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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회권


 

 

서로 발을 씻어줌으로써 사랑의 종노릇하라

(요한복음서 13:31~35)

20171126일 주일예배

김회권 교수

(숭실대학교)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서 13:31-35

 

 

개신교 종교개혁을 철저하게 구현하기 위하여서 사제주의적인 종교를 끝내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새길교회에 와서 말씀을 대언하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수난주간 중 목요일 밤의 정황을 기록한 본문으로 믿어집니다. 누가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목요일 밤에 성만찬 제정이 이뤄진 것으로 봅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은 목요일 세족식을 하면서 최후의 만찬을 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는 성만찬 제정상황은 생략되고 오로지 한 가지 사건만 보여지고 있습니다. 주와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면에서 너무 부자연스럽고 돌발적이었으며 그만큼 그 돌발적 사건이 주는 메시지의 함의도 묵직하고 큽니다. 첫째, 유대인들의 관습은 식사 전에 발을 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도 스스로 또는 서로 발을 씻어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식사 도중에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것을 아시고 잡수시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수건을 몸에 두르십니다. 식사 도중에 발을 씻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돌발적인 것이었습니다. 둘째, 주와 스승의 발을 제자들이 씻어주던 관습과는 달리 주와 스승되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당시 몸에 수건을 두르고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은 노예적 섬김에 가장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고대 로마 제국이나 지중해 일대의 모든 문명사회에서 주인이나 주인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당연히 노예의 몫이었습니다.

 

발씻어주는 대접을 받지 못한 예수님의 섭섭한 감정이 언급된 본문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36-50입니다. 예수님께선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받아 발씻어주는 섬김도 받지 못하는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그냥 하대하는 이 바리새인 집에 가서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다가 기분이 너무 안 좋으셔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744절입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이 말씀 안하셨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예수님은 푸대접을 받은 기분이 어떠한지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시몬은 예수님께 공경과 환대의 입맞춤도 하지 않았습니다(7:45). 예수님은 굉장히 모욕을 당하신 겁니다. 이런 모욕감을 느끼시면서 식사를 오랫동안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겨 주며 서로 종노릇하는 것들을 아마도 자주 반복적으로 가르치셨던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가르치심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동아리가 가부장적 종교권력의 위계질서체로 경직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셨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2~45절에서 보면 이 말씀의 맥락이 좀 더 분명해집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주의 영광의 나라가 임할 때 자신들을 각각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길에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두 아들들의 소원을 예수님께 아뢴 것입니다(10:35-40). 나머지 열 제자들은 분기탱천했고 두 제자에 대한 비난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일순간에 제자공동체가 권력욕으로 부서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 유명한 둘로스와 디아코노스 담화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42절부터 45절까지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의 진수를 선포합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를 가리킵니다. 아담이 하나님에게 최초의 인자입니다(8).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에게는 인자입니다. 예언자들도 인자입니다(80:17 주의 오른 편에 있는 자, 곧 인자). 에스겔도 인자입니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 하나님통치를 대신할 우편 대리통치자도 인자입니다(7:13). 신약에서 모두 80여 차례 언급되는 인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부왕(副王)사역, 즉 하나님백성을 모아 통치하는 대리통치사역을 언급하실 때 자신을 스스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종말에 와서 하나님백성을 모아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왕적 인물이 인자입니다. 인자는 권력 통치적 지배군주가 아니라 섬김을 통해 자신의 통치를 수행하십니다. 이 인자의 통치행태는 예수님 당시의 통치자들의 통치행태와는 정반대입니다. 42절의 헬라어 구문을 보면 이 점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아우투스 호 예수스 레게이 아우토이스, 오이다테 호티 호이 도쿤데스 아르케인 톤 에스톤 카타큐리유우씬(katakurieu-ousin=카타큐리유오[overlord=과도하게 주인노릇하다]3인칭 복수 능동태 현재직설) 아우톤 카이 호이 메갈로이 아오톤 카텍쑤씨아주씬(katexousiazousin[카타엑쑤아(rule over forcefully)=권력위협과 통제로 통치하다] 아우톤.

