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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양희송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들: 세속성자와 교회

(히브리서 13:12-13)


 

2018 10 21

주일예배

양희송 형제(청어람 대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히브리서 13:12-13 -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으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성문 밖의 그에게 나아가자'고 권합니다. 예수의 사역이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것으로 요약되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성문 밖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으로 간명하게 요약이 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단지 예수께서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것을 상기하려고 이렇게 쓴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다른 어떤 서신보다 더 공들여서 예수의 죽음이 어떤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지 희생제사로서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유대교의 성전 제사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유대교적 배경을 강하게 갖고 있는 이들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떤 학자는 수신자들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제사장 혹은 종교인 그룹들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제의와 신학적 논의에 통달한 존재들을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맥락에서 이 본문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의 죽음이 성전으로 쳐들어가고, 그 성전체제를 전면적으로 전복시키는 것이라는 통쾌한 주장과 설명을 할 법도 한데, 이 본문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성문 밖으로 나아갔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매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문'은 어떤 공간입니까? 그곳은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현실이 있는 곳입니다. 일상의 고단함과 덧없음이 고스란히 만나지는 시공간입니다. 예수는 그리 가셨다는 말,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가야 하리라는 말,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향이 아닌 쪽으로 향하도록 우리 삶을 인도합니다

저는 최근에 <세속성자>란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을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첫 장면에 견주어 설명했습니다. 인류를 학살하려는 거인족의 공격 앞에 3중의 벽을 쌓아놓고 살아가는 인류의 운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애니메이션이 시작하자마자 그 벽이 붕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50m 벽을 훌쩍 넘어서는 초대형 거인이 벽을 깨어버리고, 수많은 거인들이 그 벽 틈으로 들어와 인류를 공격합니다. 사람들은 시급히 두번째 벽 안으로 피난을 합니다. 저는 이 모습이 한국교회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 덕분에 튼튼한 벽을 쳐놓고, 세상의 위협과 공격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기대한대로 돌아가지 않지요. 초대형거인들이 마구 등장해서 벽을 깨부숩니다. 그 거인들의 이름은 '종북'일 수도 있고, '동성애'일 수도 있고, '이슬람 난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큰일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더 높고, 더 튼튼한 두번째 벽 안쪽으로 피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는 안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는 달리 전개됩니다. 주인공은 어쩌면 벽 안쪽이 아니라, 저 벽 바깥으로 나아가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작품은 지금도 시리즈를 이어가며 벽 바깥 세상의 비밀을 찾아 모험을 하는 주인공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은 원래 울타리를 쳐놓고 벽 안에 안주하는 것을 가르치는 신앙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원래부터 벽 바깥의 세상,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그 세상이 우리 신앙과 삶의 본격적인 장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어떻게 살 것이냐를 놓고 기도하고, 분투하는 것이 신앙의 참된 모습이지,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리고, 어떤 불결하고, 위험스런 것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무균 청정 지대를 만드는 것이 기독교의 이상은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공산혁명 이전에 얼마나 엉뚱한 신학논쟁을 일삼았는가 보여주는 예화로 종종 들을 수 있는, '성수에 파리가 빠지면 성수가 오염되는가, 파리가 성화되는가?'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거룩함과 성스러움이란 가치는 늘 오염되고 부패될 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우리가 수호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비추고, 접촉하고, 스며드는 곳마다 새 살이 올라오고, 상처가 치유되고, 눈물이 그치는 그런 것입니까? 우리의 거룩함과 성스러움은 어찌 그리 유약합니까? 예수께서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패턴은 우리가 신앙적으로 모방하고, 반복하고, 재현해야 할 전형입니다. 우리도 성문 밖으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능욕과 굴육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본받는 길입니다. 그것 아닌 다른 길을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부들의 시대에 교회란 구원의 범주였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란 명제가 강력하게 작동했습니다. 그러면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는 무엇인가요? 교부들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교회다(ubi christus ibi ecclesia)' 그런데, 이 명제는 곧 바뀝니다. '주교/교황이 있는 곳이 교회다(ubi papa ibi ecclesia)' 즉 그리스도의 임재를 대변하는 사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중세적 교회론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제가 없는 교회를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그 사제는 무엇을 대신하는 존재였는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대신하지 않는 한 사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어디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문장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를 우리가 묻게 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 교회는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행보와 더불어 교회란 생성소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교회는 훨씬 더 유연하고, 훨씬 더 다양하고, 훨씬 더 창조적입니다


저는 교회를 이해하는 우리의 인식을 3가지 유비로 설명을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교회는 매우 고체적입니다. 특정한 형태와 관행이 교회됨을 결정합니다. 강대상, 장의자, 파이프 올간, 독특한 설교스타일 등. 이는 매우 구체적이라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지만 경직되기 쉽습니다. 고체적 실체와 교회를 동일시합니다. 이런 입장이 의외로 매우 많습니다. 여기서 좀 벗어나 보려는 이들은 교회란 사람들이다. 본질이 유지되면 이를 담는 용기는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를 액체교회라고 할만합니다. 해변가에서 모이는 비치쳐치, 산에서 모이는 마운틴쳐치, 길에서 모이는 쳐치 온더 웨이... 다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본다면, 기체교회는 불가능한가 물어봅니다. 기체란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방식의 존재입니다. 루터교 배경을 갖고 있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 혹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들을 포착할 때 유용합니다. 제도교회의 교세는 미미하지만, 그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가 기체처럼 스며있는 어떤 존재방식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속성자로 살아가자고 다짐하고, 서로 격려하는 것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전면적으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고, 천가지 만가지의 다양하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세상 속에 스며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모두 성문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주께서 성문 밖으로 나아가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성문 밖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성문 바깥에서의 삶 가운데 외롭지 않고 위축되어있지 않도록 늘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길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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