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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현섭




헤매다 받은 엉뚱하고 놀라운 은혜

(이사야 41:10, 전도서 1:2-3, 전도서12:13)


 

2018 11 4

공동체 추모예배

최현섭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이사장, 강원대 명예교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할 말은 다했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 이사야 41:10, 전도서 1:2-3, 전도서 12:13 -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 공동체가 일 년에 한 번씩 그해에 소천하신 교우들을 기리고 가족과 함께 위로와 소망을 나누는 날입니다.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교우, 그래서 더욱 허전하고 그리운 교우를 오늘 하루만이라도 기억하며 영적인 만남과 교류를 하자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정선자, 조성희 두 자매께서 아름다운 시와 회상으로 추모 말씀을 나누었듯이, 올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우는 이정모 형제, 장세열 자매님입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금년 중에 부모님께서 소천한 분도 많았습니다. 윤희정 자매의 부친 윤영상 님, 추응식 형제 부친 추연규 님, 최순님 자매의 부친 최규남 님, 김옥순 자매 모친 서순임 님, 송준화 형제 모친 이연자 님 등 모두 다섯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추모 예배 이후에 소천하신 분은 김성한 형제 모친 유두근 님, 이찬곤 형제 모친 김홍자 님, 손경호 형제 부친 손용환 님, 이영기 형제 부친 이종채 님 등 네 분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여러 가지 특성상 교우간의 관계 밀도가 촘촘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아마도 이분들을 잘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알고 모름 또는 친소와 관계없이 마음과 정성을 모아 먼저 부르심을 받은 분들과 영적인 교제도 나누고, 유가족 분들의 슬픔과 그리움도 함께 느끼고 보듬어 나눔으로서 서로의 위로와 소망을 더 키우는 예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한동안 말씀의 본문과 주제를 정하지 못해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유가족 분들의 슬픔과 그리움을 덜어드릴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래서 맘에 안 들고 저 말은 저래서 허접해 보였습니다. 참 위로가 되고 참 소망을 키울 것 같은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성경말씀만으로 마음을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말은 하나도 보태지 않고 성경말씀만 읽고 은혜를 나누는 말씀증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감흥이 없는 말을 중언부언 늘어놓으면 얼마나 공허하겠습니까? 괜찮겠다, 싶지요? 사실 이 방법은 지난해 이태림 자매의 부군 문혁수 님의 조문 예배 때도 시도한 바가 있습니다. 그때도 제가 무슨 말을 한들 자매님과 가족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까, 주께서 주시는 말씀만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성경말씀만 읽는 것으로 추모 말씀을 대신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안인숙 자매께서 읽은 이사야 4110절 말씀이 그 중의 한 구절입니다.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은 개역개정본 말씀입니다. 제게는 표준새번역본 말씀보다 더 실감나게 다가와 일부러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씀. 듣고 또 들어도 든든하고 기운을 돋우는 말씀이지요? 그런데요. 이번에는 이 말씀이 그렇게 든든하거나 기운을 돋우는 말씀으로 다가오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아주 공허하게 읽혀지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시편 231-4절을 찾아 읽었습니다. 조금 전에 교독을 했지만,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말씀 잘 아시지요?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암송도 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 꺼내어 읽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 말씀도 그렇게 신통치가 않은 것입니다. 찾아보는 말씀마다 시큰둥해 보이니 크게 당황이 되었습니다. 성경말씀만으로 위로와 소망을 나누기도 어렵겠다 싶으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슨 핑계라도 대서 말씀증거를 못하겠다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것이 자신감 위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게 말해서 자신감의 위축이지, 실은 일에 대한 의욕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무엇이든지 허무하게 느끼는 노인 우울증 증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정말 그러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1:2) 하는 전도서 말씀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 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2:11)는 말씀에 공감이 더 갔습니다. 전도서 저자처럼 누릴 것 다 누려본 사람도 모든 게 헛되다고 하는데, 내 인생이야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교우님들의 말씀증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같이 달인수준이고, 교우 한분 한분을 살펴보니 신앙적으로나 이웃사랑 실천 모든 면에서 저보다 몇 배나 더 앞서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고개 들고 교회를 다녔구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교우들을 뵙기가 두려워졌습니다. 유능하고 신앙심 깊은 교우 여러분, 책임감 느끼시기 바랍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나요?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한테 말도 못하겠고 혼자서 끙끙 앓기만 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 증상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언제인가 해외 봉사를 가려고 공항에 가는데, 갑자기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서기 전에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해두고 중요한 서류는 잘 보이는데 따로 두었습니다. 떠나면서 유언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족들에게 간절한 문자도 남겼습니다. 그것이 그 신호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노인 우울증이 더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이사를 와 옛날 사진을 정리하고, 그동안 썼던 글과 책, 언론 보도 내용들을 한군데로 모아두는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습니다. 죽고 나면 다 불태워지고 말 것들이라는 생각에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수님께서 부모님 유품을 정리하여 200쪽에 달하는 사진집을 발간하여 보내왔는데, 감동보다는 헛된 낭비라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사람을 만나러 나가기가 귀찮아지고, 집에서 빈둥빈둥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도 그 쪽으로 가는 걸음이었습니다. 그토록 의미와 보람을 강조하고 깨인 시민이 희망이라고 외치며 동분서주하였던 지나간 날들이 모두 공허하게 느껴진 것도, 글을 쓰기가 싫어지고 대중 앞에 서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걱정되시지요? 유가족 분들보다도 제가 먼저 위로 받아야겠고 소망의 회복이 급해 보이지요? 그러나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단을 두개씩 걸어 올라가는 등 치유 작전에 돌입했으니 잘 되지 않겠습니까? 노인 우울증 검사를 받아 보니 계단을 두 개 이상씩 올라가느냐는 물음도 있더라구요. 검사받아본 분 아시지요? 저 나름대로 긍정적 의미와 보람을 찾으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으니 효과가 곧 나타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습관의 문제를 스스로 분별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자기 주도적으로 조절하려 하면 효과가 더 크다지 않습니까? 의사 선생님, 상담전문가 여러분, 맞지요?

