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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낯선 성서 읽기 - 경계를 넘어 서로 기대어 서로의 희망이 되자

(마태복음서 25:6-10)

 

 

202038

창립 33주년 감사주일 예배(새길여성회주관)

최만자 자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 마태복음서 4:17-23 -  

 

 

낯선 성서 읽기 - 경계를 넘어 서로 기대어 서로의 희망이 되자

 

새길 자매 형제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모두 그립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들게 지내실 줄 압니다. 이 사태가 속히 끝나고 반갑게 만날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 말씀증거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새길교회 창립 33주년, 그리고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새길의 여성 주일입니다. 이 어려운 때 창립, 여성, 코로나 세 주제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좀 막막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의 우리 신앙과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가 의학적 문제에서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문제로 퍼지고 있지요. 특히 신천지란 사이비 미신 종교의 해악이 심각하고 이 위에 기독교의 왜곡된 종말론이 혼란을 부추깁니다. UCLA 옥성득 교수는 신천지의 토양이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라고 봅니다. 전도와 행동을 내세우고 근본주의 신앙행태를 가진 것, 그리고 자기집단 이익에 전념하는 유형이 같다고 합니다. 근본주의 집단은 적을 만들어 공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개신교는 중국과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신천지는 마귀를 내세워 배제와 혐오의 언어를 쏟아내며 자신들의 내부결속을 다지고 있다 합니다.


지금 저의 뼈저린 깨달음은 왜곡된 신앙이 세상에 얼마나 독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1970년대 폭발적 성장 이후 한국교회는 맘몬주의, 기복 성공주의, 그리고 근본주의 신앙의 강화로 치달아 그 결과 탈-사회, -역사화 된 신앙으로 집단적, 개인적 이익 얻기에 집중 했고 하나님은 그들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됐습니다. 옥 교수는 한국 목회자를 오락형목사라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함의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는 중 교회는 평등, 자유, 평화를 누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상실, 외면해 버렸습니다. 공공성의 윤리를 상실한 것이 지금 한국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지점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사회-역사의식으로 이 공공성의 윤리를 회복해야만 교회도 사회도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긴박한 마음이 듭니다.

 

이런 한국교회 신앙행태는 변동하는 사회상황 곧 경제적 양극화와 포스트트루스(-진실, Post-Truth) 시대와 맞물리면서 더욱 사이비적, -복음적 세력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실시대에 살고 있지요. 그런데 이 탈-진실시대는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여 영향력을 키우면서 가짜뉴스를 범람시킵니다. 이를 인지편향이라 하지요. 소셜미디어의 출현으로 자신과 일치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되어 다원적 사고를 차단하게 됩니다. 사회학자 김호기 교수는 그래서 -진실시대는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힘은 다원적 토론을 통한 생각들을 합의하는 공론의 장을 언론을 통해 이루는 것인데 이것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새길 33주년 되는 올해는 4.1960주년, 5.18 민주화의 4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져야 하는데 정작 우리 현실은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 서게 됐습니다.


