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17.33.156) 조회 수 16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자 정경일


공동체의 존재방식: 서로

(히브리서 10:24~25)

20171119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 히브리서 10:23-25 -

 

 

지난 11월 첫 주일 운영위원회에서, 새길의 공동체적 리더십 형성을 주제로 기초 토의가 있었습니다. 그 핵심은 한 개인이나 소수에게 책임과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고, 평신도 공동체다운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삶의 방식을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운영위원들이 다시 모여 그 주제로 집중토론을 하고, 그 후 교회 차원의 대화와 토론도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제 고민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공동체에서 제가 맡아 온 여러 역할에 대한 점검과 반성, 그리고 그에 따른 변화의 모색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년이면 제 나이도 공자가 지천명(知天命)의 시기라고 말한 50이니, 제 인생의 소명(vocation)’을 식별해야 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소명은 세상의 깊은 갈망 (deep hunger)과 나의 깊은 기쁨(deep gladness)이 만나는 곳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세상의 깊은 갈망은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제 깊은 기쁨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습니다. 사실, 최근에 갖게 된 고민이 아니라 꽤 오래된 고민입니다. 44개월 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으로 일을 시작하고, 교회에서도 신학위원, 예배위원장, 서로돌봄 위원, 운영위원 등을 줄곧 맡아오면서, 공동체에서의 저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고민이 늘 있어왔습니다. 며칠 전에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하다, 문득 헨리 나우웬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나우웬은 20세기의 위대한 영적 스승 중 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자신의 어둠과 씨름하며 괴로워했던 연약한 인간이기도 합니다. 늘 괴로워하던 그를 보다 못한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헨리, 그렇게 힘들면, 자네가 쓴 책들을 좀 읽어보지 그래?” 나우웬은 그의 생전에 이미 영성 고전이 된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를 비롯해, 상처와 어둠을 안고 치유와 은총의 삶을 사는 길을 제시한 여러 책들을 썼으니까요.

 

나우웬의 일화를 떠올리면서, 저의 고민이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고, 그 동안 새길에서 나눠온 말씀증거에서도물론, 나우웬의 깊이에는 결코 미칠 수 없지만공동체를 많이 이야기했으니, 그 말씀증거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틈틈이 그 동안 제가 나눈 말씀증거들을 읽어보았는데, 한 가지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자주 사용해 온 핵심 키워드가 서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평신도 공동체로서 신학, 영성, 사회적 실천, 돌봄, 운영 등을 전문 목회자나 소수 평신도에게 위임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함께 해 나가자는 바람과 다짐이 서로정신에 담겨 있습니다. 이 서로 정신은 새길을 창립한 1세대 교우들이 선택한 새길의 존재형태이며 활동 방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2세대 교우들이 시도해온 서로돌봄위원회, 미래위원회, 사회사역위원회 같은 위원회 조직이나 다양한 소모임 활성화, 2013년에 실시했던 서로배움세미나, “모두가 함께 하는 공동체 활동”, 전 교우 대화마당, 새길 지혜나눔, 평신도신학팀 등도 그런 서로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활동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시도하려는 공동체적 리더십 형성은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우리가 경험해온 서로 정신과 활동을 점검하고 쇄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동안 새길의 존재 형태이며 활동 방식인 '서로성'을 꾸준히 실현해 오느라 수고 많았다고 서로 격려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이제, 새로운 상황에서 새길을 더 평신도교회답게 만들기 위한, 서로 정신을 더 심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한 지혜를 공동체적으로 나누고 결정하고 실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공동체적 노력을 위해, 오늘은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세 가지 주제로 함께 성찰해 보겠습니다. 첫째, 서로 사랑하기, 둘째, 서로 협력하기, 셋째, 힘써 모이기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우선 히브리서 저자는 서로 마음을 써서사랑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서로 마음을 쓰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지난 목요일, 문화원의 사회적 영성 강좌 시간에 틱낫한 스님의 마음챙김을 탐구했는데, 그때 나눈 것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서로 마음을 쓴다는 것은 서로를 마음챙겨 대하는 것, 즉 서로를 주의 깊이 대하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사실은, 초대교회에서도 이미 교회 내 역할 분담 및 기초적 제도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allēlous, one another)”라는 표현이 공동체적 삶의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서 13:34b)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로마서 12:10)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로마서 14:13a)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로우며, 겸손하십시오. (베드로전서 3:8b)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라디아서 5:13b)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11b)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야고보서 5:16a)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골로새서 3:13a)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히브리서 13:1)

