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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고통과 감사”
(빌립보서 4:6)


 
2019년 12월 29일
송년감사주일 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 빌립보서 4:6 -


고통과 감사


오늘은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을 감사하는 송년감사주일입니다. 그런데, 2019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맘 편히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한 해 동안 사회적으로 혼란과 고통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는 정말 ‘다사다난’을 넘어 ‘파란만장’했던 해였습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몰락의 전조로 보일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겪은 고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고마운 일보다 고단한 일이 더 많았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어떻게 온전히 감사할 수 있을까요? 고통 속의 감사가 아큐(阿Q)의 ‘정신승리’ 같은 자기기만이 아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보다 고통은 더 많고 감사할 일은 더 적었던 1세기 사람 바울의 삶과 신앙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감사’입니다. 그는 평생 고통 속에 살았던 사람이고 평생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서로 대조되는 것 같은 고통과 감사가 바울의 삶에서는 어떻게 양립하며 공존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불행하게도 첫 그리스도인 중 하나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폭력의 현장이었습니다. 바울은 가해자 중 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전 바울의 삶은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과 바울 자신의 편지들을 통해 그가 유대 율법에 정통하고 헬라 철학에 통달한 바리새파 청년 지식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당시 로마 제국 전체에서 1, 2퍼센트에 불과했던 로마시민이었던 것을 보면 그가 특권층이었던 것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의 바울의 삶은 요즘 말로 ‘폭망’이었습니다. 특권 엘리트로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탄탄대로를 걷던 청년이 예수를 만난 후 좁은 길, 위험한 길, 십자가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겪은 고통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쓰고 있는데, 그 묘사가 몸서리쳐질 정도로 구체적이고 생생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자매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24-27)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은 예수님을 기억하며 따르던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사회적 소수자’로서 고통을 겪고 있었겠지만, 바울의 고통은 그 중에서도 정도가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고통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고통이 ‘삼중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 바울은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몸의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 가시가 뇌전증이라는 주장도 있고 만성 두통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바울의 병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그 가시를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극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 크고 깊었기에 바울은 그 병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인 병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둘째, 바울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가 병약함과 함께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었다고 고백합니다.(고린도후서 12:10) 앞서 읽어드린 고린도후서 11장을 다시 살펴보면, 그가 유대 사람들에게서 여러 번 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십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은 당시 유대 회당에서 매질할 수 있는 최대가 ‘서른 아홉 대’였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 회당의 가장 심한 처벌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채찍질은 당시 로마의 처벌 방법이었습니다. 앞의 매질이 유대 종교권력으로부터 당한 박해였다면 뒤의 채찍질은 로마 정치권력으로부터 당한 박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돌로 맞은 것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군중에 의한 집단폭행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인, 로마인, 군중 할 것 없이 온갖 집단으로부터 폭행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그 모두가 주를 위해 겪은 고통이라고 고백했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당시의 사회적 소수자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욕과 혐오와 폭력을 당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서 기록에 따르면 두 차례, 그리고 1세기 말 로마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일곱 차례 감옥에 갇혔는데, 오늘의 주제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빌립보서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였습니다.

