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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순화


두 발로 서서 하늘을 봅니다

(욥기 38:1-3)


 

2018 11 11

주일예배

최순화 자매(고 이창현 군 어머니)



[그 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 욥기 38:1-3 -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얼떨결에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데요.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내 인생의 가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고, 울긋불긋 생애 가장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최후를 맞이하는 나뭇잎들을 보면, 누구나 한번쯤 시인이 되고픈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인데요. 그래서 시 한편을 먼저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라는 시인데요.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고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봄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올려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

 

저는 이 시를 만난 후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적잖은 위로를 받았는데요.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실천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과 함께 어린 사무엘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도 생각이 났구요.

 

시간을 내어, 교회에 찾아가서, 모여서 기도할 것을 교회는 강조하지만 우리 삶 깊숙이 배어 있는 진솔한 기도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 또한 그의 삶 전체가 이런 기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정해놓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는 그의 숨결이 숨어 있음을 인정하며 어느 것 하나 하대하지 않고 존중해가며 욥은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욥이 하나님께 올린 기도는 언제나 찬양과 감사였겠죠.

 

그런데,

 

평생 성실과 근면으로 일구어 놓은 재산이 잿더미로 변하고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자녀들을 하루에 다 잃고 삶의 질을 높여 주던 엘리트 친구들은 원수처럼 변하고 거기다 건강까지 잃어버린 욥의 기도는 탄식과 한숨과 항의의 기도로 바뀝니다. 자신과 가정을 한꺼번에 집어 삼켜 버린 엄청난 재난의 이유조차 모르는 채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어 신음소리 내는 것 마저 구차하게 느껴졌던 욥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탄식 밖에 없었겠죠.

 

네가 이런 일을 당한 건 남몰래 저지른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고 친구들이 다그칠 때 욥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결국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하나님을 대면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장면이죠.

 

폭풍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욥을 향해 다짜고짜 질문공세를 이어갑니다. 수많은 질문에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던 욥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입을 다무는 것 밖에 없었죠. 욥의 탄식과 친구들의 훈계질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이 욥기 전체의 주류를 이루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질문과 욥의 침묵으로 욥기는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질문과 욥의 침묵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지금도 대자연을 통해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들은 동문서답만 열심히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반짝거리는 별들로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는 밤하늘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경탄을 금지 못하다가 결국 할 말을 잃고 마는 것처럼... 어쩌면 침묵은 하나님을 대하는 가장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욥이 재난 이전의 삶을 회복하고 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아서 모르지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짐작은 됩니다. 엄청난 재난을 온 몸으로 통과한 사람이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욥은 아마도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과 더 깊이 교감하며 말 보다는 사랑이 깃든 행함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침묵해야만 들려오는 세미한 소리들과 하모니를 이뤄가며 나머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제 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났던 아이들이 어째서 침몰해가는 배와 함께 그대로 수장되어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질문만 산처럼 쌓인 세월이 46개월입니다. 국가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죠.

 

국가를 향한 질문에는 아주 더딘 걸음이긴 하지만 진실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고 있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질문은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우리 창현이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아들을 잃은 어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이 두 가지 질문인데요. 창현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하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어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얻어가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갇혀서 살았던 내가 교회 밖으로 나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고 이 사회가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보게 되면서 이전에 가졌던 생각들은 완전히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포지션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웠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고 내달리고 있는 모습이나, 심지어 교육이나 종교의 최종목표도 돈이 되어버린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16참사 전에는 내가 몸담았던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그 우월성의 근거는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가 믿는 그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 중에 내가 속해 있다는 자부심이 교회 안에서의 생활을 가능케 했었는데 교회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두고 멀리서 교회를 바라보니 그런 모습들이 바로 우상숭배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이런 기독교 교리가 얼마나 많은 폭력을 만들어 내고 또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지금은 기독인이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을 높인다며 욥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을 섬긴다며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세상은 멸망당하는 게 마땅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 ~~찬 어둠 속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는데요.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 보니 오히려 보여지는 것들이 있었고 점점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것들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건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빛이 아니라 조물주가 피조물들에게 심어 놓은 아주 오래

전 부터 있었던 빛이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읽어 드린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

나오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는 것,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는 것

촛불 한 자루 올려놓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한다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 등등...