 

이렇게 예수와 바울, 그리고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서로 존재성, 서로 관계성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삶에서 사랑은 사도나 장로나 집사나 교사의 구별된 의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모두'의 보편적 의무였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랐던 것처럼 서로 사랑했고, 세상 사람들은 초대교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제자인 줄, 그리스도인일 줄 알았습니다.(요한복음서 13:35)

 

이처럼 예수의 공동체와 초대교회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이상이 아니라 일상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더욱 깊어져, 오늘 교독한 바울의 편지처럼, 그들의 교회를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겼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서로 사랑의 일상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의 모임입니다. 우리 새길도 그 서로 사랑의 한 뿌리에서 나온 작은 한 가지입니다.

 

선한 일을 위한 협력

 

히브리서 기자의 두 번째 당부는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서로 사랑이 공동체의 존재 방식이라면 서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공동체의 활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협력입니다.

 

공동체의 활동은 개인의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개인의 헌신 없이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도 활동할 수도 없습니다. 개인의 헌신은 공동체의 소중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그런 헌신이 서로성을 결여할 때, 개인의 헌신은 개인의 희생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희생도 소중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 혹은 소수 개인들의 희생을 통해 공동체가 유지된다면, 그 소수의 상태에 따라 공동체가 활력을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희생과 헌신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공동체에서 지치거나 상처받는 이들은 대부분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이들입니다. 희생하며 애쓴 만큼 변화가 없어 속상하고, 때로는 헌신이 오해 받아 서운하고, 그래서 지치고 상처를 입습니다.

 

헌신은 혼자 하면 희생이 되기 쉽고, 함께 하면 협력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원리는 개인적 희생이 아니라 공동체적 헌신, 협력입니다.

 

이런 헌신과 협력의 대표적 예는, 잘 아시는 기러기들의 비행법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멀리 이동할 때, 기러기들은 화살촉 모양으로 무리 지어 날아갑니다. 맨 앞 기러기가 기류를 온몸으로 맞으며 양력을 만들어주면, 뒤의 기러기들은 훨씬 덜 힘들게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마리가 그 먼 거리를 계속 앞에서 홀로 이끌며 날아간다면, 그는 얼마 가지 못하고 지쳐서 추락하고 말 겁니다. 그리고 그 기러기만을 따랐던 기러기들은 길을 잃거나 뿔뿔이 흩어질 겁니다. 그래서, 기러기 공동체는 서로 돌아가며 인도자가 됩니다. 맨 앞 기러기가 지치면 제일 뒤로 빠지고, 대신 다른 기러기가 앞으로 나아가 바람을 맞으며 무리를 인도합니다. 그렇게 바람을 번갈아 맞으며 수만 킬로미터를 이동합니다. ‘홀로 헌신의 희생이 아닌 서로 헌신의 협력 덕분입니다.

 

이처럼, 리더십을 서로 분담하고, 때에 따라 인도자의 역할을 교대하는 협력은, 효율성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신과 삶을 늘 새롭게 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불교에는 수행자는 같은 나무 아래 사흘 이상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곳에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그러다 결국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나 가능한 이상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집착하지 않는 정신을 실천하는 불자들이 있습니다. 정토회 활동가들입니다. 그들은 삼 년마다 하던 일을 내려놓고 다른 일을 맡습니다. 그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은 때가 약 십오 년 전이라, 요즘도 그런 원칙을 지키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이야기를 해 준 정토회 활동가에게 연락해 물어보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토회 활동가들은 1000일이 지나면 모두 보직해임 됩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 따라 중임도 가능하지만, 그 이후엔 무조건 바꿔야 합니다. 그것은 익숙해지는 것, 관성에 사로잡히는 것, 집착하는 것을 거스르려는 공동체적 원칙이며 노력입니다.

