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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성수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고린도후서 4:1-2, 6-10)



2020년 1월 19일
주일예배
김성수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사무국장)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고린도후서 4:1-2-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4:6-10-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한 주간도 평안하셨는지요? 이 예배 가운데, 또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저희들 가운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새해를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새해를 맞아 제대로 인사드리면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많은 인생과 신앙의 선배, 친구, 동료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배우고 있는 후배로서, 많이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시고 받으시고 나누시는 저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이 자리가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특별히 오늘은 개인적으로 유난히 부담스럽고 또 준비하면서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 더 성찰하면서 곰곰이 따져야겠지만, 가장 크게는 제 부족함 때문일 것이고, 새길 공동체에 대해 말하지만 제게 하는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무엇보다 제가 몸담고 있는 이 새길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저도 모르는 사이 많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 부족한 말과 표현으로 담기지 못한 더 깊은 이면의 의미들을 공동체적으로 우리 모두 함께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길 공동체는 꼭 제 나이와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두 달 정도 먼저 태어났으니, 제가 세상에 먼저 나온 선배일까요? 그러다보니, 가끔 자연스럽게 제가 인생에서 느끼는 고민, 불안, 염려를 새길 공동체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리다는 핑계를 댔다간 다 큰 어른이라는 게 질책이 되어 돌아오고, 어른이라고 으름장 놓았다간 큰 웃음에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인 이상한 나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앞두거나 해나가야만 하는, 그래서 정신없이 고민, 불안, 염려에 휘청이다가도 현실에서 정신줄 바짝 붙들어야 하는 혼란스러운 나이, 그럼에도 아직은 젊기에 무엇이든 만회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나이. 그런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나이를 저와 새길 공동체는 함께 먹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새길 공동체는 안팎으로 끝없이 젊어야 하는 청춘의 정신을 요구받기에, 저보다 훨씬 힘들 것도 같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응시


새길 공동체를 바라보는 밖으로부터의 시선과 평가는 다양합니다. 지난겨울, 새길 공동체는 공식적으로 외부자의 시선으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새길 공동체의 주요한 특징을 평신도성, 개방성, 사회적 영성으로 꼽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취지의 평신도교회, 지식인교회, 진보적 운동권교회 등의 세간의 평가는 새길 공동체의 시작부터 존재하던 가장 대표적인 밖으로부터의 시선입니다. 모두 공감하고 동의하십니까?


동의여부를 떠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밖으로부터의 시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새길 공동체 구성원인 저희가 새길 공동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응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야말로 새길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속하게 하는 바탕이자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부터의 시선과 평가가 절대적이지도 않지만, 이를 평가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성찰적으로 다듬고 가꾸어 나가는 일은 새길 공동체 구성원인 저희가 새길 공동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응시하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긍심 혹은 자괴감이 생겨날 수 있고, 희망 혹은 절망이 교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길 공동체 구성원인 저희들은 새길 공동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자긍심일 수도, 자괴감일 수도, 또한 희망적일 수도, 절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긍심 혹은 자괴감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팎의 두 관점의 일치 혹은 불일치 속에서 부정적 평가와 현실적 어려움은 외면한 채 듣기 좋은 긍정적 시선과 평가만을 취사선택하여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은 새길 공동체에 대한 비판과 기대 사이에서 스스로 모순된 혹은 분열된 어그러진 자기정체성과 자의식을 마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길’에 대한 자긍심과 자괴감


