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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재난 시대의 사랑법: ‘사회적’ 거리두기와 섬김”
(마태복음서 5:13-16)


 
2020년 3월 22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습니까?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둡니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 마태복음서 5:13-16 -



재난 시대의 사랑법: ‘사회적’ 거리두기와 섬김


재난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파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드러내는 것입니다. 파괴의 특성은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고 드러냄의 특성은 재난 이전에는 볼 수 없었거나 무의식적으로 지나쳤던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소중함, 삶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종교의 의미와 목적, ‘교회됨’의 방식을 새롭게 보고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재난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랑법을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와 ‘사회적 섬김(social diakonia)’ 두 주제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


이번 코로나19 재난을 겪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또 실제 삶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만남과 모임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거리두기의 의료적 필요는 인정하면서도 이 표현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싸늘함 때문에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이번 재난의 경우, 특히 한국의 경우, 확진자 중 ‘집단발생’ 비율이 거의 80퍼센트에 달합니다. 종교 공동체, 병원, 요양기관, 복지시설, 콜센터 등 집단 모임이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감염의 중심이며 통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서로의 안전을 위한 기본 수칙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평상시에는 ‘비사회적’ 행위로 여겨지던 안 만나고, 안 모이고, 안 다니는 것이 바이러스 재난에서는 오히려 가장 ‘사회적’ 행위가 되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으로 거리들 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이 사회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증거 제목에서 ‘사회적’이라는 형용사를 강조해 표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이러스 재난 시대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서로를 배제하는 비사회적, 반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는 사회적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성과 공공성을 지향하는 교회라면 ‘사회적’ 거리두기 원칙에 따라 예배와 활동을 제한하거나 전환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재난을 겪으면서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교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우려와 권고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교회가 모이는 예배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신천지만이 아니라 제도교회에서도 집단감염이 발생했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단지 ‘헌금’ 욕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문자적으로 절대화한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들도 없진 않겠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의 전통적 ‘사귐(koinonia)’을 사회적 맥락 없이 이해하고 적용하는 풍토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귐의 제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의 중심 가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두 형태가 있습니다. 사귐(koinonia)과 섬김(diakonia)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코이노니아는 주로 교회에서의 사귐을 가리키고 디아코니아는 세상에서의 섬김을 가리켰습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회로 들어와 모이는 것이고 디아코니아는 세상으로 흩어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재난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한 곳에 모여 예배하지 못하는 것을 못 견뎌하는 까닭은 그들이 추구하는 사랑의 한 형태인 코이노니아가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모든 교회의 이상인 초대교회도 모이기에 힘쓰고, 만날 때마다 서로 입을 맞추고, 함께 음식을 먹는 친밀한 코이노니아 공동체였으니까요. 어떤 면에서는, 이런 공동체적 사귐은 초대교회 시대보다도 개인주의와 경쟁주의가 만성적 ‘팬데믹’이 되어버린 오늘의 시대에 오히려 더 절실한 미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회적 맥락이 중요합니다. 친밀한 사귐의 물리적 형태는 일상 상태일 때 미덕입니다. 지금처럼 바이러스 재난의 비상 상태에서는 면대면 만남과 사귐을 피하는 것이 미덕이며 의무입니다. 문제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중예배와 사귐의 제한을 마치 ‘신앙의 포기’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모여 예배하고 사귀는 것을 신앙의 증거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결국 신천지만이 아니라 일부 교회에서도 집단감염이 발생했고, 잘못하면 앞으로 더 확산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 때문에 사회에서는 “신천지나 교회나 똑같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고, 심지어 국회 차원에서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종교집회 자제 촉구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을 읽어보면 그렇게 반발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일부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 제20조에 따라 보호되는 국민의 본질적인 자유임. 다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코로나19의 예방 및 방지에 기초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고, 국민 모두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종교계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종교집회를 자제하여 줄 것을 간곡히 촉구함.


이 결의안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반발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마가복음서 2:27) 지금 같은 감염병 재난의 때에 교회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한 곳에 모여 예배할 수 있는 종교적 자유가 “국민 모두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위협이 되는가입니다. 신천지와 일부 교회에서 발생한 집단감염이 그 답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말하며 반발할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결의안을 이웃을 사랑해야 할 교회가 아니라 세속적 정부기관인 국회가 먼저 제기하고 채택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반성해야 합니다. 


