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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08.16 17:47

[2018. 8. 5] 고통과 선(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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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용덕


“고통과 선(善)”
(로마서 8:22-24, 28)
 

2018년 8월 5일
 주일예배
김용덕 형제(광주과학기술원 명예석좌교수)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로마서 8:22-24, 28 -



고진감내(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지요. 어려운 일이 지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만, 이 말을 들을 때면 저는 지금 읽은 ‘협(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성경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떠나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으로 얼마나 위안이 될까 생각해보면 좀 암담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옳으심과 선에 대한 확신을 갖고 희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을 보면 바로 거기에 주님이 같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의 얘기를 오늘 하려고 합니다.


권정생(權正生 1937-2007)선생입니다(다음의 제 이야기는 이기영님이 지은 <작은 사람 권정생>에 많이 의존하였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병고 속에서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 동화를 많이 지어주신 분이지요. 그 분의 아버지는 안동시 일직면의 가난한 소작인이었는데, 삶이 힘들 때면 도박에 빠져 그나마 살림마저 거덜내곤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일본에 가면 조금이라도 벌이가 나을까 싶어 아버지는 가족을 두고 떠납니다. 안동에서 태어난 권정생의 형 셋과 누나 둘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난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벌이가 시원찮아 그랬겠지만 가족을 부르지 않고 있어 어머니는 마침내 아들 둘 딸 둘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 갑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곧 데려가겠다며 할머니에게 맡기고 갑니다만 할머니는 문둥이 삼촌을 데리고 산골에 들어가 살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권정생이 태어난 것은 동경의 한 빈민가에서였습니다. 1937년은 이른바 ‘대동아전쟁’이라고 하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전국이 전쟁에 휩쓸리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전쟁에 휩쓸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빈민가의 어린이들은 가난 그 자체로 서로 이어진 듯 일본 어린이들과 잘 어울리며 주일학교에도 나가곤 합니다. 그곳에서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는 예수를 보게 됩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아닌 고통 속의 예수를 마음에 새기며 왜 그렇게 죽어가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한편 안동에 남겨놓고 온 둘째형이 죽었다는 소식이 일본으로 날라 옵니다. 어머니는 너무 한스럽고, 두고 온 아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린 정생에게 한 맺힌 사연, 아마도 할머니의 구박 속에서 죽어갔을 둘째형에 대한 아픔을 눈물 속에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이 둘째형의 죽음이, 또한,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와 함께 그에게서 평생 떠나가지 않습니다. 힘든 ‘유형의 세계’보다는 ‘무형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그에게서 나타난 것이 이 때 부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현실 속에서 힘들고 치열하게 살았지만, 타협하며 살지 못하는, 외롭고 힘든 삶을 정생은 일찍부터 보고 자라며 또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전쟁 속에서 삽니다. 일본에서 돌아와 또 다시 가난한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때가 바로 좌우대립으로 한마을의 사람들이 서로 불목하고 싸우던 때입니다. 하루는 하도 배가 고파 동생과 같이 밤중에 정미소로 쌀을 훔치러 갔다가 들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정미소 아저씨는 ‘가난한 사람끼리 도와야지’ 하며 쌀을 더 퍼줍니다. 다음 날 태극기와 붉은 기를 든 사람들 속에서 정미소 아저씨를 봅니다. 얼마 후 마을에서 주재소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6.25, 한국전쟁이 터집니다. 끊임없는 전쟁의 계속입니다. 이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합니다.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 중학 공부를 시켜 보려고 어머니가 힘들게 행상해서 모은 돈은 1953년 화폐개혁으로 쓸모없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는 정생이 나무를 해다 팔아 닭을 사서 중학교 갈 돈을 마련하여 가는 중에 때마침 닭 전염병이 돌아 그 닭들마저 전부 죽어버립니다.
    
고학을 해서라도 중학교에 가겠다며 혼자 부산으로 가 재봉가게 점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 이북에서 혼자 내려와 자동차정비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오기훈을 만납니다. 기훈이는 정생이 못지않은 독서광이어서 서로 열심히 책을 빌려서 돌려 읽어가는 마음의 친구였습니다. 또 전쟁고아로 고아원에서 자라다 장사꾼 집 심부름을 하며 사는 최명자를 만납니다. 명자는 정생에게 성경책과 찬송가를 선물합니다. 이 명자의 선물은 정생이 평생 간직합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기훈이의 자살은 정생에게 이겨내기 힘든 충격이었고 뒤이어 명자도 서울로 간다고 떠나갔습니다. 명자는 후에 사창가에서 봤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게 됩니다.
    
그래도 자신의 고통을 예수와 함께 이겨내겠다는 정생이지만, 그 충격이 그만 폐결핵으로 번집니다. 병든 몸으로 집에 돌아옵니다만 이미 결핵이 심하게 번져가는 상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던 때입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개구리, 뱀 등을 찾아 산으로 들로 다니며 잡아다 정생이에게 먹입니다. 이 보양식 덕분에, 그리고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과로로 병을 얻어 돌아가시며 정생의 병세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과 겹쳐 악화되어갔습니다.
    