 

호이 도쿤테스 아르케인은 직역하면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those who seem to reign)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열방들(에스톤)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은 로마제국의 총독이나 황제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혹은 헤롯 분봉왕들을 가리킵니다. 호이 메갈로이는 큰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로 로마제국의 총독이나 고급관리, 혹은 헤롯 왕국의 강압적 지배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과도하게 주노릇하며 억압과 무력으로 눌러 순종을 짜냅니다. 복종을 짜내기 위해 무력과 권력에 의존하는 행위가 카타큐리유오(임의로 주관하다)와 카타엑쑤아조(권세를 부리다)입니다. 이런 자들에 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통치방법을 말합니다. 진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43-44입니다. “누구는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섬기는 자는 디아코노스(δικονος)이며 종은 둘로스(δολος)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신 목적을 섬김을 받으려 함(디아코네데나이)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디아코네싸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10:45).

 

여기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말이 섬기러 왔다종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디아코노스섬기는 자와 둘로마이 즉 노예 노릇하는 둘로스가 되려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으뜸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 하는 디아코노스가 되면서 둘로스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로스가 그 당시 어떤 일을 했는가를 생각하면 이 가르침의 충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은 노예들의 무상공여 노동봉사에 의해 지탱되는 사회였습니다.

 

둘로스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모든 삶에 토대를 이루는 무상 노동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노동력 그 자체입니다. 노예들에게는 인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는 옷을 입지 않았고 좋은 신발도 신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자신의 비무장 상태를 늘 드러내기 위해서 간결한 옷차림으로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특히 남자 노예는 웃옷을 100% 입지 못했습니다. ‘내가 칼과 어떤 흉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로 무해하고 안전한 사람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주인에게 항상 주기 위해 노예는 상반신을 어느 정도 드러낸 채 다녔습니다. 그래서 노예는 로마의 모든 자유민 신분인 남자가 입는 튜닉과 토가와 같은 멋진 옷은 입지 못하고 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차고 몸을 구푸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을 지탱시키는 그 수고로운 노동력의 무한공여자들인 노예노동의 본질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이 스스로 둘로스가 되겠다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서로에게 대해 섬기는 둘로스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을 궁극적으로 이기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왕이 되려는 자들,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 권력을 남용하려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권력 남용과 압제적인 권력 행사욕망 그 자체의 궁극에 로마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길이 무력항쟁으로 로마의 예루살렘 및 갈릴리주둔군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근본토대를 허물어뜨리는 사랑과 자기희생적 섬김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내가 세우려고 하는 교회의 궁극적 본질은 둘로스가 되려고 하는 자원적인 결단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이다. 서로에게 종이 되고 섬기려는 자가 되려고 하는 이 결단, 이 행동이 로마제국을 분쇄하는 길이다. 로마제국의 권력을 이스라엘의 일부의 엘리트들에게 배분하여 권력을 이전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라 로마적 삶의 방식을 완전히 끝장내고 이스라엘적 삶의 방식, 즉 서로에게 사랑의 노예가 되어 주고 섬기는 자가 되어주는 것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길이다. 로마제국이 살아가는 그 방식을 더 이상 채택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해방은 바로 이것이다. 탐욕적인 권력행사와 압제적인 타자지배적이고 약탈적인 삶의 방식들을 전부 다 제쳐놓고 이웃에게 그리고 자신의 공동체지체들과 서로에게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려는 이 삶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본질이며 하나님나라 백성의 근원적인 자기해방력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상을 여기서 설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할 때 자주 서로 서로 발을 씻어주고 음식을 나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식사를 자주 했을 때는 앉은 자세를 보면 발 씻지 않고는 힘든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식사장면을 ‘recline at the table’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합니다(9:10).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때 비스듬히 드러누웠다는 말입니다. 식사할 때 비스듬히 드러눕는 것이 무엇일까?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아마 발을 식탁 맞은 편 상대방으로 어느 정도 뻗고 먹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recline이라는 동사는 분명히 정상적으로 꼿꼿하게 90도 몸을 세워서 밥을 먹는 자세라기보다는 분명히 몸을 옆 사람에게 어느 정도 기대거나 구푸리면서 동시에 상대방에게 발을 뻗어서 먹는 식사대형을 서술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recline at the table’이라는 말은 몸을 식탁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밥을 먹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발이 상대방의 가까이에 뻗어지는 상황을 상정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고 밥을 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습이었습니다. 당시 정상적인 팔레스타인 일대 인근의 모든 문명사회에서는 발을 씻고 밥을 먹는 것이 상궤였습니다. 그냥 관습이었습니다. 낮 시간 동안 하루 종일 걸었던 발을 씻고 냄새를 깨끗하게 제거한 후 발을 상대방 쪽으로 뻗어가며 식사하는 이 분위기가 바로 식사행위의 진수였습니다. 이런 노동으로 굳어진 몸과 정신이 이완되고 쉼을 얻는 곳, 즉 몸 전체의 릴랙스(relax)가 일어나는 곳이 식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에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은 음식물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발을 뻗고 식사하는 행위는 고대사회에서 한 통속이 되는 것.