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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은경

 

경건에 이르는 길

(마태복음 6:1-4, 25:31-46)

2018429

주일예배

이은경 박사(감리교신학대)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할 것이다.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 마태복음 6:1-4, 25:31-46 -


마태복음 5-7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일명 산상설교라 불리는 내용이며, 오늘 처음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이 산상설교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셨는데, 그중에서도 마태복음 61-18절은 믿는 자들이 행해야 할 3가지 실천적인 덕목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선으로, 오늘의 본문 말씀인 1-4절에 해당합니다. 5-15절은 기도, 이 기도에 관한 구절 안에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이 들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16-18절까지는 금식에 대한 덕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가지는 우리 삶의 3가지 영역, 특히, 나와 이웃과 하나님에 관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덕목인 자선이 이웃에 대한 관심이라면, 두 번째 덕목인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이고, 세 번째 덕목인 금식은 자기 자신을 향한 관심으로, 이 세 가지는 나누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3가지 덕목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경건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선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도 바로 서있을 것이며, 반대로 이웃과의 관계가 온전치 못하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온전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 자라야, 의로운 사람, 즉 경건한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에서는 경건에 이르는 이 3가지 길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는 길의 절반까지 이끌어 주고, 금식은 (우리를) 하늘의 입구에 데려다 주며, (마지막에) 그 문을 여는 것은 자선이다.”(Beten führt auf Halbem zu Gott, Fasten bringt an den Eingang zum Himmel, Almosen öffnet die Tür.)

 

오늘은 경건에 이르는 3가지 길 중 하나인 자선’, 즉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주는 올바른 자선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유대공동체에 전해지는 어느 랍비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동유럽에 있는 유대 공동체에 랍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안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소문이 퍼졌습니다. 하시디즘(18세기 동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종교적인 경건운동의 하나)에 속하는 그 랍비가 매일 아침 새벽기도 전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의 적대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밝혀내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어느 날, 이른 새벽에 몸을 숨기고, 랍비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랍비는 나무꾼처럼 변장을 하고 집을 나서더니,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한 짐 해서는 늙고 병든 어느 여인의 오두막으로 그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랍비를 미행하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가서는 창문을 통해 오두막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랍비는 오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불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랍비를 뒤쫓던 사람이 자신을 보낸 이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이 조롱하듯이 물었습니다. “그래, 그 랍비가 정말 하늘로 올라갔소?” 그러자 랍비를 뒤쫓던 사람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갔소이다.(Sogar noch höher.)” 그것은 랍비가 피운 오븐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 한 말이었습니다.

 

이 랍비가 한 행동과 같이, 가난한 이들과 소외당한 이들과의 연합에 대한 요구는 성서 전체에 매우 강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구약의 출애굽기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0절의 안식일에 관한 계명을 보면, 남종이나 여종과 같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낮은 계층에 속한 노예 계급의 사람들도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311, 안식년에 관한 계명에서는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놀리고, 거기서 자라난 것들 추수하지 말라,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도 이미 노예나 이방인이나 가난한 사람들 모두 이웃의 범위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렇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한 이들에 대한 계명은 종교적인 관습에 속할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이 신약성서 (빌립보서 23-5)에 와서는, “그럴 듯한 말로 자신의 방식을 내세우지도 마십시오. 자기를 제쳐 두고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도우십시오. 자기 이익을 꾀하는 일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자신을 잊을 정도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셨던 방식으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메시지성경에서 인용)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베풀면,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베풀어야 할 다른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 나와 비슷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혹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의 약자, 소외된 자, 어린 아이, 여인들을 말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예수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이러한 성서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첫 번째 읽은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경건에 이르는 길 3가지, 자선, 기도, 금식은 구조적으로 평행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각 본문의 첫머리에 그것의 부정적인 예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 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예를 들면, (자선을 할 때) 나팔을 불지 말아라, (기도할 때)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서 하지 말아라,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아라. 그리고 나서, 이와는 반대로 긍정적인 명제를 제시하면서 이러한 위선자들처럼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바른 자선과 기도와 올바른 금식을 한 사람에게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각 문단의 끝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자선에 관한 부분 역시 이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부정형으로 이루어진 1절은 너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연극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여라.”(메시지성경)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인 헬라어 dikaiosyne(디카이오시네)는 개역개정에서는 , 방금 읽은 메시지 성경에서는 선한 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산상설교 전체에 나타난 의() 또는 정의, 공의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혀줍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의롭다또는 정당하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상호적이거나 균형 잡힌 관계를 염두에 둡니다. 다시 말하면, Give and Take의 관계를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주는 것과 받는 것에 있어서 서로 간에 대등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한번 식사 대접을 받았으니, 나도 한번 대접한다혹은 내가 한번 대접했으니, 이제는 네가 해라라는 식의 이해관계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서에서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뿐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관계에서도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는 율법이 존재했고, 이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특히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의의 개념에는 이러한 이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는 조금 전에 말한 주고받는 것이 동일한, 균형 잡힌 관계 속에서의 의가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비대칭적인, 균등하지 않은 관계속의 의를 말합니다. 이때, 주는 자와 받는 자는 상호적인 원리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는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서 그것을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다시 대접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거저 주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마태복음 5장 하반절에 기록된 보복에 관한 말씀에서는 구약에서 정의로, 정당한 것으로 여겨졌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나를 고소하는 자에게까지도 누가 너를 법정으로 끌고 가서 네 셔츠를 달라고 소송하거든, 네 가장 좋은 외투까지 잘 포장해서 선물로 주어라. 그리고 누가 너를 억울하게 이용하거든, 종의 삶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아라. 똑같이 갚아 주는 것은 이제 그만하여라. 너그럽게 살아라.” (메시지성경 마태 5:4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의(), 즉 이전의 공의(公義)의 의미가 예수의 산상설교에서 더욱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2절에는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자선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언어로 볼 때는 긍정적 의미를 지니지만, 사전적 의미는 작고 보잘것없는 보상이라는 뜻으로, 동정(Erbarmen)과 연민이나 자비(Barmherzigkeit)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본래는 적선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본문 말씀에 올바른 자선행위라는 표제를 붙여놓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자선은 다음의 2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드러내는 증거로서, 우리가 바른 자선 행위를 할 때에만 우리의 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올바른 자선행위는 믿는 자들이 해야 할 본질적인 행위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경건에 이르는 길에는 3 가지가 있는데, 올바른 자선이 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가 바랐던 것은 자선을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자선은 믿는 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그것은 자랑할 거리가 아니다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자발적으로 자선에 참여해야지 마치 쇼를 하듯, 다른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서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처럼 우리에게 산상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이 실제 모범을 보여주면서 자선을 행할 때에는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 자신을 잊을 정도로 손을 내밀어야 할까요? 두 번째로 읽은 마태 2531-46절에 보면,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를 가르듯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사람 vs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갈 사람을 가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심판대에 앉은 임금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배고플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집이 없을 때, 너희가 내게 방을 내주었고, 내가 떨고 있을 때, 너희가 내게 옷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내게 문병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내게 면회를 왔다.”

