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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강철웅

 

들어라, 이스라엘아: 함께 찾는 유대인 예수의 믿음

(마가복음 12:28-34)


 
2018년 9월 30일 
 주일예배 

강철웅 형제(강릉원주대 철학과 교수, 정암학당 연구원)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마가복음 12:28-34 -



1. 물음들: 율법, 즐거움, 공부와 성공

 

1.1. 율법과 즐거움

 

3년 전 긴 휴식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버킷 리스트에 있던 것 가운데 몇 개를 해결했다. 그 중 하나가 흐름 끊기지 않고 한달음에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것이었는데, 늘 조각조각 단편적으로만 읽던 것을, 한 호흡에 읽으니까 뭔가, 나무들만 여기저기 조금씩 보다가 약간 멀찍이 떨어져서 산 전체를 조망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성서가 적어도 바울 서신 이전까지는 상당히 일관성 내지 유기적 통일성이 잘 유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는데, 그 때의 여러 느낌들 가운데 신선했던 것(아니, 오히려, 충격에 가까웠던 것)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바울 서신 이전까지의 성서가 율법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싶었는데, 그 율법, 계명을 즐거움, 기쁨과, 행복과 연결시키는 구절들이 특히 히브리어 성서(, 구약)에 너무도 많다는 것이 꽤나 낯설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시편 119편에만 보아도 33-35절에 주님,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법을 살펴보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지키겠습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기쁨을 누릴 길은 이 길뿐입니다.”라 하고, 47절에 당신의 계명들을 내가 사랑하기에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라 하며, 56절을 보면 당신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삶에서 내 행복을 찾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계명, 율법, 이런 것이 어떻게 기쁨이 되고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인지? 계명은,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즐거운 일들을 못하게 막는 불편한 구속 같은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막는, 그러니까 불편하기만 하고 안 지키면 뭔가 께름칙한, 없으면 더 자유롭고 편할 것 같은, 그런 것 아닌가? 어떻게 그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까? 이런 물음을 갖게 되었다.

 

1.2. 율법, 공부와 성공

 

그리고 최근 여호수아서를 읽는 어떤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여호수아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히브리어로 하가’], 이 율법책에 씌여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cf. 개역 성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율법을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야 성공한다? 아니, 그 지긋지긋한 공부를 열심히, 그것도 밤낮으로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 성공한다는 것인가?

 

율법이 어떻게 즐거움과 기쁨의, 행복의 원천이 된다는 것인가도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열심히, 그것도 밤낮으로 주야장천 공부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가는 길이 순조롭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가? 그런가 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뜬금없고 의외로 느껴지게 된 이유는 또 뭘까? 율법을 기쁨과 행복의 원천으로 놓고 주야로 묵상, 공부하던 구약 성서의(, 유대인의) 태도를 우리가 백안시하게 된 이유가 뭘까? 다른 한편으로, 그런데도 그토록 율법을 경계하고 바리새인들을 경계하던 크리스찬들이 오히려 훨씬 더 율법주의적이 되고 바리새적이 된 이유는 또 뭘까? 그런 것들이 상당히 궁금해졌다.

 

 

2. 호승 vs 탐색: 율법학자와 예수

 

2.1. 율법학자는 공공의 적?: 익숙한 이분법

 

오늘 우리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혹시 표기된 본문의 굵은 글씨 강조가, 중간에 나오는 핵심 계명 이야기에 가야할 것이 실수로 잘못 강조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이 시작과 끝부분에 있다. 이야기의 결론이자 핵심 알맹이가 가운데 부분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야기를 그 말씀의 핵심으로 끌고 들어가고 다시 거기서 이끌어 우리 삶으로 끌고 나오는 부분도 말씀의 핵심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운데 알맹이부분에 예수 메시지의 핵심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오늘 우리는 약간 다른 데 관심을 가져 보자, 그 핵심 이야기에 예수가, 그리고 이제까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했지만 오늘 우리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대접을 해 주고 싶은 사람인 율법학자가, 어떻게 다가가는가에 관심을 가져보자.

