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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마태복음서 4:17-23)



 
2020년 1월 12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 주셨다.] 
                                                                                                           - 마태복음서 4:17-23 -



진리가 진리인 것처럼


뉴욕에서 유학 중에 ‘카이로스 커뮤니티(Kairos Community)’라는 모임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1977년 급진적 평화운동가 대니얼 베리건 신부가 창립한 공동체로, 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사회운동가들이 함께 기도하며 교제하고 행동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참석했을 때는 두 주에 한 번 맨해튼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임 형식은 단순했습니다. 보통 서른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놓은 나무의자에 둘러앉아 침묵으로 기도하고,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돌아가며 각자의 외적 활동과 내적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간식을 곁들여 친교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다시 세상으로 흩어졌습니다. 단순하지만 생기 넘치는 모임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90세 가까이 되었던 베리건 신부도 늘 함께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은 간결했고 얼굴은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그는 ‘열혈사제’였습니다. 1968년 2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고 외치던 혁명의 바람이 전 세계에 불고 있을 때, 대니얼 베리건 신부는 동생 필립 베리건 신부, 하워드 진과 함께, 당시 미국과 전쟁 중이던 북베트남의 초청으로 하노이에 가서 포로로 잡혀 있던 미 공군 조종사 3명을 석방시켜 데려옵니다. 자신들의 도덕적 우위를 과시하려는 북베트남의 심리전에 이용당하는 거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결행한 예언자적 평화 행동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베리건 신부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같은 해 5월 17일,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습니다. 그와 동생 필립을 포함한 아홉 명의 가톨릭 사제, 평신도들이 매릴랜드 주 케이턴스빌 징병사무소에 들어가 징집영장을 뭉치 채 들고 나온 후 사제 네이팜을 서류들에 뿌리고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베리건 신부는 ‘케이턴스빌 나인(9)’ 사건으로 불린 이 비폭력직접행동으로 체포되어 실형을 살았습니다. 당시 미 정부와 보수 우파는 케이턴스빌 나인의 행동을 이적행위로 규탄하고 베리건 신부를 빨갱이 사제로 몰아붙였습니다. 이때 베리건 신부는 케이턴스빌 나인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아이들이 불에 타죽게 하지 않기 위해 징집영장을 불태웠습니다.”, “우리는 범죄적 권력(criminal power)의 시대에 무력한 범죄자(powerless criminals)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전쟁범죄자들(war criminals)에 의해 평화 범죄자들(peace criminals)로 낙인찍히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런 급진적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베리건 신부는 ‘거룩한 무법자(Holy Outlaw)’로 불렸습니다.


그 후에도 베리건 신부는 비슷한 형태의 ‘밀워키 14’, ‘캄든 28’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1980년엔 또 다시 동생 필립, 앤 몽고메리 수녀를 포함한 가톨릭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펜실베니아 킹 오브 프러시아(King of Prussia)의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미사일 공장에 들어가 미사일 부품을 해머로 부수었습니다. 이때 행동한 그리스도인들은 ‘Ploughshare 8(보습 8인)’으로 불렸는데, 이는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사야 2:4)”이라는 평화의 비전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베리건 신부의 비폭력직접행동은 예언자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증거 제목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은 베리건 신부가 가톨릭노동자(Catholic Worker)의 창립자 도로시 데이의 자서전 <The Long Loneliness> 1981년 판 서문에서 데이의 삶을 요약하며 쓴 표현입니다. 데이처럼 베리건 신부 자신도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았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산다는 말에는 역설적으로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진리를 듣고 보고 알고 말하지만, 진리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진리란 무엇일까요? 진리라는 말은 무겁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뭔가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것, 뭔가 신비하고 천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의미로 진리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가 추구하신 진리가 심오한 철학자들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예수는 헬라 철학의 중심지 아테네에서 공부하고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추구하신 진리가 특별한 신비가들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예수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영지주의나 밀의종교 종파에 들어가 수행하며 사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이 살고 있는 고통의 땅 갈릴리로 가셨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가 가르치고 보여주신 진리는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명확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지금 여기서 삶의 길을 돌이켜 하나님 나라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가르치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진리는 누구나 알고 행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따라 살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심오한 형이상학도 거룩한 신비주의도 아닌, 단순하고 명확한 회개, 곧 삶의 전환(메타노이아)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정말 진리인 것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 대니얼 베리건, 디트리히 본회퍼, 오스카 로메로, 문익환, 전태일, 여운형... 그런 이들은 예수가 깨우쳐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따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늘 함께 읽은 성서본문도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았던 예수와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선포하신 진리는 지금 여기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고, 그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인 제자들은 즉시 배를 버리고 부모를 떠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베리건 신부의 글 중에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태리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1964년 영화 〈마태복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파솔리니가 묘사하는 예수는 우리의 통념처럼 산 위나 호숫가 또는 마을 회당에서 근엄하게 앉거나 서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는 길 위에서 빠르게 걸어가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합니다. 베리건 신부는 다소 과장되게 보이는 영화 속 예수의 빠른 속도는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리고 쉼 없이 걷는 동작은, 하나님 나라는 조직이나 교리가 아닌 운동(movement)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저는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를 보고 베리건 신부의 해석을 읽으면서 새길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길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 “길 위의 하나님 나라 운동 공동체”입니다. 새길교회와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을 창립한 목적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새길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와 평화를 실현(창립취지)”할 때까지 걸음을 멈출 수 없는 길 위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베리건 신부와 함께한 카이로스 공동체 경험을 회상하면서, 교회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세 가지 주제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세상에 순응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도전하고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카이로스 모임은 고요하고 평화로웠지만, 그 고요와 평화의 목적은 세상으로 돌아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새길의 예배와 모임과 활동의 방향도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길의 목적은 세상 밖 천국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길이 실천하는 ‘사회적 영성’입니다.


