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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완상


, 텍스트 그리고 예수의 사랑

(요한복음서 8:6~11, 고린도후서 3:3~6)

201817

새해주일 예배

한완상 형제(새길교회 신학위원)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 요한복음서 8:611 -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 고린도후서 3:36 -

 

 

1. 들어가며

 

왜 예수님은 주옥과 같은 그의 하나님나라 비전을 그의 친필인 글로 남기지 않았을까요? 당시 지배 언어였던 희랍어를 몰라서일까요? 이 질문은 글로 먹고 살아온 저와 같은 지식인 크리스천에게는 언제나 끈질긴 도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복음서가 그의 친필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의 꿈과 그의 운동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예수님은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으셨기에, 그 많은 성서학자들이 그의 어록의 진실성(authenticity)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8장에는 예수께서 두 번씩이나 땅에 글을 쓰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쓰셨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기에 매우 궁금해지고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우리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은 그의 글씨와 말씀으로 어떤 사건,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궁금해지는 것은 왜 하필이면 땅에 두 번씩이나 글을 쓰셨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지식인 예수따르미로서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호기심이긴 하지만, 땅에 글을 쓰신 예수님의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서 오늘 저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보다 깊게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조국강토에서 인류 마지막 재앙이 될 핵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먹구름이 유령처럼 전 세계에 번지고 있는 지금, 예수님의 글쓰기 문제를 새롭게 성찰해보고 싶습니다. 땅 위에 글쓰기가 하나님나라 세우기와 한반도 평화만들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새길공동체와 같이 글쓰기 좋아하고 그것으로 먹고 사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공동체에서 예수의 글과 말씀의 깊은 뜻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습니다.

 

2. 위기 상황과 예수의 글쓰기

 

공관복음에는 없는 한 예수사건이 요한복음 81~11절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불륜 행위를 저질렀던 한 여인을 율법을 숭상했던 일군의 유대교 남자 신자들이 잡아 예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가부장적 권력으로 이 여인을 즉결처분하고 싶어 했습니다. 일종의 유대주의적 인민재판이지요. 그들은 절체절명 위기에 빠진 이 여인을 이용하여 사실은 예수를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과연 예수께서는 이 위기를 어떻게 대응해 나가셨는지, 특히 예수님의 그 대응을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위기 해결방식이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2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인을 잡아온 남권주의자들은 예수에게 신성한 모세율법에 따라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하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예수의 탈율법적 일탈을 드러내어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실천하려 했습니다.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이 도전 앞에서 예수님이 취하신 대응책은 당시 관례를 뛰어넘는 놀라운 대응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허리를 굽혀 땅에 무엇을 쓰셨습니다. 그들의 거친 집단적 분노 앞에서 그는 참으로 쌩뚱맞게도 땅에 글을 쓰셨지요. 거친 말의 도전에 바로 거친 말로 대응하지 않으시고, 아무 대꾸도 없이 허리를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글은 읽지 않고 계속 다그쳤습니다. 사람마다 손에 돌을 꽉 움켜쥐고서 예수의 대답을 다그쳤습니다.

 

도대체 이런 험악한 상황에서 예수의 이와 같은 글쓰기 대응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의 신학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호기심에 따른다면, 거친 말에 거친 말 대응 대신에 갑질하려는 권력 주체들이 보다 차분하게 성찰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예수님은 주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성찰을 도와주기 위해 이런 내용의 글을 쓰지 않았을까요? 이른바 불륜 행위는 짝이 있는 법인데, 이 여성과 한 짝이 되어 일탈 행위를 한 남성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간음 행위는 겁탈 행위와 달리 쌍방 합의에 따른 행위인데, 왜 여성만 잡아왔는가? 하고 글로 질문한 듯합니다. 공범자가 없는데, 어떻게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겠는가를 오히려 물으면서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도 남성 공범자를 데려오라는 메시지를 쓰신 듯합니다. 현장에서 남성 공범자를 놓아준 잘못을 상기시킨 글일 것입니다.

