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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지은

 

예수의 생명을 품은 바보, 이용도

(전도서 3:2-8)

2018318

주일예배

박지은 박사(이화여대)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 전도서 3:2-8 -



저는 이용도 전공자는 아닙니다. 5, 6년 전, 신학자들과 한국 신학자들 중 몇 분을 정리하여 책을 내는 작업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때 이용도를 알게 되었고, 이 분을 정리하며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신학자들에 대한 저의 무관심,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목사이자,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이용도의 삶은 일제 강점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3.1 운동이 일어났던 이 3월에 이용도를 함께 만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용도는 1933, 서른셋에 생애를 마칩니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이용도는 일제강점기에 위로받을 곳 없던 민중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전해준 삶을 살았습니다.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 서민의 삶이 그러했듯 이용도 역시 가난했고, 나라를 잃은 심리적 박탈감과 울분을 토해낼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 이용도에게 폐병 3기라는 진단이 내려집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 이용도를 위로하고, 새로운 삶의 방법을 터득케 한 사람은 예수였습니다. 이후 이용도는 예수처럼 살고자 했고, 실제로 그의 삶은 예수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피폐한 유대인들의 삶을 위로했던 유대인 예수는 이용도를 통해 찢기고 상처받은 조선인들을 치유하는 '조선의 예수'가 됩니다.

 

제가 예수에게서 참 '인간적이다'라고 느낄 때,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느낄 때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예수를 만날 때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는 죽은 나사로 때문에 슬프게 울고 있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동네사람들을 보십니다. 우는 마리아와 동네 사람들, 예수는 마음이 괴롭고 비통하여..울었다"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함께 울 수 있다는 것은 그 고통을 뼈저리게 함께 느끼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우는 이들의 심정을 그대로 느낀 예수를 이용도는 만납니다. 자신의 고통의 경험을 통해 이용도는 삶의 고달픔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며 함께 아파합니다. “어찌하면 이 부초 같은 인생들, 그 방향잡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참된 진리의 길을 보여줄 수 있을지!. . .저이가 슬프매 내가 슬펐고 저이가 굶주림에 내가 기운이 없었다"고 이용도는 말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라는 사회적 고통, 폐병 3, 이렇듯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1925년 요양차 평양을 방문합니다. 평양 강동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찬송을 부르다 이용도는 울기 시작합니다. 그의 개인적, 또한 시대적 아픔으로 쌓여 있던 가슴속의 울분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청중들도 함께 울었고, 이용도의 이 체험은 이후 순회 집회를 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그의 설교는 유식한 말이나 교리적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그들과 함께 울면서 이용도는 그들의 마음 밑바탕을 꿰뚫고 아픔을 치유합니다. 1930년에 평양 부흥회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이날 저녁에는 별사람이 다 모였다... 천 여명 군중은 그저 울음이다. 수천의 눈은 그저 눈물이다. 목석도 이 자리에서는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울었다. 