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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용덕



도반(道伴) - 순례자(巡禮者)

(사도행전 4:34-35, 5:1-11)



2019721

주일예배

김용덕 형제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 사도행전 4:34-35 -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 그 값의 얼마를 따로 떼어놓았는데, 그의 아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떼어놓고 난 나머지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 때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나니아는 들으시오.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사탄에게 홀려서, 그대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 아니었소? 또 팔린 뒤에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할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숨졌다. 이 소문을 듣는 사람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젊은이들이 일어나, 그 시체를 싸서 메고 나가서, 장사를 지냈다. 세 시간쯤 지나서, 아나니아의 아내가 그 동안에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물었다. "그대들이 판 땅값이 이것뿐이오? 어디 말해 보시오."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 그것뿐입니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왜 그대들 내외는 서로 공모해서 주님의 영을 시험하려고 하였소? 보시오. 그대의 남편을 묻은 사람들의 발이 막 문에 다다랐으니, 그들이 또 그대를 메고 나갈 것이오." 그러자 그 여자는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져서 숨졌다. 젊은이들이 들어와서, 그 여자가 죽은 것을 보고서,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묻었다.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 사도행전 5:1-11 -



새길 교우들은 흔히 서로를 도반으로 생각합니다. 求道(구도)의 길을 같이 걸어가는 벗들이란 뜻이겠지요. 저는 이 도반을 순례자로도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서 순례라고 하는 것은 天路歷程(천로역정), John BunyanThe Pilgrim’s Progress의 번역에 나오는, 크리스천이 무거운 짐 곧 죄라는 짐을 지고, 천국을 향해가는 길에서 만나는 유혹과 허영과 고통의 마을을 지나 하늘나라에 이르는 그 순례의 뜻으로 써 본 것입니다. 어릴 때 저의 어머니께서 성경책과 함께 둔 그 책을 틈틈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 때 깊은 내용을 알고 읽지는 못했지만 삽화가 많아서 읽기에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오늘 읽은 성경의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 사도(유다 대신으로 맛디아를 새로 뽑음)들은 예수님이 떠난 후 그들을 따르는 초기 신앙공동체의 사람들과 순수한 형태의 무소유 생활을 시작합니다. 모든 재산을 사도들 앞에 가져와 분배를 하니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당연하였겠지요.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아 벌을 받아 죽음을 맞습니다. 참고로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사도행전에 세 번 등장합니다만 각각 다른 사람입니다. 여기 벌 받은 아나니아, 사울을 눈 뜨게 하고 세례를 주는 아나니아, 그리고 사울 즉 바울을 심판할 때의 대제사장인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밭을 판 값을 다른 공동체원들처럼 다 바치지 않고, 몰래 숨겨두었다가 베드로의 심문에 걸려 벌을 받은 것입니다. 차명계좌가 발각 난 것이지요. 일부만 바쳤다는 것만으로도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달랐고, 또 베드로의 질책처럼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죽을 만큼 큰 죄를 진 것인지는 고대인의 관습으로도 지나치긴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논리는 분명합니다. 재산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재산을 바친다고 하는, 개인적인 소유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잘못, 또는 문자대로 받아들여, 교회에서 순진한 신도들로 하여금 재산을 모두 바쳐야 구원 받는다고 이끄는 데 자주 이용되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으로 거듭난 후 그 때까지의 모든 재산을 기쁘게 바치는 것이야 이 본래의 뜻에 따르는 것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진정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과, 부흥사와 같은 사람들의 말에 취하여 또는 베드로 같은 권위에 눌려 두려워서모든 재산을 바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에서 우러나는 자발적 헌신이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절망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결국 삶을 마감하겠다고 생각한 그 청년은 한강 다리로 가기 위해 어느 지하철 역사로 들어가 죽을 결심을 확인 하고 있었는데, 노숙자 한 사람이 찾아와 구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바지주머니에,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마실 술을 사기 위해 남겨둔 돈이 얼마 있었습니다만 그 노숙자에게 줄 다른 여유는 없었습니다. 노숙자는 여기 저기 구걸을 해봤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기에서 외국인 노동자인 듯한 사람이 그 노숙자에게 다가와 천원을 건네주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사라졌습니다. 자살하려던 청년은 뜨거운 그 무엇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부끄러움에 떨었습니다. 술 마시고 죽으려던 주머니의 돈을 꺼내어 모두 노숙자에게 주고는 다시 삶의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청년은 그 사마리아인의 도움으로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새롭게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도반이라고 하는 우리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도반은 같이 즐거운 여행만을 하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짧은 여행은 즐겁지만, 그것이 곧 그 지역을 이해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동료교수 중에 일본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극단적인 반일학자가 있었는데 무슨 기회에 일본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주일 간 일본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저한테 하는 말이 일본을 우리가 잘 못 본 것 같아. 배울 것이 많은 나라야하면서, 자기가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전부터 균형 있게 일본을 봐야한다고 말할 때는 저를 그렇게 비판하던 동료였기에, 제가 또 경고를 했습니다. 여행을 한 주일 정도 하면 그곳의 좋은 면만 보게 되고 일 년을 살아보면 제대로 알게 되니까 섣부른 판단을 하기에 딱 좋을 만큼 여행을 하고 온 것 같다고.


