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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어느 일요일 아침의 기도”
(에베소서 6:18)


 
2018년 8월 26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교회 신학위원)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 에베소서 6:18 -



1. “글루미 선데이”


한달 전, 7월의 마지막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날은 너무 무더웠지만 하늘은 무척 맑았습니다.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예배드리러 차를 운전해 오는데, 저는 깊은 우울감을 느꼈습니다. 그 전 주에 있었던 사건들 때문이었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슬픔이었지요. 그 주의 첫날, 노회찬 의원이 비통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과 직접적 인연은 없었지만 그래도 삶의 동선이 여러 곳에서 교차했던 저는 가슴이 미어졌고, 다음 날 저녁 빈소를 찾아가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그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습니다. ‘지못미’라고 하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그 지못미 목록이 또 하나 늘어나면서 죄책감이 더 커졌습니다.


그 다음날엔 폭염 속에 조계사 옆 우정공원에서 종단개혁을 요구하며 단식정진을 하고 계시던 설조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막장 드라마’를 보여줄 때 불교를 보며 청량감을 느끼곤 했는데, 불교도 ‘사회문제’이긴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안타깝게 확인하며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살기 힘든 세상에 종교가 위안은커녕 오히려 걱정만 끼치고 있으니, 정말 종교가 사라지는 게 세상에 ‘복된 소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사건 말고도, 제 가까이에서 어려움과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별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한 것도 제게 번민이 되었습니다.
 
그런 비통하고 안타까운 사건이 반복되고, 그때마다 한 개인으로서 제가 하고 있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이 죄책감과 섞이면서 우울감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로 예배를 드리러 가니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울 수밖에요. 음악이라도 들으면 좀 나을까 싶어 CD 플레이어를 켰는데, 하필이면 빌리 할리데이의 〈Gloomy Sunday(우울한 일요일)〉가 흘러 나왔습니다. 슬픈 C단조의 노래를 들으며 보는 태양은 왜 그리 찬란한지요? 하늘은 왜 그리 푸른지요? 그래서 더 우울한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우울의 차로를 계속 달리는데, 문득, 출구 표시처럼 몇 년 전 스리랑카에서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 신부님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신부님께, 제 고통도 해결하지 못해 겨우겨우 살아가는 제가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반응하고 참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잠시 침묵하시더니, 당신의 한 친구 신부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분이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할 때는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느 날 이른 아침 피어리스 신부님에게 전화를 했더랍니다. 무슨 내용이었냐면, 지난밤도 두통 때문에 잠들 수 없어 기도하며 밤을 새기로 했는데, 피어리스 신부님의 어머니가 병석에 계시다는 걸 기억하고, 친구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는 겁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지요. 피어리스 신부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고통받는 타인을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아침, 몸과 마음이 다 아팠던 저도 피어리스 신부님이 해주신 이야기를 기억하며, 가까운 이들 중에 힘들어하거나 아파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할수록 기도해 줄 사람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나중엔, 오히려 길이 좀 막혔으면 하는 마음조차 들었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라도 더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일요일 아침에 제가 기억하며 기도했던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제가 기도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다보니, 무겁고 딱딱하던 제 몸과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지고 끝내는 기쁨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작은 믿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도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래 전 즐겨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레니 울프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였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 노래를 속으로 따라 부르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치워진 것 같았습니다. 연약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이유와 용기를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Gloomy Sunday’(우울한 일요일)가 ‘Joyful Sunday’(기쁨의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2. 기도의 힘


그날 아침의 경험 이후 기도의 힘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고 이해하게 된 기도의 ‘힘’은 일반적 의미의 ‘힘’과 다릅니다. 그것은 사태를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아니라 문제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체험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권력자가 독점하는 힘이 아니라 연약한 이들이 공유하는 힘입니다. 기도의 힘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무기력하고 비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진실에 더 가까울 겁니다.
 
제 개인적 신앙의 여정을 돌아봐도, 제가 정말 간절히 기도했던 것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일수록 더욱 그랬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나아도 아플 것 다 아프고 나서야 겨우 나았고, 목숨을 건져달라고 호소했던 이들은 대부분 속절없이 스러져 갔습니다. 억울하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형편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내 믿음이 너무 약한 건가, 그래서 내 기도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만약 기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의 결과는 좌절일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고 고백하는 경건한 신앙인들도 많지만, 그못지 않게 경건한 사람들도 고통을 겪습니다. 또한, 끔찍한 자연재난이나 사회적 참사는 기도의 해결하는 힘을 의심하게 합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기적을 바라며 기도했지만, 뒤집힌 세월호 안에서 단 한 아이도 살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기도가 정말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탄핵해야 했던 이는 무정한 그 정치인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 무능한 신앙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믿음이 선하고 의로운 이들이 부당하게 겪는 개인적, 사회적 고통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모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믿음이 좋으면 모든 기도가 응답될 거라고 여기는 것은 교만이라는 사실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 『기도』에서 모세, 다윗, 욥, 요나, 엘리야, 하박국, 예레미야, 바울 같은 이들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치신 예수의 겟세마니 기도도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건하고 신실한 이들의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성찰하며 얀시는 C.S. 루이스의 통찰을 인용합니다. “언제나 응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마법에 가까울 뿐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마법처럼 모두 이루어진다면 아마 세상은 교통신호 체계가 망가진 도심의 도로처럼 온통 엉망이 되고 말 겁니다. 전쟁에서 서로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나라들, 곡물이 자라도록 비를 내려달라는 가난한 농부와 일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해를 비춰달라고 기도하는 가난한 건축노동자, 재판에서 서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피고와 원고... 이렇게 상충하는 수십억 인류의 기도를 하나님은 일일이 분류하고 판단하고 조정하여 들어주시고 해결해 주실까요?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선하고 경건한 이들이 무고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하나님의 무능 또는 직무유기를 의심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도하는 것일까요? 왜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무엇보다도 기도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연결하는 기도의 힘에 대한 믿음이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듯이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되면, 아무리 큰 고통도 덜 힘들고 덜 괴롭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고통(pain)을 괴로움(suffering)으로 만드는 것은 외로움일 것입니다.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 서로를 위한 기도는 나홀로 또는 너홀로 고통을 겪지 않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힘은 고통을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하는 데, 고통을 달리 보고 달리 겪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 자매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로마서 12:12)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기자는 “끝까지” 참으라고 합니다.  바울과 에베소서 기자가 가르치고 구현한 기도의 힘은 환난으로부터 벗어나는 마법이 아니라 환난을 참는 용기였습니다. 그 가르침과 권면대로, 박해받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를 통해 환난을 한 몸이 되어 겪었습니다.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소망을 품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 각자의 고통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던 이는 ‘마법사’가 아니라 ‘친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며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가 있기에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도 성령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와 함께 기도하는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의 기도는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넌 혼자가 아니야.”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3. 사회적 기도