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친밀해지기로 결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식사하는 행위가 사회적인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누구랑 식사를 했다는 말은 굉장한 사회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식사하는 행위는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모험적인 결단을 하고 가까워지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리, 죄인들, 창기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말은 스캔들이 될 정도였습니다(9:10; 15:2). 바리새인들이 식사 한 번한 행위가지고 왜 트집을 잡냐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한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보기에는 충격적인 사회장벽, 계급타파적인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식사참여자들을 계층과 신분 면에서 한 통속, 한 패거리로 만들어버리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게 예수님 당시의 식사하는 행위였습니다. 식사행위는 발을 뻗어 상대방에게 나의 발 냄새를 드러낼 수 있는 가까워지기로 결단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발 씻고 식사하는 일종의 바리새인적인 풍습을 이해했을 것이며 공감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 과도한 정결집책 행위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해서 발 씻지 않고 손 씻지 않고 식사하시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범적이고 인습타파적인 신학적 저항의 일환으로 발을 씻지 않고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셨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예수님도 발을 씻고 손을 씻고 식사를 하셨으리라고 기대가 됩니다. 누가복음 7:44에 그 실마리가 나옵니다. ‘네가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이런 뜻입니다. ‘시몬아, 유대인의 일반적인 시민교양으로 가득 찬 내가. 발 씻지도 않고 밥을 먹어도 되는 정도로 네가 알았느냐? 그렇지 않다. 나는 발을 씻고 식사하는 교양인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마땅히 발 씻을 물을 줬어야 하는데 소문이 매우 좋지 않은 평판 이 여자는 네가 씻어주지 않은 내 부르튼 발에 향유를 붓고 씻어주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으레 식사 전에 발을 씻으셨음을 알 수 있고 때로는 자신을 초청한 사람이 발씻어주는 환대 정도는 기대하셨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런데 왜 요한복음 13장 본문상황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발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셨을까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지막 수난주간에 즉 예수님이 그 목요일 밤 지나 금요일 새벽에 닭 세 번 울기 전에 성전경비병들에게 붙잡힐 그런 시간인데 이런 부자연스럽고 경직된 상황이 전개되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당신이 전파했던 하나님 나라의 근본을 가르치는 데 실패하고 있는가요? 예수님이 가르쳐준 섬기는 자들의 나라, 서로 사랑의 둘로스가 되어 주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인간의 마음에 각인되기가 너무 어렵고 낯선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는 기독교 복음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바로 전달되었는지 끊임없이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복음은 예수님 자신에게도 가르치기가 어려운 난제였습니다. 기독교복음은 노예들과 섬기는 자들에게 세워지는 하나님나라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나님나라 복음이 제자들에게 아직 납득되거나 각인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삼년간이나 하나님나라복음을 가르쳤지만 아직도 제자들은 서로 섬겨 주지 않고 서로 돌보아 주지 않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이런 무자비한 냉혹함으로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서로에게 발을 씻어주지 않는 이 상태가 예수님에게 깊은 좌절감과 실패감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삼년간 교육을 했는데도 이 상태라는 말은 예수님도 몹시 이 기독교의 근본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바로 전파할 때도 고생이 심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기독교 진리는 로마 제국적 약탈사회, 권력 공학적 조작사회에서 사는 자들에게는 이해되기 힘들고 낯선 복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나라복음은 우리 자연인들에게 습득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고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며 용납이 안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제자교육에 어려움을 겪으신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프랑스 개신교사상가인 쟈크 엘룰 같은 사람도 기독교는 우리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그 무엇이다.”라고 말했습니다(뒤틀려진 기독교).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기독교를 많은 사람들이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는 매우 의심스러운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인구의 4분지 1이 이런 기독교복음의 소화하기 힘든 점을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그 사회는 로마제국 사회를 극복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적인 사회 방식을 궁극적으로 초극하고 부정하고 이겨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고 둘로스가 되어 주어 발을 씻어주려는 이 급진적인 자기부인의 삶이야말로 로마제국을 토대부터 붕괴시키는 힘, 로마제국에게 승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저 자신마저도 얼마나 기독교의 하나님나라복음을 얼마나 철저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기독교복음은 인간의 이성과 정신적 사유의 힘으로 파헤치기 어려운 심오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은 깊고 깊습니다. 벌거숭이 이성과 합리적 교양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도달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습니다. 확실히 기독교복음은 충분히 깊고 깊은데 어느 정도까지 깊은지를 제가 아직 감지를 못하겠습니다. 왜냐면 제 자신이 기독교복음의 심오를 체득하고 기독교 하나님나라복음을 온 삶으로 영접하며 살아내는 좋은 기독교인 사이에 많이 있어 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좋은 기독교인, 즉 하나님나라복음 비밀을 체득하여 깊은 경지까지 이른 좋은 기독교인 사이에 살았다면 우리도 좋은 기독교를 식사하듯이 섭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신비와 심오를 신학서적을 가지고 깨달아 알려고 하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 자신의 근원적인 좌절감입니다. 성경공부와 신학강의로 가르치는 기독교보다 식탁에서 밥먹듯이 가르쳐지는 기독교가 그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복음, 둘로스와 디아코노스의 하나님나라 복음에 저항하는 주류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자되라고 부추기는 세상에 살면서 디아코노스가 되고 둘로스가 되기란 어렵습니다.

