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17.33.156) 조회 수 27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자 정경일

 

나드 향유 병을 깨뜨리다

(마가복음서 14:1-10)

2018325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속임수를 써서 예수를 붙잡아 죽일까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 마가복음서 14:1-10 -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을 영어로는 ‘Passion Week’라고 합니다. 사실 고난주간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의 당신의 마지막 한 주일을 무력하게 고난만 당하며 보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고난을 뜻하는 영어 단어 ‘passion’의 다른 의미가 열정인 것처럼, 그의 시대 지배체제에 열정적으로 저항하셨고, 고난과 죽음은 그 저항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그러니 고난주간열정주간으로 바꿔 부르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에서 실제적 고난은 채 하루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유월절을 앞둔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 성전을 정화하셨고, 화요일과 수요일에 유대 종교 지배자들과 대결하셨고,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늦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성전의 무리에게 붙잡히셨습니다. 마가에 따르면, 체포된 목요일 늦은 밤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1차 재판을 받으셨고 다음날 금요일 새벽 빌라도에게 끌려가 2차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니 하루가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예수의 체포, 재판, 처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빠른 사건 전개는 여러 의문을 일으킵니다. 로마 군대와 예루살렘 성전의 힘이면 충분히 예수를 낮에 예루살렘성 안에서 체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밤에 성 바깥에서, 그것도 가룟 유다의 도움으로 체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반란자나 이단자라면, 많은 군중이 모인 앞에서 공개 재판함으로써 다시는 예수 같은 불온한 인물이 못나오도록 본보기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밤사이에 황급히 재판하고 처형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왜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뿔뿔이 달아났을까요?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의 첫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학교

 

유월절을 앞둔 일요일, 예수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초라하고 심지어 우스워 보이기까지 한 행진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행진이 유대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직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을 삼중으로 억압해온 제국의 황제, 유대의 왕, 성전의 제사장들과 전혀 다른 메시아의 모습을 예수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행진 이후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가는 곳마다 대중이 운집하여 그의 가르침을 경청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 학교같았습니다. 그 며칠 동안 대중의 의식이 급격히 변화합니다.


대중은 처음에는 예수에게서 새로운 또 하나의 지상적(地上的) 권력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행진이 있던 일요일, “복되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마가 11:10)라고 환호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마가는, 며칠 뒤 예수가 성전에서 다윗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많은 무리가 그 말을 기쁘게 들었다고 합니다(마가 12:37). 불과 며칠 사이에 그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로마 가이사 황제의 나라만이 아니라 유대 다윗 왕의 나라와도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로마의 지배만이 아니라 다윗의 지배, 아니 모든 지배를 거부하셨습니다. 제국의 지배만이 아니라 민족의 지배, 강자의 지배, 부자의 지배, 종교의 지배, 남성의 지배 등, 인간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모든 지배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가이사의 나라다윗의 나라, 그 두 나라 외에는 상상해본 적이 없던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충격적 해방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열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혁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체포, 재판, 처형이 왜 그렇게 급속히 전개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가야바와 빌라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중의 열기가 변혁의 불길로 타오를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실제로 마가는 권력자들이 대중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여러 번 언급합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붙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대중이 소동을 일으킬까봐 두려워 섣불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마가 14:1-2) 특히 그들은 대중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낮에는 소동이 두려워 예수를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예수도 대중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밤을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밤마다 예루살렘 성 바깥 베다니 어딘가로 피신하셨을 것입니다. 예수의 체포에 내부자인 가룟 유다의 배반이 결정적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혼란

 

그런데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가장 결정적 순간에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갈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은 당시의 젤롯파나 시카리파 같은 유대 민족주의 세력이 추구하던 군사적 항쟁을 통한 민족해방을 기대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자들 중 일부는 젤롯파 출신이었고, 특히 가룟(Iscariot)’ 유다는 호칭이 말해주듯 급진적 무장 조직인 시카리파 출신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로마 제국주의 세력과 유대 민족주의 세력은 누구의 지배를 원하는가에서는 달랐지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그것을 폭력으로 실행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유대 민족주의 세력이 원했던 다윗의 나라는 가이사의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더 정의로운 나라였겠지만, 여전히 지배와 폭력의 나라였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길 바랐고, 자신들은 그 나라에서 어느 지위를 차지할지 상상하며 다퉜습니다. 여기서 제가 상상 속의 다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권력을 욕망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한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놀랐고 무리는 두려워했다는 마가의 증언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마가 10:32a)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군대도 없는 예수가 변방의 갈릴리도 아닌 제국과 성전이 지배하는 예루살렘에서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 놀랍고 두려웠던 것이겠죠.


