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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진권


“관상기도: 하나님 품에 안기는 신비의 여정”
(시편 131편)

 


2019년 9월 15일
주일예배
이진권 목사(평화영성교육센터 ‘품’)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 시편 131편 -



관상기도: 하나님 품에 안기는 신비의 여정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여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입니다. 이 시대의 스승이셨던 신영복 선생님도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가장 멀리 하는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현장의 발까지 가는 먼 여행”이라 하셨지요. 저도 제 인생에서 이 가깝고도 먼, 역설적인 여정을 떠나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모태 신앙으로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착실한 신앙인으로 자라나면서, ‘이웃 사랑’을 제 삶의 중심가치로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83년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사회‧구조적 불의에 눈뜨고, 이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으면서, 기독교신앙과 사회변혁을 통합하는 삶을 고민하며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속도 되어 국립수도원 학교에도 다녀왔고, 공장에도 위장취업을 해서, 잠시 노동자로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사회운동의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다양하게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삶이 너무 거대한 대의를 추구하며, 이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당위적 삶으로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가득해졌습니다. 그 이면에는 당위적 가치를 제대로 삶으로 살아내고 있지 못하는 삶의 이중성의 문제, 이로 인한 내면의 분열과 영혼의 황폐함, 삶의 고단함 등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서, 제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을 감행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근처에 있는 퀘이커 영성센터이자 대안학교인 펜들힐에 9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내면의 평화와 사회‧구조적 평화를 조화롭게 실천하는 퀘이커 전통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새길교회에 계셨던, 정지석 목사님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펜들힐에서 매일 아침 함께 모여 30분 동안 고요하게 기도하는 공동예배시간이 있었습니다.  사회자도 없이, 한 사람이 와서 침묵가운데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기도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예배가 시작됩니다. 찬양이나 기도, 말씀 봉독이나 설교도 없이, 그저 단순하게 고요함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 예배의 전부입니다.


침묵예배에 참여하면서 저도 자연스레 저의 내면세계로의 여행을 집중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한 과거의 무수한 기억과 상처들, 분노들, 욕망과 좌절, 죄책감과 수치심 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겉은 고요했으나 저의 속사람은 가히 수많은 포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였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너무 힘겹고 무서워서, 예배 시간에 참석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재산 전부와 인생 전체를 걸고 나선 여정임을 되새기며, 꾸역꾸역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참여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래도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그 고요하고 거룩한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펜들힐 친구들이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예배 시간에, 어느 한 순간 그 모든 분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너무도 고요하고 평안한 순간이 문득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제가 한 일엔 그 어떤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단순히 힘든 발걸음으로 그 기도의 공간과 시간에 찾아가서 고요함 가운데 머문 것이 전부였습니다. 기적처럼 다가온 그 순간은 뭐라 표현할 수 가 없는 평안함과 자유로움, 깊은 고요와 잔잔한 기쁨이 충만한 시‧공간이었습니다. 그 체험을 후에 묵상하면서 오늘 본문 시편 131편 2절에 나오는 구절과 연결되었습니다. 제 영혼이, 존재의 중심이,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였다고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이 가능했던 것은 1절에 나오는 내용인 교만한 마음, 오만한 길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과 내 생각조차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무력하게 주님 앞에, 주님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경험과 연결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하면서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하나님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아이와 같은 존재이구나라는 깨달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아들이구나 하는 것이 생각이 아닌 사실로, 머리가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분명하게 믿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마가복음 1장 11절) 


예수님의 이 체험은, 당대의 절대‧초월적이고, 심판자적인 이미지의 주류 유대교의 하나님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압바 하나님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아빠를 부르는 것과 같이 친밀한 호칭과 관계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밀한 압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풍성한 생명과 평화의 에너지와 소식을 이 세상에 담대하게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저도 머리로는 압바 하나님,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와 책에서 자주 읽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슴으로 깨닫기 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머나 먼 이국땅까지 여정을 떠난 후에야, 그 머리의 지식이, 가슴의 중심과 깊이로 깨달아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알다’라는 말은 ‘야다’입니다. 이 ‘야다’는 남녀가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해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성서적 전통에서 보면 사람이나 사물을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추상적인 사변의 결과가 아닌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런 선생과 제자라는 구체적인 관계와 만남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그 이유가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둘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 부르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어 보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쫒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마가복음 3장 14-15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있으면서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 그의 인격과 삶을 자연스레 닮아가는 것. 이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자기 스승께서 “ 하나님의 어린양” 이다 말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이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고 되묻자 예수님은 이에 “와서 보아라”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님이 묵고 계신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인 안드레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합니다.(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는 경험이, 예수님과 대화하고, 생활하고, 기도한 그 경험이 그분을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증언자로 변화시켰습니다.


