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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신앙고백

(에스겔 37:11-17)


2018715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한국민중신학회)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한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 에스겔 37:11-17 -

 

 

민담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잘 아는 심청전이 있습니다. 아버지 심봉사의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양미 3백석과 자기 목숨을 맞바꾸고 임당수에 빠져서 스스로 제물이 된 심청이의 이야기입니다. 심청이는 효도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실 심청전은 희생을 효로 포장하여 아름답게 꾸민 이야기입니다. 심청이를 희생제물로 죽게 한 것은 아버지의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많은 공양미를 바치면 부처가 눈을 낫게 할 것이라는 헛된 종교적 믿음으로 약속해 버렸던 것입니다. 부처님을 향한 잘못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린 16세의 아까운 생명을 바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심청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찬스는 있었습니다. 무릉촌 장 승상 부인이란 착하고 착한 심청에게 어머니와 같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심청을 좋아해서 의붓딸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심청이 몸이 팔려 임당수로 간단 말을 듣고 일꾼을 불러 심청이를 부릅니다. 심청이 시비와 함께 무릉촌 건너가니 승상 부인 밖에 나와 심청의 손을 잡고 눈물지어 하는 말이.. “쌀 삼백 석 줄 것이니 선인 불러 도로 주고 망령 의사 먹지 마라합니다. 이에 심청이 말하기를, “당초 말씀 못한 일을 후회한들 어찌하며 또 몸이 위친하여 정성을 다하자면 무명색한 재물을 바라리까... 노친 두고 죽는 것이 이효상효하는 줄은 모르는 바 아니로되 천명이니 하릴없소. 부인의 높은 은혜와 어질고 착한 말씀 죽어 황천에 돌아가서 결초보은하오리다.” 以孝傷孝(이효상효)란 효로써 효를 상하게 한다는 뜻이니, 심청이 상황파악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심청이도 이 사태를 천명, 즉 하늘의 뜻이라고 이해했고, 신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심봉사의 어리석음으로 심봉사는 귀한 딸을 잃게 되었고, 그것을 신의 뜻으로 충직하게 따르는 심청이는 이효상효, 즉 효로써 효를 상하게 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약하디 약한 16세 심청은 신의 이름과 효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습니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성서에도 나옵니다. 유명한 사사 입다의 딸의 이야기입니다. 사시기 11장에 나오는 입다는 굉장한 용사였습니다. 그는 정실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고 길르앗 지방에서 소외당하고 쫓겨나 있었는데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암몬을 막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용사 입다가 필요했습니다. 그를 불러 지도자로 세우고 암몬과 싸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입다가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암몬을 쳐서 이기게 해 주신다면, 누구든지 내 집문에서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는 그 사람을 주에게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라는 아주 잘못되고, 또 무시무시한 서언입니다.(11:31) 필요없는 서원이었습니다. 전쟁시기라 하나님이 피를 요구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예수의 사랑의 하나님과는 전연 다른 하나님입니다. 결국 승전 후 집으로 돌아오니, 나온 사람은 입다의 외동 딸이었지요. 입다의 딸은 소구를 치고 춤추며 그를 맞았습니다. 입다는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신께 서원했으니 돌이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입으로 주께 서원하셨으니, 서원하신 말씀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이미 주께서는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에게 복수하여 주셨습니다.”

 

