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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

(이사야서 53:2~6)

20171029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종교개혁 사상가들의 삶과 뜻을 배우는 예배

길희성 형제(심도학사 원장, 새길교회 신학위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 이사야서 53:2-6 -

 

 

죄와 은총: 복음주의의 깊이


복음주의 신앙의 대전제는 인간의 죄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죄를 극복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더 죄에 말려들어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방직공장의 이야기인데, 직원 하나가 실이 엉키자 스스로 풀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점점 더 얽히게 돼서 결국 포기하고 현장감독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그 공장 벽에는 곳곳에 현장감독(foreman)을 불러라!”는 말이 쓰여 있더라는 거다. 이것을 모르고 스스로 엉킨 실타래를 풀려다가 문제를 더 악화시켜 급기야는 포기하고 현장감독을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바로 복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복음주의 신앙은 자신의 도덕적, 영적 노력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공로주의를 깨끗이 포기하고, 그야말로 두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바로 자기와 같이 도저히 구원 받을 길 없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이고 은총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다는 믿음이다. 복음주의는 그래서 죄로 죽고 은총에 기뻐하는 신앙이며,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라는 것이다. 오페라 토스카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라는 아름다운 아리아가 있는데, 복음주의는 죄에 죽고 은총에 사는삶을 노래한다.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오늘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이며 마르틴 루터 자신의 정신이다. 루터 자신도 성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의 수도사였지만, 아무리 수행을 해도 죄의식만 더해 갈 뿐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고, 오히려 바로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이지만 참다운 구원의 길임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의 구호 아래 중세 영성을 지배하던 공로주의 신앙, 즉 밤샘기도, 금식, 고행, 순례 등 각고의 수련과 수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깨끗이 청산하는 종교개혁의 물꼬를 튼 것이다. 복음주의는 이러한 철저한 죄의식 없이는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며, 은총의 사상이나 교리도 죄의식 없이는 그 깊이와 진정성을 이해할 수 없다.

 

종교는 도덕이 아니다. 신앙은 흔히 오해하듯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주의’(moralism)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란 상식적, 사회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 또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까 신경을 쓰는 정도로는 진정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죄란 사회적 평판의 문제가 아니다. 남의 눈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속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눈과 자기 양심의 고발은 피할 길 없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명령 앞에서 큰소리 칠 만큼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할 만한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또 진정으로 뉘우치고 통회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없다고 믿는 신앙이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같이 죄인이며 의인이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용서를 말하면, 내가 무슨 죄를 크게 지었다고 교회만 가면 말끝마다 를 들먹이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한다. 교회란 유난히 죄인들만 모인 곳인가, 유난히 악한 사람들만 모인 곳인가? 아니면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좀 자학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죄란 결코 사회적 통념이나 상식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은 비교적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무슨 감옥에 갈만한 몹쓸 짓을 한 적도 없고 유리지갑이라 세금 또박또박 다 냈고, 이만하면 그런대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는데, 자기가 무슨 죄인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너의 죄를 네가 알렸다고 죄인을 마구 윽박지르고 고문하다가 심한 고문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자기 죄를 토설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조선 시대의 는 주로 국법, 그 가운데서도 역모 죄가 가장 무서운 죄였다. 임금님의 명을 거역했다는 등 사회적, 법적, 고작해야 도덕적인 죄 개념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죄는 그 이상이다. 그 보다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문제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가 아니라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는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인에게 던져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의 세계다. 죄는 나의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라고 말할 정도이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당시 율법을 다 잘 지켰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가 있다(누가 18: 9~14). 바리사이파 사람은 저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살았다, 이런저런 계명들을 잘 지키면서 살았다고 자신의 의로운 삶과 행위를 늘어놓았지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조차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 두 사람 가운데 후자야말로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사회상식을 넘어서는 말씀이다. 여기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말은 루터 이래 개신교 신앙의 핵심인 의화’(justificartion)와 같은 뜻이며, 이것은 결국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과 교리가 바로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루터 이후, 아니 루터 훨씬 이전부터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예수 자신의 은총의 사상과 신앙을 저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총의 하나님에 대한 예수 자신의 가르침이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루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예수야 말로 진정한 복음주의자였다!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도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그가 예수께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먼저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반문했고, 청년은 율법에 있는 대로 이런 저런 계명들을 충실히 다 지켰다고 말하자, 예수는 그러면 가서 너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는 가혹한 말을 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이 청년은 도덕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예수가 보기엔 그의 삶의 근본 방향,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문제였다. 예수는 이 점을 간파했다.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는 그가 별 문제없이 살았지만,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 자기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에 그런 라디칼한 결단을 촉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수의 이 명령 앞에서 부자 청년의 도덕적 자부심과 자만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가 예수의 말씀에 따라 실천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죄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깨달았을지 모른다. 그때 까지 자기 삶에 근본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몰랐기에 예수를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영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근심하며돌아갔다고는 하나 말이다.


