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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중요한 것은 작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3:4, 요한복음 1:46)

 

2019년 1월 6일

새해감사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 야고보서 3:4 -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 요한복음 1:46 -




새로운 한 해, 새로운 하루


묵은해와 새해의 교차는 징검돌 건너듯 초침 하나 건너는 순간의 경험이지만, 마음과 삶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삶을 깊고 풍요롭게 할 기회가 계속해서 매해 주어진다는 것, 참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그런 감사함은 새해에만 느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가 언제나 새날이니, 매일매일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는 작은 날이 아니라 삶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만을, 아니 지금 이 순간만을 새롭게,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공동체로서 새길도 한 해 한 해,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갑니다. 제게 ‘새길’이라는 이름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처럼 느껴집니다. 길 위에서 늘 움직이며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 새길의 존재방식이니까요. 명사적 교리와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새길의 동사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자유롭게 새 길을 가는 것은 즐겁지만, 그 무엇에도 안주하지 않으니 불안하기도 합니다. ‘길 위의 자유’가 ‘길 위의 불안’을 수반하는 거죠. 하지만, 자유와 불안을 함께하며 여행하는 친구가 있어 마음이 기쁘고 든든합니다. 새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여행하는 친구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또 한 해의 새로운 여행을 떠나며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작은 것’이라는 진실입니다.


새길은 특정 지역에 뿌리내리고 자라는 정주 공동체가 아니라 특정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 공동체입니다. 종교개혁, 사회개혁, 평신도 운동, 대안공동체, 하느님 나라 실현 등 신앙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도상의 공동체, 길 위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주 공동체가 갖고 있는 안정, 편안함, 익숙함을 자발적으로 포기합니다. 정주 공동체든, 여행 공동체든, 뭔가 큰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작은 것을 말 그대로 작게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새길은 다릅니다. 서른 두해 가까이 길 위에서 살면서 우리가 배워온 것은 작은 것이 더 중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것이 왜 중요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여행자들은 작은 일로 상처받고 작은 일로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공동체의 작은 것이 공동체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야고보서와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공동체의 작은 키 : 따뜻한 말


여행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유롭고 즐거운 일이지만 동시에 갈등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격과 생각과 태도의 차이로 인한 갈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동안 크고 작은 갈등을 여러 번, 아니 무수히 겪어 왔습니다. 갈등으로 인한 상처도 보이게, 보이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제도교회의 목회자처럼 갈등을 조정해주고 상처를 돌봐주는 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더 아프고 힘듭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상처는 항상은 아니지만 대부분 작은 것에서 비롯합니다. 무심코 던지는 까칠한 말, 차가운 눈빛, 밀어내는 몸짓, 그런 작은 것들로 마음이 크게 상하지요. 물론 관점의 차이로 인한 큰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마음의 상처는 작은 것들, 즉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말과 태도 때문에 생겨납니다. 갈등은 관점 때문에 일어나지만 상처는 관계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관계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말입니다. 우리는 말로 상처 주고 말로 상처 받습니다. 교회의 이상으로 여기는 초대교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중상과 모략 등 말로 인한 교인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라디아서 5:15)라고 했겠습니까? 복음서와 히브리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의 위험성과 파괴성을 경계하고 경고하는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 점에서는 다른 종교도 비슷합니다. 붓다는 구원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 중 하나로 “바르게 말하기”(正語)를 가르쳤습니다. 그만큼 그릇된 말로 인한 미움과 갈등과 상처가 많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정말, 언어로 인한 상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성서본문 중 하나인 야고보의 가르침도 말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야고보서 3장은 성서 중 말의 문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며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런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의 ‘작은 키’도 말과 관련된 것입니다. 야고보는 작은 키와 같은 혀로 바르게 말할 때, 거친 세파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제 방향을 찾아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작은 키가 무엇이고, 또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도착지가 달라집니다. 그 키가 권력의 언어라면 우리는 종교권력이 될 것입니다. 그 키가 ‘세상의’ 구원이 아닌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언어라면 우리는 우리만의 소승적, 자폐적 섬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 키가 제도적 언어라면 우리는 제도종교, 제도교회로 돌아갈 것입니다. 새길의 작은 키는 무엇이고 어디를 향할까요? 저는 그것이 따뜻한 사랑의 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사랑의 세계에 이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크게 상처를 주거나 받는 일이 주로 말 때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절망보다 희망을 더 갖게 합니다. 마음챙겨 바른 언어를 사용하면 불필요한 갈등과 상처를 줄일 수 있고, 더 나아가 치유까지 경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서말씀 중 하나는 잠언 15장 4절입니다.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참 지혜로운 말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생명나무와 같은 따뜻한 말은 공감의 말, 사랑의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따뜻한 말은 단지 예의바르고 예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공감과 사랑의 말은 격렬한 비판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도 격한 말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근본 동기는 공감과 사랑이었습니다. 마가복음서 8장 29절에서 33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후,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항의합니다. 아마도, “예수여, 왜 자꾸 죽는다는 겁니까? 살아서 함께 하느님 나라를 만듭시다!” 라는 애타는 마음의 토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항의 뒤에 예수의 유명한 ‘폭언’,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가 나옵니다. 아마도 예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친구여,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지 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거요?” 였을 것입니다. 


