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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사랑, 그리고 마무-의 지혜"

(전도서 3:1-2, 11-12)


 

2018 11 18

주일예배

최만자 자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 전도서 3:1-2, 11-12 -


 

깊어가는 가을은 오고 있는 겨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들었던 산야는 이제 온통 달강거리며 어디론가 굴러가는 낙엽으로 뒤덮였습니다. 달랑 두 장 남은 올해의 달력, 그마저 한 장은 열여덟 날들을 지났습니다. 이때쯤엔 누구나 지난 한 해의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한 해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게 되지요. 특히 요즘은 고령사회라 그런지 여기저기 인생의 마무리에 대해, 특히 늙은이들의 생활 모습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 납니다. 몇 해 전 떠돌던 17세기 어느 수녀의 기도문이 요즈음 새삼스레 많은 매체들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수녀님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이렇게 서두를 내는 기도는 꽤 길게 이어집니다.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제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 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이렇게 끝납니다.


늙어가지만 아름다움을 잃지 않도록 길잡이를 해주는 이 기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듯합니다. 이 기도문 가운데 저를 꽉 붙드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나이 들면 너 나 없이 요점을 파악 못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댄다는 걸 이 수녀님도 너무 잘 아셨던 것 같아요. 오늘도 제가 요점으로 날아가도록 날개를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말씀증거를 해 보겠습니다.


저도 이젠 충분히 인생 마무리 할 나이에 이른 듯합니다. 그래서 나이 듦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귀담아 듣게 됩니다. 다행히 요즘 주변에 이런 말이나 글들이 넘쳐나고 있어 많은 감동과 도움을 받습니다.

 

오늘 말씀증거의 제목을 헬렌 니어링의 저서 아름다운 삶, 그리고 마무리에서 빌려왔습니다. 헬렌 니어링은 100세에 세상을 떠난 남편 스콧 니어링과 53년 동안 함께 살면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회상하면서 남편이 사회주의적 철학과 자연을 따라 살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철저하게 살았고 또한 그 신념에 따라 자기 생을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를 차분하고 깊이 있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증거 제목은 이 책으로부터 빌려 왔지만 우리 생의 마무리에 대한 지혜의 이야기는 성서로부터 찾아보려 합니다. 성서는 우리들의 종교적 고향이며 삶의 지혜를 주는 많은 모델들이 있고 또한 지금 내 삶의 의미를 찾게 도와주는 전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히 성서에 나오는 네 사람 구약의 야곱과 모세 그리고 신약성서의 예수와 도르가의 이야기입니다.

 

맨 먼저 창세기 26장 이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야곱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더구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흥미롭기조차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 마무리는 한 마디로 사생결단하고 허물 많은 자신을 갱신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격심한 몸부림 입니다. 해서 야곱의 인생 마무리는 마무리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열고 있습니다.


야곱은 한마디로 속임수의 달인입니다.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자기의 것을 성취하기 위해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야비한 인간으로 등장합니다. 어머니 뱃속부터 쌍둥이 에서와 싸움을 하면서 먼저 세상에 나오려고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고, 형의 약점을 이용해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 직분을 탈취하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 믿음의 조상으로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선조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행위를 가부장제 사회에서 생득적으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누리는 장자에 대한 도전이고 투쟁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만 어쨌건 야곱은 야비한 인물입니다. 그는 분노한 형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도망하여 방랑자의 길을 떠납니다. 외삼촌의 집에서 기거하는데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고 외삼촌이 야곱을 속여 그는 20년 동안 외삼촌 집 머슴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또 술수를 써 많은 가축들을 자신의 소유로 갖게 되고 가족을 이끌고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을 죽이려 분노하고 있는 형님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형에게 줄 많은 선물을 준비하고 얍복강에 이르러 선물과 가솔들과 가축들을 모두 먼저 강을 건너보내고 혈혈단신 강가에 섰습니다. 성서는 그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결국 천사를 이기고 야곱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게 되었고 그의 환도뼈는 부러졌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님이여 다스리소서라는 의미도 있는데 신학자 폰 라드는 후자의 의미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야곱이 새 이름을 받았다는 말에서 볼 때 얍복강가의 그의 씨름은 단순히 형의 분노를 거두게 해달라는 간구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거짓과 허물로 가득 찬 이 야비한 자신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지, 이것을 위해 절대적 도움이 필요하다고 간청하였던 것이 아니었나 짐작됩니다. 속임수의 달인으로, 도피자로 노숙자로, 속이고 속임 당한 머슴으로 살아온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뼈저린 후회와 반성,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이 그러한 존재로 살 수 없다는 절박감, 이제 새로운 존재로 살고 싶다는 간절함 이러한 번뇌들을 안고 사생결단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 않았나 싶습니다. 몸이 부서질 때까지 부르짖음을 통해 그는 결국 새 이름을 받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하나님이여 다스리소서라는 기도로 엎드렸다고 봅니다. 그 밤이 지나고 야곱이 절뚝거리며 걸을 때 해가 떠올랐고,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고 하며 그 곳 지명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불렀고 그 곳은 성소가 됩니다. 사실 야곱의 행적을 보면 그는 내면 깊이 자기 갱신을 소망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부른 찬송 야곱의 돌 배게 잠의 꿈, 하늘에 이른 사다리와 천사들이 왕래한 모습을 본 것도 그의 유랑생활에서도 간절했던 자기 갱신의 소망의 흔적이 아닐까요? 야곱은 그 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명명했지요.