이것은 단지 부자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는 산상수훈을 보자. 그 앞에서 무슨 핑계,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평생 예수를 믿었다 해도 이렇게 예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가 무너질 정도로 도전을 받아보지 못한 삶, 그래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본 적 없이 어영부영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해 온 사람은 결코 진정으로 예수를 만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결코 도덕주의자가 아니었다. 엄격한 도덕교사가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아버지’(아빠, abba) 하나님은 모범생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우리네 부모와는 다르다. 예수가 가르친 진리는 바리사이 같은 의인이 죄인이 되고,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놀라운 역설의 세계, 은총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이런 것이 복음주의 신앙이다. 누가 이런 복음주의 신앙을 비판하겠는가?


볼프람 에버하르트(Wolfram Eberhard)라는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독일 학자가 말하기를,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는 수치(shame)만 알고 죄(guilt)는 모르는 문화라고 했다. 수치란 체면을 중시하고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지만, 죄란 하나님 앞에 홀로 단독자로 서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이자 곧 은총이다. 우리사회가 수치심이 지배하는 문화라는 사실은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는 장면, 곧 죄를 짓고 경찰서에 끌려 들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잠바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만 가리고 남의 시선만 피하고 보자는 태도이다. 마치 쥐구멍이라도 들어갈 듯 하는 것이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범법자들의 일반적 모습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같은 나라에서 보면, 범법자들이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고도 수치는커녕 당당한 자세로 행동한다. 적어도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기 전에는 그렇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경우 무슨 잘못을 한 다음 “I am sorry.”라고 말하면 대체로 정말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진정성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툭하면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을 연발하면서 연신 몸을 굽실거리는 일본인들과 너무 대조적이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행위를 싫어하는 예의바른 사람들이지만, 일본 정치인들이 진정 죄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 보고 하는 말이, 너희 한국 사람들은 이미 사과를 했는데도 왜 자꾸 사과하라고 요구하는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들이 아무리 사과를 해도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 한 번도 우리를 감동시킬 만큼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자꾸 사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흔히 지적하지만, 같은 2차 대전의 전범국이지만 일본과 독일의 태도가 그렇게 다른 것은 왜 그럴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보기에는 일본인들이 식민통치에 대해 진정으로 잘못 했다는 죄의식이 없고, 따라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죄를 진 사람의 사과란 피해자가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몇 번이라도 해야만 한다. 이미 사과했는데 왜 자꾸만 사과하라고 하느냐는 것을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가 되겠다고 공언하면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노리고 있는 아베 정권이 며칠 전 중의원 선거에서 3분의 2 개헌선을 너끈히 돌파하는 압승을 거두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일본 매스컴들은 8.15가 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를 조명하면서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별로 거론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라는 것만 부각시킨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는 것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죄란 단순히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체면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무너질 정도로, 자기 삶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질 정도로 내면의 죄를 깊이 느껴보지 못한 자는 진정으로 죄를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죄란 외적, 형식적, 도덕적, 법적, 사회적 통념이나 상식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평판 정도의 죄의식에 따라 도덕적 자만심을 가지고 사람은 자기만 못한 사람들을 보면 마구 비난과 욕을 쏟아낸다. “죽일 놈”, “한심한 놈하면서 말이다. 이런 사람은 바울 사도처럼 자기가 죄인의 괴수라고 하는 고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지나친 자책처럼 들리고 자학증이라는 생각마저 들 것이다. 아니, 바울 같은 사람이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을 어떡하란 말인가라는 푸념도 절로 나온다. 그러나 바로 죄에 둔감한 사람들을 두고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이 바리사이 사람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말씀하신 것이다. 죄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총도 모른다. 죄가 얼마나 깊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신앙의 세계, 은총의 세계를 알기 어렵다. 종교나 신앙의 세계는 단지 도덕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뭐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가끔 말하기를,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바울이 만들었다고 하면서 바울과 예수를 엄격히 차별화한다. 이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날카로운 죄의 인식에 근거해서 도덕적 자만과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바리사이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적 메시지에는 이미 바울의 죄와 은총의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바울은 오히려 예수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죄의 깊이를 아는 자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밖에 없다. 죄를 가벼이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죄 없다고 큰 소리 치지 못한다. “나는 떳떳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남의 죄에 대해 욕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은 감추어야 할 자기 죄가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려야 할 자기 약점이 많을수록, 남의 약점이나 죄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고 사정없이 욕을 한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죄를 아는 사람은 방심하지 않고 끝임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성찰한다. 자만하지 않고 매일매일 자성하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뉘우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영적, 도덕적으로 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양종교들, 특히 인도종교들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깨달았다고 큰 소리 치는 자, 도사나 구루 같이 행세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인도종교들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구루 숭배, 종교 지도자나 교주 숭배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마치 자기가 신이 된 것처럼 신도들에게 군림하는 오만한 지도자가 너무 많다. 히말라야 어디선가 오래 수행을 했다고, 어느 토굴에서 두문불출하고 다년간 수행했다고 자랑하면서, 마치 무슨 계급장이라도 붙인 듯 목에 힘주고 행동한다. 하기야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목사님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인도종교만 탓할 노릇도 아니다. 여하튼 죄란 것이 무엇이며, 죄의식이 무엇인지를 깊이 아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교만해질 수 없다.