 

부자(富者)’라는 말은 라틴어 렉스’(rex)에서 나왔죠. 라틴어 렉스는 왕을 의미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붙여졌던 라틴어 죄패 INRI에 있는 철자 RRex를 의미합니다. 라틴어로 INRI'Iesus Nazarenum Rex Iudaeorum'의 축약입니다. Rex가 고대영어 richs로 발전되었다가 현대 영어 Rich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뭡니까? , 즉 지배하려는 사람입니다. 왕 대접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부자니까 국가적으로 부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둘로스와 디아코노스가 많아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왕처럼 살려고 마음먹고 중산층이 되고 부자가 되려고 하면 엄청난 무상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가 그만큼 필요합니다. 노예를 요청하는 사람이 바로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노예적인 무상공로 노동력을 한없이 징발하겠다고 하는 것이 왕입니다. 이것이 부자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지금 부자하고 옛날의 왕들이 똑같은 대접을 원하기 때문에 부자중심사회는 무상 노동력은 끊임없이 징발하려고 합니다. 저임금, 사회적 모멸감을 견디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순하고 순한 노예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부자들입니다.

 

아내에 대해서 남편이 왕 노릇하게 하면 아내는 거의 하녀 노예와 거의 똑같아 집니다. 집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만일 루이 14세 급 절대군주이면 아이들은 프랑스 농민처럼 있고 눌려 삽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폭동 직전의 어떤 적막한 저항 분위기가 억압적인 군주같은 가장의 집에 가보면 금방 느껴집니다. 아버지가 절대왕의 권세를 가지면 모든 가족구성원들은 눌려사는 신민(臣民)들의 신음을 토해내기 마련인거죠. 담임목사님이 루이 14세급으로 짐은 곧 교회이다. 교회의 3대 중심 중 하나는 담임목사 하나다.” 이렇게 선언하면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탄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왕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 이룬 사회가 로마제국입니다. 이러한 로마 제국적 삶의 방식은 우리 인간성의 심연에 사는 사탄적 권력욕을 활성화시킵니다. 사탄이 우리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타인을 지배하고 복속시키려는 근원적인 권력 향수를 촉발시키는 거죠. ‘내가 네게 천하만국의 영광을 줄 테니까 내게 절하라.’ 이 음성은 예수님을 로마제국 황제 같은 군사적 정복군주로 만들려고 시험한 악마의 유혹속삭임입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은 악마에게 절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간존엄 파괴권력이죠. 악마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습니다. 그 악마에게 부여받은 천하만국 다스리는 권세는 통치자 자신의 인간성을 즉각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요 인류 혐오적 문명 대량 파괴 권력으로 귀결됩니다. 악마가 주는 천하만국 통치 권력은 우리 각자의 인간성을 와해시킨 후에 얻는 권력입니다. 그것은 천하만국을 외적으로 군사적으로 지배 복종시키는 권력이요 타자를 약탈하는 포식하는 자기 파괴적 권력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천하만국통치 권력을 단순히 거부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인간의 마음을 영구적으로 다스리는 인자통치의 길을 결단하여 선택합니다. ‘인자는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누리러 오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종의 도를 실천하러 왔다.’ 인자는 섬기는 것, 즉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이 만민의 마음을 감화시켜 다스리는 순간임을 아신 것입니다. 인자의 영광은 십자가 지심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복음은 인자의 하나님나라복음입니다. 그것의 근본선언은 이렇습니다.

