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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대식

 

자연의 신음과 고통은 하느님의 가쁜 숨입니다!”

(로마서 8:22-27, 사도행전 2:1-21)


201863

환경주일예배

김대식 교수(대구가톨릭대)

 

 

[그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 로마서 8:22-27 -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사도행전 2:1-21 -

작가 이외수의 명상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슬픔이 깊으면 자연을 벗하라. 모든 자연은 천혜의 성전이다. 그 성전이 당신에게 안식을 선사할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풀 한 포기도 벌레 한 마리도 모두 조물주가 저술한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이다. 행여 하찮게 여기거나 함부로 손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여. 꿈이여. 깨달음이 없어도 좋으리니, 우리에게 만물을 사랑하는 그 마음만 키워다오.” 좋은 생태학적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일까요? 별로 관심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질문이 될지도 모르니, 좀 더 범위를 작게 잡아 볼까요?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래 전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묵시문학적 유산인 천국과 지옥의 두 갈래 기로에서 지옥을 면하는 것이 구원일까요? 복음서를 가만히 보면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의식을 갖게 되었던 예수가 사람들에게 맨 처음 했던 말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engiken e basileia tou thou)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요한복음 연구의 대가인 다드(C. H. Dodd)가까이 왔다has come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했다는 RSV(Revised Standard Version)는 이를 at hand(손에 닿을 정도로, engys), 혹은 near라고 옮겨놓았습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근거에서 보면, 구원은 오고 있는 하느님의 지배 혹은 통치를 어떤 자세로 맞이할 것인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 그것은 이 땅에서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고 하다가 생이 다한 후에 다시 하늘나라에 가서도 잘 입고, 잘 자고, 잘 먹으면서 사는 평균적인 삶,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일상인(das Man)의 삶이 아닙니다.

 

적어도 성령, 즉 하느님의 영 혹은 하느님의 정신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유없이 사는 이기적인 신앙과 삶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세속적인 몸의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삶을 지향한다고 사도 바울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시대에 하느님의 정신을 자신의 삶의 기운과 척도로 해서 살겠다는 그리스도인은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만큼 피조물의 구원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정신이 자신의 마음에 각인된 그리스도인은 나만의 구원, 인간만의 구원과 해방뿐만 아니라 피조물과 더불어 구원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더불어 구원이요 다함께 구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구원의 대상인 피조물은 인간에 의해서 신음과 고통, 상처와 파괴, 착취와 억압으로 인해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횔덜린은 만족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한 인간이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고 삶이 어떻게 느껴지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폭풍과 바람을 벗어난 사람과 같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또한 아는 것, 전체 삶의 순응과 숭고함을 아는 것 더욱 좋은 일이다. 노력의 수고로부터 기쁨이 생겨날 때, 그리고 이 시간에 모두가 얻어낸 재화라고 스스로 부르듯이, 푸르른 나무, 가지들의 끝머리, 줄기의 껍질을 에워싸고 있는 꽃들 신적인 자연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들은 하나의 생명, 이것 위로 하늘의 대기가 허리 굽혀 절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삶 그 자체의 진리나 본질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일생을 살다가면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자연도 나름의 미적 가치, 생명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조화와 균형, 균제, 반복적 형태의 감성의 재현을 보여주는 자연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한 감성을 체험하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미를 판단하는 능력인, 이른바 칸트가 말하는 주관적 보편성(subjektive Allgemeinheit)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미적 감수성을 누가 부여한 것일까요? 횔덜린은 신적인 자연이라는 과감한 표현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이른바 범신론적 해석입니다. 자연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이 느껴집니다. 하느님이 생명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가 자연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에 하느님이 내재한다는 횔덜린의 시적 표현은 단지 추상성이나 개인의 고백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은 동근원적 성격을 띱니다. 하늘의 마음과 정신이 아니면 인간은 물론 자연도 살 수가 없습니다. 자연을 신성시하고 자연의 생명 그 자체가 하나의 신적인 능력의 운동처럼 인식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고 착취하려고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이 인간의 구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인 양 배타적 존재로 치부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태적 죄악은 자연을 대상화하고 수단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들의 신음과 고통을 외면합니다. 인간과 더불어 동등하게 하느님의 구원의 자리, 하느님에 의한 해방을 염원하는 자격이 없는 듯이 취급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요 하느님의 정신대로 사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횔덜린의 시를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감성을 위해서 감행하는 것 이것이 무엇인지 운명이 무엇인지, 지극한 것,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리. 그것이 삶이라고, 깊은 생각처럼. 자연이 평범하고 평온하게 해주는 사람 그 사람은 나에게 사람들을 위해 즐겁게 살라고 경고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 앞에서 현자들도 몸을 떠는 투명함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농담하고 웃음을 웃을 때 명랑함은 아름답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한 감성, 지극한 운명인데 그렇게 감성적으로 살며 지극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도록 하는 것은 자연입니다. 피조물은 겸손한 감성으로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그와 같은 자연이 사람들을 평온케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기쁘게 살라고 일러줍니다. 즐거움과 기쁨의 감성은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구원의 표상입니다. 구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 salvation은 전인적 건강을 가리키는 라틴어 salve에서 온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의 지표인 건강한 사람은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감성적 표현과 관계를 적극적으로 나눕니다. 현재와 미래, 오고 있음과 아직 오지 않음이라는 긴장 속에서 희망적인 구원, 메시아의 구원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성적 관계로 맺어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웃음, 명랑함, 아름다움과 같은 긍정과 쾌의 기분을 나타냅니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 구원의 희망을 자신의 몸, 정신, 그리고 기분을 통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이른바 자신의 감성적 관계를 통하여 신적 자연, 혹은 하느님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연과의 관계는 총체적인 인간의 기쁨과 즐거움, 명랑함이라는 근본적인 신앙기분을 갖게 만듭니다. 기쁨과 즐거움, 명랑함이라는 신앙적 근본기분이라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이고 가식적이고 전략적인 감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의 희망이 사라지고 나아가 자연이 황폐해짐으로써 신앙적 근본기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대상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라면 자연은 그 구원의 전령자요 희망의 전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구원과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가능성과 그로인해 웃음 짓게 만드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기쁨, 즐거움, 그리고 명랑함과 웃음이라는 감성적 기분 상태를 회복하고 종국에는 인류의 구원을 확신하는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하느님의 영에 기대고 하느님의 정신으로 무장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니까 성령이 인간에게 와서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하는 신앙인들에게 영언(靈言), 즉 영적 언어로 말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감각화하고 신의 의지를 실현합니다. 기도는 하느님 자신의 현존으로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느님의 영은 인간에게만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에세이스트 찰튼 래어드(Charlton G. Laird)는 초기의 언어학자들이 히브리어는 아담의 언어라고 보고, 언어란 인간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로 생각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설명처럼 만일 언어가 하느님이 준 선물이라면, 하느님의 영의 선물은 인간과 피조물 전체의 구원입니다.

