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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승렬



“경계를 넘어서”
(창세기 1:26-30, 갈라디아 3:26-29, 마가복음 7:24-30)



2019년 12월 8일
인권주일 예배
박승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

- 창세기 1:26-30 -


[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입니다. ]

- 갈라디아서 3:26-29 -

 

[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수로보니게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

- 마가복음서 7:24-30 -

 


경계를 넘어서


반갑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박승렬 목사입니다. 기독교장로회 교회 목사이고, 서대문구에서 한우리교회를 담임하여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새길교회에서 인권주일 예배로 드리고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개방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새길교회는 품이 넓은 교회라고 들었습니다. 품이 넓은 새길교회의 영향이 더 넓게 퍼져나가 많은 교회들이 새길교회를 닮아 가면 정말 좋겠습니다. 오늘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저를 부르신 것은 인권과 교회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자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왔습니다.


저희 인권센터는 과거 70년대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국가의 인권탄압을 고발하고 피해자들을 옹호하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2019년 인권상을 수여하였습니다. 이번이 33차인데 올해는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비롯해서 장애인철폐운동을 한 박경석 대표에게 시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정부에 인권 옹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일인데, 한국 교회에서는 교우들과 자녀들에게 인권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교회학교 교재를 인권의 시각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 차별 사례들을 정리하여 인권가이드북을 제작 중에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인권단체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희 인권센터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인권 탄압의 가해자는 누구이겠습니까? 국가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국가가 인권을 탄압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부끄럽게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인권억압자가 되어 있습니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 탄압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자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 이름으로 차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대통령을 면담할 때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고 국가인권위원회 법을 개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와 이슬람종교와 난민들을 계속 차별하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나 한 것일까 싶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지역 지자체에서 인권조례를 제정하려면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 교회입니다. 충남에서 그러했고 경기도에서도 그러합니다. 단순히 반대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몰려다니면서 다중의 힘으로 공청회를 봉쇄하고 온갖 비난과 욕설을 쏟아놓습니다.


