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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명식

 

 

궁지의 공간: “~”에 대해서라면 하느님조차 피고인일 뿐

(창세기 1:1-2)

 

20191124

주일예배

김명식 형제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 창세기 1:1-2 -

 

 

궁지의 공간: “~”에 대해서라면 하느님조차 피고인일 뿐


제목 없음.png     

보고 계신 사진들은 산 젤로라모 에밀리아니(까를리 데 까를로) 교회입니다. 밀라노 외곽 치미아노 지역에 있는 교회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신의 기운으로 가득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공간을 도입부에 보여드린 까닭은, 오늘 말씀증거 말미에 언급하겠습니다. 저는 최근 홀로코스트 생존자 시몬 비젠탈이 쓴 책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와 이에 대한 다트머스 칼리지 종교학 명예교수였던 아서 허츠버그의 단편 글을 읽고 이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과 마주했습니다. 저의 사유의 한계를 절감한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마주한 한계에 대한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증거는, 비젠탈이 쓴 책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의 한 대목과 이에 대한 허츠버그의 단편 글을 함께 읽고, 다시 교회 공간에 대한 내용으로 돌아와,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공간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궁지의 공간, 딜레마의 공간에 대한 내용을 나누고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아직 빛이나 땅의 형체나 물 덩이를 만들거나 나누거나 하지 않은 상태여서 신이 온 세상, 우주를 만들었는데, 아직 그 형태가 없이 땅이고 물이고 뒤죽박죽 뒤 섞여 있고 그 가운데 신의 영이 감돌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형태지각이론을 통해 모순에 관해서 설명하거나 물질 상태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건너뛰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땅이 될 고체 상태의 물질들이 형태가 없이 기체 상태의 물질들과 뒤섞여서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고, 물론 아직 빛을 만들지 않았기에, 어둠이 땅을 지배하고 있어서 형태가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영 곧 하느님이 수면 위에 운행, 움직이신다는 것도, 물이라는 것이 바다나 호수처럼 뭉쳐 있으면 문자 그대로 그 위로 하느님이 계신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중력이 작동하여 땅이 뭉쳐 있고 그래서 물을 받치고 있다면 모를까 땅도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 땅의 물질도 물질 간 비어 있는데, 물도 땅과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제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우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기운은 땅이건 물이건 온 물질 상태에 가득 차 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공간에 하느님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여전히 하느님의 영이 온 우주에 운행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면 온 우주의 총합이 하느님의 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겠죠. 우리가 있는 이 공간에도 신의 기운이 가득할 겁니다. 여기까지 공간과 신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잠깐 건축으로 넘어갔다가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건축은 시대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 있는데, 어떤 시대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어가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면, 집은 우리 삶을 담는 공간이고, 건축은 이 공간을 짓는 것을 의미하죠.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를 몇 개 골라내면, , 공간, 집이 될 텐데요. 집은 공간과 삶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이 셋 중에 포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만, 단 하나를 선택하라 하면 삶이 될 겁니다. 두 물질의 형태, 공간과 집이 주어지더라도 생명이 없으면 무의미하니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하느님이 생명의 선결 조건을 갖추기 위해 천지를 만들고 땅과 바다를 만들어 생명이 거할 수 있는, 곧 집을 만들고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세 단어 중 공간에 집착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어이기 때문입니다. 집과 삶은 건너뛰기로 하겠습니다. 집은 건축의 분명한 목적의 형태고, 삶은 이를 통해 인간이 영위하는 일상인 것으로 가름해도 오늘 나누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충분할 것 같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건축이 집을 통해 삶의 공간을 만드는 행위라는 점입니다.


온 우주에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하느님의 기운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오직 신의 집만이 건축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전도 신의 집이고, 로마 교회들도 신의 집인 것이니 어원에서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가면 피부로 그리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을 많은 교회건축이 지향해왔습니다. 즉 건축의 핵심은 공간을 만드는 데 있고, 모든 공간에는 신의 영, 기운이 감돌고 있으며, 이를 가장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시몬 비젠탈,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용서라는 말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단순한 개인이 아닌,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가 용서를 말할 때는 더욱 그렇다. 용서하는 일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러나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 것일까? 가해자의 참회가 없더라도 용서해야 하는가? 만약 가해자가 참회하면, 당연히 용서해야 하는가? 한 개인이 다른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1940년대 초, 폴란드의 유대인 강제수용소나는 그날도 평소처럼 노역장에 끌려가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신 유대인이죠?”


