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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세기 1:26-27, 마가복음 6:34, 10:45)

201834

창립 31주년 감사예배

최만자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 창세기 1:26-27 -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 마가복음 6:34 -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 마가복음 10:45 -

 

 

지독히 매섭던 겨울도 봄기운 앞에 고개 숙이고 물러난 것 같다. 이 아름다운 봄기운이 남북의 평화에도 퍼져 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은 새길교회 창립 31주년을 기억하는 주일이다. 매년 창립기념 주일에는 창립취지문을 읽으며 당시의 정신을 되새긴다. 뿐만 아니라 새길이 어떤 위기를 맞을 때나 결단이 필요할 때 우리들은 다시 창립정신을 되돌아본다. 저는 새길의 창립정신을 1987년 당시 시대에 정의를 회복하고자 한 것과 또한 폐쇄적 근본교리주의의 신학을 벗어나 대화적 변증적인 열린 신학을 지향 한 것이라고 두 가지로 생각한다. 새길은 신앙 지향성을 깊은 신앙 넓은 신학으로 표현하고 이에 기반하여 말씀증거와 교회운영을 진행하여 왔다. 사회적 모든 변화를 수용하고 현대 기독교 사상과 신학을 새롭게 정립해 사회 책임적 그리스도인으로 나가는 노력을 경주하여 30년이란 한 세대를 지나왔다. 31주년을 맞은 지금은 이제 다음 세대의 신앙과 신학을 새로이 추구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새길 역사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역사를 이으면서 지금의 시대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야하는 시점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21세기를 이미 5분의 1을 지나고 있다. 혹자는 20세기를 경제의 시대라 한다면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라고 한다. 문화의 시대를 자칭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사람다운 삶이 지니는 가치 추구를 요구 받는 시대임을 의미한다. 이는 로봇과 공존해야 한다는 등 4차 혁명의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문제를 생각해야 할 점도 있으나 그 보다는 인간성이 실종된 듯 한 지금의 사회상황에서 심각히 생각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은 괴물과 좀비들이 득시글 그리고 참인간은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인 것 같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성폭력 괴물들, 권력 괴물, 돈 괴물들 등 온갖 괴물들이 약자들을 고통스럽게 괴롭히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괴물의 지배를 받는 줄도 모르고 태연스레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 우리를 사람이게 할 수 있을까? 오늘 설교 제목은 낮은산 출판사에서 나온 책 제목에 의존한 것이고 그 중 강남순 선생의 글을 많이 참고 했다. 참 사람이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한 탐색을 세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1. 첫 번째 이야기

몇 해 전 남편과 함께 정말 재미있는 한 영화를 보았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둘이 똑같이 그 영화 제목도 내용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참 재미있었는데만 기억났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도무지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아 아 이렇게 치매가 시작되는 구나 싶은 약간의 불안감마저 생겼다. 그 며칠 후 어느 순간에 둘이 거의 같은 순간에. ‘! 쇼 생크 탈출하고 소리쳤다. 정말 재미있는 영화다.


그 영화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주인공 앤디가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간수의 방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2중창을 틀어 교도소 곳곳의 스피커로 감옥 구석구석 아름다운 아리아가 울려 퍼지게 했을 때 모든 죄수들이 하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 숨죽여 그 음악을 듣던 장면이다. 그 음악은 감옥생활 동안 모두 상실해 버렸던 죄수들 자신의 본연을 돌아보게 해주었고 가슴 깊숙이 쳐 박아 두었던 온갖 아름다운 감정과 벅찬 행복감, 막힌 공간에 있음에도 평화롭게 다가오는 자유 함, 이런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순간이었고 아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구나’ ‘아 내가 본래 이 자유함을 아는 인간이었지라는 깨달음이 온 몸을 휘감는 듯 보였다. 감옥생활 규칙의 강요에 매인 일상을 살며 자신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게 된 그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순간 자유를 박탈당한자기 삶을 똑바로 보게 되면서 감옥 너머의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게 되는 모습의 장면이다. 음악은 사방이 벽으로 갇히고 규격화된 제도의 강요 속에서 이젠 차라리 그것이 익숙하고 편해진 비인간화 된 존재로부터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나를 찾게 하여 주었다. 음악의 위대성이다.