 

우리는 사실 너무도 이분법에 익숙해 있다. 어릴 적부터 우리의 놀이와 사고를 지배해 왔던 좋은 나라-나쁜 나라, 아군-적군, 선인-악인의 이분법 프레임, 성서 읽기에도 무심코 적용해 왔던 것 아닌가? 내 머릿속에서도 부지불식간에 율법학자(혹은 개역 성서의 번역으로는 서기관’)는 늘 예수를 죽이는 무리들 3총사 그룹(, 율법학자, 대제사장, 장로. 경우에 따라서는 바리새인이 포함됨)에 끼어 있었다. 이런 유아적 이분법의 발상에서, 선입견에서 벗어나면 조금 더 하느님 말씀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2.2. 변론 vs 함께 찾기

 

사실 성서 번역자들에게도 이런 유의 선입견이 상당히 작용한 것 같다. 본문의 굵은 글씨로 된 첫 문장(정확히는 첫 어절)에 나오는 변론이라는 말이 그렇다. 개역 성서, 표준새번역 등 한글 번역들이 택한 변론이라는 말은 사실상 논쟁’, ‘말다툼의 맥락을 상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NIV‘debating’이라고 옮겼듯이, 동서를 막론하고 상당수 번역자들이, 여기서 율법학자가 관찰한 것이, 예수와 사두개파 사람들 사이에 오간 부활 논쟁’(표준새번역도 이렇게 표제를 달았다)이라고 본 것이다(KJV‘reasoning together’가 예외라면 예외일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생각과 번역은 그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넓은 문맥을 보면, 11장 처음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 - 무화과 이야기 - 성전 정화 이야기 - 다시, 무화과 이야기 - (11:27에서부터 나오는) 대제사장, 율법학자, 장로, 3총사 그룹이 예수의 권한을 놓고 논란 벌인 이야기 - (12장 처음의 포도원 소작인 비유) -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이야기 - (오늘 본문 바로 직전의) 부활 논쟁, 이렇게 이어지는 앞선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를 테스트하는 당대 유대교 권력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맥락에서 나오고 있다. 나중에 38절 이하에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오늘 우리 본문도 이런 논쟁테스트의 큰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크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큰 맥락 속에 낀 이 이야기가, 율법학자가 예수를 말로 테스트하고 말로 겨루는 이야기일 뿐인지는, 그런 넓은 문맥 말고 일단 이 이야기 자체 내에서 먼저 검증되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래야 마가복음 기자(편의상 앞으로는 그냥 마가라고 줄여 부르자)가 무슨 의도로 이 이야기를 여기에 끼워 넣었는지도 좀 더 균형감 있게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번역자들이 변론한다’, ‘논쟁한다로 옮긴 대목은 원어 성서로 보면 ‘akousas autōn syzētountōn’(아쿠사스 아우톤 쉬제툰톤)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희랍어로 ‘syzētein’(쉬제테인)이라는 동사가 쓰였는데, 이 말은 본래 ‘sy’(<‘syn’), 함께라는 말과 ‘zētein’, 찾는다’(혹은 거기서 좀 더 좁혀져서 묻는다’)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원래 함께 찾는다/탐색한다/묻는다는 말인데, 거기서 다시 서로에게 묻는다’, ‘서로와 논쟁한다는 뜻으로 좁혀질 수 있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자들은 이 말이 가진 원래의 넓은 의미보다는 나중에 좁혀진 의미가 이 대목에도 그대로 잘 적용될 수 있다고 본 것인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목이 들어 있는 넓은 맥락이 그런 논쟁의 맥락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읽는 것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옮겨 놓고 나면, 마가가 이 장면에서 그리고 싶어 하는 예수 그림, 마가가 전달해 주고 싶어 하는 율법학자의 태도가 온전히 전달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후 율법학자와 예수의 대화 모습을 보면, 여기서 율법학자가 주목했던 예수의 모습이 과연 논쟁뿐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앞선 장면에서 예수와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의 문제에 관해 문답을 주고받았다. ‘부활을 인정하게 되면 형사취수 제도에 의해 일곱 번 결혼했던 여자는 그 형제들 중 누구의 아내라고 해야 하느냐?’ 하는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나온다. 물론 묻는 사두개파 사람들이나 대답하는 예수 모두, 자기 이야기로 상대방을 압도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수 있다. 토론이나 논쟁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사람은 대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로 임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하고 또 상대방은 그런 질문을 적절히 받아넘기는 식으로 토론이 진행될 때, 우리는 자주 그래서 누가 이긴 걸까?’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나 무슨 선거의 토론이거나 입법 관련 토론이라면 더더욱, 그 승패가 우리 삶에 긴밀히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기고 지는 것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앞의 장면에서 논쟁 당사자들인 사두개파와 예수가 승부에 관심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 내에서 율법학자의 태도, 그리고 그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과연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 그러니까 호승심’(好勝心)이라고 할 만한 것이 부각되기만 하는 것인가? 오히려 그것과 대비되는 다른 뭔가를, ‘함께 찾는다는 말을 사용하면서 마가가 주목하려는 것이 아닐까?