한 간호사가 내게 묻더니 나를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어두운 방 안에는 죽어가는 환자 한 명이 온몸에 붕대를 감싼 채 누워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저는 나치 SS대원이었습니다. 저는 유대인 수백 명을 집에 가두고 불태웠습니다. 뛰쳐나오는 사람에겐 총을 난사했죠. , 하느님나는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곧 죽습니다. 그러니 제발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이 고백을 들은 유대인은 고뇌에 휩싸인다. ‘나치는 내 어머니와 일가친척 89명을 죽였어. 하느님조차 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고, 과거를 뉘우치고 있어. 나는 그에게 최후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야. 용서해야 할 많은 이유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이유들. 참회에는 마땅히 용서로 화답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무슨 권리로? 이미 죽은 수백만 동포들은 내게 용서의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죽어가는 나치와 비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 유대인은 훗날 아이히만을 비롯한 1,100여 명의 전범들을 추적하여 심판대에 세운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시몬 비젠탈입니다.


아서 허츠버그의 단편


이 책, 시몬 비젠탈의 생존기에 대해서 유대교 신학자, 다트머스 칼리지 종교학 명예교수였던 아서 허츠버그가 쓴 단편글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죽어 가는 군인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그의 죄는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커지기만 한다. 그가 나치가 된 것은 결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가톨릭 교도였고, 또한 그의 아버지는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반대 의견을 서슴지 않고 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히틀러 소년단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더욱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막무가내였고, 이후에는 더욱 도전적으로 바뀌어 SS(나치친위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다가 임종의 순간이 되어서야 자기가 부모에게 배운 것은 이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일부 확고한 나치들과는 달리,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몰살해 버리기 위해서라면 무덤 속에라도 기꺼이 들어가겠다고 자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기가 합류하려는 살인자들이 결국 성공하리라고 확신하자 그는 기꺼이 악행을 선택했다. 사실 나치 정권은 마음이 약한병사들에게는 다른 임무를 부여하도록 허락해 왔다. 심리적 충격이 그토록 컸다면 자기 손으로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마땅히 피했어야 하지만, 그는 결국 무고한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만다. 설령 인종적으로 열등한 자들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는 주장에 확신을 갖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죽임으로써 당시 승승장구하던 나치 정권하에서 뭔가 특별한 혜택을 얻으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군인의 침대 곁에 앉아 있던 긴장된 순간, 시몬 비젠탈은 <탈무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한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탈무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어찌 너의 피가 남의 피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겠느냐?” 그 죽어 가는 SS대원은 인종주의적 살인자가 되거나 직업적 도살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잃는 편을 택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 한 명, 어느 누구라도 좋으니 유대인을 자기 침대 곁으로 데려오게 함으로써, 희생자와는 물론이고 나아가 하느님과의 평화까지 도모했다. 비젠탈은 침묵했고, 그의 행동은 옳은 것이었다. SS대원이 참여했던 범죄는 인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한계조차도 넘어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 범죄에 있어 오히려 피고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느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악을 보시고 그곳을 멸망시키려 작정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항변한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자들 중에 있는 의로운 자들도 모두 죽이실 셈입니까? ()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나이까.”(18:23, 25)


하느님은 그 악한 도시에 정의로운 사람이 단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지만, 아브라함은 그 숫자조차도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대화 속에서, 온 땅의 심판관이신 하느님 자신도 반드시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 하느님은 당신이 악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한꺼번에 멸망시킬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신다.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가운데는 수많은 정의롭고 경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처 죄를 알지도 못했던 아이들도 100만 명이나 포함되어 있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논쟁을 보면, 아브라함은 결코 하느님이 그런 잔혹한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쩌면 하느님은 욥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스로를 변호했을지 모른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치조차도 우리로선 감히 측정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하느님의 도구였다는 식의 지나친 확대해석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하느님이시라면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많은 수의 사람을 죽일 필요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나치와 그 동조자들을, 홀로코스트의 와중에서도 숨어서 침묵하고 계셨던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한때 가톨릭 신자였던 그 SS대원은 아마도 자기가 했던 몇 마디 회개의 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비젠탈이 나간 뒤에 그는 또다시 신부를 불러 종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용서를 확신하며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허락했던 하느님이라면, 결코 그런 살인을 저질렀던 괴물들을 용서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로부터 오랜 후에 시몬 비젠탈은 슈투트가르트를 방문하여 죽은 군인의 어머니를 만나는데, 당시 그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은 것 또한 옳은 행동이었다. 그는 아들의 죄를 어머니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시몬은 사람이 그 아비의 죄나 그 자식의 죄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죄 때문에 죽기 마련이라는 성서의 내용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 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19~20)


