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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04.24 10:52

[2018. 4. 8] 일상의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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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안인숙, 박현욱

 

일상의 신성

(마태복음서 5:20, 로마서 7:15-8:2)

201848

주일예배

안인숙 자매, 박현욱 형제(새길교회 평신도신학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 마태복음서 5:20, 로마서 7:15-8:2 -


안인숙 자매

 

일상은 매일 반복되는 활동으로, 우리의 의식내지 무의식, 그리고 시간과 물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일정대로 잘 수행함은 우리를 지탱해주고 우리를 우리답게 합니다. 일상의 반복을 지루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일상이 깨졌을 때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시대에는 갈수록 새롭고 커다랗고 충격적인 정보가 넘쳐나 쉬임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니, 개인이 일상을 유지하기란 도무지 기적과 같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 말씀증거의 제목이 일상의 신성인데, 일상과 신성을 연결짓는 것이 약간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의식주활동이나 직장생활로 채워지는 일상생활과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의 신성은 거의 반대되는 느낌이 드니까요. 그래도 그런 일상생활 속에 깃든 삶의 경이로움, 아름다움 혹은 신비로움을 접할 때는 종교인이 아니라도 일상의 신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삶 순간순간에 초월자의 임재를 느낀다던가, 개인과 함께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일상 그 자체가 신성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절의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한편, 일상 속에서 우리는 신성한 어느 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거나, 시간을 정하여 기도나 묵상을 하거나 성경을 읽는 것 즉, 일상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 내어 거룩하게 지내는 활동도 일상의 신성일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 자체가 신성하다고 할 수도 있고, 일상의 어느 부분을 신성하게 구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두 가지 측면이 서로 배치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과학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일상을 점점 더 깊게 지배해 가고 있는 시대에서 영적으로 고갈됨을 느낀다면 일상의 신성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한 편, 우리는 가끔 일상을 벗어나, 휴가를 내어 여행을 떠나거나, 자연 속에 거하며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조망해 보고 재충전하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강제적으로 일상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면 우리는 쉽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세월호 학생들의 가족과 같이 너무나도 큰 충격적인 변화를 겪게되면, 이전의 일상이 완전히 와해되고 비일상이 일상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일상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선순환적 비일상이 있을 수도 있고, 일상을 흩트러뜨리는 비일상도 있겠습니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서 우리는 일상을 지키려고 하는 본능적 움직임이 있으나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겠습니다. 저는 오늘 비일상 속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한 가지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남편과 저는 2 주 전에 이스라엘과 요르단 여행을 하였습니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소위 성지순례 패키지여행이었습니다. 요즘엔 성지순례도 여행사가 다 시켜줍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란 곳이 아름다운 경치구경 갈만한 곳은 아니지요. 저희는 전국에서 모집된 초면의 집단이기는 했으나, 시기가 사순절기간이기도 하고 기독교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도 해서 일행은 모두 진지하고 숙연하고 순응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여행 둘째날 제 얼굴에 안면마비가 온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습니다. 인솔자는 귀국할 것인지, 계속 여행할 것인지 그날 밤 안에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계속하는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우선 저의 소싯적 간호사로서의 지식과 인터넷의 정보와 일행 중에 있었던 의사의 의견을 종합해보건대 뇌졸중은 아니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면마비는 심해지고 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지만, 이동에는 지장이 없으니 부지런히 따라다녔지요. 저의 사정을 알게 된 일행은, 모두들 간절히 중보기도하고 핫팩 등을 건네주며 염려해 주었습니다. 생면부지이고 여행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질 사람들이었는데, 저로 인해 여행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여행이 끝나갈 무렵부터 마비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얼굴에 미소가 엷게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며, 이 일로 인해 은혜로운 여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어려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모으게 하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번 여행은 그래서 일상에 활력을 주는 비일상이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역시 이스라엘 여행이야기입니다. 18년 전 제가 방문했을 때와 지금의 이스라엘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국가가 자기 나라 안에 친 높다란 장벽입니다. 이 콘트리트벽은 8m의 높이로 무려 700km에 걸쳐 웨스트뱅크 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사는 구역을 갈라놓고 중간중간에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수 백개의 검문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천 년 동안 수없이 거류민들이 바뀌었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최근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이 대대손손 살아오던 땅을 빼앗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온주의파가 주도하여 세계 곳곳에서 돌아오는 정착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편법과 경제력과 병력을 동원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갈라놓고, 억압하고 가두고 착취하고 살해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높은 담벼락 안에서 비좁게 생활하며 생존을 위해 저임금을 감수하며 매일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성지순례를 계획하신다면 차옥숭자매님이 쓰신 예루살렘/성지/전장이라는 책을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위의 내용들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성지순례의 의미가 확실하게 각인될 것입니다.

