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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보식, 최성자



“메리 그레이하운드 / 나의 크리스마스 추억”
(빌립보서 2:4, 베드로전서 4:8)



2019년 12월 22일
성탄주일 예배



메리 그레이하운드_김보식 형제


저는 찰스 디킨슨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타고 제가 2016년에 보낸 크리스마스 여행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맘 때면 많이들 언급하는 찰스 디킨슨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스크루지를 길 위에 세운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특히 저는 스크루지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는 회상의 여행을 넘어, 같은 시간대를 살았지만, 같은 공간을 살지 않은, 자신이 착취하며 구박했던, 직원의 공간으로의 여행이라는 길 위에 선다는 점이 좋습니다. 익숙한 자기 공간이 아닌 동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공간을 향유하며 다른 상황에 처하며 살았던 타인의 공간으로의 여행이 바로 스크루지를 바꾸게 했고, 그 변화의 여정 속에서 스크루지와 우리 독자와의 거리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서입니다. 그 여정에 집중하게 되면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동안의 삶과 다르게 크리스마스는 난데없이 개과천선하기 좋고, 이 날 만큼은 마음껏 선행을 베풀고 또 즐겨야 한다는 신나는 결말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지만 공간을 달리하며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특수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같이 살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우리의 주위를 돌려놓는다고 생각합니다.


스크루지는 직원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다른 공간을 사는 그 직원의 특수성과 개별성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잘 살겠지 하며 그러려니 하는 것에 더해서, 직원이 가진 가난의 실체를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며 삽니다. 이런 스쿠루지의 태도에는 얼마간 사람들이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삶을 살고 있고, 그 비슷함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동일성의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는 단지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지, 같은 공간을 살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처지가 얼마나 다양한 감정적 혹은 정치적 결과 갈래를 지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내가 이만큼 누리고 사는 것만큼 다른 이들도 그렇게 누리고 살 것이라는 혹은 바로 그런 나의 누림 때문에 특정 이슈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 거라는 균질성의 오류에 쉽게 빠져드는 거 같습니다.
 
바로 그런 오류들에 대해서 스쿠루지가 내딛은 직원의 공간으로의 여행은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던 이 여정을 계기로 너와 동시대를 살지만 다른 삶의 현장을 가진 사람들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라는 메세지를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삶의 실체를 목도하고 서서히 스스로도 그것에 공감할 수 있고, 독자들로부터 공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며, 자신의 시각의 한계를 깨닫는 스쿠루지의 모습은 시대를 넘어 감동적일 뿐더러, 남의 사정을 돌보는 게 나에게도 이득이라는 실용성을 보장해 줍니다. 그래서 스쿠루지는 본문의 말씀과 달리 제 이익만 차리고 남의 이익을 돌보아 주지 않는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돌보아 줄 때 일어나는 즐거움의 산증인이 될뿐더러 그런 삶에 대해 우리의 의식을 우선 바꿔 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초대에 고무되어 저도 익숙한 크리스마스에서 벗어나, 낯선 길 위에 나섰던 적이 있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선물을 나누며 칠면조를 먹으며 편하게 앉아 수다를 떠는 크리스마스를 떠나,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남부로 가기로 했습니다. 미드웨스트에서는 언제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자유와,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자유가 충분히 없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에, 버스를 타는 것은 미국이 긍정하는 다양성의 다양한 측면이 아닌,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치부되는 가난의 상징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버스는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제가 있는 아케데미아에 공고하게 펼쳐진 획일성의 장벽에 가려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조차 소환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저의 목적에 딱 맞는 이동 수단이었습니다.


저는 미시간에서 출발해서 오하이오, 켄터키, 테네쉬를 거쳐 조지아 까지 가는 18시간짜리 버스를 탔습니다. 랩으로 안내를 해주는 익숙한 디트로이트를 벗어나 버스가 오하이오의 신시네티를 향해 달릴 때 전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제 옆자리에 앉아서 제 이어폰 한쪽을 빌려 제가 보던 영화를 보면서 너무나 맛있게 닭다리를 뜯던 건장한 흑인 청년의 닭다리는 버스에 압도적으로 많은 흑인 아주머니들에게 반은 구걸 반은 삥을 뜯어 받아 낸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분명 사람들이 음식을 주면서 즐거워 한다는 것이었는데, 크리스마스의 후함에 더해, 그 청년이 무료한 사람들을 웃겨주고 짐도 들어주면서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 더 신기한 것은 대도시에 자리 잡은 친척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길 위에 나선 레바논 난민 가족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미시간이 이민자들 뿐 아니라 난민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폈던 주라서 중동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난민으로 와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은 가족들을 직접 만나기는 처음입니다. 처음에는 미국서 나고 자란 자식들도 히잡을 쓰고 외간 남자와의 이야기는 꼭 아들을 통해서만 하는 그들의 성역할이 여전히 지켜진다는 것에 신기해하다, 스스로를 돌보며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9.11 이후의 중동 공동체의 이야기를 들으니 점점 저도 구경꾼의 입장을 벗어 던지고 진지한 얼굴로 몰입하게 됩니다.


그들과 작별하고 버스가 이제 좀 따셔지기 시작하는 켄터키의 루이빌에 도착하니 그제야 흑인 강세 도시를 지나오느라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던, 말로만 듣던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도시 빈민들이 드문드문 버스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온몸에 칼러 문신을 하고, 반쯤은 취해서 딸과 함께 여행하는 한 분은 아무 바닥이나 눕고 명확히 들리지 않는 영어로 말하고 묘하게 거친 눈빛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흑인들과는 섞이지 않으려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분리된 모습은 확실히 따신 테네쉬의 대학들이 몰려 있는 도시로 버스가 운행하면서 달라집니다. 짧은 구간을 타고 내리는 대학생들 대부분이 흑인들이지만, 간혹 친구로 보이는 흑인과 백인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면, 젊음과 교육이 결국 인종을 넘어서는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렇게 긴 팔다리를 하고 저렇게 좁은 자리에 쭈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대물림되는 살아있는 가난의 모양인가 싶기도 합니다.