새길 정신의 중요한 한 축은 새길의 신학적, 신앙적 정체성입니다. 이는 새길교회 창립취지와 새길신앙고백에 기초합니다. 구체적인 이정표는 없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본래적인 근원적 의미를 굳게 신뢰하면서 역사와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고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바라는 ‘예수 따르미’로서의 길 없는 길, 곧 새 길을 걸어오면서 새길의 신학적, 신앙적 정체성을 형성해왔습니다. 그리고 새길 정신의 중요한 또 다른 한 축은 평신도성입니다. 새길 공동체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의 토대와 기초가 평신도성이기 때문입니다. 새길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는 ‘평신도’의 의미는 위계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일방적으로 교리를 소비하는 대상이 아닌 종교개혁의 만인사제 사상에 근거하여 모두가 평등한 사제이고 신학자이며 예언자라는 보다 적극적인 뜻을 함의합니다. 즉, 이러한 새길의 신학적, 신앙적 정체성과 평신도성은 이른바 새길 정신의 내용과 방식을 구성하는 핵심적 토대이자 기둥입니다. 그러나 새길 공동체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멋진 이상과 지향을 지녔어도 구체적 현실의 장으로 옮겨와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에서 이와 같은 이상과 지향은 멈추기 일쑤였고 매우 비효율적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것 투성이었습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마무시한 이상과 비전이었던 만큼, 더 불안했고 더 위험했으며 늘 힘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마무시한 이상과 비전이었던 만큼, 때로 더 아팠고 더 상처받았으며 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길 공동체는 불안과 위험과 힘듦 속에서, 아픔과 상처와 실망 속에서 지난 30여년의 세월 동안 정말 끝없이 ‘새길’에 대해서 묻고 또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묻고 싶습니다. ‘새길’에 대해서 자긍심을 느끼십니까? 혹은 자괴감이 드십니까? 조금 아쉽지만, 뭐 이 정도면 만족스러우십니까? 아니면 ‘새길’도 겨우 이 정도였다니, 너무 실망스러우십니까? 그도 아니면 자긍심과 자괴감 사이에서 왔다갔다 여러 단계를 거치며 여전히 밀당하면서 적당히 계십니까? 물론 모두 다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진정 공동체라면, 개인으로 흩어지지 않고 굳이 여기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신앙공동체로 존재한다면, 그 고민과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오늘 말씀증거 제목은 이미 눈치 채고 알고 계시듯이, 새길교회 창립취지문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새길교회 창립취지문은 작성된 지 세월이 한참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읽어도 매우 가슴 뛰는 명문이기도 합니다. 조금 길더라도 일부를 옮겨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뜻을 사회와 역사의 구체적 현실 한가운데서 항상 되새기고 증거해야 한다고 믿으며, 복음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도 함께 변혁시키는 힘임을 굳게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선포하신 것이 바로 복음과 선교의 핵심이라고 믿기에, 우리도 고통당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몸과 마음, 정성과 물질을 바치려고 합니다. (…)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게으름과 방관자적 자세를 깊이 뉘우치면서 우리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 나가려고 결단합니다. 우리는 섬김 받는 교회에서 섬기는 교회로, 직업화된 교역자 중심의 교회에서 공동체적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제도와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에서 은총과 자유의 교회로, 닫힌 교회에서 열린 교회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쌓아올리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로 발돋움하려 합니다. (…) 어두운 역사 한가운데서 빛이 되시며 혼돈 손에서 헤매는 백성들에게 진리의 새 길을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뜨겁게 기억하면서 마침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향하여 오늘도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합니다.”