 

다시 일상의 신성으로 돌아가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관계를 목도하며 이 이슈가 나의 일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상의 신성이 개인적인 이슈일 뿐일까? 나 혼자만 신구약성경에 나오는 지역들을 방문하며 성경 안의 의미만 확인하고 은혜받으면 되는 걸까? 특히 베들레헴, 가나, 나사렛, 여리고 등 성지들은 대부분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위치해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 성지순례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상의 신성을 개인 자신에게 한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너무도 친숙히 잘 아는 누가복음 10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이야기를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까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제사장과 레위사람을 한 편에, 그리고 사마리아인을 다른 편에 두고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들의 일상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나에게 집중하며 살고 싶어합니다. 무어가 잘못인가요? 아무 잘못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신음하는 사람을 보았으나, 자신들의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즉,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신실한 신도로서 피해갔을 뿐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신성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신성을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반해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거지반 죽게 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일상을 잠시 벗어나 도움을 주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원래의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처음에 율법교사가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것과는 정반대방향입니다. 율법교사의 관점은 내가 중심이 되는 관점입니다. 반면에, 여태까지 강도당하여, 초죽음상태의 무력한 약자로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어, 발언권이 없는 바로 그 사람 즉, 일상을 강탈당하여 비일상에 처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웃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타자의 관점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누가복음 1035절에 예수님은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하였다며 예화를 끝내십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일상을 완전히 버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사마리아인같이, 나의 일상 속에 비일상을 위한 여백을 두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도움을 요청해 오는 낯선 비일상에 기꺼이 대응하는 것, 강도만난 자의 비일상이 나의 일상 속에 들어오도록 나의 한 부분을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일상의 신성은 아닐까요?

 

먼 옛날에 있었던 일과 같이 시간적 거리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은 공간적 거리가 크면, 나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서 2~3000년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으면서, 지금 여기서 내가 읽고 있는, 내 삶의 제 1지표가 되는 성경에 나오는 지역과 사람들을 방문한다면, 저는 거기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나의 일상에 연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사람들을 테러집단으로만 인식했던 것을 반성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강도만난 자들이 아닐까요? 하지만 과연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으로 충분한 걸까? 그들은 저에게 나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5장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의 말미에 예수님은 결론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의 일상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 누가복음의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이 사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만큼의 의를 넘어서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어찌해야 할지 마음속에 큰 과제하나를 안고 오게 되었습니다.

 

 

박현욱 형제

 

일상의 신성! 오늘 예배의 주제입니다. 여기 자매형제님들 가운데는 일상에서 신성을 경험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제 일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신성함이 떠오르지는 않고, 영화 모던타임즈가 생각났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거대한 공장에서 기계부품처럼 일을 합니다. 컨베어어벨트의 속도에 맞춰서 쉴새 없이 나사를 조이기를 반복합니다. 왜 그 장면이 떠올랐을까요? 사무실과 집에서 강박적으로 일정한 행동에 매달리는 제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회사에서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가정에서조차 자동적으로 TV를 켜서 뉴스, 영화, 스포츠채널을 오가고, 게임을 하고, 책을 뒤적거립니다.

 

이런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뤄집니다. 제가 정말 TV를 보고 싶어서 TV를 켜는 것일까요? TV를 보면 삶이 리프레쉬되기 때문에 보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몸이 가는 데로 가만두면 그런 패턴에 빠져듭니다. 왜 이런 행동에 자신을 내주는 것일까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불편함이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떠밀려서 하는 행동을 어떤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자동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알랭 바디우가 쓴 사도바울을 읽게 되었습니다. 철학자가 풀어내는 바울서신에 대한 설명은 참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디우의 로마서 7장 주석이 망치로 제 머리를 한 대 꽝하고 치는 느낌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중략)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중략)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이 본문에서 바울은 당위와 현실 속에서 고민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금지된 일만 하는 자신 때문에 절망합니다. 왜 그렇게 인간은 무력할까요? 바울은 내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가 문제라고 강변합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나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일까요? 바디우는 무의식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죄는 욕망에 무의식적으로 떠밀려 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주체가 결여된 삶입니다. 반복적이고, 자동적인 일상은 참다운 내가 없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저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죽어있습니다. 죽음은 물리적 사망이 아니라 주체의 상실, 참다운 내가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 일상이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지배되어 죄 가운데 있고, 죽어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욕망과 무의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깨달음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게는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참 자아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를 구원해주세요.’

 

저는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사는 옛사람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에 가까웠지요. 악한 영에 사로잡힌 것을 생각하면, 복음서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청년, 영화 엑소시스트의 축사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게 귀신들림이란 무의식을 의식화시키지 못해서 욕망의 노예가 된 삶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죄인이라고 깨달은 날, 동종업계의 전문가와 코엑스에서 저녁약속이 있었습니다. 다른 날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이어폰을 끼고, 뉴스나 음악을 들으며 삼성역에서 식당까지 인파 사이를 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은 그런 행동을 당연시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일상에 어색한 틈이 생겼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중단하는 공간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어색한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자동적으로 행동할 때는 철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든든했습니다. 외부의 감각에도 무딜 수 있었지요. 하지만, 잠시 멈추고 내면을 들여다 보자, 헐벗고, 굶주린 제 존재가 느껴졌습니다. 자코메티의 앙상한 조각상이 된 듯 춥고 배고팠습니다.

 

더 시간이 흐르자, 제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오늘 그 전문가와의 만남이 특별하게 해주세요.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다른 때 같았으면, 경쟁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일지, 우리 사무실을 위해서 경쟁그룹과 어떤 전략적 관계를 구축할지 머리를 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만은 그를 한 인간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영원한 순간처럼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제가 정말 살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이 제게 응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멈추면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저는 이 불안에 대해서 이제는 좀 더 친절해지고 싶습니다. 불안은 마음에 틈을 만들어냅니다. 이 틈은 축복입니다. 여기서 저는 참다운 자아로 존재할 수 있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저는, 아니 우리는 죄인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합니다. 저희는 살아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욕망의 노예, 무의식의 종으로 사는 연약한 존재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은총을 넘치도록 부어주소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열어젖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주소서. 우리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당신을 더 신뢰하기 원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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