기도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불 수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성 삼위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정의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도의 여정을 통해 성삼위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고, 마침내 그 분과 사랑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깊어진다는 것은 사랑이신 그 분과 더욱 깊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고, 마침내 사랑 그 자체가 되어,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랑의 화신’으로 변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기도로 유명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통성기도가 영어에서 ‘Tong Sung Gi Do’로 옮겨질 정도입니다. 그 만큼 우리네 삶이 고단하고 절박한 사정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부르짖음의 기도가 한계에 봉착하고, 변질 되어가는 것을 나타나는 징후가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일방적인 자기욕망의 표출이거나, 자기의 편협한 생각이나 확신을 신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신성모독적인 행위로 타락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사랑이 아닌 편견과 증오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안타깝고 비극적인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위기상황 속에서 소위 ‘관상기도’라는 새로운 기도가 소개되기 시작했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관상기도에서 관상이란 영어로 ‘contemplation’입니다. 명상으로 번역되는 meditation 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함께’를 의미하는 라틴어 ‘컴 (com)’ 과 성전을 의미하는 라틴어 ‘탬플룸(templum)’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관상을 말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0장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유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존재, 의식의 상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묵상 또는 명상과 관상을 분명하게 구별해 왔습니다. 명상은 우리 힘으로 온갖 행위와 훈련을 통해서 무언가를 획득하고 성취하려는 능동적 이미지가 강합니다. 관상은 이에 반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수동적이고, 무위적인 기도의 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물을 받기위해서는 두 손을 비우고 펼쳐야 하듯이, 우리의 의식과 존재를 활짝 열어 놓아야 합니다. 개방성이 관상기도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이런 까닭에 관상기도는 ‘침묵 기도’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침묵이란 그저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기 위해, 고요히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생각이나 기억, 상상력, 등 온갖 분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 이러한 것들을 흘려보냄으로써, 마음을 비워, 성령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준비하는 것이 ‘고요함’ 가운데 머무른 다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관상 기도의 여정을 쉽고도 분명하게도 이야기한 비유가 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여성 신비가였던 아빌라의 데레사는 당신의 자서전인 ‘천주 자비의 길’에서 기도의 여정을 정원에 물을 대는 네 가지 방법에 비유했습니다. 그 네 가지 방법은 “팔의 힘으로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 둘째는 “두레박을 단 도르래를 손잡이를 돌리면서 긷는 법” 셋째는 “시내나 도랑에서 물길을 터놓는 방법”, 그리고 넷째는 “다량의 비가 내려 정원을 적시는 방법” 등입니다.

기도의 초보자는 팔의 힘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러 나르는 것처럼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하고, 의지를 통해 소원을 아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말로 하는 기도, 묵상기도, 등이 포함될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 도르래를 이용해서 물을 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기도 중에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점차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어, 마침내 그저 단순히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게 됩니다. 데레사는 이것을 ‘고요함의 기도 (The prayer of quiet)’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관상체험을 처음으로 맛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는 수동적이기 하지만 주님께 온전히 주의를 집중하는 ‘수동적인 몰입’이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과 평화 등의 선물이 더욱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세 번째 길은 냇물에서 물길을 내 정원으로 흐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때의 기도는 더욱 관상적으로 깊어집니다. 기도자의 마음과 의지는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관한 모든 일들을 실제로 도맡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네 번째 길은 비가 흠뻑 내려 정원이 충분히 젖는 양상입니다. 주님과 친밀한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는 ‘합일’의 상태입니다.  이 기도의 단계들은 엄격한 순서에 맞추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겹치면서 되풀이 됩니다. 또한 이 기도의 단계들은 일정한 상태가 아니라, 기도 중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체험’입니다. 여러 기도의 단계들이 혼합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여정을 걷게 되면, 점차로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되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바쁜 공생애 속에서도 이른 새벽, 고요한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한 관상기도를 통해 투명해진 눈으로, 들에 핀 꽃 한 송이가 탐욕과 권력으로 얼룩진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음을 보았기에, 그들을 치유하고, 깨우치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풍성하고 본질적인 관상기도의 길을 어떻게 시작하고 지속적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요? 


홀로 그리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상으로 들어가는 길은 각 사람마다 고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신학적 지식으로, 어떤 사람은 찬양으로, 다른 사람은 구제와 봉사 혹은 사회운동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삶과 신앙의 여정을 잘 살펴서, 고유한 기도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 경우 경험과 학식이 많은 영성지도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기도의 여정은 신앙공동체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여정입니다. 함께 드리는 고요함의 기도는 더욱 풍성하고 강력해서, 때때로 개인이 겪는 혼란과 무력함의 사막을 견디고 건널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저도 때때로 기도의 리듬을 잃고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될 때, 다양한 기도모임이나 개인 또는 그룹 영적 지도 모임을 통해서 새로운 영적 활력을 얻고, 기도의 리듬을 회복한 경우가 많습니다. 함께 드리는 공동예배를 통해서 개인의 관상기도는 더욱 풍성해지고, 개인의 기도를 통해 공동체의 예배는 더욱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주일 성수는 율법적인 의무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와 개인과 공동체의 기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어지는 순례의 여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에서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2절에서 개인적 차원의 깊은 관상적 체험이 공동체의 영적 여정과 결합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관상기도는 관상적 삶으로, 관상적 태도로 더욱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도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집중적인 사랑의 관계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 바쁘고 성취 지향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세상의 풍조 속에서, 무위적이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흐름에 내어 맡기는 수동적인 삶을 위해서는 특별하고 집중적인 영성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일상이, 활동이 관상기도가 되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순간, 모든 활동에 하나님께 활짝 열려있는 의식의 상태,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하기 위해 투명하게 깨어있는 삶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 의식의 상태가 있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그 것 자체가 훌륭한 관상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걷다가 잠시 신호등에 멈추었을 때, 하늘을 바라보고,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피조물의 아름다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치고 고단한 퇴근길에 복잡한 지하철 환승 통로를 걸으며, 고요하게 한 걸음, 옮기며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또 다른 걸음에 “저에게, 여기 걷고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며 예수 기도를 조용히 드릴 수 있습니다. 


새길교회는 평신도 공동체로, 은총과 자유의 교회로, 열려있으며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로의 꿈을 간직하고 30여년의 여정을 걸어 왔습니다. 그 길에 수많은 분들의 기도와 수고가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 수고와 고뇌를 주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앞으로 그 길을 계속 가시면서, 언제나 넉넉하게 은총과 평화로 품어주시는 그 분의 사랑 안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기를 바랍니다. 관상기도의 길을 통해서 더욱 겸손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따라 주님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새길 공동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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