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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경미

 

국가 전쟁 여성

(마태복음 1:1-17)

2018311

여성주일예배

박경미 교수(이화여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고, 아삽은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야김을 낳고, 엘리야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 마태복음 1:1-17 -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국가국익이라는 명분이 걸렸을 때 보통 사람의 상식이나 도덕감정, 정의감과 배치되는 행동이 쉽게 용인됩니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국가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저지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라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국가가 하는 일이고, 전쟁은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명분을 앞세우든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살고 싶어 하고 죽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 본성일 텐데, 거기 거슬러서 남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도 무릅쓰게 만드는 마법을 국가는 행사합니다.

 

국가의 발생에는 언제나 폭력, 전쟁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대부분의 건국신화들은 신화적인 살해행위에 대해 언급했을 것입니다. 고대 바빌론 건국신화인 에누마 엘리시에서 마르둑 신은 어머니 티아마트를 죽입니다. 일본 서기에 등장하는 야마토 타케루,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호두르 등 건국신화의 영웅들은 형제살해자들입니다. 이것은 건국사업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종의 정치적 희생제의, 새로 창건되는 국가로부터 현존하는 적의 위협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사정을 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심층적인 수준에서 그것은 국가가 무엇인지를 국민의 의식 속에 심어줍니다. 국가는 필연적인 인간의 조직형태이며, 그 운영방식은 본질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으며, 또 국민은 그것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건국신화가 전하는 모친살해, 형제살해는 국가란 보통 사람의 판단 영역 위에 있으며, 국가의 관리자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국가는 우정, 사랑, 혈연 같은 인간적 유대로부터 벗어나 있다. 따라서 국가의 이름으로 행동할 때에는 친구, 아버지, 형제, 심지어 아들도 살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전쟁이라는 비도덕적 행위를 도덕화 시켜주는 이념적 장치를 일찍부터 발전시켜왔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전쟁이론, 정전론(正戰論)입니다. 국가발생 초기에는 신이 허락한 전쟁인지 여부가 중요했습니다. 가령 구약성서의 전멸법(신명 20:10-18)에 따르면 야훼 하나님의 명령만 있다면 정복전쟁을 벌여 적국의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까지 죽이고 노예화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니 우리의 전쟁은 정당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도덕적 명분이 중요해지면서 보다 세련된 정전론이 요구되었습니다. 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대 정전론의 원형은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타납니다. 이들은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평화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쟁을 하면서도 사랑의 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전쟁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나로 합치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의 도시가 아닌 지상 도시에서 전쟁은 필요악일 수 있고, 그리스도인은 전쟁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어야 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도 정당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평화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내적 동기가 진정으로 정당한 명분과 적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면, 그런 경우에는 폭력의 사용이 불의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평화를 위한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라는 매우 역설적인 논리입니다. 그러나 서로 끔찍하게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에서 적을 사랑한다는 내적 의도란 게 대체 무엇일까요? 실제로 이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전론이 오늘날 국제법이나 UN같은 국제기구, 외교관계에 일반적으로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전쟁은 그 목적이 평화이기 때문에 정당화됩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의 조직에 집중시켜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지역 내에 다른 조직이나 집단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힘을 갖는 조직이 있다면, 그 지역에서는 조직적 폭력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내의 평화는 국가폭력에 의해 달성되고, 국가와 국가 간의 평화는 상호공포, 즉 힘의 균형에 의해 지켜집니다.” 특정 지역에서 유일하게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조직으로서 국가는 군대를 가져야 하며, 세계적 차원에서 초강대국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에 의해 평화를 유지합니다. 이들이 일으키는 전쟁은 이기는 전쟁이고, 이김으로써 평화를 가져오는 전쟁이며, 따라서 정의로운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쟁의 최대명분은 전쟁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역설적인 논리입니다. 그 전형적인 예를 과거의 팍스 로마나와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전쟁을 없애기 위해 군대를 폐지하는 것은 평화를 확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최악의 전쟁상태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정전론은 허구입니다. 그것은 군대가 무엇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군대는 국제법과 군법상 허용되는 일만 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가령 위안부 문제의 경우는 조직적으로 국가와 군대가 나서서 성노예를 모집하고 운영했다는 점에서 이미 국제법 자체를 어긴 것이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과 강간, 성폭력은 늘 같이 갑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비전투원 살해와 약탈, 강간 등이 국제법이나 군법상 대부분 금지되어 있지만, 그런 경향은 군대의 전통과 문화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잠정적인 위협으로 있다 전시에 현실화 됩니다. 월남전에서 우리 군대가 저지른 민간인학살과 성폭력, 관타나모 미포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포로학대는 예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상전에 늘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정전론의 허구는 군대가 누구를 죽이는가를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전쟁법은 가급적 적의 전투원만 죽이고 비무장 일반 시민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사보다 일반시민 쪽이 더 많이 살해됩니다. 20세기에 국가에 의해 살해된 외국인의 수는 6,8452천명이었지만, 자국민의 수는 134756천명, 즉 두 배에 달합니다.