그것뿐입니까? 교회단체인 한기총을 내세워서 정권 반대집회를 합니다. 정치적 의견은 달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곧 교인들의 행태가 말로 표현하기도 부끄럽습니다. 토요일이면 광화문 일대는 미친 거리입니다. 욕설과 폭언, 혐오 발언이 난무합니다. 토요일에 광화문에 가보십시오. 난생 처음 듣는 욕설도 있습니다. 폭행도 서슴지 않습니다. 세월호 피해 부모들에게 비수가 되는 말을 쏟아놓습니다. 듣고 있노라면 제 안에서 피가 끓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스스로 나는 인내력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토요일에 광화문 일대에서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들 곁에서 1시간 정도만 함께 해주시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아 죽어줘서 고맙다!”는 피켓을 들고 서 있기도 합니다. 돈 많이 벌어서 좋겠다고 야유합니다. 시체팔이 그만하라고 시비를 겁니다. 말리는 시민들을 욕하고 밀치고 폭행을 서슴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견딜만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집사님, 권사님 할 때입니다. 정말 부끄럽고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는 혐오와 차별입니다. 광화문이나 청와대 일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곳곳에서 혐오발언(hate speech)이 난무하고 있고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김치녀, 한남, 틀딱충 등등 온갖 폄하와 혐오성 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세대, 남녀, 지역 등 차이도 없습니다. 혐오와 차별이 말이나 개인적 행위만으로도 큰 불행을 가져옵니다. 최근 젊은 연예인들의 연이은 죽음들이 그 폐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혐오성 발언과 행동으로도 그런 불행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이 집단화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이나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혐오와 차별을 통해 집단을 만들고 권력을 장악하면 재앙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학살입니다. 처음부터 학살한 것은 아닙니다. 차별하고 혐오하였고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만 학살한 것이 아니었지요. 집시, 성소수자 등도 학살했습니다. 혐오는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놓고 구분 짓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차별하고 공격하고 공포를 조장합니다.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서도 끊임없이 써먹었던 수법입니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 집단을 학살하고 공포를 조성하여 시민들을 제압했습니다. 이처럼 혐오와 차별을 집단화하고 정치화했을 때 끔찍한 사태가 일어납니다. 생명을 앗아가는 씨앗들이 혐오와 차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혐오와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혐오와 공격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돈을 모으고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이렇게 나쁜 이야기들을 하는 길게 하는 까닭은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안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세상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데 우리가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제 고 김용균 노동자 1주기 추모집회가 열렸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하루에 3명이 산재로 죽어갑니다. 먹고 살려고 출근한 직장이 그의 무덤이 되고 있습니다. 하루 3명이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는데 그 고통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나만 편안하면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누군가에게 지옥입니다. 더럽고 악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고결하고 깨끗한 인품을 지니고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한다 할지라도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럽고 악한데 우리는 깨끗할까요? 우리도 더러운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혐오의 발언을 들으면서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분노에 차오를 때도 있습니다. 외면한다고 우리가 깨끗해집니까? 분노한다고 우리의 정의가 높아집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러운데 우리라고 깨끗할 수 없습니다. 마음도 더럽혀져 있고 말도 더렵혀져 있습니다. 우리의 영도 더럽혀져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상대를 패주고 싶을 정도로 포악하기도 합니다. 우리만 더럽혀져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더러움이 우리의 이웃에게도 이미 퍼져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혐오하고 차별하는 그 마음들이 우리 사회에 가득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더러움과 악함에 있어 남녀와 차이가 있을까요? 인종과 민족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까요? 처지가 어떠하든지 혐오와 차별만 아니라 분노하는데 차이가 없습니다. 악함에 있어서는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됩니다. 악한 영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의 지배를 받아 서로 미워하고 차별하면서 만족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지옥입니다. 혐오와 차별, 분노가 지배하는 지옥 같은 세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일에 만나는 교우들이 소중한줄 알게 됩니다. 더러운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우리의 영혼도 더러워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욕과 폭언으로 더럽혀진 귀와 마음과 영혼을 씻어내는 날이 주일입니다. 주의 말씀을 통해 깨끗해지고 영혼을 담아 부르는 아름다운 찬양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질 것으로 믿습니다.


창세기 1장은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아름답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참 좋다고 선포할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지는 어떠했습니까? 나라는 부패했고 분열되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앗시리아에 망하고 바빌론에 망했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개고생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고향은 모두 허물어지고 주변 나라 사람들의 횡포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포로기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노예와 같은 비참한 포로 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존엄함을 깨달았습니다.