이제 얍복강을 건너 형을 만나게 되는 야곱에게 기막힌 전환이 생깁니다. 야곱이 형을 만나 형의 얼굴을 뵈니 하나님의 얼굴을 뵌 듯 하다고 합니다. 사생결단하고 철저한 자기비판과 새로운 자기정립의 과정을 경험한 후 그토록 적대관계였고 증오하고 경쟁하고 원수 같았던 존재가 하나님의 얼굴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브니엘의 경험 이후로 야곱이 야비한 행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야곱이 많이 늙어 요셉이 있던 이집트에 가서 바로 왕 앞에서 자기 인생 고백을 할 때 지나온 날들이 수고로움이었다면서 겸손히 자기 생을 자평합니다. 야곱의 인생 마무리는 철저한 자기 갱신과 새로운 인간상으로 변화하여 새로운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시작은 브니엘 곧 원수도 하나님의 얼굴로 볼 수 있는 성숙한 새 인간성을 갖게 된 변화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자기 변화를 갖게 하지 못하는 종교와 신앙은 종교도 신앙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어쩌면 야곱은 허물 많고 약한 우리 모두를 투영하고 있어도 보입니다. 우리 자신을 야곱의 브니엘 경험에 깊숙이 잇대어 스스로를 성찰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오래전부터 한국교회는 남북 관계를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많이 비견했습니다. 남북 관계를 새로이 하는 때 성서를 읽는 우리들에게 야곱의 브니엘 경험은 더욱 중요하게 들려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출애굽의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 이제 가나안 땅이 건너 보이는 요단 건너편에 이르렀고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신명기 3:25 “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소서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이 간구를 거절합니다.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명기 3:27)


참 이해하기 어려운 모세의 인생 마무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그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민족을 거기까지 이끌어 온 그의 수고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지시는 냉정하고 인정 하나 없습니다. 고난 투성이 던 광야 생활이 끝나 고된 나그네 삶을 청산하고 안정과 편안함을 누리게 될 이 땅의 주인으로 자리 잡게 될 생활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그 작은 요단강을 왜 못 건너게 하시는지요.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건설의 꿈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를 거절합니다. 결국 모세는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과 규례들을 자세히 전합니다. 그 설교 내용이 신명기이지요. 설교를 마친 모세는 느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한 번 더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신명기 32: 49-50절에 너는 여리고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람 산에 올라가 느보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스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라고 하십니다. 비록 나이는 120세 일지라도 모세가 아직 눈도 밝고 총명하다고 성서가 기록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모세는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지만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세 인생의 마무리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리가 일생에서 누리고 수고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습의 모델이라 하겠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억울할 까 생각되지만 성서의 진리는 생애동안의 내가 이룬 모든 수고의 열매를 내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철저한 내려놓음의 마무리를 요구합니다. 내가 수고한 모든 노력들 업적들은 자연스레 다음 인생들에게 이어져 가는 새로운 지도력에게로 계승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 해 온 백성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는 광야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혹자는 모세의 이 마무리는 모세의 신격화를 막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쌓아온 공적들의 열매를 내가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가 가져 이어가도록 내 모든 공적들을 내려놓는 생의 마무리,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요구를 순순히 따르는 모세의 진정한 지도력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요즘 한국교회 주된 문제인 교회세습의 문제들 앞에서 모세의 마지막 모습은 현 세태를 다시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성서의 가르침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로 인하여 여기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동참하고자 애쓰며 그를 따라 살고자 다짐합니다. 예수 운동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 나라의 질서는 가난한자, 약한자, 갇힌자, 포로된자, 우는자, 억울함 당한자, 여성, 어린이들, 곧 사회의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되고 우선이 되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해방적이며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꼴찌가 으뜸이 되고 섬김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천명하였습니다.