그저 울었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은 인생에서 상반되는 때를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심는 것을 뽑을 때, 죽일 때와 치료할 때,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경험을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통찰한 지혜교사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일희일비를 경험합니다. 기쁜 일만 지속되는 삶도 아니고, 슬픈 일만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치료를 받아야 할 때, 웃어야 할 때, 춤출 때를 박탈당한 또한 여전히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는 현실입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순간과 때의 섭리조차, 자연의 순환조차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로, 우리의(나의) 무관심으로 박탈당하면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일의 생존을 감당할 수 없어 유서를 남기고 삶의 끈을 놓는 어느 지하 월세방의 가족들, 세월호 참사, 군부대 의문사, 해고 노동자들, 위안부 할머니들, 성폭행 피해자들, 우리 사회 곳곳에 치유를 받아야 할 때, 웃어야 할 때, 춤출 때를 박탈당한 이들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고 이용도는 울고 있는 이들, 웃음을 빼앗긴 이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때를 돌려줍니다. 죽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돌려준 예수, 울분으로, 가난으로, 온갖 상처로 찢긴 식민지를 경험하는 이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품도록 희망을 준 이용도. 이용도에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에, 교회에 가득찬 죽음의 기운을 봅니다. “죽음의 물결위에 산 시체들이 떠다니는것과 같은, 죽었으나 죽은 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만이 위로와 생명을 준다는 것을 이용도는 확신합니다. 이것을 이용도는 "예수를 통한 생명의 역환"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이란 예수와의 생명의 바꿈, “역환을 통해 죽음에서 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용도는 말합니다. “신앙이란 곧 생명의 역환의 일입니다(일이외다). 세상에 살던 나의 죄악의 생명은 하늘에 사는 예수의 생명과 바꾸어지고, 물을 바라던 나의 생명은 영을 원하는 그 생명과 바꾸어지고,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애쓰던 나의 생명은 환희와 평화와 용기로 날뛰는 그 생명으로 변하여지고, 땅위에서 물욕과 정욕에 쌓여 오래 잘 살기를 꿈꾸던 나의 생명은, 이를 저주하여 버리고 천에 살려는 생명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생명을 얻는 일은 기도와 자기 비움을 통해 일어납니다. 기도를 통해 생명을 얻고, 하늘의 기운/예수의 기운(성령)이 채워지고, 비인간화되고 가식적인 내가 비워지고, 세상 욕심으로 가득찬 나의 마음이 비워지고, 결국 나의 죽음을 통해 예수의 생명으로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곧 나의 생명이요. 나의 운동이 올시다. . .나 자신이 죽는 날에 우리의 완성은 있사외다.” 그리고 예수와의 합일을 통해 예수의 생명으로의 역환이 일어날 때 진리가 드러납니다. 참 삶, 참 생명, 참 자신의 모습을 구현하며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와의 합일에 대한 이용도의 이러한 가르침으로 이용도는 신비주의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인 고난의 현장에서 배태된 신비주의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어둠속에서 고난 받는 민족과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에 직접 동참했던 예수와의 합일을 통해 역경 속에서 예수와 함께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비주의입니다. 하지만 이용도 자신은 그 당시 이미 그를 평가하는 많은 이름들이 참 자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는 목사가 아니다. 부흥목사도 아니다. 이는, , 이름 잘 짓는 너희 세상이 지어준 이름뿐이다. 저희가 이름지어 놓고는 됐느니 안됐느니 말썽이다. 마는, 나는 실상 그 이름 속에 있는 내가 아니다. . ” 이용도가 짧은 생애 동안 찾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참 자신의 모습, 세상이 이용도에게 만들어 둘러씌운 껍데기 이용도가 아닌, 그의 속에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로 살고 있을까요?

