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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성수

 

“언제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를 묻다: 공공적/수행적 교회”
(에베소서 2:20~22 / 마태복음서 5:13~16)


 
2018년 9월 9일
 주일예배
김성수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사무국장)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에베소서가 ‘건축'에 비유하여 말하는 ‘교회의 신비’에 대하여)

- 에베소서 6:18 -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습니까?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둡니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환히 비춥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교회의 존재 의미와 그 역할에 대하여)

- 마태복음서 5:13-16 -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한 주간도 ‘평안’하셨는지요? 이 예배 가운데, 또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저희들 가운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매우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래서 한편으로 매우 어렵고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느껴지는 ‘교회’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시작하는 운을 띄우면서, 물음을 던지면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교회’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나머지, ‘교회’에 대한 물음은 낯설기 그지없습니다. 그 물음을 맞닥뜨리는 순간, 당연한 듯 바로 머리에 무언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그 무언가를 선뜻 말로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해서, 저는 시작하면서 던졌던 질문에 질문을 더하고 싶습니다. ‘교회’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또 ‘교회’는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요?


교회를 다시 묻게 하는 어떤 징후들


  교회가 무엇인지, 또 교회는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묻는 이들에게 하늘의 꿈을 품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야 할 교회의 ‘이상’과, 땅을 딛고서 존재해야 하는 교회의 ‘현실’ 사이의 커다란 괴리를 드러내는 몇 가지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혹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는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모릅니다. 이 역설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가를 드러냅니다. 동네 편의점만큼이나 많은 십자가와 교회의 숫자를 통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리지 않고 과거와는 달리 누구나 쉽게 접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증가한 숫자와 익숙해진 풍경만큼 교회의 본래적 존재의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의 본래적 존재의 의미와 그 존재의 근거였던 교회의 사명과 역할은 희미해졌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알지만,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역설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인식의 반영을 넘어, 교회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과거 어디에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동네 어디에나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오히려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은 오늘 교회의 독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정작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나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교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에 대한 거센 비판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판은 응당 그에 대한 관심과 그 존재의 이유와 역할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무관심 앞에서,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너무나 익숙한, 그러나 그토록 낯선 혹은 알다가도 모를, 가깝고도 먼
  누구나 알기에, 그리고 어디에나 있기에 너무나 익숙한 교회는 동시에 아무도 모르기에, 그리고 어디에도 없기에 그토록 낯설게 느껴집니다. 너무나 익숙한 것 같은데 그토록 낯설게 느껴지다가도, 너무나 잘 알 것 같은데 그렇게나 모르겠고, 너무나 가까운 것 같은데 그렇게나 멀게 느껴지는 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왜, 어째서 이 모든 중의적 표현들을 포괄하면서 수렴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만큼 교회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탓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지향’과 ‘반성’ 사이의 괴리가 큰 까닭입니다. 나아가, 암울하고 절망스러운 교회의 현실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독 교회를 말하는 것의 어려움과 곤혹스러움이 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를 말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하여: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물음들


— 암울한 교회의 현실 앞에서
  교회에 관해, 혹은 교회를 말한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특히, 교회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우리를 더욱 곤란하고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노골적인 비판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도 않으며,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켜야 할 표지로서의 교회는 이미 오히려 세상의 걱정거리가 된 지도 오래입니다. 변화하는 사회와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여, 도리어 세상의 모든 장벽들을 철폐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장벽들을 굳게 세우고 경계선 밖의 이들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세간의 지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습을 강행한 한국의 대표적인 어느 한 대형교회의 모습이 그렇고, 동성애 척결하는 일이 마치 기독교와 문명의 사활이 걸린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여느 보수 기독교 단체와 교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일부의 모습이 아닌 데 있습니다. 일부 보수적 교회나 단체가 아니라, 교단을 막론하고서 누가 얼마나 후진지, 누가 얼마나 퇴행적인지를 겨루기라도 하듯, 각 교단의 총회에서 망조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민으로써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사회적, 도덕적 감수성은 물론 신앙인에게 필수적인 종교적 감수성에 있어서도 이미 매우 퇴행적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제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꼴을 부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회와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교회는 오히려 퇴행하고 있으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실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만을 수호합니다. 믿음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임을 새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온갖 장벽들을 철폐하여 모두가 소통하는 세상을 연 것이 예수의 삶인데, 그의 몸이 되어야 할 교회는 오히려 수많은 장벽을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심각한 자기배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교회가 예수를 배반한 심각한 자기배반을 비꼬아 한완상은 “예수 없는 예수교회”(한완상, 『예수 없는 예수교회』 김영사, 2008)라고 통탄하셨고, 또 자기반성과 성찰을 잃어버린 채 세상과 담을 쌓고 그저 맹목과 독단으로 치닫는 교회의 암울한 현실을 비꼬아 길희성은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길희성,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대한기독교서회, 2015)하고 일갈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렇듯,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교회’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무엇이며, 교회는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요? 