 

그런데 동원된 듯한 남성 고소인들은 예수를 닦달하기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예수의 땅 위의 글씨를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를 제거하려는 그들의 본래 계획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그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으려 하지조차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시 몸을 일으켰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이번에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서 8:7)

 

예수님의 이와 같은 단호한 명령에 율법 근본주의자들은 찔끔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께서 당시 신성한 모세율법이요, 실증법이었던 신명기법(신명기 22:22~24)이나 레위법(레위기 20:10)을 존중한다는 사실에 그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이 실증법을 예수가 무시해야만 그들의 함정에 예수를 빠뜨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실증법을 존중했지만, 실은 그 법의 껍데기를 존중한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정신을 진정으로 존중했습니다. 이 신성한 모세율법을 집행하되 그 정신에 따라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부터 먼저 돌로 여인을 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본다면,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일탈 범죄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잘 생긴 이성을 보고 욕심만 내도 이미 간음했다고 엄격히 해석한다면,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문제에 있어 모두가 일탈자임을 상기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의 준엄한 명령에 그들은 찔끔했던 것입니다. 이 찔끔은 자기성찰의 문을 조용히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찔끔하는 사이에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또 쓰셨습니다. 이번에는 고소인 남권주의자들이 그 땅 위의 글씨에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쓴 것인지 성서는 밝히지 않았으나, 그 글의 메시지를 읽자 고소인들은 충격을 받아 하나 둘씩 현장에서 조용히 물러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는 예수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시사합니다. 흥미롭게도 성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제일 먼저 떠났다고 증언합니다.

 

정말 이 말의 뜻이 저에게는 가슴으로 다가온 메시지였습니다. 갑질하려는 사람들 중에 나이든 남성이 더 부끄러워했기에 먼저 그 현장에서 물러갔다는 뜻이 아닐까요? 과연 지금도 그러할까요?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 살아온 햇수만큼 잘못이 많겠지요. 그러나 늙을수록 노욕 또한 추악하게 강렬해져서 쉽게 그들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세월호 참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그들 중에 두드러지게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른바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군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분을 위시해서, 기독교 신자 늙은이들 중에 이러한 분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 당시 늙은이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의 글 위력이 엄청나게 감동적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의 손에 단단히 쥐어졌던 돌이 부끄러움(羞恥心)을 회복한 남권주의자들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에 저는 감동합니다. 도대체 무슨 글을 쓰셨길래 그런 효과가 났을까요? 짐작컨대, 남성들의 성적 갑질 행위를 상기시키는 일탈 행위를 적었다고 생각됩니다. 노골적으로는 지적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글을 읽는 순간 저것은 바로 내가 얼마 전에 저지른 짓인데.’ 하고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 완고했던 율법주의자들이 부끄러워했음이 분명합니다. 동양의 수치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서양의 죄의식이었을까요? 흔히들 유교문화는 수치심(shame)을 강조하고, 기독교 서양문화는 죄의식(guilt)을 중히 여긴다고 하는데, 저는 예수가 되살려놓은 부끄러움은 동양의 수치심과 서양의 죄의식을 모두 포함하는 자기성찰의 고귀한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발선(發善)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마시게 하라고 당부하시면서, 그렇게 하면 악한 원수 속에 얼어붙은 양심과 하나님 형상이 녹기 시작하여 마침내 선함을 되찾게 된다고 했습니다. 원수머리 위에 숯불을 얹어놓는 효력이 발생한다고 했습니다(로마서 12:20~21). 그래서 원수에 대한 우리의 증오심과 우리에 대한 원수의 적개심이 서로 발악(發惡)하는 가운데 죽음과 죽임의 대결로 치닫게 되지요. 예수는 이 죽음의 악순환 행진을 중지시켰습니다. 발선으로 발악을 이겨야만 진정한 소통과 감동적 평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글은 평화만들기의 힘으로 작동하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갑질하는 남성들의 살인야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끈 것이지요. 정죄와 낙인으로 사람을 죽이는 악순환을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돌을 움켜쥔 남성들이 돌을 내던지고 모두 그 증오의 마당에서 사라졌을 때, 예수께서는 처형당할 뻔한 여성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나도 당신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나아가 다시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8:11)

 

죄의 노예가 되지 말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만들어내는 하나님 사랑의 힘입니다.