셋째, 바울은 그가 사랑했던 교회의 분열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한 편지에서 “그 밖의 것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28)라고 고백하는데, 육체적 병고나 종교적, 정치적 박해보다도 교회로 인한 근심걱정이 그의 더 깊은 고통의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세운 아시아 교회들이 하나 같이 분열과 다툼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소란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는 바울의 적들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이기적이고 불순한 의도로 복음 전파에 열심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빌립보서 1:17)  이처럼, 교회로 인한 바울의 고통에 대해 E. P.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 회당과 로마 집정관의 처벌보다 교회 안의 거짓 형제들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을 더 염려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가장 사랑했던 교회가 바울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평생 겪었던 삼중적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나이로는 노년인 50대 후반에 이른 바울이 “사탄의 하수인” 같은 만성적 질병에 시달리면서, 종교적, 정치적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교회의 분열 소식을 들으면서, 게다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던 로마 제국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으면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도대체 이 사람 바울, 이 ‘고통의 사람’ 바울이 동시에 ‘감사의 사람’ 바울일 수 있게 한 힘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본문 중에서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에 주목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감정일까요? 감사할 만한 일에 대한 반응일까요? ‘감사의 수도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감사의 주제를 오랫동안 성찰해온 데이빗 슈타인들-라스트 수사는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태도’라고 합니다. ‘감사의 심리학자’ 로버트 이먼스도 감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라고 합니다. 즉 감사는, 또는 감사하는 마음은 감사할 만한 외적 조건에 대한 반응이나 감정이 아닌 주체의 내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감정 또는 행위는 외부로부터 받은 정신적 자극이나 물질적 자원이 내게 흡족하게 여겨질 때 그것에 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건에 따라 어떤 일에는 감사하고 어떤 일에는 감사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의 감사는 그런 조건적 반응으로서의 감사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모든 것, 모든 일에 무조건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이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은 로버트 이먼스가 말한 것처럼 바울이 스스로, 의지적으로 선택한 태도입니다. 즉, 감사하는 마음은 내 밖에서 주어지거나 선천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후천적으로 계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치료사 대프니 로즈 킹마는 감사는 “마음의 습관이며 영적 훈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감사 리스트를 만들고 감사 일기를 쓰고 감사 명상을 하는 것은 감사를 우리의 습관과 태도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의 감사하는 마음은 정신적, 심리적 태도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감사하는 마음은 단지 인간의 ‘심리적 태도’가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적 태도’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고립과 고통 속에 홀로 던져놓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굳건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을 때도 자신이 언제 어디서나 ‘주 안에’ 있다는 진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것,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과 더불어 희망과 사랑으로도 나타납니다. 지금의 ‘최악’이 영원한 ‘최후’는 아니라는 희망은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합니다. 언젠가는 지금의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 고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희망, 그 희망이 있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의 희망입니다. 바울은 그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빌립보서 3:10)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활의 능력, 부활의 희망이 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을 마음을 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만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길입니다. 죽음만의 길이 아니라 죽음과 생명의 길입니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너머 부활의 희망, 그것이 있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고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고통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는 아픔을 겪은 사람이 타인의 아픔에 더 자비롭게 공감하며 참여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자비심을 느끼는 조건 중 하나로 “그 고통이 자신의 삶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고통의 가능성’을 헤아리는 정도가 아니라 ‘고통의 현실성’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낍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통이 깊은 이들일 수록 감사하는 마음을 더 깊이 갖게 됩니다. 왜냐면 고통 속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고 한없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감사야말로 가장 진심어린 감사입니다. 어쩌면 감사하는 마음은 고통 받는 이들의 존재론적 특권이며 능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은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싹틔우고 꽃피우고 열매 맺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옥중에서 육체적 병고, 정치적 박해, 교회적 분열의 삼중고를 겪으면서 쓴 빌립보서의 다른 이름은 “기쁨의 편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하는 마음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태도일 것입니다. 절대적 자존자인 하나님은 당신 외부의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감사할 일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고통 속에서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면서, 고통 속에 있으면서 당신께 항의할지언정 당신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면서, 고통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이들을 보시면서,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십자가의 길을 부활의 희망으로 함께 걸어가는 이들을 보시면서 하나님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실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어머니가 자식 품듯 껴안고, “나를 믿어주어 고맙구나”, 이렇게 신비 가운데 말씀하고 싶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삶의 신비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더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겨울을 건너는 것입니다. 외로움이 사무칠수록 작은 친절과 환대에 깊은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가난할수록 작은 베풂과 나눔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무기력과 우울감 속에서 작은 생기에, 이를테면 맑은 하늘, 밝고 따뜻한 햇살 한 조각, 고운 들꽃, 아이들의 웃음소리, 부드러운 미소에 살아갈 이유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의 신비는 모든 것, 모든 일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깨닫고 체험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우리 평생의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 하나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사회적, 교회적, 개인적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0년 새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뿐만 아니라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열사 분신항거 50주년, 광주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고통과 저항의 한국 현대사가 응축되어 기억되는 해인만큼 2020년에도 우리는 집단적, 개인적으로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이 우리에게 깨우쳐준 것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우리 ‘존재의 지반’인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하듯 아뢴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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