— 교회론의 어려움 혹은 곤혹스러움
  신학에서 중요한 주요 주제들 중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중에 제일 어렵고 곤혹스러운 것이 바로 ‘교회론’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코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입니다. 마치 예수와 하나님 나라가 분리될 수 없듯이,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고, 역사 속에서 교회를 배제한 채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곧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담지하는 존재로,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존재합니다.
  신에 대해 묻는 것도 어려운데, 또 예수에 대해 묻는 것도 어려운데, 교회에 대해서 묻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에 대한 물음으로 점철되는 신론, 예수에 대한 물음으로 점철되는 그리스도론, 성령에 대한 물음으로 점철되는 성령론이 종합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교회론’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또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교회의 존재 의미와 성격은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해서, 교회를 바라보면, 그 교회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론은 신학의 여러 주제 중 하나이지만, 다른 여러 주제들과 깊이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오히려 다른 여러 신학적 주제들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짓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론이야말로 신학과 윤리, 이론과 실천이 만날 수 있고, 만나야만 하는 접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비가시적인 요소들 투성인 것 중에서, 유일하게 교회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의 매우 가시적인 증표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여기의 현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언제나 교회를 말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해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교회는 무엇이며, 교회는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요? 


언제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에 대하여: 공공적/수행적 교회


  앞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교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토록 낯선 교회, 알다가도 모를, 가깝고도 먼 교회에 대한 많은 이들의 공감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어떤 ‘징후’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은 가나안 성도 현상, 교회 및 종교의 유민화 시대 등으로 일컬어지는 ‘탈교회 시대’라는 현대사회의 어떤 시대적 풍경을 암시합니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거나,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와 같은 표현 또한 이러한 탈교회 시대의 징후를 드러내는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해서, 이러한 징후는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는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와 같은 근원적인 성찰적 물음과 대면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언제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적 물음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고 치열하게 되물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 역사 속의 교회, 교회의 역사: 예수와 교회
  이러한 정직하고 치열한 되물음의 과정 속에서 역사 속의 교회,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은 매우 유의미합니다. 교회는 그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이룬 신앙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의 정황과 당대의 사회 및 문화, 사상 및 역사적 배경, 세계관 등에 의거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여 왔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결코 고정 불변의 교리를 담지한 채 반복하여 전달하는 것일 수 없고, 애초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공동체의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맺게 된 결실 그 자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 잉태된 교회, 그리고 교회로 인해 재현되는 예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합니다. 예수의 삶과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가치를 이루는 것은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인 것에 반해,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교회는 오랜 기간 그 자체의 조직화를 통한 기독교 우월주의, 성직자 중심주의, 승리주의, 율법주의를 그 중심적 가치로 두면서 교회 조직 자체의 유지가 주된 존재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예수와 교회 사이에는 연속성(continuity)과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서로 공존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신학자 알프레드 로이지(Alfred Loisy)는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온 것은 교회였다.”고 언술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로이지의 진술은 오랜 시간 종종 오해를 받아왔는데, 그 오해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교회의 ‘불연속성'에 근거합니다. 예수는 짧은 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던 것이었으나, 예수의 죽음 이후 예수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제자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대신에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우려던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으므로, 교회는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고,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견 그러한 오해는 타당하고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적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죽음 이후 존재해왔던 현실의 교회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이지의 의도는 하나님 나라 운동과 교회의 대비를 통한 교회의 무용론(無用論)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지향을 담은 교회의 존재 근거에 대한 강조이고, 복음의 새로운 형식으로의 확장이며, 그로 인한 교회의 새로운 역할과 책임, 그리고 과제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이전에는 없었던 모습과 방식의 신앙공동체이지만, 예수의 죽음 이후 본래의 방식으로 전개될 수 없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교회의 등장으로 인해 축소가 아닌 ‘확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연유로 교회의 의미를 오히려 더 의미 있게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ekklesia)는 예수의 죽음을 경험하고 기억하며, 부활을 통해 예수의 현존을 새롭게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현상에 기초하므로, 교회는 조직이나 제도, 건물이기 이전에,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교회, 교회의 역사는 예수로 인해 교회가 ‘잉태'되었음을, 동시에 교회로 인해 예수가 ‘재현'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줍니다.