예수의 언어는 따뜻함을 넘어 뜨거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격렬한,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하기 전에 신중히 식별해야 합니다. 이 말의 동기와 목적은 사랑인가?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침묵해야 합니다. 사막의 수행자 아가톤은 침묵을 배우기까지 3년 동안 입 안에 자갈을 물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고행은 ‘침묵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말을 배우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가톤은 ‘바르게 말하기’를 배울 때까지 침묵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수행 후에 아가톤은 깊은 공감과 사랑의 말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했습니다. 아가톤은 “나는 남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을 가진 채 잠든 적이 없다. 또한, 할 수 있는 한, 남이 내게 불평하는 마음을 갖게끔 놔둔 채로 잠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가톤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작은 것


얼마 전 외부 강의 때 만난 어떤 분이 제게 새길은 어떤 교회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답변을 드렸는데, 알고 보니 이미 홈페이지를 방문해 새길에 대한 ‘정보’를 많이 파악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알고 싶으셨던 것은 새길에 대한 ‘정보’가 아닌 새길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은 말로만은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명드릴 말이 궁해진 저는, “그럼, 한 번 와 보세요.”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새길을 아는 가장 좋은 법은 새길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새길의 정신이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는 새길에 직접 와서 보고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이죠.


친교부 자매형제님들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새길을 방문하신 분들이 최근 몇 년 중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무너져가는 교회의 모습에 실망해 새로운 신앙과 삶의 길을 찾는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새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었을까요? 


새길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새길을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더 세련되게 업그레이드하고, 방문하신 분들이나 새교우 분들에게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길의 정신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우리의 말하는 법, 인사하는 법, 식사하는 법, 친교하는 법 등, 일상의 작은 언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인 빌립에게는 나다나엘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교회 전통은 나다나엘을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바돌로매와 동일시합니다. 아무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는 예언자들이 기다린 메시아라고 이야기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나중에 나다나엘을 만난 예수께서 첫눈에 그를 보시고, “보십시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는 지혜롭고 신실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 나다나엘도 말로만은 예수와 예수의 공동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말로 예수 공동체의 정신을 온전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여기서 빌립이 말한 “와서 보시오.”는 아마도 이런 말이었을 것입니다. “와서 예수와 함께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 먹고 마시는 것, 걷는 것, 머무는 것, 앉는 것, 눕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가 누구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겁니다.”


빌립의 이 말에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습니다. 예수가 당신의 공동체와 함께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일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은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천상적 신비가 아니라 지상적 현실이었을 겁니다. 나다나엘은 예수가 사는 모습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고,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제자임을 알았습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밥상을 나누고, 사랑으로 움직이고, 사랑으로 저항했습니다. 사랑이 깃든 작은 말, 작은 몸짓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와서 보시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중에 틱낫한 스님이 겟세마니 수도원의 토머스 머튼을 방문했습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두 위대한 수행자는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깊은 대화를 나눴는데, 머튼은 많은 말보다도 틱낫한이 문을 열고 닫는 것을 보고 그가 진정한 수행자임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틱낫한은 단순히 문을 열고 닫을 때도 불교적 마음챙김과 평화로움을 온전히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가 몸으로 보여준 작은 행위에 그의 지혜와 수행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기도요, 모든 것이 수행입니다. 작은 것이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길을 찾는 이들은 새길의 ‘이상’을 보고 찾아오겠지만,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 동행하게 하는 것은 새길의 ‘일상’입니다. 이는 우리의 한 해가 아닌 주일 하루, 그리고 매 순간을 온전히 ‘새길답게’ 살아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새길의 신앙과 신학, 새길의 정신은 창립취지문이나 신앙고백에 잘 담겨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몸짓 하나가 중요합니다. 그 모두는 새길 정신의 표현입니다. 새길을 찾는 분들은 우리의 작은 언행 하나하나를 보고 새길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은 언행을 관통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무조건적 환대’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영접하듯, 하나님을 영접하듯, 나그네와 순례자를 환대하는 것입니다. 새길을 찾는 이들에게, 그리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여행하고 있는 서로를 마음다해 환대하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부드럽게 손을 내밀 때,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을 때, 따뜻한 말을 나눌 때, 함께 먹고 마실 때,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한 자매형제입니다.” 라는 예수의 마음을 온전히 나누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환대의 마음을 온기로 (따뜻한 체온으로) 느끼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에서 모든 것을, 작은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빌립처럼 자신 있게 “와서 보시오.” “와서, 새길을 보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새해에 우리가 나누고 싶은 작은 소망이며 다짐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냉대와 적대의 세상에서 우리의 작은 말과 작은 몸짓과 작은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따뜻함을, 하나님 나라의 환대를 보여주게 하소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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