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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정배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 책임적 실존, 세계 개방성, 그리고 종교 해방에 이르기까지

(마태복음서 7:6~13)


20171022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종교개혁 사상가들의 삶과 뜻을 배우는 예배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 마태복음서 6~13 -

 

 

 

새길교회 종교개혁 500년 신앙축제에 참여하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의 기간을 하늘이 이 땅 교회에게 허락한 절호의 기회라 여겼습니다. 2013년 분단된 조국에서 열리는 WCC대회로 교회가 세상(세계신학)과 소통하기를 바랐고, 그 변화로 종교개혁 500년을 맞는 2017년에 한국 교회개혁을 꿈꿨고, 그 힘으로 20193·1 독립선언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이웃종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을 시작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2013년의 꿈은 한국 최고가 되고 싶은 한 교회 지도자의 탐욕으로 조각났고, 2017년의 소망 역시 사필귀정으로 500이란 숫자가 주는 무게감마저 가볍고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온갖 종교들의 타락상이 봇물 터지듯 천하에 들어났고, 신학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미래마저 절망케 했습니다. 따라서 2019년도 기대할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을 차지했던 기독교는 통일운동은커녕 자기 생존을 위해 허덕이는 종교로 퇴락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정황에서 새길교회가 기획한 종교개혁 강좌는 흙탕물 구덩이 속에서 솟는 한줄기 샘물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한국교회의 개혁은 1901년에 출생한 네 사람의 생각으로 돌아갈 때 가능타고 믿어 왔습니다. 함석헌, 김재준, 김교신, 그리고 이용도가 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선생격인 多夕 유영모가 이에 더해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들의 후예가 서남동이고 안병무이며, 오늘 말하고자 하는 변선환입니다. 금번 신앙 강좌에서 빠졌으나 이용도는 김교신과 함께 짝을 이뤄 다뤄질 신앙개혁자이기에 어느 순간 다시 재론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제게 맡겨진 주제인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은 이용도에서 시작하여 유영모, 그리고 김흥호를 거쳐 안병무, 서남동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신학적 결과물이라 할 것입니다. 본래 변선환의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은 그가 신앙부흥사가 될 것이라 기대할 정도였답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로 감리교단에서 출교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 스승인 변선환에 대해 제가 배우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진술하겠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변선환 선생님과 저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멍에와 명예 사이에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가치와 무속적 신앙 배경에서 자랐으나, 신앙을 접해 부모를 속이고 신학교에 갔던 저를 신학의 길로 옳게 인도한 이가 바로 변선환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심각한 결단이었겠으나, 달리 보면 무모할 정도의 열성을 지녔던 까닭입니다. 그런 열심을 갖고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곳은 제가 기대하던 그런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목사, 장로 가정의 아이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저의 배경은 초라했고 때론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옛 종교성을 품고 사는 제 부모의 구원문제가 늘 걸림돌이었습니다. 힘겨워 학교를 그만두려 했던 순간이 수차례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다른 신학, 다른 기독교의 길도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스위스 바젤에서 막 귀국한 변선환이었습니다. 가정의 종교배경을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고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입니다. 이점에서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정배도 없었습니다. 신학의 길을 포기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변선환은 제게 명예입니다. 하지만 출교 후 그의 제자란 것은 동시에 멍에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선생에게서 떠났으나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멍에를 명예로 만드는 것을 제 소임으로 여겼습니다. 마지막 고별강연에서 그가 내 제자들을 건드리지 말라(No touch)’고 했던 말씀을 기억했던 탓입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도 멍에와 명예 사이에서살았던 흔적 때문일 것입니다.

 

1927년 신의주 진남포 인근에서 출생한 그는 평소 자신이 신석구 목사에게서 세례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아시는 대로 신석구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던 분이었으나, 모진 옥살이 감내하며 변절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선언서 서명을 망설인 이유는 당대 선교사들의 가르침 탓이 컸습니다. 신앙인은 정치 문제에 관여할 수 없고 기독교 이외의 낯선 종교인들과 마음을 섞을 수 없다는 선교사들의 지침 때문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선언서 서명은 정치적 문제였고 이웃종교인들과 협력하는 사안이었습니다. 당시 이 가르침은 강제성을 띄었기에 무시하기 어려운 족쇄였지요. 하지만 고민 끝에 신석구는 결단하였습니다. 정치, 종교(신학)적 이유를 들어 민족의 자유를 방해하는 선교사들을 의심하여 저항한 나머지 마지막으로 서명에 참여한 것입니다. 변선환은 이 이야기를 강의 중, 종종 침을 튀기며 말했고 감신의 얼이 바로 이런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종교해방신학이란 말은 오랜 후에 생겨났으나 제 생각에는 이것이 신석구 목사에 대한 그때의 경험과 중첩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기독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웃종교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신석구의 자발적 깨침이 세례 시부터 변선환의 영혼 속에 자리했던 까닭이겠지요.