아무리 정당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전쟁은 그 자체로 끔찍한 폭력입니다. 아무리 고매한 철학자, 신학자들이 전쟁에 윤리를 덧씌워도 전쟁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없습니다. 정전론은 전쟁을 저지르는 왕들과 장군들의 명분찾기를 도와줄 뿐 전쟁의 야만성을 바꿔놓지는 못합니다. 침략전쟁은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지만, 침략전쟁이야말로 로마제국을 비롯한 과거와 현재 제국들의 존재근거이고, 단지 그것을 변방 야만인들을 교화한다거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수립한다고 포장할 뿐입니다. 2004년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내세워 이라크를 침략했지만, 이미 이라크 공격 당시에도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오바마 역시 아프가니스탄에 안정된 민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군을 보냈다고 하지만, 실은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통제욕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근 극적인 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서 벌어졌던 전쟁의 위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당한 전쟁이라는 논리를 통해 전쟁을 벌이는 자의 수사는 진화했을지언정, 전쟁의 실상은 여전히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통제야욕, 비전투원의 무차별 살인, 성폭력의 횡행일 뿐입니다. 정당한 전쟁은 없습니다. 그냥 전쟁, 끔찍한 살육극이 있을 뿐입니다. 전쟁을 통해 평화를 이룬다는 논리는 허구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더더욱 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일본을 향해 도덕적 사과와 법적인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정전론의 논리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의 사과 요구는 전쟁의 무조건적 비도덕성을 상기시키며, 전쟁은 무조건 범죄임을 상기시킵니다. 일본은 전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의 한 축을 이루면서 이제 다시 군사대국화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유지를 자임하고 나섰습니다. 일본은 헌법 제9, 평화헌법을 바꾸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동북아의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일본이 과거 식민지배와 전쟁의 부도덕함과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전후 일본이 여전히 군사대국의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가 거짓되고 위험천만한 것임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짓밟힌 삶 자체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사사기에는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다의 딸(11:1-40)과 레위인의 첩(19:1-30) 이야기인데, 두 여성의 죽음은 모두 전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두 여성은 스스로 폭력과 전쟁에 개입한 일이 없지만 폭력의 희생자가 됩니다. 비천한 출신이라 하여 상속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입다는 건달들을 모아 비적떼의 두목이 됩니다.(11:3) 그러다 암몬족과의 전쟁에 나서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데, 실제로는 하나님과 거래를 합니다. 그는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주신다면 자신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자신을 맞이하는 사람을 야훼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11:29-31) 그는 전투에서 이겼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의 딸이 그를 맞이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모습은 대조적입니다. 입다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수령이 되기 위해서였고, 그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 결과 딸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딸은 다른 사람이 당할 수 있는 희생을 자신이 당하고 그럼으로써 의도했든 안 했든 그런 거래의 부당함과 잔혹함을 폭로합니다. 그녀의 죽음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의 한가운데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줍니다. 해마다 4일 동안 이스라엘 여자들은 입다의 딸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11:40) 사사기에 나오는 여예언자 드보라의 노래는 야훼의 승리를 끝없이 다시 이야기’(5:11)하지만, 입다의 딸의 이야기는 드보라의 노래의 이면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에는 드보라의 노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입다의 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마도 입다의 딸의 이야기가 드보라의 노래보다 전쟁의 진정한 모습을 전해줄 것입니다. 아무도 돕지 않은, 하나님도 침묵한 한 딸의 죽음. 이것이 전쟁의 실상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사기는 또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것은 입다의 딸의 죽음보다 더 처참합니다. 에브라임 산지의 한 레위인이 첩을 맞이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여자는 남편에게 반항하고 그를 떠나 베들레헴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짐작컨대 남편의 학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남자는 아내의 시체를 칼로 썰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가 달래서 데려오기로 합니다. 베들레헴의 처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베냐민 지파 마을 한 노인의 집에 머뭅니다. 이 때 성읍의 비류들이 집을 에워싸고 그들이 "알 수 있게"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레위인을 성적으로 욕보이고 학대하려는 것입니다. 노인은 대신 자기 딸을 내놓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완강하게 나오자 레위인은 자기 아내를 무리에게 내던집니다. 무리는 밤새 성폭행하고 새벽이 돼서야 여자를 놓아줍니다. 여자는 노인의 집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와 문 앞에 쓰러집니다. 남편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아침에 일어나 길 떠날 차비를 합니다. 문을 열었을 때 아내가 문지방에 손을 얹은 채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일어나 가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몸을 당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그는 칼을 들어 마치 제단에 짐승을 바칠 때처럼 아내를 잡아, 시신을 열 두 토막냅니다. 그는 시체의 조각들을 이스라엘 지파마다 보내서 자신을 모욕한 베냐민 지파에 맞서는 전쟁에 소환합니다.