하지만 예루살렘 입성 이후의 제자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중은 불과 며칠 사이에 다윗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급진적 의식 변화를 이루었는데, 정작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함께해온 제자들은 오히려 대중의 의식에 못 미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모르거나 완전히 부정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직접 불러 모은 이들이고, 갈릴리에서부터 함께 여행하며 가장 많은,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눈 제자요 동지입니다. 또한 그들이 대중보다 특별히 의식이 부족하다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용기 있게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다기보다는, 너무도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그만 혼란에 빠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는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깨우쳐줄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셨습니다.

 

한 여성 제자의 깨달음

 

그런데, 모든 제자가 혼란에 빠졌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함께 읽은 나드 향유 사건은 혼란에 빠진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뜻을 깨달은 한 여성 제자의 행위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다가와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었을 거라고 화를 내며 그 여성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여성의 행위는 자신의 장례를 미리 치러준 아름답고 고마운 일이라며 옹호하고, 더 나아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 여성이 한 일을 기억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마치 이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듯이 예수를 배반할 마음을 품고 대제사장들에게 갑니다.


마가는 이 여성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인 것 같은데,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4세기 교부 에브라임은 그 여성은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후대의 해석일 뿐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다만, 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해 추정해 보면, 그 여성은 며칠 뒤 남성 제자들이 모두 달아난 뒤에도 떠나지 않고 예수의 최후를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던 여성 제자들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여성들을 제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근거는, 그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랐다는 마가의 설명입니다(마가 15:41).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니까요.


그 여성 제자는 다윗의 나라를 욕망하던 남성 제자들이 예수가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실재 앞에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예수의 뜻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아파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모든 지배에 맞서는 예수가 모든 지배로부터 고난 받고 배반당하고 죽임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비통한 마음으로 예수의 머리에 나드 향유를 부음으로써 스승의 장례를 미리 치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 제자의 행위를 스승의 고난(passion)에 대한 애도만이 아니라 스승의 열정(passion)에 대한 참여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국 남성과 반제국 남성의 이중적 지배를 겪어 왔을 그 여성 제자는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바라는 인식론적 특권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가이사의 나라도 다윗의 나라도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예수가 보여준 나라, 그 어떠한 지배도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 여성 제자가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린 행위도 로마의 지배다윗의 지배를 동시에 거부하며 깨뜨린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드 향유에 대한 가이사의 나라와 다윗의 나라의 동일한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나드 향유는 가이사의 나라에서도 다윗의 나라에서도 값비싼 상품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발끈했던 것도 가이사의 나라에서만큼이나 다윗의 나라에서도 나드 향유는 귀하고 값비싼 상품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나드 향유를 가이사의 나라와 다윗의 나라가 공유하는 지배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 여성 제자가 가이사의 지배는 거부했지만 다윗의 지배는 동의했다면 그는 나드 향유 병을 깨뜨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대로 갖고 있다가 다윗의 나라에서 비싼 가격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거나, 예수 또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 여성 제자는 하나님 나라는 다윗의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임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을 가격으로 매겨 차별하지 않고 각자 지닌 가치대로 존중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아무도 남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겨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마가 10:44).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픈 자, 약한 자, 작은 자, 없는 자, 어린이, 소수자, 난민이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지 않고 사회의 중심으로 초대받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 나라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차별적 지배가 아닌 평등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 나라의 법은 사랑이기에 혐오는 불법이라는 것을. 그렇게 예수에게서 하나의 지배를 다른 지배로 대체하는 나라가 아닌,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한 그 여성 제자는 나드 향유를 갖고 있을 이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입국신청을 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드 향유와 들꽃 향기의 차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드 향유 병을 깨뜨림으로써, 낡은 지배, 가이사의 나라와 다윗의 나라 모두에 대한 욕망과 환상을 깨뜨립니다.

