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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020.05.21 10:37

[2020. 5. 10] “단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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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추응식



“단문의 시대”
(창세기 1:27, 출애굽기 3:14)


 
2020년 5월 10일
주일예배
추응식 형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 창세기 1:27 -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 출애굽기 3:14 -



단문의 시대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추응식입니다. 제가 지난 2월 23일 말씀증거를 하려고 했는데 그 때부터 못하게 되었으니까 벌써 2달이 좀 넘었습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예수교인들이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마스크를 믿는가 하니님을 믿는가’ 또 ‘교회란 무엇인가, 꼭 가야되는가, 안가도 되는 것인가’라면서 논쟁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번 코로나가 종교의 본질을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런 단문의 대립이 얼마나 본질을 훼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몇 말씀 드려볼까 볼까 합니다.


예전부터 어른들은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했습니다. 물론 성서도 그런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 저희 집에서도 ‘밖에 나가서 알아도 너무 아는 척 하지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지식이 다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혹은 ‘지키지 못할 말은 좀 하지 마라. 언행일치.’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중에는 예수교 사람들은 말이 많아서 싫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 생각에는 특별히 말이 더 많다기보다는 일반인들은 좀 지키기 어려워서 말을 잘 안하거나 쑥스러워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말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애나 어른이나 삶 자체가 경쟁인 치열한 우리 사회에서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 산다는 말을 잘 안합니다. 그렇지만 예수교 사람들은 남을 위하는 사랑을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처럼 보이는 사랑이 아니라(선택적 사랑이 아니라) 정말 예수처럼 사랑하는 그런 희생적인 삶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예배당 다닌다고 하지만,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다음 생애는 모를까 이번 생애는 길이 잘못 들여져서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오래전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 학생처에 근무할 땐데 당시 학생회관에는 동아리실이 부족해서 일부 동아리들은 복도에 책상을 두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사회에 잘 알려진 선교단체 소속 학생 몇 명이 제 방에 나타나서는 막무가내로 동아리방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학생들의 태도가 상당히 전투적이었습니다. 그때 기존의 기독교동아리는 방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도 예수님도 한 분이라는데 기존의 기독교동아리와 함께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건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양쪽 기독교 학생들에게 현재 방이 없어서 바깥에서 모이는 동아리도 있는데 만약 여러분들이 오히려 방을 내주고 저기 운동장 광야에서 모임을 한다면 얼마나 기독교를 신뢰하겠는가, ‘예수는 목숨까지 내놓지 않았는가’라고 설득했습니다만 그들은 자기들 활동을 위해 방이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심시간에는 학생회관 앞에서 찬송가와 함께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관심을 두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교 사람들이 말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너무 쉽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기만 보고 있는 듯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역사하였다.’ 하는 것을 쉽게 말하니까 사람들이 말이 많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어 본 적도 없으면서 죽어본 사람처럼 죽은 후의 일에 대해서 또 쉽게 말하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굳이 기독교뿐 아니라 종교를 말하는 사람들, 특히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잘 알려진 스님께서 평화순례 하신다고 우리 지역에 와서 평화에 관한 대담을 하였다, 그때 저는 ‘평화를 해치는 지진이나 홍수, 쓰나미 같은 것들이 선량하게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늘의 징벌인가.’하는 것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자연 악, 자연 해) 그런데 스님께서 뭔가 길게 말씀하셨는데, 죄송하게도 저는 잘 안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물어 놓고 갑자기 스스로 답이 생각났는데 그냥 스님께서 ‘그런 하늘 일은 내가 모른다 하시면 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침묵 프로그램을 더러 하지만, 대개 수행하는 선원이나 (카르투시오) 수도원 같은 데서도 보면 수행은 ‘말 안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말 안하는 것은 말로 죄업을 짓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려고 여기 섰는데 조심스럽습니다. 대개 남 앞에서 하는 말은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완전한 자서전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는 엄청나게 늘어난 tv 채널, 유튜브, 개인tv, 블로그, 포털사이트, 각종 SNS 등을 통해 말들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에서부터 생경한 욕망의 언어까지 사람들이 원하는 말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말은 매끄럽고 자극적입니다. 