사사기에서 이 이야기는 베냐민전쟁의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나옵니다. 동족상잔은 참혹했고, 베냐민지파는 거의 멸절되다시피 했습니다. 육백명의 남자들이 살아남았지만, 여자들과 아이들은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 남자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다른 도시 사람들을 도륙하여 처녀들을 빼앗고 납치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의 상황에 어떻게 이용되고 또 끝까지 짓밟히는지 이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그녀들은 살해당하고 납치당하고 강간당하지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누군지 이름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지 이야기만 전해집니다. 이 여자들은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얻지 못했고, 지상의 어디에도 그녀들이 쉴 장소는 없었습니다. 레위인의 아내는 낯선 고장, 낯선 노인의 집 문 앞에 쓰러져 있습니다. 남편은 그녀의 몸을 토막 내어 내전의 빌미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의 이야기가 성서 안에 들어와 계속 이야기됩니다. 국가의 번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참한 이야기가, 남자들의 전쟁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서 희생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진짜 삶과 전쟁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리고 예수이야기에서 이 여자들의 희생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됩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의 족보가 나옵니다. 물론 마태나 누가가 전하는 예수의 족보를 실제 예수의 족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족보를 복음서 첫머리에 실은 저자들의 의중은 읽힙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는 세부사항에서 틀리는 부분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다윗왕가의 족보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예수가 다윗자손임을 입증하려는 의도로 씌어졌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전성기의 왕인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이 묘합니다. 16절은 이렇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마태의 족보는 정형화 된 문구로 이어지고, 그 문구대로라면 16절에서도 야곱은 요셉을 낳았고, 요셉은 예수를 낳았다.”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16절에서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다윗 자손으로 예수를 그리는 것이 본래 족보의 의도였다면, 분명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로 서술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으로 기술됩니다. 앞서 15절까지 다윗 가문인 예수의 부계혈통이 서술되었는데, 마지막 절정인 16절에서는-지금까지 이름을 열거했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리면서-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 서술됩니다. 학자들의 설명은 다양하지만, 간단히 말해 16절에서는 예수탄생에 관한 두 전승, 즉 다윗후손 전승과 동정녀탄생 전승이 충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절의 전환도 특이하지만, 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도한 남성 왕들의 계보 중간에 문득문득 등장하는 여성들입니다. 다말, 라합, ,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가 바로 그들입니다. 마태가 이 네 여인을 선택한 것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의 자랑스러운 여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 네 여자들은 다윗가문의 명예를 특정한 방식으로 훼손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기서 예수를 다윗 자손으로 그리는 것이 본래 의도였다면 마태는 이들을 등장시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명문가의 아름답고 총명한 며느리도 아니었고, 권세가의 현숙한 아내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특히 성적인 측면에서 오점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고, 거기서 아들을 낳는 다말, 늙은 보아즈의 품속에 들어가 그와 한 몸이 되어 생존하는 과부 룻, 가난한 하삐루들이 여리고로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탐꾼들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기생 라합, 자기 남편을 죽게 만든 장본인의 아내가 되어 그의 가계를 이어주었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이 네 명의 여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성적인 측면에서 무언가 특이점, 내지는 하자가 있는 여자들이면서 동시에 놀라운 적극성을 가지고 삶을 개척해나간 여자들입니다. 