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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명식

 

우리 인생에서 만난 새길공동체, 그리고 그 도전과제

(창세기 28:10~12, 사도행전 2:44~45, 디모데전서 6:7~8)

2018114

주일예배

이명식 형제(새길교회 운영위원장)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 창세기 28:1012 -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 사도행전 2:4445 -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 디모데전서 6:78 -

 

 

1. 들어가면서

 

흔히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나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인은 인생을 소풍길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숙생이라는 타이틀로 인생은 정처 없이 왔다가 가는 허무한 나그네길이라는 1966년에 발표된 최희준이라는 가수의 노래는 제 연배가 되시는 분들은 모두들 기억하리라 봅니다. 인생의 허무와 쓸쓸함 그리고 외로움 등을 독백하는 노래입니다. 그토록 영화를 구가했던 솔로몬 모든 영광도 들에 핀 한 떨기 백합보다 화려하지 않았으며, 우리 시대 혁신의 아이콘이었고 성공의 전형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남긴 메시지를 보더라도, 그는 병상에 누워 죽음의 사자의 숨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주위의 갈채와 막대한 부는 정말 부질없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인생을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의 덧없음과 불확실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말씀에도 나그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브리서 11:1314)

 

저는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산 대표적 성경인물이 야곱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에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에 미국친구와 더불어 성경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대다수 미국 사람들의 first name은 성경인물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4명의 이름들이 많이 인용되는데 많은 부모들이 이삭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가장 순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도 그렇게 살기는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4명 중에는 야곱의 인용빈도가 상대적으로 제일 적다고 합니다. 그 만큼 야곱의 인생은 드라마틱한 나그네 인생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어머니 고향이며 외삼촌이 사는 하란(오늘날 터키의 샨리우르파 주, 카르하데 지역)까지는 900km, 그중 변변한 길도 없는 사막이 400km나 이어지는 여정이었다고 합니다(구글 지도 상 도보로 184시간). 그곳의 기후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하여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외삼촌과 7, 레아와 7, 라헬과 7, 도합 21년을 시험과 연단을 받으면서 타향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의 나그네 인생에서 하이라이트는 소위 말하는 <야곱의 사다리> 꿈 장면입니다. 돌은 편안한 베갯감이 되지 못하지만 때로는 놀라운 꿈을 꾸게 합니다. 야곱은 상속 문제로 형 에서를 속였다가 형의 분노를 피해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돌을 베개로 삼아 잠든 야곱은 천사들이 하늘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꿈을 꾸게 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고, 야곱의 자손들(이들은 장차 이스라엘이라 불리게 된다)에게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세기 28:16~17).” 그는 꿈을 꾼 그 장소를 벧엘(신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야곱이 그 인생길을 안내자도 없이 혼자 길을 가고자 했을 때에 정말 말할 수 없이 불안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초석으로 하는 신의 집이라고 한다면 야곱은 베개로 삼은 돌을 세워 기념 기둥으로 만들면서 오늘날 그리스도 신앙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2. 공동체란?

 

일찍이 사람들은 나그네로 대표되는, 외롭고 쓸쓸하고 허무한 인생의 본질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시시대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외부환경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위협을 막아내고, 상부상조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공동체는 비단 인간만이 이루는 사회단위는 아닙니다. 여러 동물들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식물 또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애리조나 사막을 자동차로 여행하다 보면 선인장 군락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조슈아트리(Joshua Tree)가 선인장 군락에서 드문드문 보이다가 이내 완전히 조슈아트리 군락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같이 같은 종의 식물끼리 군락을 이루게 되면 다른 생물들이 주위에 못 들어오게 한다든지 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공동체(community)는 일반적으로 공통의 생활공간에서 상호작용하며, 유대감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합니다. 혈연(血緣)과 지연(地緣)공동체는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사회, 경제, 문화적 삶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새로운 사회 환경 속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는 유연한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이나 운명을 같이하는 조직체를 만드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것이 바로 신앙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혹은 법을 바탕으로 구성된 공동체사회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형태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친교 또한 성령의 활동을 근간으로 이뤄진 그리스도인 공동체-교회-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42~47)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247)

 

그러면 우리들은 왜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구원 받아서 천국 가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굳이 공동체를 만들어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은 가능한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우리는 왜 새길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이 자리에는 30년 전 새길교회를 창립하면서부터 그 일원이 되신 분들부터 얼마 전에야 새길을 만나서 구성원이 되신 분들까지 다양하게 새길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여한 세월과 관계없이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은 기성교회에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과 성찰일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가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을 조사해 발표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물론 호감도도 하락했습니다. 주요 종교 중 거의 꼴찌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신교인이 가장 호감을 보이는 종교는 불교로 40.6%에 달했고, 뒤를 이어 천주교가 37.6%, 개신교는 9.5%3위를 차지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점점 증가해, 1998년 조사 당시에는 11.7%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반면, 2017년 조사에서는 23.3%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응답이 20년 동안 2배 증가한 셈입니다. 얼마 전에 터진 한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목회자의 사리사욕 및 자기교회 중심적과 양적 팽창 지향성은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최대 고질적 과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으며, 유럽으로 가서는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는 기업이 되었다라는 리차드 핼버슨 목사의 말에 빗대어 교회는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돈이 제왕자리에 앉아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모든 것을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고 있는 현대사회의 현실 앞에 교회는 얼마나 무기력하고 얼마나 부끄러워지고 있는가요? 맘모니즘(mammonism)란 말이 있습니다. , , 재산, 재물, 소유, 물질을 절대시 하거나 그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물질숭배 풍조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맘모니즘으로 뿌옇게 덮힌 현실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우리 새길공동체 자매 형제님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현안인 사회적 양극화의 간극을 좁히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양극화 문제

