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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차옥숭

 

 

“가는 해와 오는 해: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전도서 3:1-13)

 

2018년 12월 30일

송년감사예배

차옥숭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 전도서 3:1-13 -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네요. 한 해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하루하루가, 한 주가, 한 달이 왜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는지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설교준비를 하면서 저는 장사익의 ‘꿈 속에 사네’라는 제목의 노랫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장사익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특히 그의 노래 중에 ‘찔레꽃’을 좋아합니다. ‘꿈 속에 사네’라는 노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묵은 해니 새 해니 구별할 것 없네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 하지만

 여보게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변해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사실 이 노래 말은 하루의 반은 일을 하고 나머지 반은 선을 행했다고 전해지는 조선 말기의 스님, 학명(鶴鳴)선사(1867~1929)의 선시(禪詩)입니다. 


 妄道始終分兩頭(망도시종분양두)  묵은 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冬經春到似年流(동경춘도사년류)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試看長天何二相(시간장천하이상)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浮生自作夢中遊(부생자작몽중유)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우리는 계기의 변화에 따라 12월에는 불가피하게 한 해의 끝과 새로운 해의 시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디언들은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외적인 계절의 변화와 흐름에 나를 싣지 않고 마음의 심연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의 중요함을 학명선사의 선시에서 인디언들의 지혜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흔히 새로운 한 해는 1월 1일에 시작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새해가 시작하는 날은 정하기 나름이어서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슬람력을 보면 그들은 순 태음력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음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태양력에서 부족한 날을 채우기 위해 윤달을 사용지요. 그러나 그들은 순수 태음력을 사용해 일 년이 360.1일로 우리와 차이가 납니다. 이슬람전공을 한 선생님 한 분이 그들이 순수 태음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환경에서 기인 한 것이라고 들려주었습니다. 그분은 그곳 사막 여행을 하면서 그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날씨가 더워서 낮에 일하기가 힘들어 밤에 일하는 일이 많았고 특히 대상들이 사막을 건널 때는 낮에는 쉬고 밤에 움직였다고 합니다. 또 낮에는 더워 사막을 건널 수 없고 길을 잃기 쉬운데 밤에는 북극성 등 별의 위치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움을 받기도 하고, 달의 차고 기움에 따라 날의 변화를 알 수 있어 순 태음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요. 전해들은 이야기로 사막의 밤은 쏟아질 듯 헤아릴 수 없는 별빛으로 어둡지 않다고 합니다. 


 서양의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정부는 한 해의 첫날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으로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달력에 따라 정월이 달라졌습니다. 주력(周曆), 은력(殷曆), 하력(夏曆)은 각각 음력 11월(동지 정월), 12월(소한 정월), 1월(입춘 정월)을 정월로 설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한제국 시절 건양(建陽) 연호가 선포되면서 1895년(고종 32년) 음력 11월 17일이 건양 원년(1896) 1월 1일이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민간의 세시 관행을 보면 어느 한 날을 기점으로 해가 바뀐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음력 1월 1일이 해가 바뀌는 시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동지 때부터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는 관념이 함께 나타납니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음의 기운이 가득 찬 가운데 양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는 시점이 동지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동지는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여겨졌습니다. 동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1월 1일에 앞서 동지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지부터 새로운 한 해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여기면서도 12월 그믐날에는 지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여러 세시행위가 이뤄집니다. 그렇다고 1월 1일과 함께 새로운 한 해가 완전히 도래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해의 도래는 정월 대보름이 되어서야 완성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전 해에 받지 못한 빚을 정월 대보름까지는 기다린다든지 정초 세배는 대보름까지 다닌다든지 하는 모습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날과 정월 대보름을 비교하면, 설날은 새로운 해가 찾아왔지만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워하고 근신하는 시간의 모습을 보입니다. 설날은 다른 말로 ‘신일(愼日)’이라고도 하며, 외출을 삼가고 가족 단위의 활동이 주를 이룹니다. 반면 대보름에는 행동의 제약이 사라지고, 달맞이와 달집태우기, 줄다리기, 지신밟기. 동제 등 공동체 단위의 다양한 놀이와 제의가 행해지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월 대보름은 설날과는 달리 새로운 한 해의 완전한 도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축제적 시간의 성격을 갖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사회에서는 설날을 기점으로 지난해가 종결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고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동지에서 비롯되어 설을 거쳐 대보름에 와서야 비로소 완결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동안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기는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지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동지, 설날, 대보름의 다양한 세시행사는 새로운 시간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간 주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입춘’이 ‘入春’이 아니라 ‘立春’인 것처럼, 새로운 시간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자연의 리듬에 따라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촉구하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에 의해 확립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새 해는 대림시기가 시작되는 12월 2일 시작됩니다. 정교회는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율리우스 로마 황제가 태음력이 아닌 새로운 태양력을 만들어 1년 길이를 365.25일로 개정한 달력입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고쳐 1582년에 시행한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을 가톨릭과 개신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으며 정교회와는 보통 2주간의 차이가 납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하나는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그저 흐르는 시간을 말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늙어갑니다. 인간의 유한성이 드라마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다릅니다. 카이로스는 우리의 노력을 창조해 나가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의미 있는 시간이고, 가치 있는 시간이고 보람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 전도서에서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 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전도서 3장 1-9절)