치열한 말들의 경쟁입니다. 지식도 사랑도 정의도 정치도 종교도 모두 말이 되어 유통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더는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드러내는 말들은 시장에서는 가치가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잘난체하는 것은 절대 금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하늘나라 질서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좋아하는 고린도전서의 ‘지체들이 모여 한 몸 이룬다.’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나 천태생 타고난 역할, 누구는 코, 누구는 입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지체는 몸을 위해 있는 것이지 자기가 몸을 대표 할 수가 없습니다. 지체가 자기를 드러내려 할 때, 몸의 질서는 무너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지식이나 힘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드러냄 없이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동네 슈퍼 아줌마가 있어 소주도 사고 라면도 삽니다. 생선 장수 아줌마가 있어 고등어를 먹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의 저녁 밥상을 위해서 고등어를 판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사람들은 그냥 일할 뿐 스스로 자신의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관념적인 말들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는 지금 드러나 보이는 저보다는 듣고 계시는 여러분이 온전한 지체처럼 생각됩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지만, 일반교회에서는 위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옷도 다르게 입고, 목소리도 다르게 하여 뭔가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과는 다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교회조직을 위한 것입니다. 조직은 리더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는 모두가 사제이기 때문에 특별히 높낮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앞에서 말할 수 있고,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다른 톤으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생활, 교회 안과 교회 밖의 경계를 두려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말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성경‘독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요즘 우리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에 대해서 제가 느낀 것을 몇 가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몇 년 전 돌아가신 최규삼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가끔 성가대 찬송이 끝나면 성가대 자리에 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민호 교회 왔습니까.” 민호는 최규삼 선생님 아드님인데 아마도 민호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쯤 됐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최규삼 선생님은 “안 왔어.”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아, 집에서 안식하고 있군요. 우리는 언제 교리나 종교적 관습에 매이지 않고 민호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요.”라고 하면 “우린 아직 멀었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우린 교회에서 나와서 좀 더 수행해야겠네요.” 하면 “그렇지, 나도 나오잖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당분간 조금 더 다녀보겠습니다.” 뭐 이런 대화를 가끔 나눴습니다. 그런데 요즘 민호는 도력이 좀 떨어졌는지 어머니 김종순 자매님와 어린 아들 산해, 건해 형제님을 데리고 교회에 열심히 오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세상사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말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세상일을 말로 다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고급 세단이 좋은 차라고 하지만 차가 커서 주차도 어렵고, 연비도 안 좋습니다. 그리고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면, 밥값을 내도 사람들이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경차는 안전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대신 연비와 주차 등 고급 차의 단점이 모두 경차의 장점이 됩니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부는 두 사람 다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말하는 데 정작 두 사람은 서로를 원망하며 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사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좋은 면만 말한다거나 안 좋은 면만을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체파 그림도 보면 정면에서도 보고, 측면에서도 보면서, 한 사람을 다양한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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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요즘같이 정보가 넘치는 사회에서 이런 저런 긴 이야기는 전달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말들은 한없이 짧아지고 축약됩니다. 몇 초도 지루해하는 sns 상의 말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있잖아 내 친구 중에 엄근진 있거든. 오늘 애들하고 팬아저 연예인 사진 가지고 수다 떠는데 걔가 오늘 또 뭐라고 했다. 너무 외모만 보면 안 된다고, 그래서 우리 분위기 렬로 갑분싸 됐어. 복세편살하면 되지, 걔는 생각이 너무 많아. 걔가 우리 무리에서 TMI 일인자 일 듯, 근데 신기한 건 나는 그 친구 그러는 게 묘하게 커엽다. 실화냐, 다큐냐, 멘큐냐!”