복음주의 신앙에서는 모든 인간이 별 수 없이 죄인이기에 다 거기서 거기라고 본다. 성인이든 죄인이나,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 사람이고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오십보백보로 본다. 요즘 유행하는 내로남불라는 말이 있다. 남이 땅을 사면 투기이고 자기가 사면 투자라고 한다는 말도 유행한 적이 있다. 진정으로 죄를 아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고 엄격한 반면, 남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하나님의 절대 명령, 양심의 명령 앞에서 큰소리 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처럼 완벽하라는 예수의 말 앞에서 큰소리 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그 앞에서는 도덕적, 영적 교만은 설 자리가 없다! 모두가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하면 남에게 관대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저 사람의 처지였다면 똑같은 짓을 했을 터인데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아서 끔찍한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처지에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죄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든다. 때로는 너그럽게 용서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상식적 도덕이나 법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이라고? 그렇다. 사회의 법도 아니고 종교의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예수님의 경우, 원죄 개념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인간의 죄악성에 대해 깊은 의식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차 없이 나무랐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 대해서도 엄히 꾸짖었다.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한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복음주의 신앙의 문제


지금까지 나는 복음주의를 넘어를 말하기는커녕 진정한 죄의식이 무엇이고 복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했다. 오히려 복음주의 신앙의 장점에 대해, 왜 복음주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말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서>를 말해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나라 복음주의 신앙이 그 원조 격인 미국 복음주의와 더불어 너무나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받아야 마땅한 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그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개신교의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 새로운 복음주의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이제 부터는 이 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첫째, 나는 말끝마다 죄를 들먹이는 우리나라 복음주의자들이 정말 진정한 죄의식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말로는 툭하면 죄인이라고 하지만 일단 교회 밖을 나가면 죄의식과는 무관하게 산다. 뻔뻔하기 짝이 없이 산다. 교회 밖으로 나가는 순간, 사회로,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갑질을 일삼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사는 독실한신자들이 많다. 정치인들, 고위장성들, ‘성공한기업인들, 교장이나 교감, 그리고 일반 교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많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하직원이나 학생들에게 교회에 나가라고 압력을 가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우리 한국인으로서 여리고 여린 죄의식의 소유자를 들라면, 지체 없이 2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청년 윤동주를 말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사랑하는 그의 시구 가운데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구절이 있지만, 정말 우리사회에는 인간 이하로 살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뻔뻔한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는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경건한신자들이 적지 않아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조롱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나 사회적 특권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부채의식 같은 것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며 당연시한다.