이렇게 기도는 우리를 연결해 고통을 나누는 친구가 되게 하고, 이 친구들의 모임에서 교회가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적 몸으로서의 교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개인의 기도가 자기 삶의 울타리 안에서만 울리는 독백이 아니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의 기도도 집단의 담장 안에서만 맴도는 소리가 아니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일구는 소명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기도는 ‘사회적 기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세상에서의 삶이 아닌 영적 세계의 삶에만 관련된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함께 읽은 에베소서 성서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전신갑주” 본문의 일부분입니다. 그중 11절과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영적 세계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로 여겨져 왔습니다. 악한 영의 작용에 대해서는 늘 깨어 경계해야 하지만, 영적 전쟁만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회적 악에 대해 무관심하게 됩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악의 외적 구조와 제도에만 관심을 갖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악과 싸우다 악에 물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두 극단은 악의 힘을 바르게 인식하며 악에 맞서지 못하게 합니다. 악의 내적 작용과 외적 작용을 모두 직시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장 정교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발전시킨 이는 월터 윙크입니다.
 
윙크는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는 권세를 “제도적인 생활의 중심에 있는 비인격적인 영적 실재”로 정의합니다. 그는 성서적 관점에서 권세들은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이고, 지상적이면서 천상적이고, 영적이면서 제도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주제 본문에서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는 에베소서 기자의 권면은, 교인들끼리 사랑을 나누자는 훈훈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악한 사회적-영적 권세들에 맞서는 저항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는 세상의 권세들에 맞서는 저항의 일부, 그것도 ‘필수적’ 일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저항을 위한, 또는 저항으로서의 기도의 본보기를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에서 보게 됩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인류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 독일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폭력과 악에 침묵하거나 공모했습니다. 하지만 소수 그리스도인들은 침묵하지 않고 작은 저항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고백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었습니다. 본회퍼는 고백교회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핀켈발데에 세운 지하신학교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본회퍼도 신학생들도 모두 사회의식과 정의감이 강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회퍼는 핀켄발데 신학교를 ‘훈련소’라기보다는 ‘수도원’처럼 만들었습니다. 실제 수도공동체의 일과처럼 성서묵상, 기도, 중보기도, 금식,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하게 합니다. 그러자 수도적 측면이 약한 프로테스탄트 문화에서 살아왔던 신학생들의 반발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행동할 때지 기도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본회퍼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그는 공동생활의 목표는 “은둔”이 아니라 외적 봉사를 위한 “내적 집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점차 신학생들도 본회퍼의 신념에 동의했고, 그들은 함께 기도와 생활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핀켄발데 신학교는 나치에 의해 2년여 만에 강제로 폐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루었던 기도와 삶의 공동체는 나치에 맞서는 저항의 힘이 되었습니니다. 아마도 기도 생활을 통해 가장 큰 힘을 얻은 이는 본회퍼 자신이었을 겁니다. 그의 삶에서 기도와 저항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습니다. 그런 본회퍼의 신앙과 삶을 생각했던 것일까요? 본회퍼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던 칼 바르트는 “기도를 위해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이 세상의 혼란에 저항하여 일어서는 행동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저항의 준비나 전단계가 아니라 저항의 일부로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세월호 이후, 촛불 이후, 미투 이후, 우리는 격동하는 ‘이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너무 격렬해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냉철한 정신 따뜻한 가슴으로 시대의 표징을 식별해야 할 것입니다. 1987년, 시대의 표징을 식별한 예수따르미들이 새길을 창립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시대의 표징을 읽고 응답하고 참여하며 새길을 계속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복잡하고 복합적입니다. 권세들은 우리 바깥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은밀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월터 윙크는 기도 없이는 우리의 내적 삶이 위축되고, 결국 우리가 맞서는 세력과 같아진다고 경계하면서, “기도는 권세들로부터 전염된 영혼이 치유되는 야전병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는 가슴이 무너진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줍니다. 그렇게 기도를 통해 한 자매형제, 한 몸이 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계속 고통을 겪을 지도 모르고, 공동체적으로도 환난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모든 성도를 위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삶의 길이 되어주고 “야전병원”이 되어줄 것입니다. 지난여름 수련회 때, 새길의 기도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최만자 선생님은 “공동체가 곧 기도”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고백대로, 새길이 기도의 공동체이기를, 새길이 기도이기를, 우리가 고통 받는 서로와 모든 성도를 위한 성령의 기도이기를 바랍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해와 달이 빛을 잃을 때
소리가 빛이 되어줍니다.
어둠 속에 있는 우리의 기도가
서로의 길을 찾아주고 인도해주는 빛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 안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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