이웃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인 이웃 사랑의 기초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회의 본질은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의 때에는 그리스도인들끼리 예배하고 교제하는 종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교는 자유지만 사랑은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사귐의 목적, 교회의 목적: ‘사회적’ 섬김(Social Diakonia)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며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사실은 사귐의 목적을 깨닫게 합니다. 사귐은 소중한 미덕이지만, 사귐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재난이 충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집단이나 교회에서 친밀한 사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재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열심히 모여 예배하고 함께 밥을 먹고 친밀히 사귀었습니다. 사귐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친밀한 사귐이 사회적 공공성을 결여할 때 이번 코로나19 재난에서처럼 자신들과 이웃을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사회적 공공성을 결여하게 된 데는 이원론의 영향이 큽니다. 그것은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죄와 악에 물든 세상을 버리고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타고 저편 하늘나라로 건너가야 한다는 내세적 구원관입니다. 세상의 구원이 아닌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욕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과 내세지향적 구원관에 따른 사귐은 아무리 깊고 친밀해도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구원이 아닌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욕망하는 이들도 사랑을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병든 사랑, 아픈 사랑, 심지어 해치는 사랑도 있습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로마서 13:10)


건강한 사랑, 온전한 사랑의 표지는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 사귐과 섬김이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공동체로 모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함께 배우고 익히는 것이고 디아코니아는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함께 전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귐의 목적은 섬김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섬김입니다. 섬김 없이 사귐만 있는 교회는 사교클럽이나 동호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반사회적 집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섬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랑베르의 선택


사스, 메르스, 그리고 이번 코로나19 사태 같은 감염병 재난이 닥칠 때마다 찾아 다시 읽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입니다. 의사 리유, 여행자 타루, 기자 랑베르, 신부 파늘루 등, 다양한 인물들이 공통의 재난을 겪으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재난 속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포인트가 다른데, 이번엔 랑베르의 변화와 성숙 이야기에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취재차 오랑시를 방문했다가 페스트로 도시가 봉쇄되면서 발이 묶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은 오랑시 사람들과 상관이 없다며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파리로 돌아갈 생각만 하다가, 리유, 타루 등과 함께 공중보건대 활동을 하면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변화하는 인물입니다. 다음은 그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의사 선생님」 랑베르가 말을 꺼냈다.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남아 있고 싶어요.」
  타루는 잠자코 운전을 하고 있었다. 리유는 피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는요?」 리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랑베르는 곰곰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 만일 이곳을 떠난다면 부끄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떠난다면 자신이 남겨 두고 온 그 여자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리유는 몸을 바로 세우면서 단호한 어조로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며 행복을 택하는 것에 부끄러울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랑베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행복하다면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타루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만약 랑베르가 남들과 함께 불행을 나눌 생각이라면 행복을 위한 시간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게 아닙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저는 이곳에서 제가 늘 이방인이고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겪을만큼 겪고 보니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가 여기 사람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이던 랑베르가 재난의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변화되는 모습이 사뭇 ‘종교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랑베르의 고백이 경건한 ‘기도’처럼 들립니다. 카뮈의 『페스트』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그 어떤 재난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코로나19 재난은 교회의 어둡고 부패한 면을 아프게 드러냈습니다. 만약 그 어둠과 부패가 교회의 본질이라면 코로나19 이후의 교회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초대교회 선배들의 신앙을 통해, 예언자적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된 것은, 교회는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이며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재난 속에서 교회도 랑베르처럼 자신의 최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의 재난 속에서 교회가 자발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헌신적으로 사회적 섬김을 한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면,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된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반사회적 바이러스’가 아니라 ‘사회적 백신’으로 신뢰하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예배를 시작한 2월 23일 주간에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 주일에는 다시 한 곳에 모여 예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코로나19 재난이 시간적으로 사순절과 비슷하게 겹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과 삶을 성숙시키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재난 속에서 우리가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변화하고 성숙할 수 있다면,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는 코로나19 ‘이전’의 사회보다 더 따뜻하고 더 안전하고 더 인간적인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 변화와 성숙의 노력을, 각자 있는 곳에서, 하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기도]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삶이 곧 재난이었던 초대교회 자매형제들의 기도문을 기억합니다. “섬기는 것이 우리의 완전한 자유입니다.” 모여서 예배하고 사귀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섬기는 것이 자유임을, 교회를 위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우리의 자유임을 깨우쳐 주시니 고맙습니다. 재난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섬기는 우리의 ‘완전한 자유’가 교회의 기쁨만이 아니라 세상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타자를 위한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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