 

 

3. 이야기의 구조: 함께 찾는 예수와 율법학자

 

3.1. 원환 구성과 마가복음

 

이 이야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묻고 있는 것들에 대한 힌트를 잘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오늘 우리 본문은 내가 보기에 마가복음 이야기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11장 앞부분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이야기를 전후에서 감싸고 있는 두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두 이야기의 나머지 하나는 바로 1017절 이하의 부자 이야기다. 그 부자 이야기와 이 율법학자 이야기가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앞뒤에서 감싸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런 이야기 구조를 흔히 ‘inclusio’(감싸는 구조)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내가 몸담고 있는 서양 고전학 쪽에서는 보통 ‘ring composition’(원환 구성)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성전 정화 이야기 앞뒤를 감싸는 무화과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 구조를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들 이야기한다. 나는 다층적인 원환’(ring)들 여러 개가 감쌀 수 있다는 점, A-B-A식 뿐만 아니라 A-B-C-B-A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환 구성이라는 이름을 갖고 접근해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3.2. 처음과 끝에서 감싸는 두 대목이 보여 주는 예수: 함께 찾는 유대인 예수

 

마가복음 전체가 사실은 원환 구성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11절과 168절의 조응), 마가는 여기 이 작은 이야기 안에서도 원환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자세히 보면, 굵은 글씨로 강조된 맨 앞과 맨 뒤가 잘 조응한다.

 

<오늘 본문이야기의 원환 구성적 구조>

 

(A)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B-1)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B-2)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C)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C)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B-1)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B-2)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A)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가 와서 예수께 물었다라는 것과 이 이야기 끝에 결국 이후로는 예수께 더 묻는 가 없었다가 일단 잘 조응한다[(A)(A)]. 이 으뜸 계명 이야기가 영생, 구원에 관한 문답의 결정판이라는 이야기다. 예수가 잘 대답하는 것을 율법학자가 보고 예수께 물었다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예수가 보고 율법학자에게 말했다가 잘 조응한다[(B-1)(B-1)]. 이 앞과 뒤는 결국, 율법학자와 예수가 문답을 주고받는데 상대방이 잘 대답한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니까 율법학자와 예수 모두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호승심을 갖고 있다기보다, 상대방이 해당 사안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해 잘 대답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그들(, 예수와 사두개파 사람들)‘syzētein’하는, 함께 질문에 대해 답을 찾고 있는모습에서 뭔가 관심거리를 발견했고, 거기다가 예수가 그 난해한 부활 문제에 대해 답을 잘 하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갖고 있던 질문에 대해서도 잘 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물었던 것이다.