 

2. 두 번째 이야기

제가 2010년 이스라엘을 여행했을 때 최남단 이집트와의 국경지대인 네게브 사막지역에 있는 팀나 국립공원을 들렀었다.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 지역에 구리광산이 있었다. 이 광산은 기원전 3500년 금속 병용기 시대부터 있어온 현재 세계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구리광산이라 했다. 그 광산에 그 시대 이집트의 광부들이 와서 구리를 캐며 살았는데 그들이 남겨 놓은 다양한 흔적들이 있었다. 구리를 걸러내 제련하는 제련소가 보존되어 있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당시의 광부들이 구리광산 벽 위에 그린 많은 그림들이 마치 동굴 벽화를 보는 듯 새겨져 있는데 쉴만한 공간이 있는 거의 모든 곳에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진 1,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들, 그림2, 출산의 장면) 고향을 떠나 오래고 오랜 세월을 힘든 광부로 일하면서 쉬는 시간에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저런 벽화를 그렸을까? 그들은 아마도 고향을 한없이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을 그리며 내 마음이 연결되는 고향의 그 모든 것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안부를 듣고 싶고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절절 했을 것이다. 아기를 낳았을 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간절함도 보인다.

 

사진 1

189.JPG


사진 2

188.JPG


고향은 나와 일치성을 가지는 곳이고 그래서 나는 거기서는 소외되지 않는다, 따라서 거기서 비로소 내가 인간으로서의 진정성을 회복하게 되고 내 삶의 의미를 창출 할 수 있게 되는 곳이다. 강남순은 지리적 조건을 넘어선 지금 내 안에 들어온 고향을 탈 영토적 고향이라 이름 한다. 한 공간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는 고향이라 한다. 그는 내가 참 인간이 되고자 하는 내적 갈망이 담기는 곳내가 나와의 일치성을 경험하는 삶이 가능한 곳, 이러한 삶이 가능한 상태가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떠나 그 일치성을 상실한 소외된 존재이지만 그곳을 그리워하고 나의 일치성을 찾으려 그리는 그림에서 고향성을 회복하고 확장한 것이다. 자신의 일치성 회복을 위한 간절함, 갈망 그것이 인간이 되고 인간됨의 삶의 의미를 갖게 한 힘이었다.


3. 세 번째 이야기

요즈음 인기 작가 김동식의 소설 중 회색인간은 오늘의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묵직하다. 짧은 소설인 회색인간의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 이었다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약간 기괴한 분위기를 갖는 이 소설은 땅위에 살던 1만 명의 시민들이 땅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땅 아래 지저의 세계에서 땅을 파는 강제 노동에 시달리면서 겪는 최악의 비인간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묘사한다. 처음엔 저항도 해보고 누군가 구원해 줄 것이란 희망도 가져보고, 탈출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체념하고 강제 노동의 현실을 받아들여 정말 인간 같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어느 정도로 비인간적이었나 하면 땅을 파는 곡갱이 나무 자루를 갉아 먹어 자루가 반 토막이 됐고 그것을 훔쳐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땅을 많이 판자가 우선적으로 빵을 먹는다는 돌아다니는 규칙 때문에 누가 죽는 지도 모르고 땅을 팠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존재에겐 그저 배고픔을 느끼는 몸뚱이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작자는 흙가루를 뒤집어 쓴 이들을 회색인간이라 부른다.


그런 어느 날 한 여인이 노래를 불렀고 회색인간들은 그 여인에게 돌팔매를 던졌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맞으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벽에다 돌멩이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지상에서 화가였지만 이곳에서 화가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도 매를 맞았지만 계속 그림을 그렸다. 여인도 화가도 배가 고파 죽어가면서도 노래를 불렀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이들에게 자기 먹을 빵을 내주었다. 그리고 화가에겐 이곳의 모습을 다 그려 달라 부탁을 하였다. 손톱과 손끝이 닳아져 나간 이 손, 그리고 한쪽 발목을 잃은 사람을, 그리고 앙상한 뼈만 남은 저 몸들을 그려 달라고 하였다. 이 때 한 청년이 힘겹게 일어나 저는 소설가입니다. 이곳의 모든 것을 쓰겠습니다 라고 했다. 한 중년 여인이 소설가 청년에게 자기가 얼마나 배고픈지를 쓸 수 있냐고 물었고 청년은 그 극단의 배고픔을 읊으며 소설을 쓸 수 있다 했다. 여인은 자기의 빵을 주며 우리의 이야기를 꼭 써 달라 부탁했다. 그래서 여인의 노래도 화가의 그림도 소설가의 이야기 되 뇌임도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서서히 변해갔고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함께 그림도 그리고 이야기를 종일 외우기도 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 나갔고 배가 고팠지만, 그리고 돌가루가 아무리 날아와도 그들은 더 이상 회색 인간이 아니었고 그냥 보통 인간이었다고 저자는 끝을 맺는다. 이 이야기는 매우 상징적이다.