예수 당시의 지배질서는 이와는 정 반대였습니다. 가난한자 약한자들은 더욱 억압당했고 로마의 폭력과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횡포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런 지배와 폭력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전파를 위해 온 몸을 바쳤습니다. 그의 생활은 머리 둘 곳도 없었고 가족도 포기하고 재물도 없는 아무 것도 소유 하지 않은 외롭고 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엔 십자가 형을 받아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일생을 이야기 하고 있고 아마도 예수의 생의 마무리는 그의 십자가 지심으로 집중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그의 투쟁의 종점은 결국 십자 위에서의 희생으로 집결됩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부르짖은 일곱 전언과 함께 예수가 얼마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웠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매우 독특합니다. 요한복은 1925-27을 읽어 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행한 예수의 인생 마무리의 극적인 모습을 전해 줍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미혼모로 예수를 잉태하여 큰 두려움을 겪었고, 예수가 자라면서 율법학자들과 성서에 대해 나누는 특별한 능력을 가슴에 간직했으며,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예수로 하여금 물로 포도주를 만들게 하는 동기부여를 하기도 합니다. 하여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삶의 희망을 예수에게 걸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부역을 나갔다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예수 바라기를 했는데 예수는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며 온갖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사람들을 몰고 다녔고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마가복음(3:21)에는 마을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이 미쳤다고 전해줍니다. 이 소리를 들은 마리아의 간장이 녹아 내렸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전했으나 예수는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다라고(마가 3:31-35) 어머니를 거들 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가슴을 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저의 상상력이 동원되어 성서이야기를 확대해 봅니다.


예수에게 냉대 받고 돌아간 이후로 마리아는 아들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정신이 혼미해진 어머니가 십자가로 달려왔나 봅니다. 어머니는 로마 병정도 대제사장의 권력도 안중에 없었고 오직 죽게 된 아들을 한번이라도 보겠다는 일념으로 달려 왔겠지요. 그런데 누가 내 어머니냐고 냉정하게 돌아섰던 그 아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마냥 눈물 흘리며 아들을 바라보기만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아마도 예수는 하나님나라 선교를 하면서도 그 마음 깊숙이 어머니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잘 때도, 그지없이 외롭게 기도 할 때도, 수많은 군중이 떠나간 뒤 홀로 남게 될 때도 그 맘 맨 밑바닥에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며 돌봐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의 손길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 고난 받고 마지막 길을 가는 그 때 매몰차게 어머니를 외면하던 그가 어머니 제가 어머니 아들입니다 라고 하면서 평생 묻었던 모정에 대한 응어리를 풀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의 이 십자가 상 인생 마무리는 요한복음의 특별한 관점입니다. 거대한 인류 구원 사건에 묻혀 졌던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 사랑의 회복을 요한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리아 없이는 예수도 있을 수 없지요. 거대한 대의로 인해 희생되는 가족의 아픔을 찾아낸 요한의 복음은 작은 관계의 사랑, 가까운 관계의 사랑의 소중함을 예수로 하여금 지키게 한 기록이라 생각됩니다. 이 후 마리아는 초대교회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고 마가의 다락방에도 제자들과 함께 합니다. 후대에 마리아는 교회자체다라는 교회론이 성립되기까지 합니다. 전태일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려움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물어보자라고 하면서 이소선 여사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9:36-43에 나오는 히브리 이름은 다비다이고 희랍 이름은 도르가인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사슴의 눈’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도르가는 알려져 있지 않은 평범한 듯 한데 결코 평범하게 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성서는 이 여인을 여제자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집을 가졌거나 경제적 부를 누렸던 여인들이 주도하는 가정교회 형태로 모였고 여성들이 중심이 되고 리더가 된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도르가가 한 가정교회를 이끌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그를 여제자라 호칭한 것은 그 당시 도르가가 활동이 상당히 많고 리더격인 여성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만 예수의 제자로 생각하지만 열두제자는 교회가 상당히 조직화 되면서 설정되어졌고 예수시대와 초기 공동체에는 남녀 제자들이 있었고 여성들의 활약이 컸습니다. 예수는 제자의 자격을 성별로서가 아니라 따르고 섬기고 함께 하는자라 합니다.