 

3. 왜 예수께서는 땅에 글을 쓰셨을까?

 

이제 예수께서는 왜 땅에 글을 쓰셨는지를 성찰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처형에서 구해주셨는데, 이것으로 이 사건이 모두 끝난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을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했듯이 주님은 부끄러워해서 조용히 현장에서 사라진 갑질하려 했던 남성들도 구하고 싶어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짐짓 땅 위에 글을 쓰셨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당시 파피루스 종이에 글을 쓰면 지우기 쉽지 않고, 만일 돌에 글을 새긴다면 더욱 지우기가 힘들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남길 필요와 기억할 필요가 없는 글과 메시지를 가장 쉽게 지우기 위해 짐짓 땅 위에 쓰신 것 같습니다. 땅 위에 쓴 글씨, 곧 흙 위에 손가락으로 쓰는 메시지는 손이나 발로 쉽게 지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시시콜콜 깨알처럼 적어두었다가 그것을 달달 외우는 심판의 주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의 신은 최후심판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목을 자세히 적어놓은 고발장을 살피면서 인간을 심판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개신교에서도 최후심판은 이와 같은 심판하는 주의 셈하기(reckoning) 행위로 믿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그 셈하기에 따라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셈하기 심판은 겁주는 일이지요. 과연 예수님이 그런 심판 행위를 강조하여 겁을 주셨을까요?

 

요한복음의 이 사건에서 확인하는 진리는 인간의 죄목을 모두 일일이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을 열거하시기 즐겨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을 용서하시고 잊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지난 번 김회권 박사의 설교에서 필리핀의 한 추기경과 소녀 신도 간의 대화를 소개했는데, 그것이 주는 깨달음이 따뜻했습니다. 자기 교구에 어린 소녀가 자주 예수님과 대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추기경은 염려했습니다. 그 신비한 체험을 절대화하여 엉뚱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추기경은 그 소녀에게 숙제를 주었습니다. 추기경은 자기 선배 신부에게 얼마 전 고해성사를 했는데, 다음에 소녀가 예수님과 대화할 때 추기경의 고해성사 내용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여쭤보라고 했습니다. 소녀는 주저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추기경은 그 소녀에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때 소녀의 대답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고 고해성사의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대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고해성사를 통해 뉘우치는 죄의 고백을 일일이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대번에 잊어버리시는 사랑의 주님이시지요. 그 죄목을 낱낱이 기억하여 엄한 벌을 주는 심판의 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치 땅에 당신의 글씨를 쉽게 발로 지우시듯, 고해성사를 들으시는 주님께서도 그것을 최후심판의 자료로 인용하기 위해 기억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비정하고 무서운 검사가 결코 아니십니다.

 