 

그럼 예수는 어떤가? 앞선 부자도 그렇고 이 율법학자도 그렇고, 자기에게 와서 아주 커다란 물음을 던졌다. 10장의 부자는 영생이 뭐냐?’를 물었었다. 거기에 대해 예수는 하느님은 한 분 뿐이다. 왜 내게 묻냐? 계명이 있지 않냐?’고 답했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는 이번에는 계명의 으뜸이 뭐냐?’를 묻는다. (앞선 부자 이야기와 내용상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거기에 대해 예수는 하느님은 한 분 뿐이다. (이 대목에 왜 내게 묻냐? 계명이 있지 않냐?’가 빠져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도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계명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마가가 이 두 감싸는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예수의 모습은 함께 찾는, 함께 묻는 예수의 모습 아닐까? ‘내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한테 와서 배워라.’가 아니라 실은 나도 찾고 있다. 그러니까 함께 찾아보자.’에 가까운 말씀을 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 말이다.

 

3.3. 마가가 그리는 율법학자와 예수

 

서두의 율법학자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율법학자가 우리에게 언제나 우리의 반대편, 즉 예수를 죽인 자의 무리에 들어가 있었던 것은 실은, 율법이 언제나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밤낮으로 공부하는)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는 예수와 언제나 반대편에 있을 것으로 으레 생각하는 우리의 선입견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찬찬히 보면, 마가가 율법학자를 늘 그런 모습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다. 마가가 복수로 율법학자들로 표현한 그룹은 분명 예수를 죽이려 시도하던 무리, 맞다. 하지만 마가복음이 그 무리들 가운데 하나로, 즉 단수로 표현한 율법학자는 얼마든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오늘 우리 본문에 나와 있는 율법학자는 다른 율법학자들의 무리와 구별되는 사람이었다.

 

실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예수가 그런 사람과 아주 유사하고 친근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그려져 있는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다. , 율법학자적이고 랍비적인 모습 말이다. 예수가 계명의 으뜸이 뭐냐?’는 물음에 대해 제시한 답은 사실 토라(, 율법)에 나와 있는 두 구절이다. 첫 구절은 들어라, 이스라엘아’(히브리어로 셰마, 이스라엘’)라고 시작하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늘 아침저녁으로 묵상하는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이른바 셰마구절이다. 그리고 둘째 구절도 레위기의 말씀이다. 레위기의 이웃 사랑 계명을 신명기의 셰마, 즉 하느님 사랑 말씀과 연결하는 예수의 센스가 돋보이는 대목이고, 바로 그것이 사실 바울을 훨씬 능가하는 예수 자신의 율법 해석이다.

 

마가가 그리는 이 예수는 누구인가? 유대인이다. 물론 두 계명을 연결하는 센스를 보이는 율법학자적이고 랍비적인 예수이긴 하지만, 그 예수의 밑바닥에는 어려서부터 요셉의 무릎에 앉아 셰마를 외웠던 유대인 예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유대인 예수에게는 계명의 핵심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어느 순간 오늘 본문과 같은 방식의 해석을 낳은 깨달음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자신의 독창적인 대목은 그 구절 어디에도 넣지 않았지만, 그 두 계명을 연결해서 인용하는 것만으로 성서 전체를 꿰뚫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핵심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하게 대답은 율법에, 계명에 있다고, 그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함께 찾아보자고 권유하고 있다.

 

3.4. 답을 주는 예수 vs 함께 찾는 예수

 

우리는 흔히 예수의 말씀을 답으로 생각하고 너무도 쉽게 예수를 그렇게 답을 제공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14: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4:1) 우리는 크리스찬의 크리스찬됨이 이렇게 예수믿는 것에 있다고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들어 있는 성서의 이야기들을 예수 자신의 말과 생각이라고 아주 당연시해 왔다.