자유에의 갈망, 내존재의 일치성을 회복하려는 열정,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존재로 회복시켜가는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불씨, 이런 것들을 세 이야기로부터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극한적 상황에 처할지라도 인간 내면 깊이에 감추어 있는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씨앗혹은 불씨같은 것, 그 불씨의 힘이 자신도 그리고 다른 인간 모두를 더 이상 비인간이 아닌 사람으로 회복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이 이야기들 자체가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가에 대해 많은 토론과 답을 엿보인다. 이 이야기들이 성서에선 어떻게 조명될까?

 

4. 성서의 조명 - 하나님의 형상대로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26에서 말한다. 이는 기독교 인간학의 근원인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그러나 성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교회역사 동안 수많은 해석들이 있어왔다. 저는 구약 성서신학자 김이곤 교수의 해석에 의지해서 나는 세 가지 의미를 찾아보았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피조물인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성서는 확고하게 인간은 결코 창조자인 신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인간 신격화가 절대 있을 수 없고 동시에 인간의 비인격화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신의 형상은 그 나라의 왕의 존재에게만 인정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성서는 이를 거부하고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임을 선포한다. 이 말은 동시에 창조자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신의 과제를 부여 받은 존재임을 말한다고 김 교수는 해석한다. 그 과제는 통치와 공존의 과제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과제를 준다. 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이 마음대로 함부로 권력적으로 만물에 상관하라는 것으로 잘 못 해석되어 기독교는 인간 중심적 권력주의적 태도로 자연과 인간과 세상과 관계 맺어왔고 그 결과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이 통치는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은 책임이 수반된 것이지 인간이 마음대로 다스리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수임 통치권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권력에 대한 제한과 책임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요구한 것이다.


세 번째로 공존의 과제를 김이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말에서 찾아낸다. 이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를 위하여 돕는 꼭 맞는 짝(에제르 케네그도)을 만들겠다(2:18)는 구절과 연결시킨다. 옛 번역에 돕는 배필로 나오는 이 돕는 짝히브리어 에제르 케네그도는 돕는다는 히브리어 에제르동사가 성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도움에만 사용된 동사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도움’ ‘그 도움이 없이는 내 존재가 완성되지 못하는 도움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성서의 남녀관계 이해는 상호 절대적 도움의 존재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존의 관계를 모든 관계의 구조로 확장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냥 휴머니티(humanity)가 아니라 코우-휴머니티(co-humanity)이고, 그냥 존재(existence)가 아니라 공존(co-existence)의 존재라고 해석한다.


다시 요약적으로 보면 창세기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 평등과 존엄에서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지배권력의 제한과 동시에 만물에 대한 책임적 존재라는 것과, 나아가 상호 도우는 공존의 관계로서의 존재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인간학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이해를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가 아닌 인간의 사회적 관계질서를 포함한 관계적존재임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해치는 그래서 공존의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고 파괴된 세상이다. 그러므로 앞의 세 가지 이야기들이 개인별 자유에의 열정, 자기 일치성 회복에의 열망,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회복해 내는 내적 힘 같은 것이 인간됨의 길이라는 암시에 비해 성서의 인간이해는 사회적 관계성의 차원을 인간됨을 만드는 요소로 확실하게 전제하는 것에서 차이를 갖는다. 이것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불평등, 권력의 폭력이 없어야만 개별적 열망이 가능하고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공존의 관계질서를 장엄하게 창조 이야기로 선포하고 있는 이 창세기 창조 이야기는 그 기록의 배경을 알 때 의미가 더 분명해 진다. 창세기1장은 기원전 586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수난의 배경에서 쓰여 졌다. 포로 생활 백성의 슬픔은 시편 137편에 고스란히 노래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바빌론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의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 구나. 우리가 어찌 이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쇼 생크 감옥, 팀나의 그림, 회색인간의 세상과 비슷한 상황, 처절하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생활이 창조 이야기의 배경이다.