그는 그 군인의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절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계속 살아가더라도, 정신은 한없이 황폐해질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얘기한 것은 단지 시몬의 감동적인 이야기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나는 1912년 갈리치아의 루바추프(폴란드 남동부의 도시)에서 태났고, 1926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오는 바람에 가까스로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다. 나는 같은 세대의 독일인들은 물론이고 그 위성국가의 동조자들과도 결코 화평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세대의 그들은 분명히 나치에 동조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패하고 죽는 그날까지도 그를 향해 만세를 불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삼촌들과 숙모들과 사촌들까지 내 친지들은 물론이고 나 또한,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학살한 자들의 정신상태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죄에 대해 미안해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죄의식에 맡길 문제다. 나로선 홀로코스트를 감히 설명하려는 갖가지 글들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은 비록 역사적인 통찰력이나 정교한 시학으로 가득 차 있기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답변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하나같이 외면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어째서 인간은, 그리고 하느님은 그토록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침묵한 채 그 SS대원의 침대 곁을 떠난 시몬 비젠탈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지의 공간 속에 갇힌 나, 그리고 우리


이 글 읽고 난 후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하느님은 역시 수 많은 피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강제 징용, 일본군 성노예, 6.25, 5.18,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 우리 사회,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낳은 사건들에서 하느님이 자유롭다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의 유가족이, 이웃인 우리가 원망하고 따져 물어야 할 대상에 하느님을 결코 제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이 교회 <산 젤로라모 에밀리아니> 공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저 교회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은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마무시하게 잔혹한 하느님의 기운이 그와 정반대의 기운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롯된 것이었을까요? 제가 그곳에서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은 후에, 그것은 단지 제가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착각을 투영한 공간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궁지에 몰려 곤궁한 처지에 빠진 듯했습니다. 신의 온기로 가득 찬, 은총의 공간으로만 느꼈던 <산 젤로라모 에밀리아니> 교회, 모골이 송연한 피고의 공간에서 제가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런 잔혹한 일들에 침묵했던 신을 숭배하고 있는 우리는, 이 공간, 여기 계신 모든 분은 궁지에 몰린 것 같지 않으십니까? 이 딜레마의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도]

 

사랑의 하느님,

진정 하느님은 사랑이십니까?

무수한 생명을 앗아 간, 정녕 공의의 신이십니까?

그 생명 중에는 불의한 것만 있다 할 수 있습니까?

노아 홍수 때도, 출애굽 때도,

무수한 전쟁에서, 여전히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는 우리 시대 사건/사고에서도,

죄가 뭔지 조차 모르는 수많은 생명이 도처에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함께 신도 거기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고 있었다는 인간적 해석은

그 큰 슬픔에 비해 지나치게 무책임하고 나약하며 비겁한 해석이고,

그렇다면 당신은 무능한 신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병들어 죽어가는 환자를 구하고,

돌 맞아 죽을 뻔 한 여인을 구하며,

쓰러져 죽어가는 이웃을 구하는, 정의도 범죄도 공의와도 거리가 먼,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만인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런 신이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글로는 만날 수 있는데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까?

 

오늘 제가 처한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저의 간구가,

누군가에게는 이미 있는 해답이라면, 그들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신비스러운 신의 세계,

온 우주의 총합인 신의 물질세계 중 작은 인간계를 이해하는 지평의 한계를 넓혀 주옵소서.

 

바라 건데,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를 소중히 여겨,

잎을 떨구는 나무에서,

살처분 되는 돼지, 구축되는 멧돼지에서,

수조에 갇힌 생명, 생선에서,

죽음을 맞는 모든 생명에 대해 불쌍함과 귀함을 함께 여기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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