지금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어서 많이들 반일 또는 배일 쪽으로 쏠리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이나 동조하는 언론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얘기는 오랜 시간을 두고 해야 할 것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를 깊이 이해하고 같이 고민하는 일본 친구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을 자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짧은 여행의 피상성과 헛됨을 넘어 깊은 내면까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관광객처럼 살고 판단할 때가 있지는 않나요?


좋고 재미있고 편한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스스로 능력이 있어 돈 벌어서, 자기 힘으로 즐기는 것이 무엇이 잘 못된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때때로라도 하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보다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고 우리는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관리하며 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다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로 돌아가 보지요. 이 얘기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초기공동체의 극단적인 상징설화로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보다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재산을 남기고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것을 돌려드린다는 신앙을 갖게 된다면 초기공동체의 설화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모두 바쳐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것을 남김없이 돌려드리고 갈 수 있다는 신앙적 깨달음을 같이 하자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공동체원들이 성령을 경험한 뒤에 바치고 나누는 헌금처럼, 이 깨달음이 헌신에 앞서야 한다고 하겠습니다만, 이를 극단적인 陽明學者(양명학자)들은 행동하는 순간,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순간 깨달음이 온다(知行合一지행합일)고도 합니다.


도반이라는 우리는 짐을 진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죄의 짐을 지고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도 첫 단계인 순례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분명하겠지요. 그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의 유혹과 그 뒤에 다가오는 어려움의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받은 것, 즉 세상의 모든 것 다시 말해 창조질서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 분이 맡긴 것을 잘 관리하는 것, 또한 순례자의 의무이기 때문이지요. 창조자이고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에게 다 돌려드리려는 사람들의 삶은 창조질서를 훼손하지 말아야 하는 기본적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의 편익과 안일함을 위하여 얼마나 자연을 훼손하고 낭비하고 있습니까? 절제와 절약은 미덕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자연을 키워내기도 합니다.

 

예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한 아낙네가 물지게를 지고 오가며 물을 길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양쪽 어깨에 하나씩 지고 다녔는데, 한쪽 항아리는 살짝 금이 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아낙네는 버리기가 아까워 그대로 지고 다녔습니다만, 항상 물을 받아 오고 보면 금간 항아리의 물이 상당히 새나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주인에게 미안하여 새 항아리로 왜 바꾸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그 아낙네가 저 길을 보아라고 답을 합니다. 물이 조금씩 샌 항아리가 지나온 길에는 풀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습니다. 비록 금이 갔지만 그 나름으로 보람을 찾은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하나가 완벽할 수는 있지만 자연의 조화는 서로서로 어우러져야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오늘 날 원자력 발전을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만, 저는 가장 확실한 발전시설은 절전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 원자력 발전을 줄여가고 있는 나라들을 가보신 분들 중에는, 여름은 한국보다 덥게 겨울은 우리보다 훨씬 춥게 지내고 있는 것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저는 그 곳에서 한여름에 에어컨 없는 벤즈를 탄 적도 있습니다. ,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유럽의 에어컨 설치율이 5% 정도라고 합니다. 호텔에만 머물다 오는 관광객들은 모르고 지나치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상한 사람들만 골라 만나고 다닌다고 하시겠지만 실제로 에어컨이 있어도 문 열고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가장 자연환경에 근접하게 사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당장의 불편을 견디지 못해 우리는 자연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식의 절제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돈 들여 많이 먹고는 영양과다로 살이 찌고, 때로는 병이 생겨 병원을 찾습니다. 또 찐 살을 빼느라고 돈 내고 운동하러 가지요. 먹다 남은 음식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의 처리비용 또한 막대합니다. 小食(소식), 적게 먹는 것 이상 좋은 건강법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낭비하는 돈들(많이 먹는데 쓰는 돈, 살 빼기 위해 쓰는 돈, 영양과다로 병원에 가는 돈, 남은 음식 버리는데 드는 돈)을 우리가 모두 아낀다면 북한 동포들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서로 도움이 되는 절제의 의무를 우리는 이제 힘들어 할 만큼 자연보호의 길, 창조질서 보존의 길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나 하고 반성해 봅니다. 짜증나는 무더위에 나이든 사람이 잔소리도 많고 걱정도 많구나 하시겠습니다만 순례자의 길은 이러한 것 까지 포함한 불편하고 어려운 길이 아닌가 싶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보관하고 관리하여 돌려드려야 한다는 신앙적 깨달음과 헌신의 각오를 하게 됨으로서 순례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도반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무소유를 부러워하면서도 몸은 더 많은 소유를 따라가는 우리들입니다. 간간이 생각만 할 뿐 실천에는 게으른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옵기 빕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소유주이신 것을 깨닫고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옵소서. 순례자의 길로 들어선 저희들의 발걸음이 빗나가지 않도록 경고하여 주시기 간절히 소원합니다인간의 탐욕이 스스로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깨닫는 깨달음을 얻도록 하여 주시기 비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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