그 때, 첫째형과 셋째형은 일본에 그대로 남았고, 정생의 집에는 아버지와 동생, 이렇게 남자 셋만 남게 됩니다. 건강한 동생이라도 결혼시켜 손주라도 보고 싶은 아버지는 정생이 집의 큰 부담이라고 생각하여 어느 날 정생에게 집을 좀 떠나 있으라고 합니다. 집에서 받은 몇 푼 안 되는 돈이 떨어지자 거지생활을 하게 됩니다. 석 달 동안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만났고 갖가지 경험도 합니다.  그는 이 석 달의 거지생활 동안, 예수의 40일 금식을 그려보며 지냅니다. 거지생활 중 만난 착한 사람들, 그 중에는 가난한 사람 잘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예수가 다시 살아났음을 믿게 됩니다. 거지의 시선으로 세상을 ‘거꾸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더욱 망가져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때 결핵이 온 몸에 번져 콩팥과 방광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습니다(이 후 평생 소변통을 몸에 차고 다니게 됩니다). 수술비용은 소식을 들은 셋째형이 일본에서 보낸 것으로 충당합니다만, 그 형이 조총련계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생 또한 요주의 인물로 찍혀 주위 사람들 중에는 경계를 하며 거리를 두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196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소작인에게 쓰게 했던 농막에 더 머물 수 없어, 안동에 있는 일직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교회 종지기가 됩니다. 여기에서 거지 나사로를 생각하며 가난한 삶, 욕심 없는 삶에 만족하며 삽니다. 새벽하늘에 퍼지는 교회 종소리와 정생의 얘기를 듣는 순수한 아이들을 벗 삼아 사는 삶이지요. 마침내 <강아지 똥>이 그 다음 해 세상에 나옵니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그에게 강아지 똥은 오물이 아니라 다음 해 봄에 민들레가 피어나게 하면서 먼지처럼 하늘로 날아갑니다. 이 동화는 우리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심사에서 그 작품명 때문에 예심에서 탈락한 것인데(예심은 대개 실무자들이 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이 신통치 않아 심사위원들이 한번 탈락한 작품들을 다시 보자고 해서 살아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 돈이 필요해 응모해서 당선되면 그것으로 얼마간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과 함께 하기로 한 정생은 오히려 돈이 모일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을 읽고 감탄한 동화작가 이오덕 선생과 이현주 목사 등과 교유하게 된 것도 이 언저리입니다. 처음으로 터놓고 자기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전우익이란 시골 지식인을 만나 일본어로 된 사상서들을 읽으며 그의 사상을 정리하게 됩니다. 1970년대 한 참 유행하던 제3세계 해방론 등을 읽으며 정호경 신부와도 깊이 사귀게 됩니다.
    
그의 <몽실언니>를 비롯한 동화작품들은 반반공(反反共)동화라고 합니다. 정생이 가장 싫어했던 것이 동화 속에 반공의식을 심어 넣어 어린 마음에 증오심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반공에 대한 반대와 저항은, 물론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의 동화를 읽은 사람들이 반전과 평화운동에 나아갔으면 하는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차츰 커져가는 일직교회의 권위주의와 금전우선 신앙태도에 지쳐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마침 그의 동화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근처 ‘빌뱅이 언덕’에 한 칸 집을 짓고 옮겨갑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잡아가려는 때에 골프장 건설이라는 큰 적을 만납니다. 그는 마을에 들어와 자연을 훼손하는 골프장 건설에 극력 반대하다가 끝내 실패한 후 더 가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자연훼손과 노동착취로 이룬 부자들의 세상에 맞서 그는 자연과 더불어 제 몸으로 사는 가난한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바로 ‘거꾸로 사는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그는 2007년 힘든 삶을 마칩니다만, 통장에 10억 원이 들어있는 것이 사후에 확인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써달라는 뜻과 함께.


그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의미로서는 끝내 ‘선’을 이루지는 못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세상을 보는 그의 사상을 따른다면 그는 궁극적으로 뜻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10억 원이라는 돈으로 조금 더 안락함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가난해지기 위해 그 돈을 저축한 것이겠지요.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몸으로 느끼면서, 좌절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참아낸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에 맞춰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정생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온 불후의 명작들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통해서, 고통 속에서도 이뤄 내는 하나님의 善이 아니겠습니까?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구하는 선이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선과 옳으심은 우리가 사는 동안 확인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믿고 사는 것이 저희들의 길이 아닐까요? 부디 이 세상의 고통 중에 살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데에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무더위가 자연훼손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면 조금씩이라도 자연의 본모습을 회복해가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옵기 빕니다. 고통 속에 돌아가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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