 

이러한 빛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써의 역할을 우리 삶 곳곳에서 담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들을 잃은 어미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건, 창현이 엄마로써 창현이 엄마답게 사는 것... 이겠더라구요.

 

예수님은 예수님다운 삶을 사셨고, 바울은 바울다운 삶을 살았고, 욥은 욥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나는 창현이 엄마로써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게 나의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의 삶의 아닌 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영광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 아닐까요?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조물주가 내게 심어 놓은 빛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게 하는 것은 교회가 감당해내야 할 일일 텐데요. 기성교회가 이 일을 감당해내리라는 기대를 갖는 사람은 제로에 가까운 것 같고...,

 

그래서인지 새로운 교회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교회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라 할지라도 저 너머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면 길을 만들어 가면서 그들을 향해 가는 게 새로운 교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는 안산 화랑유원지내의 생명안전공원부지에서 매월 첫째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단원고 희생자 250명이 안산에 모여 있지 못하고 8군데 이상 흩어져 있는데 생명안전공원부지에 추모관을 만들어 아이들을 모두 데려오고 그곳에서는 생명과 안전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도록 하자는 게 예배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독인들에게 죽음은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은폐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부활과 천국 이야기로 죽음을 은폐시키고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호도하기도 합니다. 눈속임이고 귀속임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죽음 없는 부활이 존재할 수 있나요? 이곳에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죽어서 천국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모순을 드러내며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그 길을 계속

가고 있는 건 본질이 아닌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새길교회의 이라는 글자에는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사람을 찾아 떠나는... 그래서 언제나 새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정착하게 되는 순간 본질에서 벗어나기 쉽고 흘러가야 할 생명력은 흐르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곳에 자리 잡고 성도를 불러 모으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오게 하는 교회가 저희 416교회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런 416교회의 모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길 위에 있는 교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길 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언제 든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죠. 하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하늘을 봅니다. 창현이가 없어진 이후 갖게 된 습관인데요. 단 하루도 같은 하늘이 없습니다. 하늘의 맑기도 다르고, 하늘의 높이도 다르고, 하늘의 색깔도 다르고 오늘처럼 미세먼지가 있는 날은 회색하늘도 되고, 구름의 모양도 다르고,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도 다르고, 구름이 여행 다니는 속도도 다르고... 매일 매일 다른 하늘이 펼쳐집니다.

 

매일 매일 하늘을 보면서 저에게 새삼스럽게 인식되어지는 것 두 가지는 오늘도 하늘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과, 창문을 열기만 하면 혹은 고개를 들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어제와 다른 모습의 하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나처럼 살아 있어서 매일 매일 움직이고 있다는 것 확인하는 거죠.

 

조물주가 피조물들에게 심어 놓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빛들을 볼 수 있고 또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늘이 있어 저는 저의 힘으로 두 발로 서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가끔 창현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는 하늘을 향해 돌팔매질을 할 때도 있을 테고, 어두운 그림자에 속아 넘어질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편을 또 읽어드리고 마칠까 하는데요. 오래된 기도에 대한 화답시로 고진하님의 시입니다.

 

오래된 기도화답시

 

이 휘황한 세상의 유혹에 한 눈 팔지 않고

한 목표를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안에서 자꾸 일어나는 허랑한 욕심과 집착을

매일 조금씩 덜기만 해도

나를 휘둘리게 하는 바깥일에 거리를 두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폭풍을 잠재우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르며 자라는 나무들의 침묵과 고요를 내 존재의 안뜰에 들여 가꾸기만 해도

삶의 주인이 내 심장보다 더 가까이 살아 계심을 알아채기만 해도

행복이 물질의 획득이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으신 분에게 있음을 깨닫기만 해도

영혼의 성장은 서서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느긋한 마음으로 진정하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내가

우주의 꽃이라는 것을 자각하기만 해도...

 

감사합니다새길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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