 

그런데 성서의 또 다른 대목들에는 오늘 우리 본문처럼 예수의 겸손함, 하느님의 한분이심을 고백하는 예수믿음이 부각되는 부분들이 있다. 예수믿는 것과 예수믿는 것에 실은 간격 혹은 긴장이 들어 있다. 우리 지성과 믿음의 균형을 위해서는 이제까지 주목하지 못했던, 예수믿는 것에 이제는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답을 주는 예수보다 답을 함께 찾는예수가 우리가 좀 더 찾고 닮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4. 셰마의 예수와 성서

 

4.1. 셰마의 반-이분법: 듣고 따르는 예수

 

이제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지 않은 알맹이부분, 즉 예수의 본 메시지에 관해서 잠깐만 생각해 보면 좋겠다. 사실 셰마, 이스라엘이라는 말 속에 방금 말한 것들 말고도 이미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로이스 티어베르크(Lois Tverberg)랍비 예수(Walking in the Dust of Rabbi Jesus)를 참고하면 좋겠다. 그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앞으로 조금씩 함께 찾아가야하겠지만, 내가 주목했던 하나만 여기서 짚고 가고 싶다.

 

사실 셰마를 말하는 유대인 예수의 메시지에는 들음 대 행함이라는 바울식 이분법이 들어 있지 않다. ‘듣는다는 뜻의 셰마에는 그런 이분법이 들어 있지 않다. 티어베르크에 따르면, ‘셰마들어라라고 번역하지만, 그 말에는 그저 소리를 지각한다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듣는다’, ‘주의를 기울인다’, ‘들은 것에 대해 행동으로 반응한다등 폭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때로는 이 말이 순종’, ‘청종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 신명기 1113절에 나오는 당신들이 내가 당신들에게 명하는 그의(/나의) 명령들을 착실히 듣고착실히 듣고를 개역 개정판에서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청종하고라고 옮겼다.) 그러니까 듣는다는 뜻의 셰마는 그냥 듣고 말 수도 있다는 함축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귀를 기울여 듣고, 행동으로 따른다는 함축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영국인 랍비이자 국회의원이기도 한 조나단 색스(Jonathan Sacks)에 따르면, “‘셰마듣는다는 뜻이고, 셰마 암송은 들음으로서의 믿음을 보여 준다. 우주를 무에서 창조하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사 평생토록 인도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결국 셰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아)을 매일매일 음송한 유대인 예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일까? 하느님의 율법을 매일매일 듣고 있었고 어떻게 실천으로 이어갈지를 찾고 있었던 것 아닐까? 율법이 결국 뭘 하라고 명하는 거냐?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게 과연 어떻게 하는 거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눈에 보이게 실천하는 일은 결국, 눈에 보이는 이웃, 옆 사람을 하느님처럼, 그리고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냐? 이런 고민과 탐색들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마가복음이 줄기차게 강조하듯 한 분 하느님을 믿었다. ‘그분이 주신 계명이 우리 삶과 구원의 핵심이다라는 게 예수의 믿음의 요체다. 그리고 계명,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 본문의 가르침에 따르면, 끊임없이 자기 삶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또 고쳐서 다시 해석해야 하는, 즉 그 뜻을 열심히 찾아보아야 하는 것, 답이 아니라 질문을 주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답보다 물음을 던져 주는 유대인 예수의 이 기---하느님, ---계명 이야기는, 간단명료하게 우리에게 예수라는 답을 주는 바울의 기---예수, ---믿음 이야기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삶의 반성과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 같다. 바울식의 예수에 관한이야기 말고 그 예수이야기, 예수하는 이야기는 쉽고 값싼 믿음(삶에서 분리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렵고 고통스런 삶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이웃을 사랑하라의 한 귀결인 원수를 사랑하라같은 것 말이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 예수 따르미가 된다는 것은 예수 믿으미가 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어렵고 힘든 일이며, 끊임없이 내 삶과의 연결을 통해 답을 찾아가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4.2. 낡은 것과 새 것: 열린 성서 읽기