 

서로 의지하며 함께 가야 이 길을 오래,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길을 함께 가는 도반(道伴)’입니다. 도반은 불교에서 즐겨 쓰는 말로, “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는 뜻입니다. 굳이 그런 종교적 의미를 붙이지 않고 함께 길을 가는 친구”, 길벗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붓다의 제자였던 아난다도 그런 도반이 있는 게 참 좋았나 봅니다. 그래서 하루는 스승 붓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도반은 수행의 절반인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붓다가 말합니다.

아니다, 아난다. 도반은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수행의 전부란다.”

 

헨리 나우웬도 그런 도반, 혹은 영적 친구와의 우정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영적 친구의 우정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어둠에 파괴되지 않고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협력의 다른 이름, 보다 나은 이름은 우정이며 사랑입니다.

 

힘써 모이기: 시간

 

끝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힘써 모일 것을 권합니다. 실제로,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믿은, 즉 예수의 재림과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은 초대교회 공동체는, 자주 모여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함께 기억하며 새겼습니다. 당연히 공동체성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겠죠.

 

공동체의 핵심은 삶을 나누는 것인데, 그것은 물리적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선한 일을 힘 있게 할 수 있었던 것도,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같은 히브리서 313절은, 그날그날, 즉 매일 서로 권면하라고 당부합니다. 사도행전 246절은, 초대교회 사람들이 날마다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힘써 모입시다”, “모이기에 힘씁시다”, 이런 말 들으시면 스트레스 받으시죠? 우리가 새길에 참여하기 전 제도교회에 다닐 때 지겹도록 많이 들었던 말이니까요. 주일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기도회, 새벽기도, ‘특새’, 성경공부, 구역예배, 수련회, 단기선교 등등. 그래서 교회생활하느라 가정생활, 사회생활 할 틈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비판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에 비하면, 새길은 힘써 모이지 않으니 참 편한 교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하루, 주일예배 1시간 공동식사 1시간, 두 시간이 새길 경험의 전부일 경우도 있습니다. 편하고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공동체로서 서로의 삶을 깊이 알고 나누는 친교, 도반의 우정은 경험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공동체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지난 며칠 동안, 우연하게도, 공동체의 시간을 생각하게 해 준 대화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번은 인천에 교우 가정 조문예배를 다녀오는 길에, 창립멤버 한 분에게 새길교회 초기엔 어떻게들 시간을 보내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자주 만나고, 주일에는 늘 대화하고 토론하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죠.” 특히, 새로운 교회의 존재 형태와 활동 방식을 놓고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어느 한 형제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는데, 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두 달만 지나면 서로 형님’, ‘언니’, ‘아우님할 정도로 금방 가까워졌는데, 새길에서는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서먹서먹하다며 씁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전 교회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친밀할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역시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두 대화는 공동체의 시대적 소명과 인격적 우애의 기초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힘써 모이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특히, 세상의 깊은 갈망과 한 몸 공동체로서 새길의 깊은 기쁨이 만나는 곳에서 새길의 소명을 찾으려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함께 공부하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새길의 1세대 선배들이 새길을 용기 있게 걷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힘써 모여 신앙과 삶과 꿈을 나눴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2세대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호 이후, 종교개혁 500주년 이후, -종교 시대 이후, 새길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고유한 신학과 영성, 종교 간 대화 운동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 새길의 예배와 영성과 신학과 교육을 어떻게 심화시킬 것인가? 서로돌봄을 정말 서로돌봄이 되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새길의 신앙과 정신에 일치하는 사회사역의 선택과 집중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지금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토론하고 결정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과제를 몇몇 소수가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새길은 평신도공동체의 소명을 찾을 수도 실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힘써 모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는 편하지만 따분한 길보다는 힘들지만 재미있는 길을 선택한 모험가들입니다. 그 모험을 한 몸 공동체로 함께 할 때 흥분과 놀라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계신 창립 교우들은 그 기쁨을 알고 계십니다. 새길교회 20년사는 그 기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단체이든 초창기 멤버들은 열심이기 마련이다. 새길교회 초기 교우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치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주일 예배는 감동과 기쁨으로 가득 찼고 다음 주일을 기대와 흥분 속에 기다렸다. 교회 청소와 정돈, 봉사활동 등 작은 일에서부터 큰 행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헌신적이었다.