 

횔덜린은 말합니다. “남자들의 진지함, 승리와 위험들 그것은 교육받은 것에서, 목표가 있다는 지각에서부터 생겨난다. 최고인 자의 드높음은 존재를 통해서, 그리고 아름다운 유물을 통해 알 게 된다.” 이것은 남자의 찬양이 아닙니다. 인간의 권력과 지배는 초월적 존재를 통해서, 지금 역사와 시간 속에 남겨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나타날 때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횔덜린이 그토록 말하고 싶어 하는 삶의 형이상학도 초월적 존재와 자연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꿈틀거리면서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옴짝달싹 못하게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고, 자연까지도 사유화하려고 할 때 하느님의 생각, 성령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는 약하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에게 기대어 우리를 도와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의 인간의 욕망, 그로 인한 자연의 탄식과 절규, 아픔을 대신 간구해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도 깊이가 없고 진정성도 없고 사랑과 생태적 언어로 말하는 것도 어렵다면 인류와 피조물 전체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께 짧은 말로라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또한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횔덜린의 시를 더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삶은 행동에서 나오고 또한 모험적이다. 드높은 목표, 더욱 바로잡힌 움직임. 몸가짐과 발걸음, 그러나 덕망으로부터 축복이, 그리고 위대한 진지함이, 그리고 또한 순수한 청춘이....(다른 한쪽은 고뇌에, 그리고 쓰디쓴 고통에 이른다. 삶을 농하는 사람들이 몰락하고 형상과 얼굴이,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도 않게 행동했던 한 사람의 것으로 변할 때.)” 지금의 평온한 삶, 지탱가능한 삶이 되려면 기도라는 행동과 함께 생태적 행동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움직임, 몸가짐, 발걸음이 생태적 덕으로 이어지도록, 그리고 삶은 불편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이 가능한 한 피조물의 구원을 고려하는 생태적 진지함과 성숙함이 요청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츠지 히토나리(辻仁成)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런 말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들 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보통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후쿠시마의 원전사고, 포항의 지진과 그로인한 경주의 핵폐기물저장소의 위험성, 광우병사태, 지구온난화, GMO식품, 먹거리의 불신과 불안 등. 이것들은 생태적 망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앞에 스쳐지나간 수많은 환경적 재앙에 대한 생태적 망각은 더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원은 위험과 함께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이 함께 구원을 이루어야 할 우주 공동체 속의 나, 생명 일반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피조물의 고통과 신음과 직결된 것임을 잊지 말고 더불어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교회는 새길교회입니다. 새길은 새와 길의 합성어이지요. 먼저 길은 서양의 로고스, 동양의 법, , 진리, 다르마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새는 사이로 풀 수 있습니다. 여백, 공간, , 생각 짬, 알짬, 배려, 거리입니다. 이처럼 새길교회는 생태학적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생태학적 가치를 실현하고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는 생태공동체가 되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제가 좋아하는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순결한 마음과 생명에 대한 성찰, 그것이야말로 생태적 위기를 맞이한 현시대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인 듯 싶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자연 속에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믿고 살아갑니다. 아니, 자연이 아파서 우리조차도 아프고, 하느님도 힘겨워하신다는 공감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인간의 삶의 질이나 개선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라서 자연은 자신의 살덩이를 남김없이 내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자연의 상처를 싸매면서 살 수 있게 하옵소서. 교회나 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집니다. 건물의 외형을 키우면서 땅과 물과 바람 그리고 불에 부담을 주는 교회가 아니라 소박한 교회, 단순한 교회, 소비지양적인 교회, 작은 교회를 통해서 사람사랑, 자연사랑, 하느님 사랑을 잘 실천하게 하옵소서. 우리도, 자연도 하느님의 의지의 표상들입니다. 이제 모든 존재자들이 파괴와 고통을 멈추고 화해와 사랑, 공존을 통하여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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