둘째, 한국 복음주의 신앙이 지닌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진정한 죄의식이 없이 말로만 죄를 외치고 말로만 은총을 떠들다보니, 신앙과 은총이 공허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십자가는 오직 예수의 몫이고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아무런 자기희생이나 수행의 노력 없는 싸구려 은총(cheap grace)으로 복음이 변질된다. 그야말로 공짜 은총을 남발하다 은총이 자동적으로 주어진 기계적 은총,’ 공허한 은총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죄와는 무관하게 2000년 전 한 유대 청년의 죽음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가 자동적으로 사하여졌다는 공허하기 짝이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 말하자면 2000년 전 머나먼 지역 어디선가 하나님과 자기 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무슨 거래같은 사건으로 느껴진다.


셋째,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진짜 죄의식이 없다는 것, 죄 사함이 정말로 복음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강한 기복신앙에서 잘 드러난다. 복음주의에서는 죄의 문제가 최대 문제이고 최대 관심사이며, 당연히 죄 사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최대 은총이고 축복인데, 정작 한국 복음주의자들의 신앙행태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사람 모두가 바라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약속하는 기복신앙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세상적 축복에다 신앙의 초점을 맞추는 신앙의 이해를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이라고 부른다. 복음주의 신앙인일수록 기복신앙에 더 열심이다. 기도를 해도 출세와 세속적 축복이 주관심이다. 복음주의와 기복신앙은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복음주의 신앙은 기복신앙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늘 붙어 다닌다. 믿고 기도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고 하며, 하나님께 윽박지르듯이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도 내용은 거의 전적으로 내 새끼, 내 가족,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이나 출세를 벗어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기복신앙은 결국 기적신앙이기 때문에, 한국 복음주의 신앙인들은 주로 기적체험을 강조하는 신자가 많다. 노력하지 않고 공짜로 세상의 복을 얻으려는 것처럼 얌체가 어디 있는가? 병이 낫는 것도 공짜, 대학입학과 취직도 하나님 빽으로 공짜, 그리고 영생과 구원과 천국도 다 공짜라고 하니, 그저 교회만 다니면 된다고 하니, 한국 복음주의신앙은 모두 공짜병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복을 구하는 신앙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신앙인에게 무엇이 참 이냐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아는 것이 복이 아니고, 심지어 죄 사함마저도 주된 복과 은총이 아니라 물질적, 세속적 복이 주된 관심사이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을 추구하다 보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을 더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기 쉽다. 세상의 질서와 가치와 긴장 속에서 도전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대신 세상과 짝하는 종교가 되고 만다. 기적신앙은 자칫 이기적이고 얌체 같은 신앙인을 양산하기 쉽다. 하나님 자신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는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 복음주의 신앙은 성서문자주의 신앙과 연계되어 있다. 기복신앙과 마찬가지로 성서문자주의 역시 복음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함에도 그렇다.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말하고 죄의 용서를 말하는 메시지는 요한복음이나 로마서, 갈라디아서 정도면 충분할 터인데, 굳이 무리하게 성서 전체가, 구약성서까지 포함해서 일점일획이 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는 근본주의 신앙을 고집한다. 그렇게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데도 말이다. 구약성서까지 통 털어서 성경 전체를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숭배자들이다.


복음주의 신앙의 다섯 번째 문제는 이웃종교에 대한 지독한 배타주의이다. 우선, 불교를 위시한 이웃종교인들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깊은 영성을 지녔다 해도, 아무리 각고의 수행을 한다 해도 갈 데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지옥을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감히 그렇게 말은 못하지만, 부처님과 공자님도 예외가 아니라고 내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죄의 문제는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수용하는 길 외에는 해결책 없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지성과 상식, 그리고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일반적 은총과 도덕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원죄, 즉 자신의 노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죄악성을 강조한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개신교계가 들썩였지만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신앙을 외치는 개신교의 오직주의는 이제는 자랑이 아니라 치명적 약점이고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다. 오직주의는 오늘의 한국 개신교를 형편없이 저질화 시킨 주범이기 때문이다. 오직 신앙, 오직 은총만 외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생각은 설 자리가 없다. 우리 같은 죄인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따르고 본받을 수 있는가 하고 포기한다. 그리고 따를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갔기 때문에 이 은총만 받아들이면 되는데, 굳이 예수를 본받아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예수를 따라서 살려고 해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덕적 노력이나 영적 노력을 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을 거부하는 우리의 자만이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공로주의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종교, 이런 개신교의 모습은 복음의 저질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세상의 종교치고 그 창시자의 삶을 본받을 수 없다고, 본받을 필요가 없고, 본받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세상 천지에 개신교 복음주의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실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현상이다. 은총의 신학이 중세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키는 그야말로 복음이었지만, 이제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타락시키고 망치는 주범임을 기억하자.