도르가는 선한 일과 구제를 많이 한 사람인데 갑자기 죽었어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마침 그때 욥바 근처에 와 있는 베드로에게 속히 와 주기를 청하였고 베드로가 그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오자 많은 과부들이 그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 생전에 그들에게 베풀었던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도르가가 그들에게 준 속옷과 겉옷을 모두 내어 보여주었지요. 사람은 죽은 후 제대로 평가받는다는데 도르가에 대한 평가는 그의 선행과 사랑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옷이 매우 귀했고 특히 겉옷은 추운 밤에는 이불 대신 덮기 때문에 중요한 물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겉옷을 담보로 맡길지라도 밤에는 돌려주어 이불로 덮게 할 정도로 귀중한 옷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물리친 후 기도하여 도르가를 다시 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사실 성서 전체에서 별 비중을 갖지 못한 도르가의 이야기를 굳이 하는 것은 그의 생이 참 아름다워 보여서입니다. 도르가에게는 생의 마무리라는 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지요. 그의 삶 전체가 온전하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재산이 많았는지 모르지만 그의 일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도르가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 사랑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당시 과부들은 가난한 자의 대표였어요. 성서 곳곳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계명은 의지할 울타리가 없어진 과부의 생활을 공동체가 돌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가난한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증거를 위해 도르가에 대한 자료를 찾았지만 너무 부족했는데 어린이들에게 도르가에 대해 설교하는 내용을 하나 보았어요. 그 설교에서 도르가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도르가 아줌마는 옷을 아주 잘 만들었어요. 그런데 옷을 만들면서 생각 했어요. 이 옷은 시장에 떡집에서 일하는 할머니께 드려야겠어. 지난번 보니까 겉옷이 너무 낡았더라구.” 그리고 또 이 옷은 산 밑 낡은 집에 사는 과부 아줌마를 줘야지’, 이건 앞 동네 순이 엄마 겉옷이야, 끼니나 제대로 잇고 있는지. 이불로도 덮어야 하니 두꺼운 천으로 해야지등등. 어린이 설교가 재밌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도르가의 마음을 너무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삶 자체가 사랑이고 봉사고 섬김이고 나눔이고 이러한 사람의 생은 그 모든 삶이 생을 마무리 하는 듯한 진지함, 최선을 다함이라고 느껴집니다.

도르가의 사랑은 정의가 되고 평화가 되고 생명이 되어 보였습니다. 별 유명하지 않은 여인이지만 그의 삶의 모습은 매우 본받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죽을 때 되어서야 인생 마무리 잘해야지 하면서 별스런 일들 벌이기보다는 매 순간 사랑으로 도움으로 정의로 평화로 생명으로 자연스럽게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어졌습니다.

 

오늘 굳이 이렇게 많은 성서의 인물들을 소환한 것은 여러 모양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삶의 의미를 찾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저들이 전해주는 아름답고 의미 깊은 생의 마무리를 배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전도서 3장은 제가 매우 좋아하는 성서 본문입니다. 율법서나 예언서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와 자기의 질서를 전해주는 것이지만 지혜문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경험하는 인생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 하나님 찾기입니다.

 

인생 경험을 통해 보니 모든 것에는 때가 있었습니다. 인생을 마무리 할 때를 잘 아는 것은 훌륭한 지혜입니다. 내 속에 파묻힌 고약한 버릇을 고치기 위해 온 밤을 씨름해 봄도 좋을 것이고 넉넉한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무리를 하는 지혜도 고귀한 것일 것입니다. 때의 지혜를 잘 파악하고 깨달음을 갖고 사는 삶은 한층 아름다울 수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때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하나님의 때를 깨닫고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무엇이랴는 전도서의 말씀이 새삼 마음에 다가옵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늘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때를 알아 지혜롭게 살고 하나님 사랑과 생명 안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저희와 함께하여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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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 2018 [2018. 8. 5] 고통과 선(善) file 2018.08.16 김용덕
1060 2018 [2018. 7. 29] 담을 허무는 사람, 문익환 file 2018.08.07 문영미
1059 2018 [2018. 7. 22] 청년, 우리 시대의 이웃 file 2018.07.26 김홍일
1058 2018 [2018. 7. 15]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신앙고백 file 2018.07.20 권진관
1057 2018 [2018. 6. 10] 여성들은 그 때 어디에 있었나요? file 2018.06.14 정영훈
1056 2018 [2018. 6. 3] 자연의 신음과 고통은 하느님의 가쁜 숨입니다! file 2018.06.12 김대식
1055 2018 [2018. 5. 27] 이 세상의 하나님 file 2018.06.01 추응식
1054 2018 [2018. 5. 20] 일하시는 하느님 file 2018.05.24 차옥숭
1053 2018 [2018. 5. 13] 하나님의 권세와 세상의 권세 file 2018.05.16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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