 

그때, 의인들이 이렇게 되묻습니다.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이 아프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 뵈었습니까?”

 

그때, 주님께서는 내가 중대한 진리를 말합니다. 너희가 무시당하거나 남이 알아주지 않는 사람한테 그런 일 하나라도 하면, 너희는 바로 나한테 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 본문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지거 쾨더(Sieger Köder) 신부님의 작품으로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매우 좋아한 쾨더는 슈투트가르트 미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후, 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하다가 신부가 되고자 결심하고, 튀빙엔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 사제 서품을 받고, 현재 독일 예수회 소속 신부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지거쾨더.jpg


그림 속에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나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함께 성서에 나타난 인물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가장 아래쪽에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는 모습은 내가 배고플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손의 주인은 거지나 노숙자와 같은 사람으로,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구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제가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일본으로 청년부 단기선교를 갔었는데, 그때 방문했던 일본한인교회에서 하던 사역 중 하나가 노숙인들을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그 사역을 주목자 사역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친 후, 주목자가 무슨 의미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주님께서 주목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시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늘 주목하여 보고 계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거 쾨더의 이 그림은 그 사람이 바로 예수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왼쪽의 검은 두 손바닥에 새겨진 예수의 붉은 상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빵을 쪼개고 있는 손은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의 손이며, 이 손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2) 방금 살펴본 그림 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물을 따라주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은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다를 그린 것입니다. 왼쪽의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보라색 옷을 입고 검은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있습니다.

 

목이 말라 지쳐 보이는 그 남자는 두 손으로 작은 물 컵을 쥔 체 맞은편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물 한 모금을 청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자비와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면서 물을 따라 주려 합니다. 여자의 붉은 옷이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물병의 물은 심지어 반도 채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넉넉해야만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3) 그림의 뒤쪽 가운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것은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내가 집이 없을 때, 너희가 내게 방을 내주었다.”를 그린 것입니다. 문이 열려 있고, 파란색의 옷을 입은 여자가 길 가던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두꺼운 옷을 걸치고, 모자를 쓰고, 오른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문간에 서 있습니다. 나그네는 긴 여행 때문에 피곤한 모습이 역력합니다.

 

문밖 풍경은 어떠한가요?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은 이미 날이 저물고 있음을 알려주고, 젊은 여자는 늙고 지친 나그네를 친절하게 집 안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나그네를 환대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맞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림 속의 활짝 열린 문과 활짝 벌린 두 팔처럼,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4) 가장 왼쪽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알몸의 남자가 그려진 그림(포스터)내가 떨고 있을 때, 너희가 내게 옷을 주었다를 그린 것입니다. 포스터 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는 “Kleider für die dritte Welt”3세계를 위한 옷이라는 독일어입니다. 3세계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빈곤한 나라들, 즉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남미 등 가난한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이 그림은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는 것이 곧, 헐벗은 예수를 도와주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5) 방금 살펴본 그림(포스터) 아래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나요? 포스터 아래에서는 수도복을 입은 수녀가 작은 컵을 들고, 침대에 누워 있는 병자를 정성껏 간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내게 문병을 왔다.”를 그린 것입니다.