여섯째,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를 개인의 죄의 용서에만 치중하다보니, 복음주의 신앙은 대체로 사회문제, 사회정의 같은 문제에 관심이 없고 역사의식 같은 것도 없다. 아예 관심이 없다. 정치니 사회니 역사니 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복음주의 신앙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그런 것을 떠드는 성직자나 신자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원칙을 위배하고 개인적으로 무슨 출세의 야심을 가진 자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모두 다 똑같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고발하고 심판한단 말인가, 누가 감히 사회개혁을 외칠 자격이 있는가라고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을 하기도 한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이며 오십보백보인데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양비론을 전개한다. ‘적폐 청산을 말하니까, 너희들이 그럴 자격이나 있는가 하면서 신적폐세력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적폐 청산을 외치는 오늘의 개혁세력이 언젠가는 신 적폐세력이 될 가능성은 모두가 인정하고 경계해야만 한다. 개혁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런 점에서는 늘 겸손해야 하고 늘 자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오십보백보라고 하면서 가만히 손 놓고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 다 개인으로서는 죄인이기에 언제나 자기를 성찰하고 언제나 겸해야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덜 악한 집단, 더 좋은 세력, 역사의 발전을 이끌 더 적합한 세력이 있고,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해서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여전히 더 큰 악이 있고 덜한 악(lesser evil)이 있기 마련이다.


복음주의자들이나 맹목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모두를 도매금으로 매도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혹은 공범이 되었던 악을 은폐하고 물타기하려고 한다. 누가 감히 사회를 개혁한다는 말인가 하고 제법 옳은 말을 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나마 자그마한 역사의 발전이나 사회개혁도 없을 것이 자명하다. 그뿐 아니라 현실이 있는 그대로 좋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현실참여를 거부하면 현실이 그대로 정당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정치참여나 사회참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안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참여임을 잊지 말자.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하는 놈들 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아예 투표를 하지 말자는 사람도 있지만, 혼자 도덕적이고 혼자 잘 난체 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자기 혼자 의롭고 올곧은 사람인양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느라 목에 힘을 주지만, 주로 양비론이다. 실제로는 결국 현존하는 악을 용인하자는 말과 별 차이 없다. 투표 안 하는 것 자체가 투표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복음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죄 의식을 강조하면서도 역사참여, 사회참여, 사회정의를 위한 제도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명한 그리스도교 윤리학자, 신학자가 있다.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는 아직도 필독의 명저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사람은 물론이고 도덕적 인간, 도덕을 외치며 도덕으로 선한 사람이라도 부도덕한 사회에서는 무력하기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그런 개인의 선의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개인의 선한 의지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따른다는 것이다. 지난번 민주당 경선 후보 경쟁에서 모든 정치인의 선의를 믿는다는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사람이 생각난다. 또 현재 대통령이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말도 자주 들린다. 니버가 보았다면, 이 모든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 정치를 예로 들었지만, 정치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 문제를 놓고 신학사상을 논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인간관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인간의 죄악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지나친 비관주의다. 흔히 루터교 신학(Luteranism)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하는데, 모두가 죄인이고 다 오십보백보라는 생각은 옳은 면이 있음에도, 그래도 사회에는 더 진보적인 세력이 있고, 잘못된 현실에 눈을 감으려는 더 수구적인 세력이 있는 법이다. 복음주의는 곧 보수라고 하면서 태극기 집회 같은 데 앞장서는 세력이 있다. 과거 정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려는 복음주의 신자들이 꽤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의식, 사회참여, 사회정의를 외치면 다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비난받거나, 툭하면 좌빨로 몰린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을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괴물로 여긴다. 종교를 정치화한다고 비난하고 종교와 정치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더 탐하며 쉽게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아부하는 사람들이 복음주의를 내세우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다. 무슨 조찬기도회 같은 모임은 열심히 쫓아다니고, 어떤 모임이든 나서서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무슨 그리스도교 실업인 모임, 그리스도교 동문회 같은 데 부지런히 앞장서서 얼굴을 내민다.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고 갑질을 일삼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자를 자처하는 고용주들이 우리나라 그리스도교계에는 차고 넘친다. 스스로 예수 잘 믿는다고 목에 힘주고 사는 목사나 장로님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제일 무섭고만나는 것조차 꺼려진다. 그런가 하면 요즘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현 교황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압박하는 세력도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실 나는 그 분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취임부터 지금까지 내내 혹시 저러다가 암살이나 당하시지 않을까 줄곧 염려해왔다.