바빌론 신화에 신들을 섬기게 하려는 일꾼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빌론 사람들을 섬기며 살았던 히브리 노예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노예들이 오히려 사람의 존엄함과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세상의 가장 하찮은 존재임에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거룩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바닥에 살면서 하늘을 보았고 흑암에 갇혀 있으면서 빛을 보았고 혼돈 속에 있으면서 질서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둠이 와도 하나님이 주신 희망과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보며 새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 사람은 유대인이었을까요? 헬라인이었을까요? 백인이었을까요? 아프리카인이었을까요? 왕이었을까요? 노예였을까요? 기독교인이었을까요? 불교인이었을까요? 성서는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여자와 남자로 만드셨습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사람에는 민족도 인종도 계급도 없습니다. 종교도 없습니다. 오로지 여자와 남자 동등하게 만드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계를 긋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경계를 그었습니다. 난 유대인 넌 헬라인 난 남자 넌 여자 난 귀족 넌 노예 등으로 선을 긋고 차별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구별 짓고 차별하는 험한 세상을 살았던 노예들이었습니다. 차별 속에 살았던 노예들이 사람을 차별 없이 만드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여전히 한국인, 이주노동자, 백인과 가난한 나라 이주민, 남자와 여자, 가난한 사람과 부자 등으로 구분지어 차별하고 공격하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만 그러하고 교회는 아닌가요? 야고보서 2장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면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환대하면서 가난한 사람은 홀대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습니다. 과거 야고보 사도 시절에만 그랬을까요?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환대하고 있습니까? 부자들이 힘들다고 하면 부자들 말에는 귀 기울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 소리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고통, 노동자들의 고통, 이주 노동자들의 고통, 성소수자의 고통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예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교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왜곡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차별해도 괜찮을까요? 갈라디아 3:26절을 다시 읽어보십시다.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입니다. 그가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힘이 세거나 약하거나, 노동을 잘하거나 노동할 수 없거나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알았습니다. 상대가 알든 모르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런데 왜 이슬람이라고 해서 차별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민이라고 차별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는 사람을 차별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들에 맞서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은 2천년 동안 성서를 끊임없이 남성중심적으로 읽고 남성중심 문화를 만들어내면서 여성들을 배제해왔습니다. 성서가 주는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성서를 보십시오. 주님은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경계선을 넘어 자유롭게 활동하십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는 주님께서 유대 땅을 넘어 시로페니키아 지방 지금은 레바논 땅에 가셨을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딸을 치유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여자라고 번역을 했지만 부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때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부를 때 사용했던 말인데, 부인이라고 번역할 말입니다. 더러운 영이 그 부인의 어린 딸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 악한 귀신, 악령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직역을 하면 더러운 영입니다. 앞 구절들에서 주님은 더러운 것들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딸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영이 더럽다고 하면 어떤 상태일까요? 영이 깨끗하다고 하면 어떤 것일까요? 우리의 영은 깨끗할까요? 더러울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상은 욕설과 혐오, 폭언과 폭행, 분노와 분열 등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결코 깨끗한 세상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들으면서 과거 2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지금 우리의 영은 더러운가 깨끗한가를 생각할 때 이 본문 말씀이 더 잘 보일 것입니다.


어린 딸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떤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주님을 찾아온 부인은 유대 사람도 아니고 페니키아 사람도 아니고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중동 지방은 그리스의 식민지였습니다. 헬레니즘이라고 포장하지만 300여 년 동안 그리스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헬라 사람인 이 여성을 부인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면서 그 여성의 이미지를 상상해보십시오. 옷차림은 어떠했을까요? 표정은 어떠했을까요? 꽤나 우아하게 입고 왔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 여성을 보면서 뭔가 마음에 안 들었거나 녹록치 않게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뜸 강아지라고 부르면서 부인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 부인의 입심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강아지입니다. 강아지도 자녀들이 먹다 흘리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자존심 다 내려놓고 도와줄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강아지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서 돌아설 만도 한데 끝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한편 다시 생각해보십시다. 그 부인이 평소에 강아지라고 불렸을까요?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헬라 사람들은 페니키아에 돈 벌러 오는 유대인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아마도 평소 같으면 헬라 사람들이 가난한 유대 사람들을 강아지 정도 취급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딸의 증상은 어떠했을까요? 성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저는 성서도 상상하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부분은 읽지 않았지만, 21절 23절을 읽으면 모독, 교만, 어리석음 같은 악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그 부인의 딸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주변 사람들을 모독하고 교만하며 포악을 떨지 않았을까? 상상해보았습니다. 그 딸의 더러움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치유 받은 사람은 부인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헬라 사람인 이 부인에게 평소에 무시하던 유대인들을 자녀라고 자신은 강아지라고 역전해서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은 응답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자녀이며 자신은 강아지라고 낮출 줄 아는 겸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딸이 치유 받았습니다. 우리는 역지사지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개신교는 다수의 종교이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수였습니까? 처음부터 힘이 강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소수였습니다. 우리도 약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강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잘남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힘을 마치 나의 힘처럼 쓰고 있습니다. 주님의 힘을 인권조례 제정을 반대하는데 남용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와 이슬람 반대 서명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를 동정하고 연대했다고 교회에서 쫓아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힘을 믿고 온갖 포악을 떨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인권 억압자가 된 교회들이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경계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무시하는 바리새주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주신 모든 사람을 환대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새길교회가 한국의 모범적 교회가 되기를 빕니다. 새길교회 교우들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늘 앞장서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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