— 마땅한 교회의 존재 의미와 이유: 교회는 왜, 그리고 어떻게
  예수로 인해 잉태된 교회는, 다시 말해 예수가 사랑을 증언한 곳에서 태동된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를 지금/여기에서 재현해야 할 과제를 숙명적으로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존재 근거 자체가 예수가 증언한 ‘사랑'에 기초하며, 예수가 실현하고자 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세상과 타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 및 수행으로 일관했던 예수가 내내 증언한 사랑과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교회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 자체이자 지향해야 할 이정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말씀을 통해서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향해 교회의 일치와 하나됨의 과정과 교회의 의미를 공동체적으로 풀어 비유하면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동시에 교회의 신비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서술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바울은 그가 쓴 목회서신들에서 종종 교회를 건축과 건물에 비유하여 사용하곤 하는데, 그래서 교회를 단순히 건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라는 주어 사용에 있어서 이미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고쳐 읽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전체가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모퉁잇돌이 되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는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연결되어야 하며, 또한 끊임없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져 나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 곧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 말씀을 통해서도 교회는 고정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닌, 끊임없이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동시에, 교회가 되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로의 물음의 전환을 통해 교회의 존재 의미와 역할을 보다 깊게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두 번째 말씀은 익히 너무나도 잘 아는 예수의 산상수훈 말씀 중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예수의 가장 유명한 명제입니다.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본질에 대해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적확합니다. 특별히 소금이 되라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분명하게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향한 말씀입니다. 소금과 빛은 그 고유의 행위로서 작용하지만,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밝음을 드러내는 것은 그저 자신의 존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가식이나 의도가 숨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의 됨됨이가 그러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며, 그 역할과 기능 또한 마땅히 소금과 빛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교회는 그래야만 하고,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 지금/여기에서 교회의 쟁점과 화두: 공공성과 수행성
  그렇다면, 오늘날 지금/여기에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소금과 빛의 존재적 사명과 책임적 역할은 무엇이며,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여기서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 이유를 ‘공공성의 상실 및 붕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공공성'이라는 화두가 크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공공성이라는 화두는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종교 뿐 아니라, 사회와 정치, 경제 등 우리의 삶을 두루 구성하는 전 영역에 걸쳐 그 논의가 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성의 의미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그 중요성과 의미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미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전 영역에서 그 이해관계들이 얽히고설켜 충돌하는 지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어쩌면 이는 필연적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비단 우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공유해야만 하는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쟁, 난민 등 국가와 국경을 초월한 사안들이 가득한, 다시 말해서 이전과는 달라진 우리네 삶의 풍경을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의 이슈였던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나와 너의 문제, 국가와 국가의 문제를 넘어 현대사회의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공공성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우리의 시각은 그만큼 넓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이렇듯, 공공성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더 이상 혼자서는 삶을 감당하기 불가능한 시대적 흐름 안에서, 모두가 점점 도래하는, 그래서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파국적 미래 앞에서의 몸부림의 흔적일 것입니다.
  물론 공공성 자체가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풀어내는 유일한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단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공성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우리 앞에 산적한 문제와 사안들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무엇보다 민주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과정적 의미와 총제적인 문제의식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민주주의 없이도 공공의 사업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공공의 삶과 공공의 이익은 민주주의 없이는 결코 확보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시대적 풍경 속에서 다시 한국교회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가장 많은 지탄과 멸시, 사회적 불신과 냉소의 대상이 된 것은 다름 아닌 ‘공공성의 상실 및 붕괴'를 넘어, ‘이기적 탐욕'으로 무장하여 세상과 불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사회의 손가락질에도 아랑곳 않고 이기적 탐욕으로 무장하여 세습을 강행한 한국의 대표적인 어느 한 대형교회의 모습이 꼭 그렇고, 이를 통제하고 견제해야 할 교단 총회가 앞장서서 옹호하는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또한 종북좌빨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사회의 공론장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이들이 이제는 동성애 척결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사랑하니까 반대한다'며 세상과 사회의 혐오를 앞장서서 조장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와 교회의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교회 안팎에서 다양한 반성과 성찰의 시도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단연 핵심을 이루는 주제는 ‘공공성'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공공성이라는 화두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시대적 요구임을 직시할 때, 교회가 세상을 향해 건강한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상업화와 사유화에 대한 사회 전반의 우려와 경고, 그리고 비판 차원에서 촉발되었다는 매우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결코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현실의 상황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지난겨울 내내 굳세게 촛불을 들었지만, 교회권력과 교회의 사유화를 바라보며 ‘이게 교회냐'고 우리는 왜 외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국가권력보다 더 공고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권력의 구조와 그 배타성과 폐쇄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금/여기에서 교회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바로 ‘공공성' 문제를 그 핵심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 나라를 ‘사건화' 시키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야 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자 사명입니다. 신학자 손규태는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평화와 화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에 공공성을 실현하는 것”(손규태,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 그리스도교 사회윤리 개론』 대한기독교서회, 11-12)이라고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신앙적 실천을 세속적 혹은 비종교적 표현으로 고쳐 말하자면, 다름 아닌 ‘공공성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여기에서의 교회의 의미를 논할 때, 그 쟁점과 화두로서 ‘합리적 공공성'과 ‘종교적 수행성'에 주목합니다. 교회는 응당 합리적 공공성에 기초해야 하며, 나아가 그것만으로는 환원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종교적 수행성을 견지해야 하는 존재적 사명과 책임적 역할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과 빛이 자신의 존재를 녹이고 태우면서 존재적 사명과 책임적 역할을 다하듯이, 교회 또한 세상과 사회의 공공성의 실현을 넘어 자신을 넘어서는 이타적 사랑의 실천을 수행하는 것, 곧 철저하게 타자를 향하고 위하는 전적인 사랑의 실천 및 수행이 그 존재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징표이자 표지로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 존재해야만 하는 교회는 바로 합리적 공공성과 종교적 수행성의 징표이자 표지여야 합니다.