한국 복음주의가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없다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정말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다. 얼마 전까지 기승을 부리던 태극기 집회를 보라. 참가자들이 사회의식, 정치의식, 역사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모두가 미국식 사회의식, 좀 더 정확히 말해 미국의 그리스도교 우파들이 보는 대로 사회를 보고 세상을 보고 정치를 보면서,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이고 신앙적이라고 여긴다. 미국을 맹종하는 미국숭배이다. 태극기를 흔드는 행위는 그런대로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라 치더라도, 왜 미국 성조기를 흔드는지, 게다가 왜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또 거대한 나무 십자가는 왜 앞장세우고 행진하는지, 그런 장면을 보면서 도무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창피하고 자괴감이 들어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다. 어쩌다가 한국 그리스도교가 저렇게까지 망가졌나? 그동안 신학교 교수들을 무엇하고 있었나?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는 미국에서는 전혀 알아주지도 않는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 앞에서 자랑하며 무슨 벼슬이라도 한 듯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복음주의 목사들이 굳이 학위라는 것이 필요할까 싶은데도, 학위를 탐내, 쉽게 취득할 수 있는 목회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행세하는 목사님도 많다. 그래도 이건 좀 나은 편이고, 개중에는 미국에 아예 가 본 적도 없이, 아니면 여름에 한두 달 정도 다녀와서 학위를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가짜 학위를 위조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유명한 강남의 모 교회 담임목사가, 학위 문제, 논문 표절 문제로 교회가 두 동강이 났는데도, 아직도 버젓이 교회에서 설교하며 목회하고 있다. 교회에서 축출되기는커녕, 오히려 참다못해 뛰쳐나간 교인들이 모인 교회보다 훨씬 더 많은 신도들이 모인다고 하니,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회의 참석차 일본을 다녀오면서, 공항에서 시간이 남아 서점에 들렀다가, 두 주 지난 뉴스위크(Newsweek)가 딱 한권 판매대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특집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즉시 사서 읽었다. 제목이 기가 막힌다. “Does God believe in Trump?” 하나님도 트럼프의 말을 믿을까?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밑에는 바티칸 시스티나 채플 천정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천지창조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그림이 있다. 아담 대신 트럼프가 손을 뻗쳐 하나님의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장면인데, 트럼프가 툭하면 하는 말, “당신, 당장 해고야!”가 쓰여 있다. 잡지 기사는 가짜 복음주의자 트럼프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글이며, 그와 미국 복음주의 진영의 유착관계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내용이다. 미국이나 한국 복음주의자들이 필히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복음주의를 자랑할지 무척 궁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한국 복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십자가 신학>이 없는, 아니 십자가 신학을 전혀 모르는 승리주의 신앙이다. 죄의식이 정말로 중요하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찬양하면 될 터인데, 복음주의자들이 보이는 행태는 그렇지가 않다. 신도수를 자랑하는 한국의 주류 종교가 되고 권력집단이 된 힘을 믿고 승리주의 신앙에 도취되어 있다.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을 받다 죽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본받는 대신 하늘에서 영광을 누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바쁘다. 예수의 자기 비움과 희생은 온 데 간 데 없고, 하나님의 약함이야말로 참 강함이고 죽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사즉생의 십자가 신학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영광의 주님만 찬양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은 철저히 무시되고, 하늘 높이서 세상을 굽어보면서 통치하는 모습의 그리스도, 힘과 권력의 통치자 그리스도만을 찬양하고 섬긴다. 교회만 다니면, 그것도 자기 교회를 다니면, 은혜가 충만하고 구하는 모든 일이 다 자기 뜻대로 잘 되고 순탄하다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싸구려 은총을 남발한다.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가 남발했던 면죄부(더 정확히 말해서 면벌부’)와 무엇이 다를까?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팔아 모은 돈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은 것을 예수가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각종 명목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헌금을 갈취하는 오늘의 한국교회, 자격도 없는 목사들을 양산하면서 몇몇 목사들에게는 억대의 연봉과 엄청난 퇴직금을 안겨주는 한국 대형교회의 모습을 예수가 본다면, 과연 어떻게 하실까 상상을 해 본다.