왕들의 족보에 들어와 그 도도한 흐름을 끊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왕들로 대표되는 국가에 의해, 가부장제 사회에 의해 성적으로 수치를 당한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족보는 가부장제 사회,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왕으로 대변되는 국가에 의해 성적으로 상처받고 수치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 여성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가부장제에 의해, 가부장적 국가에 의해 수치당하고 상처받은 여성들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이 여자들도 수치를 당했지만 일어섰습니다. 국가에 의한 여성의 희생에는 거의 항상 성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이 네 여자들은 마리아로 연결됩니다. 예수는 이 네 여자들의 후배인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국가와 가부장제에 의해 희생당한 여자들의 후손을 구원자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놀랍고도 특이한 성격이 동정녀 탄생이라는 표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출생에서 굳이 남성의 역할을 배제하는 동정녀로부터의 탄생 표상은 예수라는 인물이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의 역사의 실패와 과오를 밝히 드러내고 그 역사를 심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태의 족보에서 그 역사의 잘못됨, 비뚤어짐은 앞에 등장했던 네 여인들의 왜곡되고 유린당한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들은 비뚤어진 역사의 희생자이며, 동시에 그런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역사를 지탱해온 생명의 원천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 네 명의 여자들, 그리고 사사기의 희생당한 여자들은 신원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실은 국가는 결코 여자의 얼굴을 할 수 없습니다. 국가라는 형태로 인간공동체를 조직해온 인류의 오랜 역사,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폭력, 그리고 그 끔찍한 폭력을 가장 극악한 형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여성들.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은 그 자체로 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묻게 하며, 근원적 평화에의 갈구를 온몸으로 증거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간디의 죽음은 국가의 본질과 근원적인 평화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간디는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본질적으로 폭력기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신과 고락을 함께 했던 국민회의파가 신생국가 인도의 부속물이 된 것을 보고 절망했으며, 국가의 개혁능력에 대해서도 회의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을 쟁취한 이후 그는 반복해서 국가권력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안을 했습니다. 폭동지역에서 경찰과 군대를 철수시켜라, 파키스탄과 전쟁 중임에도 국고에서 파키스탄의 몫을 넘겨주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를 위해 간디는 목숨을 건 단식을 했습니다. 당시 인도 정부는 간디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파키스탄에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단식이 나두람 고드세로 하여금 간디를 암살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간디의 요구는 신생국가 인도의 헌법구상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구조를 제안했습니다. 간디는 인도에 존재하는 70만개의 마을들에 근거한 마을공화국을 구상했습니다. 그는 “5인으로 구성된 판차야트를 기초로 그 윗 단계에 지도자들이 선출되는 방식으로 계속 확장되어 결국 인도 전역을 관할하게 되는 계단식 체제를 생각했습니다.” ‘국민회의파가 국가기관에서 완전히 물러나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거대한 권력이동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간디는 단순히 이론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실행 가능한 것으로 그런 제안을 했고, 그런 일을 해나갈 변화의 주체로 간디 자신과 국민회의파’, 그리고 간디 지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명백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가능한 일로 바꾸어놓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간디의 제안을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간단히 그가 사라져주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간디의 신헌법 제안문이 의회위원회 의장에게 전달된 지 몇 시간 후에 간디는 암살당했습니다.