 

이북에서 감리교계통의 성화(聖化) 신학교를 다니다가 감신대와 한신대 대학원, 드류 신학교, 그리고 늦은 나이로 바젤 신학부를 졸업하고서 교수로 활동하던 초창기 변선환은 자신을 ‘3B’s Kind’, Barth, Bultmann, 그리고 Buri의 신학적 유산을 먹고 자란 자녀라 칭했습니다. 한신대 대학원 시절 바르트를 만났고, 미국 드류 대학에서 불트만 신학을 연구했으며, 바젤에서 부리의 지도로 박사논문을 썼기 때문입니다. 감신 학부에서 배운 웨슬리 신학이 한신대 박봉랑 선생을 만나 바르트 식으로 기울었지만, 불트만을 통해 웨슬리 정신을 회복했고, 부리와 만남으로 선불교와의 대화로까지 진일보 시킬 수 있었습니다. 변선환이 이웃종교, 특히 선불교에 눈을 떠 박사논문 주제로 삼았던 것은 자유의지 및 선행은총을 강조한 웨슬리 신학, ()신화화를 주장한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 그리고 그를 넘어선 부리의 비()케리그마화 프로젝트 덕분이었습니다. 이로써 변선환 신학은 자신의 스승 부리를 따라 칼바르트 계시신학과 대척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르트 신학이 예수의 유일회적 계시를 실증적으로 강조했다면, 변선환 역시 그리스도(케리그마)를 비신화화시켜 실존적으로 이해했던 결과입니다. 바르트의 경우 예수가 기독교를 포함하여 여타 종교를 능가한 유일무이한 신적 계시였다면, 변선환에게 그리스도는 기독교 전통에 있어초월 관계된무제약적 책임 존재에 대한 실존적 상징이었습니다. 세계 속 악()에 대해 사람들이 저마다 상대적 관계를 맺을 때 그에 대해 무제약적인 책임을 감당한 십자가상의 예수, 그가 바로 초월 관계된 존재로서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변선환은 거용(巨龍)살해자라 불렀습니다. 기독교 서구 전통에서 용()이 악의 상징이었던 탓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이해로써 변선환이 목적한 것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바르트처럼 기독교 서구가 동양과 이곳의 종교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일점에 고정시켜 이전과 이후를 어둠과 빛으로 나누는 도식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거용살해자로서 그리스도는 서구 전통에서만 통용되는 상징이라 했습니다. 둘째는 동양, 특히 유교와 불교에서도 무제약적 실존의 상징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붓다, 공자 역시 아시아적 전통 속에서 자기실현을 위한 무제약적인 실존적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서구 그리스도 상징이 이들 아시아적 상징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들 상징 역시 초월 관계된 자기이해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선환은 셋째로 소외(疎外) 동기의 부족으로 악의 문제에 소홀했던 아시아 전통에 거용살해자로서 그리스도 상징이 미칠 영향이 크다고 했습니다. 현실세계 속에 만연된 악과의 싸움을 위해 기독교적 공헌이 많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점에서 변선환은 아직 충분히 종교 다원주의적이지 못했고 동양의 구원은 서구로부터 온다는 명제에 갇혀있었습니다. 아직도 동양은 주객미분의 마술 동산에 갇혀 있다는 암묵적 전제 하에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성취론을 설()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젤 유학에서 돌아온 초기 변선환은 악과 투쟁하는 책임적 실존이란 말로서 그리스도 상징을 이해했고 한국 신학계에 나름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이후 민중 신학과 만날 수 있는 씨앗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변선환은 바르트 유형의 사고와는 달랐으나 여전히 서구 중심적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본격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전개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변선환은 아시아 신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수정해 갔습니다. 자신이 아직도 서구신학의 포로였음을 자각한 것입니다. 이때 만난 대표적인 아시아 신학자 두 사람이 중요합니다. 스리랑카의 A. 피에리스 신부와 인도의 R. 파니카가 그들입니다. 먼저 파니카의 사유는 변선환을 종교재판에 이르게 할 만큼 한국교회는 과격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지만 그리스도만이 예수는 아니라는 이론을 펼쳤던 까닭입니다. , 예수는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이지 유일한 그리스도(the Christ)가 아니라 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세계관 차()에 따라 종교 역시 달리 생성되는 것이기에 종교 간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변증법적 대화가 아니라 상호 배우려는 대화적 대화가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변선환은 이점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기독교 서구가 초지일관 강조했던 그리스도 중심주의을 벗고 신중심주의라는 새 패러다임 하에서 종교다원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변선환에게 있어 종교다원주의는 세계 개방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기독교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하겠습니다. 