이전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래적인 근원적 의미에 대한 확고한 정의, 새길 공동체의 정체성과 정신의 가치와 성격에 대한 분명한 규정 등의 표현이 눈에 확 들어오고 힘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는데, 이제는 예전에는 잘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쉬이 넘기고 말았던 구절, 자꾸만 제 눈길이 머무는 대목은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였습니다. 새길이 지향하는 가치의 제시, 다짐, 선언 후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좁은 길임을 알기에 구체적인 공동체적 삶의 태도로 적시된 이 표현은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명 무겁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분명 피하고 싶지만, 이상하게 힘이 되었습니다. 단순하게 ‘힘차게’, ‘기쁘게’라는 표현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그 전제들에게서 이상하게 위로와 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라는 표현에서 저는 ‘외로움’과 ‘괴로움’에 더 주목합니다. 창립취지문에서 드러나듯이, 새길 선배님들은 이미 애초 알고 시작한 길이었습니다. 가지 않을 수 없었기에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이어져왔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울에게로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이 역설을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일구면서 복음을 증거한 이가 바로 ‘바울’입니다. 지난 말씀증거 때도 강조했듯이 바울은 주어진 삶의 조건, 딛고 선 현실과 향하는 시선, 나아갈 이상 사이에서 외롭고 괴로웠지만, 힘차게 기쁘게 에클레시아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활동가였고, 아주 현실적인 조직가였으며, 역동적인 공동체의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은 구체적인 현실과 현장을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내는 길을 고심하고 또 고심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온통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해 온갖 모욕과 수치를 겪었고 배신당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회당에 모이는 유대인들, 로마의 지역 통치자들과 시민들은 앞다투어 바울을 비난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 바울이 세운 교회를 끊임없이 흔들었습니다. 이러한 날선 배경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낙심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고후4:1). 감당하기 힘들어 복음을 왜곡하지도 않았고, 간교하게 세상과의 불화 없이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여 편히 전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운다고 고백합니다(고후4:2). 바울은 누가 보아도 보잘 것 없는 누추한 질그릇과 같은 상태였지만,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고갈되지 않는 힘으로 계속해서 움직이며 활동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이것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고후4:7). 사방에서 외롭게, 괴롭게 만들어도 주눅 들지 않았고 고난을 당해도 마음의 생기를 잃지 않았으며, 공격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고 쓰러질지언정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고후4:8-9). 바울의 이 힘의 원천은 예수의 죽임 당함을 기억하는 자의 용기에 다름 아니었습니다(고후4:10). 외롭고 괴롭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운다는 고백, 그리고 이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며,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기억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비틀거릴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새 길을 걷고자 하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맺으며: 외로움과 괴로움을 껴안은 열정과 기쁨으로


개인적으로 새길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동안, 오히려 역설적으로 ‘교회’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한편으로, 왜 기존 제도교회의 모양과 꼴이 구조적으로 그런 양태를 갖출 수밖에 없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물음은 바로 이 자리에서 생겨나야 하고, 바로 이 자리에서 깊어져야 합니다.


조심스럽게 감히 말씀드리자면, 단순히 성직자, 목사가 없어서 새길교회가 좋다면, 그것은 새길교회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 건물이 없어서 새길교회가 좋다면, 그것은 새길교회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단이 없어서 새길교회가 좋다면, 그것은 새길교회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직자, 목사 중심의 성직자 중심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전제된 탈성직의 문제의식이 없다면, 새길교회를 반만 알고 반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 중심의 확장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전제된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새길교회를 반만 알고 반은 모르는 것입니다. 교단 중심의 교리 중심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전제된 은총과 자유의 신학적, 신앙적 문제의식이 없다면, 새길교회를 반만 알고 반은 모르는 것입니다. 성직자, 목사 등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기에 야기되는 모든 문제를 단호히 거부하기에, 새길교회는 모두가 성직자인 평신도교회입니다. 교회 건물 중심의 교회를 위한 교회를 단호히 지양하기에, 새길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 세상을 향한 교회,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거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단 중심의 교리적 체계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과 자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성령의 섭리를 깊이 신뢰하기에, 새길교회는 은총과 자유의 교회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교회나 단체 등 여느 공동체보다 훨씬 더 세심한 배려와 신뢰, 그리고 공동체적 지혜에 기반해야 합니다. 확실한 조직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 부분 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전적인 권위를 위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어느 공동체보다 느슨하게 열려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백을 신뢰라는 삶의 태도와 지혜로 채워야 하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새길 정신을 추구하는 새길 공동체는 외롭습니다. 제도 대신 유기적 관계성과 자율적 책임성을 선택한 새길 공동체는 괴롭습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에 외로울 수밖에 없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분명 알기에 더 힘차게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괴로움을 분명 알기에 더 기쁘게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말이 앞서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새길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잊어야 할 외로움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괴로움이 아니라, 외로움도 괴로움도 모두 껴안은 ‘열정’과 ‘기쁨’으로, 그래서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함께 새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길들여지기보다, 의존하기보다, 주체적 신앙의 결단으로 평신도 공동체를 일구었던 저희들이지만, 여전히 앎은 부족하고 저희의 삶은 연약합니다. 가지 않을 수 없기에 걷는 길, 포기할 수 없기에 이어진 길,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새 길을 걸어 나가는 새길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이끌어주십시오. 사랑의 흔적을 깊이 남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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