 

2018년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 아픈 것 중 하나는 경쟁사회 속에서 병들어가는 우리들을 /나 자신을 특히 젊은이들을 볼 때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는 모범답안이 우리사회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 명예만이 성공이라는 사회의 인식을 좇다보니, 우리가 무엇이 되기를,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가에 대한 질문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해야 할 삶의 중요한 질문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가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사회가 정해준 행복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정말 하고 싶은 일들,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간들을 과감히 버립니다. 참 내가 되기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용도는 세상이 평가하는 나에 초연합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행복이라는 모범답안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있는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자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용도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용도에게 있어서 예수를 통한 생명으로의 변화는 내적인, 영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땅의 문제를 외면하는, 초역사적인, 내적 생명을 얻는 것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통해 참 자신을 발견한 사람, 그의 삶은 철저히 이 땅에서, 우주를 토대로 진리를, 생명을 미친듯이 부르짖는삶입니다. 이용도는 말합니다. “미치도록 부르짖어라. 머리로는 하늘을 치어 밟고, 발길로는 땅덩어리를 걷어차라. 그리고 끌려서 우주안에 맴을 돌라. 그리하여 인간 세상에서는 아주 버린 바 되어라, 그러나 뛰어라 인간의 위에서 살리니-- 그대의 목청이 세차진 못하되, 사자후를 압도할 것이요. 그대의 발이 빠르지 못하고 굳세지 못하되 조선의 천지를 무른 메주 밟듯 하리라...“주께서 그대를 삼키시게 되면, 주께서 그대를 타시게 되면.” 예수의 생명과 더불어 나를 통해 압제자를 압도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온 땅을 밟는 힘이 나옵니다. 예수를 통한 생명의 역환이 일어날 때 나의 변화는 사회와 우주의 변화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용도에게 진리를 알고 생명을 얻는, 즉 예수를 아는 방법은 지식적인 앎이 아닙니다. 전인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느끼고, 내가 예수와 합일함으로 예수를 알고 삶 자체가 생명화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으로, 느낌으로 알고, 그 앎이 생명화되어 사는 삶. 내 자신의 생명화를 통해 내가 거하는 우주 안에 생명의 기운이 맴도는 삶이 생명의 바꿈(역환)입니다. 생명의 역환이 일어날 때 진리는 말하지 않아도 삶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말하지 않고.. 그냥 살렵니다. . .진리는 말할 바 아니요 살 바 장소임을 나는 압니다. 종교는 설교에 있지 않고 삶에 있지 않습니까 . . .우리 삶에서 이 모든 것이 나오게 합니다.” 예수의 생명을 품을 때 그저 살아감에도 그 속에서 생명과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바꿈이 일어난 삶은 평화롭습니다. 내 안의 죽음이, 이웃의 죽음, 땅의 죽음, 우주의 죽음으로, 내 안의 평화가 이웃의 평화, 땅의 평화, 우주의 평화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무엇을 하든, 청소를 하던 "농사를 짓든생명이 꿈틀거리는 삶은 풍요롭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버린 바되어도 생명을 가진 삶은 고요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평가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도 두렵지 않고, 가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는 신앙은 조국과 세계, 우주의 평화를 위한 신앙입니다. 세상의 개선을 위하여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울음을 그치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도록 하는 신앙입니다. 삶의 끈을 놓는 사람이 없도록, 부조리한 구조에 희생되는 사람이 없도록,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찾도록 함께 울어주는 신앙입니다. 함께 부르짖는 신앙입니다. 일제 강점기 이용도는 말합니다. “. . .당신은 조선이 다 구원되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 보았는가? 당신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하여 보았는가?” 이용도가 오늘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당신은 우는 자들의 눈물을 그치도록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과 함께 울었는가? 전도서는 사회구조적인 폭력의 현장에서 억눌린 사람들의 억울함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용도에게 예수의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는 이웃을 향한 위로, 사랑과 동의어입니다. 예수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허위의 신앙, 사람을 살해할 신앙, 생명 없는 신앙이다.”라고 이용도는 말합니다. 이것은 막연한 대중을 향한 사랑이 아닌 구체적인 한 개인을 향한 사랑,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한 개인을 향한 사랑의 확대는 대중을 향한 사랑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이용도에게는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사랑에 있으며 진리와 생명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듯이 사랑 또한 사랑한다는 의식조차없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뛰어나고 고상해도 사랑 즉 ()가 저열하면 그는 비열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고 말합니다. 교육여하를 막론하고 진정한 인격,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인간을 향한 사랑을 삶으로 구체화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용도의 사랑은 진실을 외면하고 불의를 관조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이 불의를 드러내는 사랑이었듯, 이용도의 사랑도 정의, “를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불의를 비판하고 불의를 범한 사람이 깨닫도록 이끄는 사랑입니다. 참 생명을 살리기 위한 비판과 책망, 그래서 참 사랑입니다. 이용도의 삶과 그의 글속에서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교회를 향한 신랄한 비판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이 필요한 곳에 베푸는 따뜻함은 그의 삶속에 자연스레 녹아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만나는 인간의 조건에 의해 달라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가치를 판정해 놓고 그만큼만 위해 주는사랑이 아니라 누구든지 최선을 다하여사랑하는 것이 생명을 품은 하늘의 사랑입니다. 