 

티어베르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서(히브리어 성서), 즉 토라는 ב’(베트)(, 영어의 B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파벳)로 시작한다. ‘א’(알레프)(, 영어의 A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파벳)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아마도, 보다 근본적인 가르침, 즉 알레프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하느님 자신에게로 돌리는 겸손함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베트라는 글자는 우리말의 자를 좌우로 방향을 바꿔 놓은 모습[ב], 즉 오른쪽으로 닫혀 있고 왼쪽으로 열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써나간다. 그러니까 베트는 시작한 방향으로 닫혀 있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으로 열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성서는 이렇게 열려 있다. 함께 찾아 나가야 할 것으로 우리 삶을 향해 열려 있다. 성서는 해석이 곧 삶이고 삶이 곧 해석이다. 들음이 곧 실천인 것이다.

 

성서에서 답을 발견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발견한 답만이 정답이고 그게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독단적이고 아집스러워서 대화 불가능하다고 비쳐지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

 

너무도 당연하지만 너무도 쉽게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실은, 예수도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도서관 예쉬바’(yeshiva)는 아주 시끄럽다고 한다. ‘하브루타’(havruta)라고 부르는, 동료(‘하베르’)와 대화, 토론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유대인의 교육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답을 함께 찾으려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혹 내 생각과 많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내 생각 속에 갇혀 있으면 더 나은 생각을 들어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없다. 성서도 이렇게 눈이 아닌 입과 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성서를 주야로 묵상/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함께 찾는일일 것이다.

 

신을 위한 변론(The Case for God)을 쓴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에 따르면, 고전 유대교에서 계시라는 것은 일회적이고 영원한 것(테르툴리아누스의 말처럼 한번 찾고 나면 끝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행되는 과정(an ongoing process)이다. 늘 새로 찾아낼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게 계시라는 것이다. 에스라 서에 보면 에스라는 주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지켰으며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였다[혹은, 개역 성서 번역으로는 가르치기로 결심했다’].”(7:10)고 기록되어 있다. 성서에서 가장 유명한 율법학자라 할 에스라도 토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토라를 공부하기’(li-drosh), ‘연구하기,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공부한다’, ‘찾는다’, ‘탐구한다는 것이 미드라쉬’(midrash)라고 부르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1352절에 보면, 51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 앞서 이야기한 여러 비유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묻고, ‘라는 답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mathēteutheis: , ‘배운’, ‘공부한’)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kaina)과 낡은 것(palaia)을 꺼내는 집주인(oikodespotēs)과 같다.” 여기서 낡은 것과 새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가 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낡은 것은 벗어버리고 새 것만 찾으려는, 율법의 극복과 혁신에만 주목하는 그런 바울적 정신과는 사뭇 다른 온고이지신내지 법고창신에 해당하는 예수의 유대적 태도가 잘 들어 있지 않나 싶다.

 

성서는, 성서의 말씀들은 진리 탐색의 끝, 종착점이 아니고 진리 탐색의 시작이다. 우리에게 답을 주기보다 우리에게 물음을 준다. 그 물음을 우리 삶과 연결시켜 계속 물어가면서, 옆의 사람들과 답을 함께 찾아가는것이 오늘 본문의 유대인 예수가 보여준 믿음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기도]

 

하느님 아버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며

율법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하느님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함께 찾으며나누려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생각, 내 믿음만이 옳다고 믿는,

그것이 한 분 하느님을 옳게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착각과 아집을 갖지 않도록 저희를 도와주시길,

또한, ‘셰마, 이스라엘을 묵상하고 실천했던

유대인 예수의 겸손과 믿음을 따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을, 하느님 나라를

함께 찾아가는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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