— 공공적 교회와 수행적 교회
  지금까지의 교회는 그 교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믿음과 신앙의 고백을 토대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이해해 왔지만, 오늘날 지금/여기에서의 교회는 이러한 이해와 동시에 ‘예수 사건'이 재현되는 실천과 수행을 토대로 세워지는 공동체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지금/여기에서 오늘의 예수 사건을 만들어가고 경험하며, 이를 공동체적으로 나누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넓혀가야 합니다. 자기(ego)에 갇히고, 생각에 갇히며, 이데올로기와 자본에 갇혀서 살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지금/여기에서 오늘의 공동체적 삶으로 풀어낼 때, 우리는 곧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깊이 성찰할 때, 우리는 공공적/수행적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공적/수행적 교회”라고 표현하고자 할 때, 가장 큰 화두로서 합리적 공공성을 넘어 종교적 수행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는, 합리적 공공성을 바탕으로, 나아가 그것을 전제하여 끊임없는 종교적 수행성을 견지함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함의합니다. 그러므로 합리적 공공성은 언제나 종교적 수행성으로부터 마땅히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종교적 수행성은 언제나 합리적 공공성으로부터 교회가 자기 안에 갇혀 맹목적이지 않기 위해 점검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전제될 때, 합리적 공공성에 기초하여 사회와 현실을 정의롭게 세우고자 하는 차원을 넘어, 보다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타자를 향한 존재,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사회의 체계내적 합리성을 넘어선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온전한 교회의 궁극적 존재 근거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러한 이해에 기초한 “공공적/수행적 교회”야말로 새삼스럽지만 특별히 오늘날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교회의 존재 의미이자 이유가 되어준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공공성과 수행성이 지금/여기에서 교회의 원심력이라면, 공동체성은 교회의 구심력입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별 하나는 외롭지만, 별들이 이루는 성좌는 찬란하듯이, 우리 모두 개인일 때는 외롭고 무력할 지라도, 공동체로 함께일 때, 바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는 교회의 가능성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내가 내 안에 갇히지 않고, 내가 나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자 바탕입니다. 신학적으로 고쳐 표현하자면, 공동체는 자기비움과 자기초월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자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하고,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맺으며: 탈교회 시대, 교회 이후/너머에 대하여 