둘째, 교회는 앞과 뒤, 위와 아래, 소수 성직자와 다수 평신도가 위계적으로 분리된 조직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등한 원형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카이로스 모임 방식 중 하나는 그날 참석자가 몇 명이든 모두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함께 앉는 것이었습니다. 원에서는 앞 뒤, 위아래의 위계가 없이 모두가 평등합니다. 지배하는 중심과 지배당하는 주변도 없습니다. 원에서는 모두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새길 삶의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새길에는 성직자가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성직자입니다. 지도하며 이끄는 사람(leader)과 지도받으며 따르는 사람(follower)들의 수직적 조직이 아니라, 서로 지지하며 함께 걷는 사람(fellow)들의 수평적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사제이며 신학자이며 예언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만인사제’ 사상에 근거한 새길의 ‘평신도 민주주의’ 정신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하게, 교회의 모든 내적, 외적 활동의 목적은 예수가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아내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리건 신부와 카이로스 공동체 사람들은 단지 사회운동가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우선적이고 결정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려고 했기에 반(反)하나님 나라적인 세상 권세의 불의와 폭력과 탐욕에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새길을 창립한 자매형제들도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고자 했기에 군사독재에 맞서야만 했던 것이고, 오늘의 우리도 어둠의 권세에 맞서 촛불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새길은 스승 예수가 가르치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따라 살려는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길의 ‘예수따르미’ 정신입니다.


어느 날, 카이로스 모임을 마치고 베리건 신부님과 함께 브로드웨이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여쭤보니, 얼마 전 엉덩이뼈 수술을 받아 걷기 불편하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키 작고 걸음 느리고 목소리 낮은 신부님에게 더 몸을 숙이고 더 걸음을 늦추고 더 귀를 기울이며 함께 걸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 절뚝거리며 당신의 처소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아름답고 경건해 보였습니다. 평생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았던 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가 직접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2016년에 베리건 신부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번에 말씀증거를 준비하며 인터넷으로 그의 마지막 나날을 찾아보니, 그가 아흔이 넘어서도 멈추지 않고 평화를 위해 행동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바라보며, 문득, ‘하나님 나라 운동에는 은퇴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처드 바크가 그랬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했는지 알아보는 방법이 하나 있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의 사명을 아직 마치지 않은 것이다.”


새길에도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아오신 예수따르미 선배님들이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시죠? 하나님 나라 운동에는 은퇴란 없다는 것을. 연로한 베리건 신부와 젊은 그리스도인 사회운동가들이 함께 기도하고 사귀며 세상으로 나아간 것처럼, 우리도 선배 예수따르미와 후배 예수따르미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교제하며, 세상으로 나아가 사회정의, 성평등,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새 길을 계속 함께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가 깨우쳐주신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살면서 새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 그 사명이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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