전쟁에서 암몬인들을 죽였고, 그 댓가로 어린 딸을 더 죽여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야훼 신은 끊임없이 생명을 죽이는 신으로 이해됩니다. 그렇게 그러한 신으로 입다와 입다를 따르는 공동체가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한 어린 아이가 죽게 됩니다. 입다의 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 달만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처녀로 죽는 이 몸,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실컷 울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두달만에 딸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께 서원한 것을 지켰습니다. 그후에 이스라엘에 하나의 관습이 생겼는데, 이스라엘 여자들은 해마다 산으로 들어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 이 이름도 안 알려진 이 소녀를 애도하며 나흘 동안 애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슨 이상하고 기괴한 관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입다의 행동에 대해서 항거하는 행동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여만 하는 상황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소개했던 두 외동딸, 심청이와 입다의 이름없는 딸은 이러한 운명 속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마치 한반도에서 남북이 갈려서 서로 적대해야만 하는 것도 운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운명이란 실은 우리가, 아니 힘있는 자들이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원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지혜롭게도 하나님이 이러한 운명을 찬성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운명은 인간 세계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세상의 힘, 세상의 권위가 만든 운명이지, 결코 하나님이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교회에서는 입다의 딸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녀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거나 불의한 것이 아니라, 칭송받아야 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멘탈리티가 운명주의를 만들고, 희생양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잘못된 신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 안셀름의 생각에 따르면 더욱 그렇습니다. 11세기의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에 의한, 아버지를 위한 희생제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것이 기독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해석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타락으로부터 회복하고, 피조물인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손상된 하나님의 의와 명예를 회복하려면, 인간의 회개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보다 더 큰 존재 즉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신인인 예수 그리스도 만이 갚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를 구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발전되었는데 여기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인간의 회개나 변화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선한 행위을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교만일 뿐이며, 주제넘는 짓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은 인간들과 세상 권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넘겨지고 강압적으로 부과된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는 사고를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사고의 프레임을 예수의 십자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신이 예수의 십자가를 준비하고, 마련하고, 그리고 그것을 운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라고 본다면 문제는 좀더 분명하게 해결되어질 수 있겠습니다. 예수를 죽게 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권력일 뿐입니다. , 로마 제국, 유대 종교권력, 그리고 그 추종자들 등이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안셀름은 이 인간권세들을 쏙 빼버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한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역사적 세력들을 추상화하여 사상해 버리고 하나님만이 등장합니다. 비역사적 독해라고 하겠으며, 십자가 사건에 대한 왜곡이라 하겠습니다. 나중에 나치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려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러한 왜곡이겠습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은 희생을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희생당하는 자들에 동참하는 자라는 것이 예수의 입장이고, 복음서에서 나타난 가르침인 것입니다. 예수를 희생양으로 만든 세상권력은 하나님에 대해 범죄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예수의 희생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면서 예수와 함께 희생양을 만드는 인간권력의 기제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대속한다는 교리는 인간 권력에 동조하고, 권력관계와 희생양을 만드는 기제와 잘 통하는 교리이며, 희생양 구조를 만드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크리스천들의 노력이나 사회개혁운동을 가로막는 보수반동적 비이성적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이러한 희생양을 만드는 기제, 메카니즘을 폭로했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낙오자나 희생양이 없이 함께 사랑으로 살아가는 구원의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의 십자가는 더 이상 우리 민족 안에 희생자가 없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 전체가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제국들에 의해서 더 이상 희생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In The Ai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고전문가에 관한 얘기인데요, 남을 해고하면서 먹고 사는 직업입니다. 젊은 해고 전문가가 늙은 사원을 호출해서 영상통화로 해고를 통보합니다. 이 사람은 한동안 반신반의하며 저항하다가 이 젊은 해고 전문가에 결국 항복하고 울면서 서류를 들고 방을 나갑니다.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 직업이 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남을 희생시키며 자기는 승승장구한 사람들이 있는데 더러는 지금 감옥에 가 있습니다. 최근까지 대법원장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의 판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지난 627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김주중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아직 48세밖에 안 된 가장이었는데 그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법원에서 판결한 회사에 내야 할 손해배상 판결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가정을 꾸려가고 버텨왔습니다. 그가 재임했던 대법원은 2심에서 이긴 재판을 뒤집어서 원점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들에게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9년 동안 30번째의 죽음이 됩니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무섭습니다. 희생양들이 죽고야 마는 무서운 현실입니다. 이것을 부추긴 세력이 대법원입니다. 사법기관이 죄 없는 생명을 보호하지를 않습니다. 대법원은 쌍용자동차 해고무효 소송 2심에서의 무효선고를 뒤집어서 재판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KTX 철도원에 대한 대법원의 기각으로 또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고문으로 간첩으로 만들어진 죄 없는 사람에게 실형을 내렸고 어떤 이에게는 무죄로 선고된 것을 뒤집어 패소시키고 받았던 배상금을 이자까지 더해서 토해내게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사법적으로 이러한 희생양을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법기관들이나 경찰, 기무사, 정보부가 앞장서서 희생양 죽이기, 희생시키기를 집행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 한반도의 민중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희생자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한말로부터 이어진 우리의 역사는 오늘과 직결된 역사인데, 이 기간에 우리 민족은 특별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가서 50년간 고통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한말 이후 40 여년간을 고통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로 흩어졌습니다. 미주도 갔지만, 국경 근처인 중국의 만주와 간도 지방, 일본으로 많이 갔습니다. 피란민 생활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민족 전체가 당한 고통과 특히 독립운동으로 죽어가거나 고문당하고 투옥당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가난에 늪에 빠져서 그야말로 희생양처럼 끌려 가며 죽지 못해 살아왔습니다.