4. 그렇다면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사건이 기독교 지식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글을 한 줄도 남기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겠습니다. 언뜻 보기에 글쓰기란 고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하기야 인류에게 감동을 주는 메시지를 시로, 산문으로, 소설로, 때로는 논문으로 남기는 것은 고매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성실하게 성찰해보면, 글 쓰는 이의 마음 깊숙한 곳에 때로 위선적 탐욕이 꿈틀거리기도 한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비록 트럼프 대통령과 같이 유치하게 노골적으로 나르시즘(자기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저자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는 역사 속에서 오래오래 그의 장점이 기억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글이 글을 쓰는 이보다 대체로 더 과장하여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저의 곤혹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서울대학교 교수 시절에 때때로 절체절명의 실존적 상황에서 저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달라고 다급하게 요청하는 독자의 편지를 받곤 했습니다. 한번은 부산 태종대에서 자살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편지를 보낸 중년의 독자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번은 런던에 와서 절망 속에 거리를 헤매다가 호텔에 돌아와서 약을 먹고 죽을까를 고민하는데,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글을 읽고 제가 이런 실존적 위기에서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지식인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너무나 절망적으로 저의 무력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그 때, 내 글이 내 삶보다 더 아름다운 메시지로 전달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 글이 내 삶보다 더 미화된다는 사실을 새삼 아프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식인의 글은 이렇게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저는 절감했습니다. 글쓰기가 두려워졌습니다. 글쓰기의 이와 같은 위선적 위험을 예수님은 일찍 간파하신 듯합니다. 그래서 글을 한 줄도 남기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주옥같은 비유 말씀을 친필로 남기셨다면, 혹은 짧은 감동적 아포리즘(aphorism)을 돌에 친히 새겨 남기셨다면, 적어도 두 가지 사태가 난동처럼 벌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그 친필 파피루스나 돌에 새겨진 메시지가 무섭게 거룩한 텍스트(경전)가 되어, 이것을 놓고 해석이 분분해 질 것입니다. 현대판 삼마이파와 힐렐파가 다투게 될 것이요, 나아가 그 해석에서 좌파와 우파가 분열되어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싸움은 지극히 거룩한 경전과 신성한 텍스트를 놓고 벌어지는 좌파와 우파 간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친필이 남아있다면, 그것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될 것입니다. 그 내용의 질적 가치보다 자본시장에서의 물품 가격으로 변질되면서 그것이 고가로 올라갈수록 그 메시지는 순수한 감동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글을 한 줄도 남기시지 않은 것이 여간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지식인들도 예수의 이와 같은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따르미 지식인들은 그러기에 말이 글이 되고, 글이 메시지로 변화되면서 그것이 텍스트로 격상될 때, 원래의 글과 메시지는 숨겨지고, 텍스트의 권력만이 남아 강화된다는 진실에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식인 신자들은 예수께서 성전 숙정사건을 일으키시며 외쳤던 메시지의 뜻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당시 성전은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성전 한 가운데 정방형 밀폐된 공간은 지성소로 지정되어 더욱 더 신성한 곳(거룩함 중의 거룩함)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곳에는 모세가 일찍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십계명이 돌에 새겨져 있는데, 그 언약궤가 그 곳에 있기에 지성소(至聖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만 갈 수 있고 여타 사제나 일반 유대인들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아예 그 근처에도 얼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성소와 성전의 다른 곳 사이에는 두터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뻗어 있어 하나님이 거한다는 지성소는 인간들과 철저하게 단절되었습니다. 그 단절이 철저한 만큼 하나님의 권위는 그 만큼 더 거룩하고 위엄이 있다고 확신했지요. 그런데 갈릴리 예수께서는 성전 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치시면서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요한복음 2:19)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성전의 해체 요구는 가장 거룩한 텍스트가 안장된 지성소가 있는 성전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을 밀폐된 공간에 가두어놓고 인간과 단절시키면서, 그 성전의 거룩함을 성전 세력이 갑질하는 일에 악용했던 현실을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성전 세력을 신랄하게 나무라신 것입니다. 억압과 차별을 합리화하는 종교적 텍스트를 허물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바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이신 예수께서 성전 세력의 잔인한 권력에 의해 죽임당할 수밖에 없음을 소리 높여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따르미 지식인들은 이 외침이 바로 탈텍스트화의 명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외침은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운명하시는 순간 그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지성소를 보호했던 그 두터운 거룩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지성소에 가두면서 인간을 그 사랑에서 떼어놓았던 종교적으로 갑질했던 세력이 쳐놓은 이른바 신성한 장벽이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억압의 지성소는 해체된 것이지요. 억압의 텍스트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지식인 예수따르미들은 끊임없이 종교단체, 특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성소화의 경향, 특 텍스트화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고, 사랑의 하나님을 지성소에 가두어 권력으로 활용하려는 종교적 갑질 세력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글이 텍스트로 변질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써야 합니다.