 

나는 진짜 로마제국을 기초부터 무너뜨리러 왔다. 나는 단지 지중해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그런 로마제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 모든 족속 안에 있는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러 왔다. 역사 안에서는 항상 로마제국은 갈릴리인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갈릴리인이 로마제국의 그 뿌리 깊은 제왕적 지배 권력을 극복하고 해체하고 부셔버린다.

 

역사는 갈릴리인과 로마인의 대결입니다. 역사는 십자가를 져서 모든 약탈적 권력 의지를 스스로 분해하여 둘로스가 되려고 하는 갈릴리인 예수의 길과 남을 지배하고 약탈하고 포식자처럼 살려고하는 로마인들의 길이 각축하는 현장입니다. 로마제국적인 삶은 타자착취적인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근원적인 좌절감을 안겨주는 사람이 갈릴리사람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의 인자의 길, 십자가의 굴욕감수, 자기 하강적 섬김의 삶이 로마제국의 토대를 붕괴시켜 버립니다. 지금 세계갈등의 두 축은 미중갈등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아닙니다. 미국 안에 있는 갈릴리인들과 미국 안에 있는 로마인들의 갈등입니다. 중국안의 로마인들과 중국안의 갈릴리인들의 갈등일 뿐 입니다. 인류역사의 모든 대결은 갈릴리사람과 로마사람의 대결입니다. 역사 안에서 항상 전개되는 모든 대결은 갈릴리 사람과 로마사람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역사 안에서는 항상 로마사람이 갈릴리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갈릴리 사람이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 로마제국의 심장부터 해체하고 이깁니다. 어떤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진리의 권능으로 하나님나라는 로마제국을 이겨냅니다.

 

