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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윤여성



“고난은 믿음의 길에서 어떤 의미인가?”
(고린도후서 1:3-7)

 


2020년 2월 9일
주일예배
윤여성 형제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이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온갖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셔서 온갖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위로로, 여러분은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 고린도후서 1:3-7 -



고난은 믿음의 길에서 어떤 의미인가?


저도 벌써 인생 60여년을 돌아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길다 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살이지만, 뒤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쁨, 즐거움 등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인생의 고비처럼 느껴지던 험난한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고통과 고난의 시간도 많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아버님과 할아버님이 3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셔서, 기둥이 무너지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고난은 아마도 집사람이 뇌수막종(meningioma)으로 수술을 받던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2015년에, 부활절 아침이기에 평소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서서 교회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신호 때문에 잠시 정차하고 있는데, 뒤에서 봉고차가 저희 차를 받았습니다. 집사람은 운전하고 있어서 뒤에서 오는 차를 봤겠지만, 저는 핸드폰을 보고 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쿵하고 차가 흔들려서 내려보니, 뒤 범퍼가 찌그러졌습니다. 봉고차에서 내린 분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화분을 배달하던 중, 회전하다가 화분이 넘어지는 것 같아 붙들려하다 보니 앞에 차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연신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차를 30여년 이상 운전하고 있는데, 사고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험사에 연락하라고 하고, 큰 사고는 아니라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는 헤어졌습니다. 저희도 부활절 아침이라 교회에 빨리 가야했기에 연락처를 받고 떠났습니다. 부활절예배를 마치고 성가대원들에게 아침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더니, 1주일 정도 몸 상태를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집사람이 충격 때문인지 약간 쑤시는 것 같다고 해서 친구 정형외과의사에게 연락했더니, 내일 아침 일찍 병원 문 열기 전에 먼저 진료하자고 해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X-ray 상으로는 이상이 없으니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더니 ‘너는 괜찮니?’해서 ‘난 괜찮다.’고 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며칠 후 집사람이 자꾸 쑤시는 것 같다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겠다고,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갔습니다. 그 한의원 원장이 이야기를 듣더니, CT를 찍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위층에 있는 병원에 소개시켜줘서 CT를 찍었다는 겁니다. 그 날 저는 일이 있어서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니 집사람이 큰 병원에 가서 MRI 등 검사를 하라고 했다고 하면서 CT찍은 CD와 소견서가 든 봉투를 주었는데, 큰 관심이 없어서 내일 아침 서울대학교 병원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집사람이 서울대학교 병원은 복잡하니 CT찍은 병원에 MRI도 있는 것 같은데 거기로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라고 하면서 느낌이 이상해서 소견서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견서에는 뇌에 큰 종양(large tumor)이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학교를 가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고, 큰 일이 난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옆방 후배교수에게 이야기했더니, ‘아이고~ 형님!’ 하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몇 군데 전화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배교수는 ‘서울대학교 병원 본원은 환자가 많아서 바로 수술이 되지 않고 분당병원에서는 오면 바로 수술이 가능하니 담당교수에게 이야기했으니, 바로 병원에 가서 진찰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MRI 찍었냐고 했더니, 침 맞고 가려고 한의원에 들렸다가, 원장에게 혼났다고 했습니다. 자기 식구라면 한의원 병원 문을 닫고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면서, 빨리 대학병원에 가라고 해서 그냥 나왔다고 했습니다. 잘 됐다고 말해주고 분당병원에 예약했으니, 내가 집으로 데리러 가니 집으로 오라고 하고, 집에서 분당병원으로 바로 가서 진료를 받고 입원을 했습니다. 결과는 그래도 양성종양이었지만 오리알 크기였고 뇌에 붙어있기에 8시간에 걸친 정밀한 수술을 거쳐 제거했습니다. 종양은 교통사고와는 무관한 일이었지만, 교통사고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고 심각한 수준까지 갈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알게 되어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정상이 되어 2년에 한 번씩만 검사를 받으면 됩니다. 이 일이 있을 때 저희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주신 형제자매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공식적으로 모든 분들께 감사를 표한 적은 없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 시기에 저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기에 제가 예배 사회를 보게 되어있어서, 사회를 볼까 말까 망설이는데, 집사람이 약속한 것은 지켜야지 무슨 소리냐고 해서 예배 사회를 보았습니다.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를 않습니다. 나중에 저를 보시고 이상한 모습이었다고 말씀들을 해주셨어요.


전에 말씀증거 중에  길희성 선생님이 지옥은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제가 그 때 마치 지옥에 있는 것 같은 상태였다고 생각됩니다.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지만, 아득한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 끝도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 몇 주간의 일은 제 인생에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또 생각하게 했던 중요한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했고, 세상에서 보여 지는 껍데기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제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하며 무엇을 버려야하는지를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일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부활절만 되면 늘 새롭게 생각이 납니다.