내가 사는 강화에만도 높이 세워진 예수 상, 산이나 동산 위에 두 팔 활짝 펴고 우뚝 서 있는 예수상이 여러 군데 있다. 멀리서도 잘 보인다. 마치 세상만사를 관장하고 주관하는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듯, 승리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수상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민망하고 거부감이 드는데, 신자 아닌 사람들이 보면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비칠까 염려 된다. 세상의 고난을 온 몸으로 안고 살다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예수의 고난, 그리고 그러한 고난을 초래한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용감하게 맞서면서 지금도 예수의 고난을 몸으로 살고 있는 세계의 무수한 작은 예수들은 안중에 없고, 마치 세상의 온갖 축복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승리의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한국 복음주의 신앙을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단언하건대,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었다는 십자가의 신학,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지혜롭다는 바울 사도의 십자가의 신학, 기복신앙을 뒤엎고 기존의 하나님 인식을 확 뒤엎어버리는 십자가의 신학을 모르고,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잘못된 복음주의 신앙이 깔려 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유난히 탐욕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무지와 위선 때문이다. 이제 세계 그리스도교계와 한국 개신교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반갑지 않고 달갑지 않고 무거운 마음이 앞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축하하고 축제를 벌이기보다는 왜곡된 복음주의 신앙을 과감하게 청산해야 할 과제가, 그리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높고 크기 때문이다.