새길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지배하려고 하는 교황같고 절대군주같은 목사들에게 진절머리가나서 여기에 왔지요. 여러분 모두에게 남을 진절머리나게 만드는 지배의지와 권력욕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더 커지요. 나를 환대해주고 나에게 먼저 말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찾지요. 저도 제게 있는 섬김 받으려는 이 뿌리 깊은 욕망 때문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제가 만일 목사로서 성도들 지배하고 탄압하고 성도 양심에 재갈을 물리는 그런 사람이라면 저도 저에 대해서 엄청 놀랐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정말 조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순식간에 섬김 받으려는 욕망으로 이웃을 어렵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마찬가지로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배하고 압제하는 이런 로마제국의 황제 같은 목사를 피해왔다고 해서 그 자체가 해방은 아니죠. 저는 여러분이 아직 광야에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로마제국적 삶의 방식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갈릴리적 삶의 방식으로 100% 환골탈태하기까지 우리는 광야의 도상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섬기는 삶이 고도의 자발성으로 무장된 사람이 다수가 나타날 때 이곳은 가나안 복지가 됩니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정신을 가지고 섬기려하고 몸을 가지고 섬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기독교복음의 성육신화가 잘 안됩니다. 말로 섬기려하고 말과 사상으로 남에게 영향을 끼쳐서 섬기려하기 때문에 복음소통이 잘 안됩니다. 몸 자체가 움직여 주는 성육신적 사고가 잘 안되기 때문에 지식인이 많이 모이면 묘한 싸늘한 냉기가 풍겨 나옵니다. 어딘가 모르는 또래집단의 질투심이 있고 차마 마음의 칸막이를 헐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삭막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인들만 많이 모이면 절대로 안됩니다. 지식인의 존재는 언제 빛나느냐? 홀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입니다. 지식인이 홀로 노동자계층에 있을 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인끼리 모여 놓으면 서로가 서로의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아니라 무지 큰 중력을 가진 블랙홀처럼 빛을 빨아들여버립니다. 그래서 지식인들 동아리 같은 교회에서는 성령이 역사하기 매우 힘듭니다. 실제로 묘한 싸늘함, 묘한 적막함, 그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솔직하지 못함과 그리고 자기를 다 공개하지 못하는 베일 너머의 자아와 페르소나가 몸에 베여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 교회에서는 스스로 또라이가 되고 망가지는 것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장기자랑도 안됩니다. 그래서 재미가 없습니다. 지식인들만 많이 모이면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이만큼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지금 제가 섬기는 교회입니다. 우리교인도 150명입니다. 대부분이 지식인들입니다. 제가 망가져야 망가지고 아무도 스스로 망가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청년들과 지식인들이기에 몸이 구푸려지고 부서지는 자발적 노예영성은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묘하게도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를 해주시지 않습니다. 저는 딱 여러분을 보자마자 우리교회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2002년 말에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교회 개척에 참여한 14명의 여 성도 중에서 두서너 명만이 4년제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의 지적 수준이나 영적 수준은 높고 영성은 고결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서민다운 친근함과 칸막이를 스스로 허는 영적 순전함이 대단히 컸습니다. 고양시 덕양구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그때는 몸으로 섬겨주는 사람들의 헌신이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40킬로 마다하지 않고 새벽기도 오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는 정말 뜨거웠습니다. 정말로 매 순간 은혜였습니다. 지금 제가 섬기는 교회는 그때의 향수를 일으킬 뿐 아직 그 때의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툰드라 북극은 아니지만 노르웨이적인 한대다. 한랭기운이 있다. 그렇게 느껴집니다. 상대적으로 몸으로 섬기는 디아코노스와 둘로스가 아직 적어서 그렇습니다. 제 자신이 몸으로 섬기는 시간을 내지 못해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섬긴다는 말은 뭡니까? 김장 한번 담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뭐죠? 덜 위협적인 사람에게 이웃의 접근을 어렵지 않게 만드는 사람의 행동거지입니다. 너무 똑똑하면 매우 위협적입니다. 모든 것을 많이 알면 매우 위협적입니다. 돈이 너무 많으면 매우 위협적입니다. 그리고 아파트가 3채면 매우 위협적입니다. 너무 잘생겨도 매우 위협적입니다. 여러분 모르는데 너무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덜 똑똑한 사람을 위협하는지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 똑똑함 자체가 악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길이 있습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은 하루 종일 금식기도하면서 바보처럼 보이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아니 바보가 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내가 정말 가난한 사람처럼 그렇게 일순간 변화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심령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만 섬김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섬김은 몸을 구푸리는 것이고 상대방의 발 냄새를 맡고도 당혹하지 않는 것입니다. ‘! 저 사람 이런 냄새를 가졌네. 고약한데라고 하면서 가십을 하고 SNS에 올리는 것은 섬김의 정반대입니다. 섬김은 허물을 품고 필요하면 은닉해주는 것입니다. 사회적 공익을 해치는 허물과 죄가 아니라면 견디고 참아주는 것이 섬김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보고 죄를 목격할 때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처럼 ! 이런 아픔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듣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해 주는 것이 섬김입니다. ‘나는 그 사람의 스캔들을 다 알고 있다.’ 남의 사생활과 약점. 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못들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섬김입니다. 타인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도 큰 섬김입니다.

 