죽음과 이어지는 것은 생명이요. 생명과 이어지는 것은 부활임을 문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죽음이 현실처럼 느껴질 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임과 오직 의뢰할 분은 하나님 한 분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대면하는 깊은 성찰을 주는 기회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화석처럼 여기고 자신이 모든 것을 하려던 어리석음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돌아가신 김흥호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활이란 이천년 전에 예수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그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부활이 되어야 그것이 부활의 참뜻이다. ‘내가 바로 부활이요’가 되어야지.  이천년 전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가 부활이 되어야 예수의 부활도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내가 부활되지 않고는 예수의 부활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십자가 즉 고난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라고 했는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하려면 고행이 뒤따르게 되지 고행이 없이는 안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는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도 다시 죽을 수 없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위 ‘유즉무(有卽無)의 세계’이다. ‘무(無)에 뿌리박은 유(有)’라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것이 또한 주체라는 말이 되는 것으로, 주체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주체이니까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객체라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고난 없이는 주체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깊이 새기고 싶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체가 되어 책임을 지는,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새길공동체의 일원이면 주체로서 책임을 지고 교회의 일에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객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겠지요. 실천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저도 하나님의 능력에 덧입혀진 주체가 되고 싶습니다.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러분도 여러 모양의 많은 고난을 겪으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고난이 있다고 모두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떠져야합니다. 억지로 느끼려한다고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해보아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이 떠지면 알게 되고,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우리의 인생에는 어떠한 형태든지 고난이나 고통이 따르게 되고, 이 어려움을, 이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십자가 즉 고난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우리의 눈이 떠져서 십자가를 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김흥호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저희들이 언제나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또 주님을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저희들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도 오늘 이렇게 기도하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묵상하던 책에서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묵상집 편집장인 린지 그레이라는 분이 쓴 글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축복’은 그리스어로는 2가지 의미가 있는데, ‘율로게오(eulogeo)’라는 동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구하다.’라는 뜻으로, 흔히 우리가 쓰는 축복의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마카리오스(makarios)’라는 단어로, 마태복음 5장 중 팔복으로 알려진 말씀에서 ‘복’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는 종종 ‘책임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율로게오’가 하나님의 호의를 구하는 것이라면, ‘마카리오스’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네가 복(마카리오스)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장 17절). 즉 이런 종류의 복은 피상적이거나 곧바로 사라지는 행복이 아닙니다. 고통이나 슬픔이 없는 상태도 아닙니다. 그 대신 슬픔 중에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 긍휼이 여김 받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희망으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이 복(마카리오스)은 우리가 흔히 아는 행복의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참여하는 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의 팔복 중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다시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기쁨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모두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슬퍼할 때,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기쁨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씀이 되겠지요. 마카리오스, 즉 복이 있다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또 재미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복수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팔복은 우리가 어떤 시련이나 슬픔을 경험하든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마카리오스(복)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서로 위로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합니다. 애통한 사람을 위로하고, 긍휼을 주고받게 하며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라고 묵상집에서는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 4절부터 보면, 우리가 고난을 받는 중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가지고, 고난 받는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난 받은 것이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하나님이 넘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난 받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견디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기쁨을 누리는 복(마카리오스)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성한 손자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밥상에서 자기 자녀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증조할머니는 생선 대가리를 좋아하셔서 늘 생선 대가리만 즐겨 드셨어. 생선 대가리를 보면 늘 할머니가 생각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로 끝이 나고 더 이상 이야기가 없다면 의문이 듭니다. 물론 생선 대가리도 어두진미라 하여 맛있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진짜 할머니가 생선 대가리만을 좋아했다고 생각하는지요?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맛있는 생선살을 먹이기 위해, 자신은 생선 대가리가 맛있다고 하면서 모든 생선살을 손자에게 먹였다는 사실을 이 손자는 진짜 깨닫지 못한 걸까요? 늘 손자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을 베푸신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요? 손자가 사랑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그 의미를 진정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손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생각을 해보면, 우리 또한 사랑을 받은 사실만 이야기하지, 우리에게 사랑을 주기 위하여 희생과 헌신한 할머니, 아니 그런 분들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인가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는 지요?


이런 의미를 깨닫게 눈을 떠야하지 않을까요.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우리 또한 이 손자처럼 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시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눅 24:45) 하신 것처럼,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행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했던 예수님처럼, 아니 예수님에게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일들의 의미를 깨닫고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자가 되어야겠지요. 우리의 인생에서 다가오는 고난이 주는 의미를 깨달아,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됨을 느끼는 자가 되시기를, 즉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그래서 부활하는 자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호세아 14장 9절의 말씀으로 기도를 대신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에 쓴 것을 깨달아라. 총명한 사람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라. 주님의 길은 올바르다. 의로운 백성은 그 길을 따라 살아가지만 죄인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다.”  아멘.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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