— 교회 이후/너머의 교회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신학자 테드 제닝스는 “기독교 없는 사회가 올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아가, “지금 교회는 복음의 감옥”이라는 뼈아픈 말로 교회의 현실을 단도직입으로 일갈했습니다. 이미 기독교 이후 신학(Post-Christian Theology)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과 사회에서, 더욱이 복음을 드러내기는커녕 복음을 가두고 있는 복음의 감옥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현실에서, 나아가 기독교가 없는 사회가 도래할지 모르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우리는 교회 이후(after)와 교회 너머(beyond)를 고민하며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테드 제닝스의 말처럼, 교회의 본래적 존재의 의미로써 타자에 대한 존중, 배려, 사랑이라는 고유의 가치를 스스로 죽이고 권력기구가 된다면, 결국 교회는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도그마이자 기관으로서 교회는 의미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조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두려워하며 경계해야 할 것은 세상과 사회가 던지는 교회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이미 그 징후는 시작되었습니다. 가나안 성도 현상, 교회 및 종교의 유민화 현상 등으로 압축되어 표현할 수 있는 오늘날의 여러 탈교회 시대의 여러 징후는, 교회가 과거에 유지하여 오던 존재 방식이 더 이상 그 적절성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는 경고입니다. 동시에 교회가 새로운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생명력을 지닌 종교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매서운 경고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시금 교회에 대해 정직하고 치열한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교회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새로운 교회를 찾아 혹은 교회의 오랜 의미를 되찾아
  새로운 교회를 찾는다거나, 새로운 교회가 온다거나 하는 것 자체가 오늘날의 답답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겠으나, 한편으로 회의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는, 교회론의 역사는 늘 새로운 교회를 고민하고 찾아 떠났던 지난한 여정 자체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교회를 찾는다는 것은 언제나 교회의 본래적인 오랜 의미를 되찾는 여정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생각할 때, 두렵고 회의적이며 무력할 지라도 우리는 ‘교회'이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교회 존재의 바탕을 이루며, 교회 존재의 방향을 지시하는 ‘공공성’과 ‘수행성’이라는 화두는 오늘날 지금/여기에서 교회 존재의 핵심 근거이자 이유입니다. 하나의 교회를 그저 단순히 더하는 것이 아닌, 교회의 진정한 참된 그 의미를 되새겨 나아갈 때, 우리는 언제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교회를 넘어, 언제나 있어야 하고, 어디에도 있어야만 하는 교회가 되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스러운 교회의 현실에서, 교회가 준 상처 속에서도 우리는 굳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새길 공동체로서 신앙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바로 여기에 답이, 그리고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 따르미라고 고백하는 우리도 불연속성이 아닌 연속성에 기초하여 이해한 교회의 역사적 맥락 속에 오늘, 그리고 지금/여기에 놓여있는 까닭입니다. 나아가, 새길교회는 그 태생으로부터 교회의 새삼스러운 존재 의미를 되물으며 시작한 운명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새길교회를 시작하게 했던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지금/여기에서 치열하게 끊임없이 되물을 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새길 공동체, 새길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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