새길은 33년 전에도 그 당시 타락해 보였던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물질의 나눔, 권력해체를 위한 평신도 공동체로, 그리고 위계적 교권 권력주의를 거부하는 탈 교단을, 그리고 교회 내 평등한 운영의 제도화를 선언하여 예수정신 회복과 교회 민주화를 지향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에서 출발했지요. 그런데 오늘 여성주일과 함께 새길 창립취지문을 다시 보니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성평등 의식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 변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기존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처음 주제에 여성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채택되지 않았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여성문제는 늘 2차적인 것, 우리 삶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 시급하지 않은 것, 그리고 이만하면 성평등한 것 아니냐는 남성중심의 기준이 개혁 그룹 안에서도 작동되고 용납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33년 동안 새길의 성평등에 대한 관심을 계량해 보았습니다. 33년 총 1716주일 동안 여성관련 설교는 대략 61회로 3.5%정도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와 강좌, 특강, 기획토론 등에서 16, 계간 새길이야기에서 5회 다루어졌습니다. 격주 월요일 마다 모이는 수다성과 1,2년 전부터 진행된 우리의 언어등에서 자매들이 꾸준히 여성의 눈으로 성서 읽기와 페미니즘에 관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있습니다. 이런 횟수들이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문제에 대한 새길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겠지요. 여성문제에 우리도 관심은 있다는 수준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 그 정도라 할까요? 다만 공동체 밥상을 자원하여 책임진 형제님들로 인해 새길 성인지 감수성 지수가 높아졌다 싶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여성 문제의 본질파악과 의식공유를 교우들이 함께 노력하는 일이 오늘 이후 새길의 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자는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한데 무슨 성평등 얘기인가? 혹은 요즘 세상은 여성상위시대아닌가? 남자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는데? 라는 반론을 하지요. 물론 일부 그런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폭력이 빈번하고 직장의 곳곳에서, 가정의 구석구석에서, 그리고 거리거리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 강단의 언어에서 조차도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셀 수 없이 많고,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상입니다. 성평등 하지 않은 상태에 예수정신은 없고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나아가 어떠한 차별, 배제, 혐오가 존재하는 곳에 예수도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사회에서 여성혐오의 역사는 깊습니다. 박찬효 선생은 우리사회 여성혐오는 가부장적 가족이데올로기가 시대와 현실에 따라 재형성되면서 구성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연구했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1950-1960년대는 고등교육 받고 독립적 존재가 되는 여대생을 사회질서에 균열을 일으킨다며 혐오했고, 1970-80-90년대는 스위트 홈을 파괴할 잠재력의 존재로 이혼녀를 혐오, 외환위기 때는 고학력의 능력 있는 골드미스워킹맘은 높게 평가하는 반면 일반여성을 된장녀’ ‘김치녀, 그 이후 맘충으로 비하했습니다. 박 선생은 2015년 이후에는 남성들이 여자들이 과거보다 편한데도 이기적이고, 이젠 양성평등이 이루어져서 여성들이 자신의 경쟁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분노를 느끼면서 여성혐오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적하기를 한국사회에서 지위와 부를 놓고 하는 경쟁은 거의 남성 간에 벌어지는 것이며, 남성이 남성에게 패배감을 갖게 되고 여성이 아닌 남성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도 분노를 여성에게로 향하였다는 것입니다. 1980-1990년대는 여성들이 독립적 존재로 변화한 사회적 상황인데 이런 이해 없이 남성들이 가부장제 환상에 머무르면서 분노가 여성을 향하도록 추동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혐오는 성 대립으로 파생된 문제가 아니라 남남대립을 은폐하기 위해 주조 된 것이고 오히려 남성이 남성 간에 벌어지는 생존경쟁의 살벌함을 여성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남성 자신이 그 살벌함을 덜 인식하게 해주기에여성혐오가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 대결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혐오를 만들어낸 근본적 가부장제 질서, 여성혐오를 주조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공공성의 윤리를 상실했고 사회는 탈-진실 시대에 분별력 읽은 채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고 여성혐오를 비롯한 수많은 차별, 배제, 혐오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더구나 코로나 19의 위기 앞에선 우리들의 신앙과 삶은 어떠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저는 오늘의 성서본문을 낯설게 해석하여 봅니다마태 25장의 이 본문은 열 처녀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고 궁극적으로 오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과 이를 위해 우리가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본래 의도와는 달리 교회사에서 이 본문이 여성들을 이분화 하는 계층 간 서열구조를 만들어 내는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어왔다고 합니다. 즉 주도권을 쥔 엘리트 여성들과 주변부에 머물러야 하는 비엘리트 여성들 관계로 확대 해석되는 것이지요. 정미현 교수는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많은 여성과 남성이 그들의 게으름이나 미개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악에 의해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보면서, 특히 여성들 간의 계층분열이 심각한 것을 보면서 이 본문을 다르게 보았다고 합니다. , 인종, 문화 등의 중층적 억압 구조에 있는 남미 여성들의 현실에서 이 본문을 다시 읽으면서 그는 엘리트 여성들은 재정도 넉넉하고, 육체적으로 덜 고단한 삶을 살며, 정보도 빨리 받기 때문에 쉽게 기름을 준비 할 수 있었겠지? 순진한 여성들은 기름이 떨어졌는데도, 왜 빨리 다시 채워 넣을 준비를 못했을까? 주변부로 밀려나는 삶을 사는 여성들은 아무리 깨어 있으려 해도 육체노동으로 인한 피로와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도저히 기름을 준비할 처지가 못 되었던 것 아닐까? 이런 질문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기동성 측면에서나 주변과 중심부의 관계를 보면 중심부에 위치하고 기동성이 좋은 것은 남성과 기득권자의 특권이었습니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여성들이 기름을 나누어 줄 수는 없었던가? 그래서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던가? 많은 사람들이 바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특정 그룹만 기쁨을 누리는 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합당한 것인가? 서로가 갖고 있는 다른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되지 않겠는가? 이 본문에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이 낯선 성서읽기를 갈등과 혼란상태의 우리사회에서 생각해 봅니다. 특히 개신교에서 여성, 이주민, 난민, 성 소수자, 장애인, 이슬람, 빨갱이 등에 대한 혐오와 막말은 이루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19를 겪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도 우리를 괴롭히고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마구 퍼지는 가짜뉴스와 혐오들입니다. 탈 진실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민낯이 마구 드러납니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인들은 탈-진실 시대에 편승되지 말아야 하며 가짜를 해독해 내는 문해력을 예수의 정신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새롭게 읽은 열 처녀처럼 힘없는 자, 갖지 못한 자로 향하는 약자 우선의 정신을 어느 상황에서도 찾아내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사랑이요 윤리입니다. 또한 페미니즘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실현코자 하는 운동이라 한 벨 훅스의 페미니즘 정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의존되지 않은 사람이 존재 할까요? 더구나 돌봄이 절실해지는 오늘의 세상에서 우리는 의존의 구조 속에 더더욱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여 서로 기대면서 서로의 희망이 되면 좋겠습니다. 너에게 기대는 내가 존재하고, 그래서 너는 나의 희망이 되고 나는 너의 희망이 되는 사회가 정말 그립습니다. 광주시민들이 5.18의 그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 감염의 공포를 물리치고 대구를 지원하겠다고 달려오는 절절한 사랑이 희망입니다. 한 기초 수급자의 백여만 원 성금의 가치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모두 마음과 힘을 합하여 코로나19를 극복해 내고 오히려 이 기회를 모두 함께잘 사는 새 세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기회로 만들어야겠습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세계의 끝은 인간의 연대가 완전히 파괴된 곳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 곁에서 약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으로 이 열 처녀 비유 본문을 수정하시는 예수를 만나게 되는 새길 창립 기념과 여성주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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