라운드 업이라는 영화는 프랑스인들이 (그 정부가) 2차 대전 중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데에 일조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는 나치 히틀러에 침략당하고 앞잡이 정권인 비시 정권이 들어섭니다. 비시정부는 독일을 대신해서 유대인들을 잡아들여 대형 체육관 시설에 수용했습니다. 원래는 수 만 명의 유대인을 잡아들이려고 했지만, 프랑스 민중들이 유대인들을 숨겨줘서 1만 여명만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영웅적인 프랑스 간호사가 나오는데 수용소에서 지급되는 식량을 똑같이 먹으면서 성실하게 유대인 환자들을 치료하고 어린이들을 돌보아 줍니다. 그녀는 희생양을 제조하는 구조 속에서 이를 거부하는 용기 있는 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에 비해, 북한이 그동안 제국주의적 힘에 의해서 희생양으로 죽어가지 않기 위해서 핵을 만들었던 것은 정말 불행 중 다행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핵을 포기하는 댓가로 이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으로도 번성하고 살아남아가겠다고 하는 생각은 정말 근거가 있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결단은 이제 더 이상 제국과 권력에 의해서 인민이 희생되는 것을 막아야 하겠다는 큰 용단이요 남북한 민족의 기회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고, 사랑에 기초한 복음이요 믿음이요 이성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이 좀 추상적일 수 있지만, 오늘날의 상황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타개해 나가기 위해 적합한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때가 찼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의 말씀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복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민중적이고 정치적인 복음이요,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복음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개인적인 것을 포함하여 모두 정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복음은 전체적, 포괄적 복음, 정치적 복음, 영어로 말하면 wholistic and political Gospel 혹은 mission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전체적 즉 Total, 혹은 Wholistic한 것이고, 무엇이 정치적인 것인가? 전체적, 포괄적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먼저 아무도 배제되는 존재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모든 요소들을 다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토탈, 홀리스틱이라는 말이 되겠지만, 그것은 부차적입니다. 무엇보다도 배제되는 존재가 있느냐를 놓고 생각하며, 그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토탈, 홀리스틱이란 말이 의미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복음은 민중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희생양을 살리는, 희생양이 없게 하는 이성이요 복음이어야 합니다. 승자독식의 개발주의적인 이성이 아니라, 낙오자들을 보듬고 함께 가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약자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으로 담겨있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복음(wholistic reasoning)과 반대되는 것은 희생양을 계속 양산해 내는 세상적 기제, 희생양 메카니즘,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피의 대속론이며, 이러한 것에 기초하는 복음은 부분적 복음, 결여된 복음입니다. 이것은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한 복음입니다. 가진자, 강자에게 유리한 복음과 교리는 약자를 효율적으로 희생시킵니다. 피의 대속론과 희생양 메카니즘은 잘 어울리는 것이며, 이것은 특히 약자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입니다.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민중적 복음이 희생자, 낙오자 없이 모든 사람들이 인간적인 정당한 대우를 받는 상태를 위한 크리스천의 작동원리라고 한다면, 그 복음은 예수의 희생적 행동 즉 십자가에서 기초되고 완성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희생자이자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희생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며, 우리들은 그분의 현존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의 요점이기도 하며, 에큐메니칼 신학의 정신이며, 특히 정의를 추구하는 민중신학의 입장이며, 이것은 이제 한국 교회의 신학적 정통적인 입장으로 선언되고 채택되어야 마땅합니다.

 

너무 길게 돌아서 오늘의 본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어야 하는데, 평화통일을 위한 신학적 근거를 십자가에서 마련해 보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길게 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이 골짜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많은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인들의 고난과 절망과 죽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마른 뼈들 속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온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북왕국과 남왕국을 하나로 통일시키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시겠다는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모두 제국에 의해서 영향 받고 지배받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남북으로 갈려서 제국들에 영향 받고 지배받은 역사와 동일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40여년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노예 생활을 했는데 심판받아야 할 일본은 오히려 더 잘 살게 되었고, 일본에 의해서 침략 당했던 우리는 전승국의 일원이었는데 정작 분단은 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아가서는 전쟁까지 겪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역사이며, 우리가 강대국의 희생양 만들기의 덫에 다시 걸려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엄청난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전쟁으로 수백만명이 죽고, 그 전후로 분단과 이념문제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고, 감옥에 들어갔고,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근대의 한반도의 역사적 과정은 이렇게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해 내는 잘못된 불행한 역사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분단의 역사, 희생제물을 바치는 역사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폭로하고 끊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두 개의 막대기가 하나로 결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최후의 희생자가 우리를 희생자의 자리에서 구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먼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세상권력자들이 만든 희생 메커니즘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once for all) 이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을 이긴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 구원자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뒤를 따라 우리도 희생양을 만드는 모든 악의 영, 악의 세력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절망의 마른 뼈에서 새살이 돋고 피가 도는 살아있는 백성으로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기회를 끝까지 붙들고 나가 마침내 한반도에 진정한 구원의 때가 오도록 그러한 날들을 만들어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십자가만을 믿고 그 뒤를 따르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제 더 이상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큰 지혜와 복음의 정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때가 이르렀는데 우리가 잘못하여 그 때가 빗겨가지 않도록 늘 깨어있게 도와주시옵고, 저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진정한 해방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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