 

이런 깨달음과 자기 치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저에게는 큰 행운이자 주님이 주신 엄청난 은혜로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70이 넘었으니 말씀증거는 그만 두겠다 했었습니다. 젊고 신선한 교우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말씀증거 없이 시와 찬양으로만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대화식 말씀증거를 하는 등 예배가 다양화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 뜻을 예배위원회에서 꺾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노인 우울증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고, 더 악화되어 급기야 주변 사람들에게 맘고생 많이 시켜드렸을 것이 아닙니까?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자신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착각할 것이고, 누군가 그것을 지적을 하면 치매 노인 취급한다고 길길이 뛰었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합니다.


이렇게 고인을 기리고 추모하며 유가족에게 위로와 소망을 드리는 예배 준비를 하다가 엉뚱하게도 제가 더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전혀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것을 실감하니 더욱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유가족 여러분께도 그렇게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더 크고 귀한 위로와 은혜를 이미 주셨거나, 준비하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부디 사람의 말로서가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참 위로와 참 소망을 받으시어 슬픔과 아픔을 이겨나가시기 바랍니다. 지난 해 또는 그 이전에 소천하신 부모형제, 남편과 아내가 지금도 그립고 가슴이 아픈 자매 형제님께도 그렇게 순간순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흘러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럴 때 다른 교회에서는 아멘! 할렐루야! 하던데. 잘 안 되시지요? 혹 예배위원회에서 여러분께 말씀증거나 순서를 부탁하면 두말없이 수락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알 수 없는 큰 은혜를 듬뿍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받은 은혜는 또 있습니다. 전도서는 결코 허무한 인생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전도서 하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이 떠오릅니다. 저도 이번에 헛된 인생에 대한 엄청난 탄식에 끌려, 전도서를 읽어보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은 인생 자체가 허무하다고 탄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인생, 믿는 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를 경시하며 제 좋을 대로 산 지난 생애에 대한 뼈저린 회개이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한 역설적인 훈계이었습니다. 전도서 1213절 말씀은 아주 명쾌하게 합니다. “할 말은 다했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12:13)라 쓰여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전도서 96절과 10절 말씀은 정신 번쩍 나게 하였습니다. “죽은 이들에게는 이미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다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는 말씀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지요? 한 번 더 읽어 볼까요? “죽은 이들에게는 이미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다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

 