 

창립 직후에 새길에 합류한 한 형제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며칠을 손꼽아 기다린 끝에 찾아간 강남 Y. 그리고 이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살아 숨 쉬는 말씀증거, ...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안고 강남 Y로 가는 시간 동안의 그 설레임. 강당에 들어서면 느껴지던 까닭모를 긴장감...

 

그리고 2006년 새길교회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어느 한 형제님의 말씀입니다.

 

평신도교회는 항상 새롭게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불안합니다. 항상 모험 안에 살아야만 하는, 외줄을 타는 긴장을 구조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평신도교회의 약점이라기보다는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창립 30주년을 지나, 새로운 새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우리가 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새길교회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공동체 생활의 감동과 기쁨, 기대와 흥분, 설레임과 긴장감, 그것을 외줄을 타는 듯한 위험과 불안 속에 다시, 새롭게 경험하는 모험을 하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깊은 갈망과 우리의 깊은 기쁨이 만나는 소명을 다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위험하고 불안하지만, 공동체로 함께 하니 기쁘고 설레는 모험입니다. 그러니, 이 겨울,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선한 일을 위해 협력하고, 그러기 위해 더욱 힘써 모여 지혜를 나누면 좋겠습니다새길로고.JPG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1037 2017 [2017. 11. 26] 서로 발을 씻어줌으로써 사랑의 종노릇하라 file 2017.12.06 김회권
» 2017 [2017. 11. 19] 공동체의 존재방식: 서로 file 2017.11.30 정경일
1035 2017 [2017.11.5] 신·인(神·人)장벽, 생·사(生·死)장벽 허물기: 복음의 진수 file 2017.11.10 한완상
1034 2017 [2017.10.29]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 file 2017.11.08 길희성
1033 2017 [2017.10.22]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 책임적 실존, 세계 개방성, 그리고 종교 해방에 이르기까지 file 2017.10.25 이정배
1032 2017 [2017.10.15] 감사, 나눔, 쉼 file 2017.10.17 차옥숭
1031 2017 [2017.10.08] 받침대를 흔드는 위험한(?) 개혁: 한국 여성 종교개혁자들 file 2017.10.12 최만자
1030 2017 [2017.10.01] 서남동, 당신의 뒷모습만 봅니다 file 2017.10.10 권진관
1029 2017 [2017.09.24] 안병무와 21세기 file 2017.09.28 김진호
1028 2017 [2017.09.17] 영과 진리 안에서: 씨알의 꿈과 믿음, 그리고 함석헌 file 2017.09.19 김경재
1027 2017 [2017.09.10]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file 2017.09.13 최성무
1026 2017 [2017.09.03] 꿈과 짐: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주체적 신앙과 예언자적 역사의식 file 2017.09.06 양현혜
1025 2017 [2017.08.27]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따라 file 2017.08.30 정경일
1024 2017 [2017.08.06] 단테의 '신곡' 여행 file 2017.08.10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1023 2017 [2017.07.30]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file 2017.08.02 최현섭
1022 2017 [2017.07.16] 내 안의 선악과(善惡果) file 2017.07.18 김용덕
1021 2017 [2017.07.09]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file 2017.07.13 정경일
1020 2017 [2017.07.02] 손의 회복 file 2017.07.13 구미정
1019 2017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file 2017.06.22 박현욱, 정영훈
1018 2017 [2017.06.04] '포도나무 비유'에 담긴 뜻은 file 2017.06.08 장회익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