간디의 죽음이 인도라는 새로운 국가 건설과 관련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는 역설적으로 암살자 나두람 고드세의 행동과 발언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나두람 고드세는 미치광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적이고, 조리있고, 명석하고, 애국적이며, 용감했습니다.” 간디를 쏘기 전 그는 두 손을 모아 존경을 표시했고, 총을 쏜 후 총을 든 손을 허공으로 올리면서 경찰!”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고드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가 간디지를 죽이면 나는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명예를 모두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간디지가 사라지면 분명히 인도의 정치는 현실적인 것이 되어서, 응징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군대를 보유하여 강력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내 자신의 미래가 파멸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국가는 살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간디가 죽자 근대 국가로서 인도건설은 착착 진행되었고, 고드세의 기대는 이루어졌습니다. 근대국가 인도의 건설을 위해 간디는 죽어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근대국가의 근원적 폭력성이라는 제단 위에서 간디는 희생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간디의 죽음의 필연성이 있습니다.


고드세는 근대적 조국 인도의 건설을 위해 간디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근대 국가의 원리란 막스 베버에 의하면 합법적 폭력에 대한 권리입니다. 이것은 폭력적인 국민국가는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는 신념이고, 따라서 국가는 의심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국가를 세우는 일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이라는 신념입니다. 그리고 정치학자 러미스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신념으로부터 국가의 마법이 생겨납니다. 보통 사람의 상식적인 감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끔찍한 짓을 국가의 이름으로는 거리낌 없이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마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에 폭격기 조종사는 수많은 민간인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지상폭격을 가할 수 있고, 과학자는 자신이 개발하는 무기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산산조각 낼지 알면서도 불철주야 그 일에 매달립니다. 이처럼 국가의 마법은 인간으로서 차마할 수 없는 일들을 감히하게 만드는 요술을 부립니다. 이 때문에 분명 거기에는 어떤 진심이 있었을 테고, 그것은 고드세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간디는 그가 구상한 새로운 인도 헌법을 통해 합법화 된 폭력으로서의 국가라는 것이 인간이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따라서 국가의 마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상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인도 상황에서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사항이었음을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국가에 의해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디의 제안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고,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간디가 꿈꾸었던 세상이 사실은 가능한 것이었다는 데 대한 역설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고드세의 유혹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를 위해 내 안의 간디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이며, ‘국가의 마법에 걸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실체와 대면하는 데서 출발하기를 회피하는 것이며,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근본적으로 성립불가능하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악이 무엇인지 보기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로빈슨 제퍼스의 말대로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일반적인 정의(正義)나 행복의 꿈에 속지 않는명석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래도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비합리적 몽상가로 보이겠지만 어느 시대에나 끔찍한 재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희망을 보존해온 사람들은 그들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현실이 발목을 잡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상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상상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실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상력이 없는 곳에서 국가의 마법은 작동하기 시작하며, 우리 안의 간디는 죽임을 당하고, 희망도 사라집니다.

 

[기도]

 

하나님, 전쟁과 내전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지금 간절히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온갖 고통과 치욕과 학대를 겪으셨습니다. 할머니들이 못나고 운이 나빠서, 죄가 많아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악하고 우리가 못나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을 통해 우리는 짐승의 성질과 버릇을 버리고 사람다운 삶의 길을 찾을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난과 치욕을 떨치고 일어나 떳떳이 말하고 당당하게 행동할 때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생명을 짓밟는 모든 권력자들의 거짓과 더러움이 폭로되고 세상을 파괴와 죽음으로 이끄는 지옥의 권세가 무너집니다. 할머니가 가시는 곳마다 옳은 길이 드러나게 하시고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에서 참된 삶을 깨닫게 하시고 할머니들이 하시는 행동으로 정의와 평화의 길이 열리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위안부 할머니들께 힘과 위로를 주시고 할머니들이 평안과 보람을 느끼며 살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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