 

교회의 시작

 

예수는 그 여성 제자와 달리 하나님 나라를 보고 깨닫지 못한 남성 제자들을 안타까워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포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혼란에 빠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들도 그 여성 제자처럼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거라고, 살게 될 거라고 신뢰하셨습니다. 그러니 유다만큼은 아니지만 배신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베드로도 너무 비난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예수가 예언한대로 고통의 그 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그래도 스승 예수가 걱정되어 가야바의 뜰까지 몰래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세 번의 부인이 예수를 향한 사랑의 부재는 아닙니다. 부활한 예수와 베드로가 주고받은 세 번의 사랑 문답은 세 번의 부인에도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베드로와 남성 제자들도 스승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의 열정으로 살다가 고난 받고 죽임 당했습니다.


다만 저는 교회가 베드로의 반석위에서 시작되었다는 통념은 정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지라면, 교회는 나드 향유 병을 깨뜨림으로서 모든 지배를 깨뜨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그 여성 제자의 행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의 제도는 베드로에게서 시작되었을 수 있지만, 교회의 정신은 그 여성 제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은 그 여성 제자를 첫 번째 신앙인”,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155) 남성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지만, 그 여성 제자는 스승 예수와 이심전심으로 하나 되어 모든 지배를 폐지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며, 그 여성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그 복음이 전해져 모인 우리는 그 여성 제자가 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그 여성 제자와 예수가 살았던 하나님 나라가 오늘도 여전히 우리 앞에있습니다. 우리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의 남성 제자들처럼 하나의 지상적 지배를 다른 지상적 지배로 대체하는 것을 욕망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처럼, 그 여성 제자처럼,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실천할 것인가? 우리도 그 여성 제자처럼 나드 향유 병을 깨뜨리고, 로마와 다윗의 지배를 깨뜨리고, 아무런 지배도 없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그 물음을 붙들고 이번 고난주간, 아니 열정주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우리의 가슴을 열어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소서. 모든 지배를 거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새길로고.jpg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1049 2018 [2018. 4. 1] 부활, 종말, 영생 file 2018.04.10 길희성
» 2018 [2018. 3. 25] 나드 향유 병을 깨뜨리다 file 2018.04.04 정경일
1047 2018 [2018. 3. 18] 예수의 생명을 품은 바보, 이용도 file 2018.03.28 박지은
1046 2018 [2018. 3. 11] 국가 ‧ 전쟁 ‧ 여성 file 2018.03.21 박경미
1045 2018 [2018. 3. 4]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file 2018.03.08 최만자
1044 2018 [2018. 2. 25] 맨손혁명으로 만들어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2018.02.28 한인섭
1043 2018 [2018. 2. 18] 신앙과 돈 2018.02.22 권진관
1042 2018 [2018. 2. 11] 동행 2018.02.21 강경희
1041 2018 [2018. 1. 28] 에로스와 영성 file 2018.01.31 이영미
1040 2018 [2018. 1. 21] <1987>, 교회의 주소 file 2018.01.26 정경일
1039 2018 [2018. 1. 14] 우리 인생에서 만난 새길공동체, 그리고 그 도전과제 file 2018.01.26 이명식
1038 2018 [2018. 1. 7] 글, 텍스트 그리고 예수의 사랑 file 2018.01.26 한완상
1037 2017 [2017. 11. 26] 서로 발을 씻어줌으로써 사랑의 종노릇하라 file 2017.12.06 김회권
1036 2017 [2017. 11. 19] 공동체의 존재방식: 서로 file 2017.11.30 정경일
1035 2017 [2017.11.5] 신·인(神·人)장벽, 생·사(生·死)장벽 허물기: 복음의 진수 file 2017.11.10 한완상
1034 2017 [2017.10.29]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 file 2017.11.08 길희성
1033 2017 [2017.10.22]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 책임적 실존, 세계 개방성, 그리고 종교 해방에 이르기까지 file 2017.10.25 이정배
1032 2017 [2017.10.15] 감사, 나눔, 쉼 file 2017.10.17 차옥숭
1031 2017 [2017.10.08] 받침대를 흔드는 위험한(?) 개혁: 한국 여성 종교개혁자들 file 2017.10.12 최만자
1030 2017 [2017.10.01] 서남동, 당신의 뒷모습만 봅니다 file 2017.10.10 권진관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3 Next
/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