 

얼마 전에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니, 2018년 올해 3%대 성장을 달성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 안팎에 이른다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달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라는 환한 빛 뒤에는 사회적 양극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을 하나 들자면, ‘갑질 뿌리는 경쟁사회라고 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린 사건은 대한한국 사회 곳곳에서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사회 곳곳에 갑질이 만연하면 거꾸로 인간의 존엄성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2010년 미국 심리학자 에드 디너의 연구팀이 130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덴마크는 94%, 미국은 88%인데 반해, 대한민국은 56%에 그쳤습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도 72%였습니다. 존중이 사라진 자리에선 공동체도 무너집니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공동체지수(공동체 생활로 위안을 얻고 정체성에 도움을 받는 지수)가 지난해 꼴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은 자살률이 전 세계에서 1위인데 2위보다 두 배나 더 높은 나라, 출산율이 1.26명으로 224개국 중 219위인 나라(참고적으로, 북한 1.95, 일본 1.41, 중국 1.60, 미국은 1.43), 반대로 기대수명은 82.5세로 11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가족이나 이웃과의 단절, 경제적 궁핍, 고독사 등 다양한 고령화사회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나라입니다. 1,000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등록금과 만성적 취업난은 청년의 일자리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희망마저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소득빈곤이 생계형 묻지마 노동으로 이어지고, ‘묻지마 장시간 노동이 시간빈곤으로 이어지는, 결국 생계에 쫓겨 졸업과 동시에 내동댕이치듯 취업시장에 투입된 빈곤층 청년에게 세상은 너무 힘들고 무섭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양극화의 중심에는 경제적 양극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더욱 고착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날로 커져가고 있으며, 기업도산과 실업의 고통이 깊이 새겨지면서, 중산층은 얇아지고 빈곤층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상위 10%의 부유층이 국가 전체재산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의 국민은 국가 전체재산 중 겨우 1.7%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양극화 문제는 대한민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세계 상위그룹 1%의 재산이 나머지 99%의 재산총액과 같아지고, 그 이후로는 점점 더 많아지리라는 것입니다. 더 자극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전 세계 하위 50%에 해당하는 35억 명의 재산을 다 합쳐봐야 세계 최고 부자 61명의 재산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이미 한계에 이르렀는데도 상황은 계속해서 극점인 1%에서 초극점인 0.01% 방향으로 쏠려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쯤 되면 한국사회 전반에 드리운 상흔 중 하나가 바로 불안이며 불안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한국인은 생존위협에 대한 만성화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일부 사회학들 주장에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4. 새길공동체의 역할

 

우리는 현재 허무하고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인생길에서 새길을 만나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여기서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끼리만 잘살고 행복하자고 그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 삶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주어진 그대로 아무런 의문이나 물음도 없이 살다가 죽는 방법이 있을 것이며, 또 다른 한 삶은 자기 삶이 어째서 주어졌는지, 왜 하필 그런 방식으로 그런 곳에서 그런 시대에 살도록 주어졌는지를 따져 물으며 사는 방식이지요. 그러면 새길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새길신앙고백에서는 이 땅에 생명과 평화, 정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구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더불어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라는 말보다 혼자'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운 이 시대에, ‘공동체'라는 말이 자칫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는 이 시대에,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 등 세속화된 우리 사회에서 새길은 평신도의 역할과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회갱신의 실천적 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협업해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교우들을 포함해서 구성원 상호간에 단기적으로는 관계가 시작되고, 장기적으로는 그 관계가 유지되며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울러 만인사제론에 입각한 새길공동체에서는 몇몇 특정 구성원이 모든 봉사를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형편과 사정에 따라 자신의 봉사 분량을 채움으로써 어떤 때는 봉사의 제공자가 되고 어떤 때는 봉사의 수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슬효과(chain effect)라고 볼 수 있지요. 이렇듯 선순환 연결고리를 이루어져 나갈 때, 내부적으로는 <관계의 힘>이 자연스럽게 키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힘>을 바탕으로 새길기독사회문화원과 사회사역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접점을 확대해 나갈 때, 외부적으로는 다른 사회적 공동체들과 <연대>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새길은 내부적으로 키워진 <관계의 힘>과 외부적으로 연결된 <연대>를 바탕으로, 작지만 알차게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새길공동체가 항상 해온 듯하지만, 다시 그리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해야 하는 도전과제인 셈입니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먼지, 그런 먼지에게조차 밟히는 자세로 겸손한 사람만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됨의 길로 다가선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고통 받는 이웃의 삶을 돌보는 사람됨의 애틋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8년 새해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집 지을 때 벽돌 한 장 쌓듯이, 그리고 장마에 떠내려간 돌다리를 다시 놓는 심정으로 우리 자매형제 모두가 새길공동체 내부와 외부에 상존하고 있는 양극화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분량과 역량만큼 그 해결과정에 참여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 모두는 인생에 있어서 나그네 같은 존재입니다. 외롭고 허망한 인생길에서 저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새길공동체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새길공동체가 자기교회 중심적이 되지 않도록 깨어있게 하시고,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협업해가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그리해서 내부적으로는 <관계의 힘>을 키우고 외부적으로는 <연대>를 강화해서 우리 주위에 만연해 있는 양극화 문제를 자신의 분량만큼 참여하여 그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를 통해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진정 사회적 약자의 이웃이 되어 <더불어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삶을 살도록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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