어떻습니까? 제게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차이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이자, 살아 있는 자에게 주는 충격적인 깨우침으로 읽혔습니다. 어떠한 일에도 끼어들 기회가 주어져 있는데, 어찌 자신감의 위축, 무기력과 허탈, 자괴감과 도피 등 헛되고 헛되며 헛된 것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느냐는 안타까운 호통이 분명했습니다. 무덤 속에는 결코 없는 일을 할 수 있을 지금,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해야 할 의무를 지키라는 간절한 호소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받은 은혜는 크고 놀라웠습니다. 주님의 사랑 제가 너무 많이 받고 있지요? 그러니 신앙심도 깊고 이웃사랑도 달인급인 여러분들은 아마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 이 은혜에 더하여 새로운 도전과 긍정적인 에너지까지 선물해주는 글 하나를 접했습니다.

 

"나는 암 환자다. 머리카락은 1차 주사 맞고 열이틀이 지나자 바로 빠지기 시작, 지금은 눈썹, 콧속 털까지 다 빠진 상태다. 다행인 것은 확실히 몇 달 만에 끝이 나는 종류의 암은 아니다. 실패하더라도 대개 5년 정도 후에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악화된다. 그러니까 정리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게 행운이라면 큰 행운이다. 나는 그 시간을 리모델링할 기회가 닥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발병 후 서너 달 만에 훅 가는 경우도 많이 봤지만 말이다."

 

이 글은 암 투병중인 자매님께서 페이스 북에 올린 글입니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정리할 시간', '리모델링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니, 행운이라면 큰 행운이라니요? 몹쓸 병마에 이렇게 담담하고 대담하게 맞서다니, 그 용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죽음은 바람같이 항상 내 곁에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나와 죽음 사이는 한 발짝 밖에 되지 않는다’(삼상 20: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을 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12: 25)”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말씀 아닙니까?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 25-26)”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전 15: 14)”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도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죽음이 자기 곁에 왔다고 생각하면 두려움과 허무에 휩싸이는 게 우리 보통 사람이 아닐까요? ‘주님 뜻대로 하소서.’ 외치며 기도를 하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찬송을 부르고 또 불러도 두려움과 허무를 완전히 물리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매님은 그걸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있고, 심지어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의미와 가치를 찾고 있으니 그 믿음의 깊이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그 놀라운 믿음은 헛된 인생길을 헤매는 저에게 새로운 도전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물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은 최상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깨우침도 함께 주었습니다. 정신적 건강이 육체적 건강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물질을 듬뿍 안겨주거나 기가 막힌 말로 위로를 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고 따뜻한 마음과 새 소망이 되살아나게 하는 일도 아름다운 봉사요, 참 선교이겠다 하는 생각도 갖게 해주었습니다. 자매님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어 있을 두려움과 아픔을 생각하면 너무나 쓰리지만, 제게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선물이자 도전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비록 방언이나 천사의 말은 하지 못하고, 내 몸을 넘겨줄 만큼의 사랑은 할 수 없어도, 누군가에게 잔잔한 감동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물할 수 있는 삶에 도전하는 것,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주 자기도취에 빠져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하기도 하고, 제 딴에는 천사의 말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독이 되거나 좌절에 빠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과 세상을 화평케 하기는커녕 먼지만도 못한 자존심 지키려고 사람들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공동체를 분란과 갈등에 빠뜨리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그것을 어떻게든 분별해내고 완전히 버리는 일이 급하겠지요? 그리고 세상에 끼어들 자리가 남아 있을 때,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따뜻한 마음과 화평이 세상에 퍼지게 하는 일에 도전해보는 것, 괜찮아 보이지요? 성과는 초라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지금 새로운 30년을 향한 큰 걸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평신도신학의 나침반들여다보기도 그 일환일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공동체의 공간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도 하였습니다. 그 모든 걸음, 걸음들이 서로에게 새로운 도전과 긍정적인 에너지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는 감동으로 채워지길 소망해봅니다.


헛된 인생 길 헤매다가 받은 이 크고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유가족 여러분과 새길공동체에도 더 크고 놀랍게 더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는 자주 시시각각으로 주시는 주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하고 절절한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추도 예배도 유가족은 물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그 사랑과 은혜를 통하여 참된 위로와 참된 소망을 갖도록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가 새길 공동체에도 차고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새길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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