 

5. 맺으며

 

모든 잔인한 전체주의 억압체제는 그 나름의 신성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 혁명에도 신성한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 나름의 언약궤가 있었지요. 그들이 혁명 과정에서는 따뜻한 공동체적 유대가 있었고 동지애가 있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아름다운 일이 때로 벌어졌습니다만, 혁명이 끝나고 혁명세력이 권력화 되어 텍스트를 억압의 도구로 사용할 때부터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펼쳐지고, 많은 굴락에서 억울한 고통과 처참한 죽음과 죽임의 비극이 연출되었습니다. 나치의 범죄도 종교적 텍스트에 의해 합리화되면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터져 나왔고, 그 주범들은 부끄러움 없이 악을 일상적으로 저질렀습니다. 이른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부끄러움의 능력을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이와 같은 제도화된 악이 텍스트화 되어 그 악성을 은폐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명을 예수따르미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외친 그 메시지의 깊은 의미를 2018년 첫 주일에 우리는 새삼 깨닫고 되새겨야 합니다. 둘째로,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인으로 글을 쓰면서도, 우리의 삶이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글 쓰는 이의 삶이 역사적 예수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예수의 편지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글과 삶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 편지내용은 텍스트가 되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사랑의 동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바울의 권고의 말씀,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라는 말씀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글 쓰고 문자를 소중히 여기는 지식인 예수따르미와 그리스도따르미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6)

 

이 영은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시어 당신의 입으로 직접 불어 넣어주신 사랑의 힘입니다(요한 20:22~23). 이 힘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사랑과 용서의 새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발선(發善)의 힘이며, 이 힘은 선제적 원수사랑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 편지는 발선을 통해 평화와 공의를 만들어내는 영의 힘입니다. 2018, 바로 이 영의 힘이 예수따르미에게 필요합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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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6 2018 [2018. 3. 11] 국가 ‧ 전쟁 ‧ 여성 file 2018.03.21 박경미
1045 2018 [2018. 3. 4]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file 2018.03.08 최만자
1044 2018 [2018. 2. 25] 맨손혁명으로 만들어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2018.02.28 한인섭
1043 2018 [2018. 2. 18] 신앙과 돈 2018.02.22 권진관
1042 2018 [2018. 2. 11] 동행 2018.02.21 강경희
1041 2018 [2018. 1. 28] 에로스와 영성 file 2018.01.31 이영미
1040 2018 [2018. 1. 21] <1987>, 교회의 주소 file 2018.01.26 정경일
1039 2018 [2018. 1. 14] 우리 인생에서 만난 새길공동체, 그리고 그 도전과제 file 2018.01.26 이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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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2017 [2017. 11. 26] 서로 발을 씻어줌으로써 사랑의 종노릇하라 file 2017.12.06 김회권
1036 2017 [2017. 11. 19] 공동체의 존재방식: 서로 file 2017.11.30 정경일
1035 2017 [2017.11.5] 신·인(神·人)장벽, 생·사(生·死)장벽 허물기: 복음의 진수 file 2017.11.10 한완상
1034 2017 [2017.10.29]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 file 2017.11.08 길희성
1033 2017 [2017.10.22]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 책임적 실존, 세계 개방성, 그리고 종교 해방에 이르기까지 file 2017.10.25 이정배
1032 2017 [2017.10.15] 감사, 나눔, 쉼 file 2017.10.17 차옥숭
1031 2017 [2017.10.08] 받침대를 흔드는 위험한(?) 개혁: 한국 여성 종교개혁자들 file 2017.10.12 최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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