하느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느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인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3장 10-13절)


 1절에서 9절까지를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어나고 죽고, 파종하고 수확하고, 세우고 헐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춤추고, 지켜내고 잃어버리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전쟁과 평화 등 일상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겪어왔고 앞으로도 이어나가야 하는 사건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라고 해서 언뜻 보면 허무하고 숙명론적인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0절에서 13절의 내용에서 전도서 기자는 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삶의 과정들 속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가는 모든 사건이 역동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는 것. 바로 일 자체가 하느님의 역사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의도를 깨달아 가는 것. 무엇을 이루어내려고 하셨고,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셨는가를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서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숙명론적인 때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이어나가야 하는 삶의 일상 속에서도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역동적으로 새로움을 창조해나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이, 공동체가 매번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 붙여 전도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마음, 더욱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하는 것에 기쁨이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한 해를 달려왔던 그 수고로움이, 앞으로 새해에 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해야 되는 수고로움이 다 하느님의 감사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민정애 자매님이 코스모스 카톡방에 우분투란 말을 아시나요? 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프리카 부족을 연구하던 어느 인류학자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들 앞에 달콤하고 맛있는 초콜릿과 과자, 사탕 등이 가득 담긴 커다란 선물바구니를 펼쳐 놓고는, 아이들에게 “이곳에서 달려가 저 앞에 있는 야자수 나무를 돌아 1등으로 도착한 아이에게 이 초콜릿과 과자 선물바구니를 상으로 다 주겠다.” 며 소위 ‘선착순 달리기 게임’을 제안하고는 ‘출발!’하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예상과는 달리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께 손을 잡고 옆으로 나란히 서서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골인지점에도 모두 함께 손잡고 똑같이 도착한 아이들은 공동 1등 수상으로 받은 그 초콜릿 과자세트를 이내 둘러앉아 모든 친구들과 함께 웃으면서 맛있게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예상 밖의 상황에 그 학자가 아이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너희들 중에 누군가 일등을 하면 이 맛있는 선물세트를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을 텐데 왜 다 함께 뛰어가서 같이 들어와 함께 나누어 먹고 있는 거니?" 그러자 아이들이 합창하듯 단숨에 한목소리로 외쳤답니다.


 UBUNTU(우분투)!!!


 그리고는 한 아이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일등을 해 혼자 맛있는 선물세트를 다 차지하면, 다른 친구들은 모두 다 슬퍼 할 텐데 어떻게 나 혼자 행복할 수가 있겠어요!?" 라며 오히려 반문했다고 합니다. 친구가 슬픈데 과연 내가 행복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UBUNTU(우분트)!란 “I am Because You are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와 “I am Because We are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을 포함된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 이라고 합니다. ‘네가 있기에 우리가 있다.’ ‘네가 슬픈데 어찌 내가 행복할 수 있냐’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분투UBUNTU(함께 행복)!!”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강조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652년부터 1990년까지의 백인의 이주와 정착 그리고 식민지배와 더불어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실시되면서 지배와 착취에 필요한 각종 장치, 즉 법과 제도, 이데올로기 등이 국가권력의 힘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천부적인 인권보다 인종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이었습니다. 남아공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1994년 독특한 평화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우분투’운동입니다. ‘우분투’는 ‘한 개인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 인간이 된다.’는 의미를 뜻하기도 합니다. 남아공에서 ‘우분트’운동은 ‘깊게 양분된’ 과거로부터 벗어나 인권과 민주주의 및 화해 위에 건설된 새로운 미래로 국가를 이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과정의 ‘일부’로 훌륭하게 작동했다고 합니다.


 우분트! 사랑으로 오신 아기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에 움튼 평화의 기운이 꺼지지 않고 남북이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찾아 온 난민들도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혹독한 추위에 잠 못 이루는 집 없는 분들이 문제가 해결되어 따듯한 잠자리에서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문제가 해결되어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병들어 고생하시는 우리 자매님들 건강하게 새해에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한해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오는 해에도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행복하면 하느님께서도 행복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사랑의 하느님! 어느새 한해가 가고 새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을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의 그 마음을 잊지 않고 한 해를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살아야할지 끊임없이 묵상하게 하소서! 무엇을 버리며 살고 있는지를 깊이 반성하게 하시고, 영원한 삶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매일의 일상이 사랑의 일상이며 감사의 일상임을 깨닫게 하소서!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주님께 드려야 할 봉헌의 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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