스캇 펙(Scott Peck)이 쓴 <여행묵상>에 실린 한 재미있는 예화는 하나님의 용서를 유머러스러하게 설명합니다. 필리핀에 한 소녀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해당 교구의 추기경이 여러 번 조사했습니다. 추기경은 신비체험의 신빙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계속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그래도 소녀의 신비체험의 신빙성을 확정짓지 못해 마침내 소녀에게 어려운 과제를 줍니다. “그런데 너 진짜 예수님과 대화를 했나?” “, 합니다. 긴 대화는 아닙니다. 짧은 대화로 하시는데 내 영혼이 너무 편안해집니다.” “그러면 내가 지난 번 나보다 더 높은 신부님께 무슨 고해성사했는지 그거 한번 물어보고 오너라.” 그 소녀는 .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소녀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저를 시험하신 그 높으신 추기경님께서 마지막으로 고해성사하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 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을 합니다. “다 잊어버렸다. 나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년은 추기경에게 돌아가 예수님께서 잊어버리셨다고 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서로를 섬길 때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잊어버려 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웃의 발 냄새(자아냄새)를 잊어버려 주고 모든 약점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주는 신성함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자아가 풍기는 냄새를 악취 난다고 거리를 두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감수하며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섬김입니다. “, 장로님 그 L 그룹 비자금 관리한다고 얼마나 속이 상했습니까? 장로님 사업하시느라고 룸살롱에도 네 번 가셨죠? 그렇지만 장로님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저는 장로님을 파렴치범으로 몰지 않겠고 비자금 관리했다고 장로님을 불의한 사람이라고 욕하지 않겠습니다. 장로님의 모든 죄를 저는 고해신부처럼 안고 가겠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허물도 품어주는 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섬김은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입니다. 이런 식으로 섬겨줘야만 진짜 새길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도적 성직자에 대한 비난으로 새길교회가 하나되긴 힘듭니다. 저도 제 주변에 전부 목사를 싫어하는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목사를 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저도 채플 수강학생들에게는 목사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수라고 지칭해야 일단 학생들이 위협감을 덜 느낍니다. 저는 우리 숭실대 채플에서 목사로서는 매일 모멸(?)을 당합니다. 우리 숭실대 채플은 한 주에 12번입니다. 9900명이 강제로 채플을 듣습니다. 강제로 채플을 듣기 때문에 청년학우들은 교목실장에 대해 약간의 적의를 품고 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목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바로 기분 엄청 잡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목사가 아니기만 하면 안심을 합니다. 목사가 아닌 사람의 입에서는 그래도 들을 말이 나온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교목실장인 저는 목사입니다. 교목실장이기 때문에 얼마나 아이들이 저를 깔보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목사가 되가지고 청년들의 저항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런 모멸을 당하기 때문에 내가 내 아들에게는 절대로 목사의 길을 권하지 말아야겠다. 내 손자에게도, 나의 오촌 조카에게도 목회의 길을 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목사는 둘로스와 디아코노스의 길을 정말 오랫동안 교회와 사회 안에서 초지일관 걸어가야 하겠지요.

 

여러분, 새길교회에 회중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스승이 되어 몸을 구푸려 여러분의 둘로스가 되었습니다(13:15).” 여러분, 기독교는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준 그대로 본받는 사람들의 동아리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약탈자적 포식자적 로마제국적인 압제로 타인의 행복을 가로채서 나를 부요케 하는 사람들의 삶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친히 부요하신 자로서 자기를 가난케 함으로 종이 되신 그분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 종과 섬기는 자의 길을 본받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독교가 여러분에게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실제로 평신도의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으로 운영되는 새길교회 같은 교회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진짜 제도권 유급 성직자가 없더라도 성령과 더불어 성장하는 교회가 많아져야 제도권 교회도 정신을 차린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도 평신도 중심 교회입니다. 종교개혁주일에는 항상 평신도가 설교합니다. 평신도도 설교합니다. 저도 목사지만 또한 그들에게 형제입니다. 그들은 저를 성직자로 대우하기보다는 형제로 대우합니다. 저는 권력을 가지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저도 옛날에 목회할 때 항상 일 년에 두 번 설교 평가를 받았습니다. 익명으로 무기명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 설교 평가는 정직하고도 신랄했습니다. 그런데 설교평가를 보면 점수가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겉모양은 100% 전부 다 좋아할 것 같았는데 76%만이 설교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고 대답합니다. 24%는 교회가 가까워서 나온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분위기상으로 전부가 내 설교를 좋아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평신도들의 설교비평과 비판을 듣고 목회자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목회자의 영성 훈련에 유익하다고 봅니다. 개신교목회자는 고위성직자가 아니라 설교직분을 맡은 은사자입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마무리합니다. 우리 모두가 몸 구푸려 우리 형제자매들, 즉 내가 자주 보는 사람들, 내가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의 냄새나는 자아를 씻어주고 끌어안아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두세 사람이 모여도 나는 그 사람들과 함께 있다’(18:20). 두세 사람이 모인 교회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충만한 거죠. 두세 사람으로 충만한 교회, 서로 발을 씻어주고 서로 둘로스가 되어주는 교회. 새길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진짜 여러분들이 우리 한국교회에 큰 깨우침을 주고 마침내 우리가 여러분을 더욱 예리하게 주목하여 배울 수 있게 되는 그런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님은 로마제국을 이길 근원적 방법을 아시고 아버지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당신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요약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제자매의 발을 씻기 위하여 기꺼이 몸을 구푸리는 둘로스의 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새길교회가 둘로스들로 가득 찬 해방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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