이해가 되십니까?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이미 세대 간 격차를 느끼시겠지요. 저도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걸 보고 외국어 공부하듯이 단어 하나 공부해서 겨우 해독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냥 다 이해하는 말을 나이 든 사람들은 같은 한국어라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도의 말은 그래도 낫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말들이 날로 짧아지면서 일면을 강조하는 단정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장황한 설명보다는 축약된 이미지로 전달되는 짧은 단문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계속해서 짧아지고 단정은 강해집니다. 여기서 왜곡이 생기고, 때에 따라서는 진영이 형성됩니다. 지배의 언어가 계속해서 생산됩니다. 지배의 언어는 전체주의를 강화하고 억압과 폭력을 수반합니다. ‘북한 좋아’ 이렇게 말하는 순간 빨갱이가 됩니다. 남한은 좋은 것만 있고, 북한에는 다 나쁜 것만 있겠습니까. 오래된 이런 말은 물론이고, 태극기, 서초동, 조국이라는 말도 진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말 잘못 꺼냈다가는 한쪽으로 정체화됩니다. 동지가 되거나 반역으로 몰립니다. 참으로 단문의 비극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70,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독재냐 민주냐 하는 단문이 퍼졌을 때, 우리 사회는 산업사회의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고, 여직원이 남자직원의 재떨이를 비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수직적이었던 남녀관계, 노사관계, 부자관계, 사제관계 같은 것은 상당 부분 수평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교실에서 이름대신 번호를 부르던 그 획일화 시대에서 이제는 다양성이 가치가 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절의 단정적 이원론을 교조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난센스입니다.


이런 단문을 많이 생산하는 대표적인 곳이 정치권과 기독교, 정확히는 교단, 교회입니다. 두 집단의 공통점은 말은 현란하나 우리가 그 실체를 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실체를 우리가 잘 아는 듯이 말하지만, 언론이 선택하고 가공해서 전해준 것을 우리의 경험과 결합하여 추정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매체를 접하느냐에 따라 실체에 관한 판단은 달라집니다. 기독교는 더 나아가서 애당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파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관한 그림이 달라집니다. 실체에 대해 직접 잘 모르면 겸손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주장과 신념은 더 강합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기독교와 정치 이야기를 하면 싸움이 일어납니다. 단문의 싸움입니다. 광화문이야, 서초동이냐, 예수 믿느냐 구원받았느냐, 상대에 대한 이해나 배움보다는 무언가 강요하고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판단에 긴 생각과 긴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직이 있습니다. 세력을 확장하려는 집단의 우상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직이 커질수록 사람은 왜소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시 거대한 제국과 종교집단을 거부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 조직들을 이기기 위해 조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홀로 몸을 바침으로써 새 세상을 여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은 집단의 강령이 개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리가 개인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의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새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이제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어느 조직체의 구성품이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는 주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는 나다’ 하신 것처럼, 창녀에게, 세리에게, 종에게, 문둥병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는 너다’ 하시면서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고유한 우리는 나와 너를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회적 지위로, 종교로 그 어느 것으로도 사람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훤히 드러내는 이 세상의 만물도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작은 돌멩이, 라면 부스러기 하나조차도 우리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끝없이 묻고 물어야 합니다. 끝없이 묻고 묻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침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침묵 속에서도 묻고 또 묻는 것. 그리고 하염없이 답을 기다리는 것.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곳까지 데려다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겸손입니다.


끝으로 세간의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하고 물으면 ‘이순신!’하고 짧게 말하지만, 만약 예수님께 물었다면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람 죽이는 군함을 안 좋아하셨겠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대답을 상상해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거북선 설계한 사람, 목수, 상판 침봉을 만든 대장장이, 또 목재를 구해 온 나무꾼, 철 캐온 광부, 일꾼들에게 밥을 해준 아낙네, 밥할 곡식을 제공한 농부, 이순신 등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었습니다.’라고 끝없이 길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세단의 일들은 너무 짧게 단정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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