대만의 이야기 신학자 송천성은 이 창조이야기가 하나님의 속병앓이라고 한다. 자기 백성의 고난과 고통을 보는 하나님의 아픔때문에 창조의 구원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라고 한다. 제국의 포로가 되어 자유도 고향도 상실하고 푸른색 인간이 된 자기 백성의 고통에 하나님은 가슴앓이를 한다. 아픔의 힘이 장엄한 창조 이야기를 선포하게 했고 하나님의 가슴앓이는 백성의 자유와 해방을 이루게 하였다는 것이다. 창조 이야기는 지배와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절대적 평등과 존엄과 공존의 존재로서의 인간선언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앓이는 예수에게서 다시 솟아난다. 월터 윙크는 예수의 공생적 삶 또한 예수의 가슴 아픔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한다. 월터 윙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몰아갔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지배와 종교권력의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는 무리를 보며 그의 가슴앓이는 저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면서 새로운 세상인 하나님의 나라 질서를 보여주었다. 윙크는 자기가 평생 연구한 결과는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 예수를 이해하는데 가장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뼈대라고 한다. 윙크의 교회에 대한 뼈아픈 지적은 예수의 이 요청과는 반대로 교회는 도리어 지배체제에 복음을 적응시켜왔다는 비판이다. 예수가 세상에서 구현하고자 한 것은 지배없는 하나님의 질서였다. 예수는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지배체제와 공모했던 것을 회개하라고 요청했고 그런 체제가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킨 여러 가지 방식들에서 그들을 치유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가 지향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으뜸이 되고자하면 꼴찌가 되고 섬김을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는 질서.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 놓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였다.


이렇게 보면 창조 이야기나 예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원인은 권력의 폭력지배 통제하는 권력이 문제임을 명시한다. 권력의 지배를 강요당하는 곳에서 인간은 온전한 인간으로 살 수 없다. 그리고 이 비인간화로부터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과 예수의 불쌍히 여김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이 성서의 구원 역사의 시작이다.


나는 이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하나님의 인간창조에서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닐까 상상한다. 하나님의 가슴앓이는 분노와 비판과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의 비젼을 담고 있다. 바빌론 포로 생활의 비애, 로마 식민지 하에서의 고통과 분노, 이 절절한 아픔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로서의 섬김이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슴앓이는 하나님 형상의 불씨이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하나의 불씨로 심어져 있다고 생각된다. 쇼생크 감옥에서나 팀나의 동굴에서나 회색인간의 지저에서도 그 불씨는 은연중 살아나기 시작했고 참혹한 비인간적 현실을 넘어 다른 세상을 향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 속에 있는 이 불씨를 자각해 내는 것이며 어떤 조건에서도 끈질기게 불씨를 키워나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 된다. 내 속의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날 때 우리 모두의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나 우리를 인간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한 내 속에 있는 아픔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내는 것, 그것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힘이다.


요즈음 Me Too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주대 노명우 교수는 이 운동이 야만의 세월을 끝내자는 비상 경보기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직 남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이다. 이 운동은 그 오랜 세월동안 관습이란 이름으로 감옥을 만들고 여성들을 땅 아래에서 살게 한 권력 괴물,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이 고통에 우리 모두 가슴앓이를 해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 형상의 불씨를 가진 이들의 행진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하층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의 소리는 들리지 못하고 있다. 이주민 여성들, 장애인 여성들, 탈북자들 등 이들의 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개신교가 이 운동에 아직 잠잠하다고들 한다. 개신교가 시작되면 아마 경천동지 할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사실 개신교는 2010년 봄에 이미 이 운동이 일어났다. 피디 수첩에 한 여성이 삼일교회 담임목사 전병욱에게 성추행당한 것을 제보하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제보자들이 참여했고 인터넷 카페도 만들어지고 숨바꼭질이란 책도 나왔다. 그러나 아직 미완의 문제가 되고 있다. 소속 노회도 총회도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목사는 면직 1년 반 만에 새 교회를 시작해 잘 운영하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은 증언자들을 이단으로 몰고 있다.


지금의 한국기독교는 그들의 경전인 성서에서 맨 처음 시작되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한 이 귀절도 읽지 못하는 문맹들이다. 이 사순절 절기에 우리는 예수의 수난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고통당하는 자들의 소리는 외면한 채 가시관을 만들어 쓰고 십자가 형틀의 모형을 짊어지고 행진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 수난에 대한 명상인가? 지배체제 권력에 저항하여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 했던 예수를 저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리라. 성서는 저들에게 어떻게 읽히고 있는 것인가? 또 다시 많은 물음을 하게 된다.


권력가진 괴물의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이게 되는 길은 가슴앓이를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고 이것이 새길의 다음 세대의 과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기도]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의 형상을 이 세대에 회복하고자 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어 온 세상이 당신의 형상으로 가득차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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