예수를 닮은 병자는 오랜 병고에 지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고, 수녀는 웃음을 머금은 모습으로 밝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병자와 환자가 바로 예수일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뒤쪽의 문 오른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그림의 가장 위쪽 오른편에 쇠창살이 있는 작은 창문은 감옥의 창문임을 암시하듯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내게 면회를 왔다.”는 구절을 그린 것입니다.

 

창문 아래에 줄무늬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손목에는 수갑을 차고 앉아 있습니다. 줄무늬 옷과 수갑을 통해 그 사람이 죄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의 문헌이나 성화(聖畵) 등에 등장하는 줄무늬 옷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배척받은 사람들로, 징계 대상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현대 프랑스어에도 그대로 남아서 ‘rayer’라는 동사는 줄을 긋다’, ‘삭제하다’, ‘제외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 속의 그 죄수는 감방에서 홀로 고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방문객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의 나그네, 누군가의 방문과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은 지금도 우리가 일상 속에서, 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람들입니다. 지거 쾨더는 그들을 예수와 비슷하게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예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선한 행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웃들의 시선은 더더욱 아닙니다. 바로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고 할 때,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필요치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살피는 것,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올바른 자선일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쓰인 위선자라는 말 속에서 오늘날 우리는 부정직하거나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절에 쓰인 위선자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위선자는 마치 배우처럼 자신의 자선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배우에게는 관객이 필요하고, 관객들이 보내주는 박수갈채가 그들에게는 보상이 되듯,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위선자들은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모으고, 보이는 곳에서 자선을 행하고, 그들의 박수갈채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너희 자신이 주목받지 않도록 하여라. 분명히 너희도 내가 연극배우라고 부르는 이들의 행동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회며 큰 길을 무대로 알고는,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으면 긍휼을 베풀고,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한다.”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은 비단 인기를 먹고사는 배우만의 일은 아닙니다. 이것이 부도덕한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을 하죠. 이런 경향이 없다면, 그는 자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거나 사회적 관계성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보고,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이자, 욕망입니다. 그래서 관음증과 노출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은 누군가의 감추어진 것을 엿보기를 원하는 만큼 또한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선행과 자선은 정당하게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칭찬을 들을 때,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보다 앞선 마태 516절에는 후하게 베풀며 살아라.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면, 그들도 너희에게 자극을 받아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오늘 읽은 61절에는, “너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연극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여라. 그것이 멋진 연극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은 박수를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서로 상반되는 말씀처럼 보이는 이 두 구절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행실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보다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일을 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공개되었을 때에 선행을 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하고, 선행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일을 시기하기 보다는 그것을 교훈삼아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 그것을 통해 박수갈채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될 때, 그것은 위선적인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또한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라”, 다시 말해 그냥 소리 내지 말고 은밀히 도와주어라고 말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자선은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왼손이 한 일을 잊어버리고, 다시 오른손으로 그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비정상적이거나 의식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비반성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를 과장되게 과시하거나 혹은 자신의 훌륭한 신앙에 대해 계속해서 인정받으려 하고, 그로 인해 존경받고자 하는 행위를 경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화자찬하지 말아라, 자기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통해 나의 신앙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혹은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내 삶을 샅샅이 살피시고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캐 보소서. 나를 심문하고 실험하셔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파악하소서.”(139:23) 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을 기억하며, 내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외모가 다가 아니다. 그의 외모와 키에 감동하지 마라. 나는 이미 그를 제외시켰다.”(메시지 성경)는 사무엘상 167절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혹은 경건의 겉모양은 갖출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속사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자선을 베풀었을 때, 다른 사람의 박수갈채는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을 했을 때 느끼는 기분 좋은 감정, 혹은 그 느낌이 바로 우리의 상급입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경험, 그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과 그 일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하늘나라의 경험이 우리에게는 보상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건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셨고, 그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범을 따라 경건에 이르는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선을 베푸는 데에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도 훈련, 즉 연습이 필요합니다. 저절로는 되지 않습니다. 기도와 금식에도 훈련이 필요하듯, 자선의 행위 또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47-8절에, “신앙을 가장한 어리석은 이야기를 멀리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훈련하십시오. 영적 무기력은 절대 금물입니다.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하는 것도 유익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훈련받는 삶은 훨씬 유익합니다.”(메시지성경)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유익을 주는 육체의 운동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연습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많은 돈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면에서 유익을 주고, 우리의 생명을 약속해 주는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질을 드리듯 시간을 드리고, 자선을 행하는 일, 이 모두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합니다.

사상이 애정으로 성숙하기까지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이며, 현장이며, 숲입니다.”

 

[기도]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주님, 주님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먼저 살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도 내 욕망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옵소서. 성령의 간구와 기도로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경건의 길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 선행을 하고, 칭찬받기 위해 기도하고, 보여주기 위해 금식하는 외식하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선행을 할 때는 나를 잊고, 이웃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기도하고, 나 자신의 경건을 위해 금식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늘나라의 문을 열게 하시고, 주님을 만나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 한없이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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