겨울에 손발이 얼고 굶주려 거리에서 울고 있는 거지 소년을 보살피는 사랑, 그는 또 3.1운동 당시 네, 다섯 차례 수감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때도 감옥에서 이용도는 사형수의 수갑에 얼은 얼음을 녹이도록 그의 손을 자신의 배에 품기도 하였고, 자신의 밥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용도의 교회를 향한 비판은 날카롭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형태의 사랑이자 생명살림입니다. 철저히 이 땅위에 정의와 생명을 세우기 위한 비판이자 사랑입니다. 이용도는 탄식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도처에 많거니와 너를 긍휼히 여길 신자는 없었구나.” “교리와 신조를 가르치고 자랑하나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없다. “할렐루야, 아멘과 찬송은 넘쳐나지만 그리스도는 없다. 공허한 말 뿐인 사랑만 넘쳐날 뿐, 이웃을 품지 못하는 알맹이없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나 사랑이란 내용은 하나도 없고 껍데기와 기관과 조직만 남아가지고서는 이것이 예수 교회라고 전해서 남의 귀한 심령을 해하고 망치고 죽여 버리는 것이 현대의 교회가 아닙니까 ... 벽돌로 담을 쌓고 울긋불긋 장식을 해놓은 것이 이것이 교회가 아니예요. 이 예배당을 다- 불질러 버리고 잿더미 위에서라도 몸과 마음을 아주 바쳐 참된 예배를 드려야 그것이 교회올시다....” 이용도 교회비판의 핵심은 외식하는 교회입니다. 껍데기만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교회, 정의도 예수도 부재한 생명 없는 교회입니다. 목회자들은 정의와 진리를 외면하고 교인들이 요구하는 예수를 전한다고 이용도는 탄식합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 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버리고 말았구나.” 물질은 풍요하나 영적으로 메말라 기형적인 모습으로 죽어가는 현대교회, 이웃의 울음과 아픔을 외면하고 정의와 생명이 사라진 교회. 이용도는 외칩니다. “지금은 울때다. 크게 울때다.” 이들은 언제까지 웃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 믿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욕망과 부를 위해 예수의 이름을 파는 행위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의는 살아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돈다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촛불혁명은 불의한 자의 웃음을 그치게 하였고, 지금도 정의의 심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용도는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성찰하는데 교파나, 이념, 종교를 초월합니다. 겸손함만 필요할 뿐이라고 합니다. 겸손은 그의 좌우명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거지라도 주님과 같이 대하는 마음.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는 하나님 나라. 이렇게 이용도의 신앙은 포용적이며 그의 예수는 포용적 예수입니다. 남은 질문은 오늘,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것입니다. 이용도는 신앙이란 일년초가 아니라 인생의 본업"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산다는 것, 항상 위태합니다. 더 가지고 싶은 마음, 더 쌓아놓고 싶은 마음, 진리를/아픈 주변을 외면하고/보고싶지 않은 마음,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불의에 타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용도는 말합니다. “영원히 혁혁한 생명의 등불이 되어라. 소사에 소연치 말고 영원을 원망하여 침묵하고 기다려보자.” 죽은 모습으로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생명을 품고 나의 생명으로 이웃과 세계의 생명을 살리는 능동적인 기다림입니다. 삶을 그저 살아가지만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힘을 지닌, 등불을 지닌 삶이기에 함께 울면서 웃음의 때를 만들어가면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무언(是無言)은 이용도의 별칭입니다. 시는 한자 '바를 시' 없을 무, 말씀 언자를 씁니다. 이용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의 별명을 시무언(是無言)이라 함은 말 없음이 옳다는 의미와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려 일생을 성전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만나서 즐겨 하던 시므온을 그리워하여 그리지었나이다.” 참 신앙의 사람, 말없이 행함을 보여주고 사랑을 실천하며, 절박한 영혼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나눠주었던 사람. 그의 실존의 고통에서, 제국의 압제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통치를 기다리던 사람. 그가 바로 시무언 이용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던 예수의 삶을 살다 예수처럼 짧으나 많은 것을 오늘날까지 남긴 삶을 살았습니다. 이용도는 19333월에 그를 오해한 사건으로 목사직 휴직 처분을 받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33세의 나이로 하늘로 돌아갑니다. 이단시 되었던 그가 다시 목사직 복권이 승인된 것은 1999366년만입니다. 시무언 이용도의 이름은 너무 오랫동안 잊혀져 왔지만, 그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헐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는 삶의 법칙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그가 강단에서 말없이 흘렸던 눈물, 어떤 천 마디의 말보다도 상처받고 찢긴 이들과 소통했던 눈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묻게 됩니다. 고난 받는 이웃들과 말없이 함께 우는 삶. 시무언의 침묵 속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우리의 가슴에서 흘러내려야합니다. 비인간화가 덕목이 된 세상에서 참 나를 일깨우는 눈물이 있어야합니다. 비열한 인격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는 시무언처럼 말없이 생명과 진리가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소서 예수 한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예수 한분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빈자. 성령의 지시 외에는 모든 설계와 수단을 베풀 수 없는 백치가 되어지소서.” 그러나 예수의 사랑과 정의를 품은 가난이라면 괜찮습니다. 예수의 포용성을 품은 백치, 예수없는 교회를 향한 신랄한 예언자의 말을 하는 백치라면 괜찮습니다. 여전히 울고 있는 이웃과 함께 울어주고, 이들에게 웃을 때를 찾아주는 바보라면 괜찮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품은 바보라면 괜찮습니다. 이 생명이, 이 사랑과 정의와 포용성이 나와 세상을 바꾸고 평화를 가져오는 예수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길교회 성도님들도 예수의 생명을 품은 바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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