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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하나님의 인격성”
(출애굽기 3:13-14)


 
2020년 4월 26일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성공회대학교)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 출애굽기 3:13-14 -



하나님의 인격성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우리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건물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이제 모이고 있는데 우리는 오산고등학교의 한 모퉁이를 빌려 쓰다 보니 제약이 있어 좀 더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염력이 강한 이 바이러스가 언제 다시 확산될지 모르므로 우리처럼 더 늦게 모이는 것도 좋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전세계에서 현재 3백만명 가까운 인구가 감염되었고, 수십만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태로 우리는 그동안 멈출 줄 모르고 전진하던 인간의 문명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들, 미국과 유럽이 이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인류의 불행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력하고 작아지고 겸손해집니다. 이번 사태는 인간은 결국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요, 우리의 생명은 그야말로 낙엽이나 먼지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런 속에서도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방역에서 선방하면서 세계의 모범으로 존중을 받으며, 우뚝 서게 된 것은 실로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작디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속수무책인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인간 문명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무엇을 하고 계신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이 정말 계시는가 계신다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계시는가를 묻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저는 존재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존재라는 말은 철학자들이 많이 사용했는데요, 최근에는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연구했고요, 신학자로서는 폴 틸리히가 있습니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Absolute Being)라고 했습니다. 폴 틸리히는 하이데거와 함께 잠시 마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있습니다. 이분도 존재론적으로 인간을 접근했고, 신을 접근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신의 존재와 전연 다릅니다. 그런데 존재가 가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는 관계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존재를 독일어로 Sein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 하면 Being입니다. 독일어 동사 sein은 영어로 be동사입니다. be동사는 항상 사이에 있습니다. 주어와 보어, 주어와 목적어 사이에 있습니다. 이 사이어는 주어인 명사의 의미를 다양하게 만들어주고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 있는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언어로 이 be동사를 씁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는 질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 영어로는 이렇게 표현됩니다.


 I am Who I am. 하나님은 I am이라는 것입니다. am이라고 하는 be동사가 바로 존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I의 존재(Being of I)를 형성해 주는 것은 I가 아니라, am, be동사라는 것입니다. I 가 오히려 be에 의해 변합니다. 그런데 be동사 am 다음에 나오는 말이 다시 동어 반복입니다. I am Who I am. I am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결국 I am이 됩니다. I am 다음에 보어 혹은 목적어가 나와야 하는데 없습니다. 빈 공간입니다. 즉 하나님은 수많은 보어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어 있으므로 수많은 보어나 목적어들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말씀이고, 아직도 계속 펼쳐지고 열려있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객관적 사물과 다른 존재로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무한한 주체이며 객체인 것입니다.

 

존재자(존재와 존재자는 다릅니다.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여야 합니다. 혼란을 주는 것같아 죄송합니다. 영어로는 the being of a being입니다)는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서 항상 다양한 객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사이언어인 be동사가 이 관계를 형성해 줍니다. 한 인간이 존재를 갖는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 변화를 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관계 속에 있어야 자기 존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오늘 제가 설교 제목으로 던진 것이 하나님의 인격성인데, 인격성은 관계성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인격입니다. 왜냐하면 관계를 갖는 존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면 인격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맺는 관계의 방식은 인간이 인간과 맺는 관계의 방식과 다릅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 존재와 동급으로 혹은 동류적인 것으로 놓는 것은 하나님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전 보수 우파 정치활동을 하는 전광훈 목사가 하나님을 자기의 동류로 생각하며 하나님께 막말을 던졌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잘못된 생각이요 행동입니다.

 

저는 오늘 전도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가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전도서는 냉정한 눈으로 인간의 세계, 인간의 존재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혼동하거나 섞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드러내는 관계맺기가 어떤 것인가를 전도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간 존재의 세상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어떠한 신적인 힘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전연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에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십자가 사건에 하나님의 개입이 전연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려진 상태인 것입니다. godforsakenness입니다.

 

전도서 7장 15절로부터 17절입니다.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라.”

 

이처럼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일을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많이 봅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가문이 그렇습니다. 친일했던 가문이 더 잘 살고 영화를 누렸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엄연히 존재할 뿐 아니라, 역사를 이끄는 대세라는 것을 우리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아주 잔인할 정도로, 아주 현실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대단한 쇼크를 주는 말씀이 8장에 나옵니다.

 

11절 이하입니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백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신은 전연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개의치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에 관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관계를 맺는 인격이 되는데 전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관계를 맺지 않는 비인격적인 존재라는 말씀이 됩니다. 관계하고 개입하는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에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개입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무관한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92절 이하에서, 전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말하는 존재자는 인간인 전도자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전연 없으니 인간들은 스스로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라. 제 명을 다 살려면 극단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억이라도 해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우리가 잘 해서 살아있어야 삶에 열정도 낼 수 있는 것이며, 포도주도 즐길 수 있고, 음악도 즐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결국 허망한 것입니다.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삶은 이처럼 허망한 것이고, 이것이 인간이 형성해 놓은 인간 존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 be동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존재는 이처럼 허망합니다. 지혜가 많을수록 이러한 현실을 잘 들여다보고, 현실을 나이브하게 채색않고,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전도자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양심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요? 즉 하나님이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만 하는 존재인가요? 이것이 아니라면, 3자의 개입, 즉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인가요? 하나님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운명인가요? 그런데 전도서에 보면 인간 존재의 세계에 하나님의 개입은 전연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전도자의 생각은 소박한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극단으로 살지 말며,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며, 너무 영웅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하다가 명을 단축시키지 말며,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포도주를 즐기며, 안빈낙도하면서, 부를 너무 좇지 말며, 명예에 목숨걸지도 말며, 직업이나 하는 일에 충실하며, 법을 잘 지키며, 친구들과 잘 즐기며, 창조주가 주신 산천을 즐기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광화문에 있는 제 작은 연구실에서 가끔 나와서 길을 걷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지나갑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걸을 때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슬픔이 엄습합니다. 광화문 정부청사 근처에 겨울 내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노숙자를 보면서 아, 저 사람 아직도 살아있구나 하며 걸어갑니다. 삶이 왜 이리 불공평한지, 나는 이런 현실 앞에서 왜 이렇게 무기력한지 슬퍼집니다어제는 우연히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내 앞을 지나가는 중년의 남성을 보았습니다. 그의 한 손으로 서류 뭉치를 들고 전화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엿 듣게 되었습니다. 오토바이 기사인데요 거기로 가는 중인데요.. 배달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 저런 운명을 딛고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다리를 절지도 않고 매일 걸을 수 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축복을 받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잊고 있다가, 이런 관계 속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를 묻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는 그런 의미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즉 the Being of God입니다. 하나님도 be, be동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입니다. 사물과 같은 존재자는 아니지만 존재 그 자체이며, 절대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가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전도자에 의지해서 말씀드립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전 8:17).”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바람이 다니는 길을 네가 모르듯이 임신한 여인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전 11:5).

 

전도서에서의 결론은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것이고 심판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자로서 관계를 맺고 있고, 창조주로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은 우리들에게 모두 맡겨 놓는다는 말씀입니다. 직접적인 개입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구절 12:13-14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할 말을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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