순수한 복음의 회복


나는 한국 복음주의가 앓고 있는 복음주의 신앙의 중병을 고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근본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을 되찾으려면, 이제 세계 그리스도교와 한국교회는 위에 열거한 오해와 오용의 가능성을 다분히 안고 있는 전통적인 복음 이해 자체를 확 바꾸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대속의 복음으로 선포하는 신앙 대신에, 예수 자신이 전파하고 다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가 그토록 선명하게 보여준 은총의 아빠 하나님의 복음과 신앙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복음주의 신앙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믿는다. 이 사랑과 은총의 아빠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감 없이 극명하게 가르쳐주시고 몸으로 보여주신 예수 자신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 자신이 지녔던 아빠 하나님 신앙을 되찾아야 한다. 교회가 전해온 예수에 <대한> 복음, 예수에 <대한> 신앙 대신,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 자신이 전한 복음, 예수 자신이 지녔던 신앙으로 과감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요구하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기초이며 근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복음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생명의 끈이다.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은 이런 점에서 영원한 진리이며 그리스도교의 생명이다. 문제는 불순물로 잔뜩 오염된 잘못된 복음주의이고, 그렇게 될 소지를 않고 있고 게다가 설득력이 없는 전통적인 교회의 복음주의에 있다. 루터가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이라면, 이제 우리는 현대의 성서학과 신학을 통해 루터보다도 더 순수하고 단순한, 아니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보다도 더 순수하고 직접적인 예수 자신의 복음과 신앙을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이제 새로운 종교개혁을 할 때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도교는 사즉생의 각오로 일대 변혁, 전환을 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정말 다 죽는다. 부자가 망하면 몇 대 간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교도 당분간 어영부영 지속되겠지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이미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더 설득력 있는 새로운 복음 이해, 새로운 신앙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몇 가지 점으로 이런 주장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예수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분법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둘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나 복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예수 자신과 바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놀라운 말이며 놀라운 주장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바울과 교회가 전하는 예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선포하는 복음 사이에, 예수의 하늘 아버지 신앙과 바울이 전한 대속 신앙 사이의 차이, 예수 자신이 증언하고 몸으로 보여주신 복음서에 기록된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총의 아빠 하나님 신앙과 자기 아들의 죽음을 대가 혹은 조건으로 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 신앙 사이에 차이가 크다는 말이다. 하나는 예수가 친히 전한 <아빠 하나님 중심>의 복음과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다는 바울과 교회가 전한 <예수 중심의> 신앙이다. 둘의 차이는 극명하다. 바울의 예수에 <대한> 신앙은 예수 자신<>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공연히 복잡하게 만들어서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신앙을 공허하기 짝이 없고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 새로운 복음 이해는 예수가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는지는 안중에 없고 무조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고 떠드는 맹목적 예수숭배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수는 이 세상에 죽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펴시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하신 그의 가르침과 행위의 비극적 결과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은 아빠 하나님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극명하게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삶을 산 결과였지, 죽음 그 자체가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토록 고민하며 괴로워하신 예수의 모습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할 수만 있으며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이 인간 예수의 진정한 모습이다. 예수는 인간이 진정으로 살 길을 복음으로 전했지 자신의 죽음을 복음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분이지, 그의 죽음 자체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무슨 엄청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을 예수의 삶 전체로 이해해야만 한다. 단지 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는 추상적인 복음 이해는 잘못 된 것이다. 예수의 삶과 메시지 전체가 복음, ‘Good News’이지 유독 그의 죽음만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셋째, 우리는 그래서 예수 죽음의 의미를 대속의 죽음보다는 바로 우리 같이 의롭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 적당히 타협하고 어영부영 사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받는 대고(代苦)로 이해해야만 한다. 즉 우리 대신 받는 고난이자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속이든 대고든 둘 다 예수의 무고하고 억울한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해석이지만, 대속보다는 대고가 훨씬 더 우리 마음에 와 닿고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은 먼 옛날 우리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지구 한 구석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기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예수의 정신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살면서 고난을 받고 있는 수많은 의로운 자들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죽음이고 재현되고 있는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분명히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과거의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는 죽음으로서 영원한 사건이다. 세상의 모든 무고하고 억울한 죽음, 의로운 죽음의 신화적 원형(mythical archetype), 따라서 영원히 반복되고 재현되는 죽음이라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어디선가, 그리고 지구 어디에선가 의로운 자들이 작은 예수(little Jesus)로서 우리 같이 의롭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을 위해 대신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롭게 사는 자들, 오늘의 작은 예수들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는 부채의식, 죄의식, 최소한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복음주의자들처럼 말끝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셨다고 떠들어대면서 지금 우리 시대에 있는 작은 예수들이 받는 고난을 외면하는 뻔뻔한 복음주의자들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함석헌은 이런 복음주의자들을 두고, 남을 위해 피 한 방울 흘려 본 적 없는 자들이 예수의 피, 예수 보혈을 떠든다고 꼬집었다. 예수의 죽음을 지금 나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죽음, 그야말로 2000년 전에 나도 모르게 일어난, 다시 말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사이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그야말론 자동적으로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공허한 복음으로 만들지 않는다. 믿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믿는 신앙이 되지 않는다. 값싼 복음의 은총을 남발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의로운 싸움을 싸우며 핍박받고 고난당하는 자들에게서 십자가의 예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책임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된다. 뻔뻔한 공짜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적어도 부채의식만이라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복음에 빚을 진 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지금 여기서 나의 진리, 내가 살아내야만 하는 진정한 복음의 의미다.


다섯째, 복음을 이렇게 대고로 이해하는 신학의 성서적 근거로는 특히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의 비유의 말씀이 중요하다. (이러한 복음 이해에 대한 더 상세한 논의로, 나의 글 두 가지 복음,”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대한기독교서회)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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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2017 [2017.09.17] 영과 진리 안에서: 씨알의 꿈과 믿음, 그리고 함석헌 file 2017.09.19 김경재
1027 2017 [2017.09.10]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file 2017.09.13 최성무
1026 2017 [2017.09.03] 꿈과 짐: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주체적 신앙과 예언자적 역사의식 file 2017.09.06 양현혜
1025 2017 [2017.08.27]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따라 file 2017.08.30 정경일
1024 2017 [2017.08.06] 단테의 '신곡' 여행 file 2017.08.10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1023 2017 [2017.07.30]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file 2017.08.02 최현섭
1022 2017 [2017.07.16] 내 안의 선악과(善惡果) file 2017.07.18 김용덕
1021 2017 [2017.07.09]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file 2017.07.13 정경일
1020 2017 [2017.07.02] 손의 회복 file 2017.07.13 구미정
1019 2017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file 2017.06.22 박현욱, 정영훈
1018 2017 [2017.06.04] '포도나무 비유'에 담긴 뜻은 file 2017.06.08 장회익
1017 2017 [2017.05.14] 꽃 핀 쪽으로 file 2017.05.17 정경일
1016 2017 [2017.05.07]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file 2017.05.12 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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