어느새 버스는 미시간에 비하면 40도 가량 더 따신 조지아의 애틀란타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암울하고 위험해 보이는 곳에 위치한 버스 터미널이 좋은 거주지로 이동하려는 비주류들의 분투의 역사와 상관없이 여전히 도시 자체가 구별되어 있음을 명확히 알려줍니다. 이런 분리와 투쟁들을 보면 같은 공간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바로 그 생각 덕분에 버스라는 아주 짧은 시간 같은 공간을 향유하며 내가 쉽게 규정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도무지 닿을 수 없는 생활의 터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정이 다른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을 이해하지 않고 그들을 동질의 인종과 정치집단으로 규정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층 더 강화시켜 줍니다.


오늘 성서 본문을 다른 버전에서는 ‘자기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생각 하십시오’라고 번역합니다. ‘생각하십시오’에 강조를 두는 점에서 제가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표피적인 면을 목도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주기 위해서 우선은 그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걸음 떼었다는 점에서, 이때의 크리스마스는 저에게는 메리 그레이하운드(Merry Greyhound)가 되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특정 시간을 같이 보내지만 각자의 공간을 사는 새길의 사람들, 직장의 동료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며 이런 저런 관계를 맺게 되는 분들의 삶도 여러분들이 같이 돌보아 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새길로고.jpg


나의 크리스마스 추억_최성자 자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의정부 야채도매시장에서 25년째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최성자입니다. 저는 교회를 고등학교 때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교대로 일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직장 친구 따라 처음으로 간곳이 여의도에 있는 대형 교회였어요. 너무 크고 사람도 많고, 특히 기도시간에 통성기도가 너무 무섭기도 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저 혼자만 작은 교회로 옮겼습니다.


직장에서 가까운 교회를 다니며 본 예배 대신 고등부 예배에 참석했는데, 나이어린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웠고 담임교사가 군대를 가는 바람에 6개월도 안되어 또 다른 교회를 찾아 갔었죠. 다시 찾아간 교회는 대림동에 있는 귀신 쫒기로 유명한 대형 교회였습니다. 직장에 교구가 생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다녔고 청년부가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주일이면 종일 예배를 드렸고 그게 참 행복했습니다. 학교 친구들도 많아서 더 좋았습니다.


스무 살이 되고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에 성탄예배를 마치고 특별한 곳에 방문한다고 해서 따라 나섰습니다. 그곳은 영등포 구치소였습니다. 철장을 사이에 두고 마룻바닥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낯설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이라 무섭기도 했고 어색해서 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 바닥만 쳐다보고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선물로 가져간 양말을 드리고 왔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해서는 사정상 10년 정도 교회를 다니지 못했답니다. 장사를 하면서 수화를 배우며 알게 된 밀알 선교단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수화 찬양팀으로 활동하면서 장애인들과 함께 했던 성탄 축하예배도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 달 동안 마니또를 정하고 짝꿍인 장애인 자매님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면서 성탄절 예배시간에 예쁜 카드와 함께 선물을 주었을 때의 놀라는 표정이 재밌기도 했고, 함께 율동과 게임을 하면서 더 친해지게 되어 저도 선물을 받았던 예쁜 색종이로 만든 종이학도 떠오르네요. 예쁜 유리병에 담아준 마음이 더욱 감동이어서 잊혀 지지 않는 추억이 된 것 같습니다.


또 하나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크리스마스 즈음에 오병이어 선교단과 함께 수화 찬양팀으로 간 서울 구치소 예배였습니다. 제가 교도소의 재소자들과 편지를 나누고 있을 때여서 많이 궁금하기도 했지요. 교도소를 들어가려면 신분증과 휴대폰을 맡기고 육중한 철문을 세 번이나 통과를 해야 하죠. 화장실을 갈 때도 교도관님과 함께 동행해야 한답니다. 예배가 시작 되었고 특송 시간에 특별한 분들이 나와서 찬양을 했습니다. 가슴에 빨간 명찰을 단 사형수들이었지요.


저는 너무 놀랐답니다.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는데 젊고 잘생기고 하나같이 밝은 표정으로 찬양을 하는 거예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나의기쁨 나의 소망이라는 찬양을 5절까지 부르는데 저는 흐르는 눈물이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수화찬양을 했는데 너무 떨리고 정신이 없어서 실수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그 찬양을 들으면 그날이 생각나서 가슴 한 편이 아파온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병든 자나 어려운 이웃을 먼저 돌보셨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와 아들이 마트에서 우유 두 팩과 사과 6알 음료수를 훔친 사건이 있었죠. 그 아버지는 붙잡힌 후 너무 배고파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죄를 반성했습니다. 그 부자를 훈방조치 한 경찰관이 따뜻한 국밥을 대접했는데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 부자에게 온정의 손길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는 애기를 들으며 우리사회는 아직도 따뜻한 사람이 많다는 걸 느끼며 뿌듯했습니다.


사랑은 서로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 받는 것 보다 주는 기쁨을 많이 누리는 삶이 저에게  감동이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 성탄절 온 누리에 사랑의 종소리가 기득 울려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저 멀리 북녘 땅에도, 몸이 불편한 자들에게도, 마음이 아픈 자들에게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도, 불우한 우리 이웃에게도, 사랑하는 새길 교회 교우님들에게도 그 사랑이 가닿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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