기독교 이후 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들 구원을 위해 예수에게서 충분한 계시되었으나 하나님의 전체는 알려지지 않았다J. (Hick)의 말도 변선환의 단골 인용문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신중심주의적 틀로서 동서양을 회통했고 다원주의 신학자가 되었으나 변선환은 차이만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주의와는 달랐습니다. 현상적으론 차이가 있겠으나 종교들 간의 공통본질 역시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질은 실재론적이지 않았고 실천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스리랑카 신학자 피에리스와의 만남이 그를 파니카와 다른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피에리스는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에 시작 전,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셨듯이 서구 신학 또한 아시아에 발 들여 놓기 전에 아시아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때 아시아의 요단강은 아시아적 종교성과 민중성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민중성과 종교성에 몸을 담그지 못한 신학을 사치라 여겼습니다. 종교성 속에 함의된 민중성, 이들 간의 불이(不二)성이 바로 변선환 신학의 골자였던 것입니다. 민중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라 칭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구적 종교다원주의자에서 종교해방신학자로서의 변선환의 변신을 일컫습니다. 종교들 간의 다름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 자체가 무슨 역할을 하는가가 중요해진 탓입니다. 이전 시기 논했던 악()에 대한 이론적 책임성이 민중의 해방과 실천적으로 접목된 결과라 생각합니다. 변선환이 P. 니터(Knitter)오직 예수이름으로만?이란 책을 번역한 것도 90년대 초반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P. 니터 역시 신중심적 틀에서 실천(해방)적 혹은 기독론을 말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변선환의 이런 변신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다원주의를 포스트모던주의로 매도하여 신학토론 한번 없이 교회 밖으로 내쳤습니다. 교회의 크기로 목사의 크기를 가늠하는 교권주의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예수처럼 그렇게 성문 밖 존재가 되었습니다. 교회 밖 구원 없음을 말하기 전에 교회 안에 구원 있는가를 물었던 그를 교회들이 불편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 구원이 있는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가톨릭 교종 역시 교회의 복음화 없이는 세상 복음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을 선포하며 구원을 제도적으로 보증하고 있으나 정작 자본 종속적인 그 교회들은 붕어 없는 붕어빵처럼 복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변선환의 이런 전환은 민중신학의 도전을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였습니다. 토착화 신학자로 알려진 유동식, 윤성범의 신학의 길을 걸었으나 이들 속에서 종교의 민중해방적 기능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유동식 교수께 이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군부독재가 시작되고 민주화 투쟁이 시작되던 1960년대 선생님은 어찌 민중 신학과 대별되는 토착화(문화)신학을 시작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36년간 우리 것을 빼앗긴 경험을 한 입장에서 우리 안에서의 다툼이 사소한 것으로 보였다는 답을 주었습니다. 일면 긍정되었으나 토착화 신학이 시대(상황)적합성을 잃은 것이라 반문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변선환은 감시의 토착화 전통에 민중성을 수용하여 종교해방신학으로 진일보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민중 신학자들에게 충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민중성만 알고 아시아의 종교성을 논외로 하는 것도 절름발이 신학이라고 말입니다. 이때부터 변선환은 박사논문의 한 축이었던 선불교 대신 민중불교에 관심했고 원불교를 공부했으며 여성신학이 한국 신학의 꽃인 것을 강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이 해방되어야 할 또 다른 민중, 마지막 민중인 것을 자각한 결과이겠습니다. ()신학자가 여성들 모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여성신학회에 찾아와 응원해 주었습니다. 결국 변선환은 한국신학의 두 산맥인 토착화신학과 민중신학을 종교해방신학의 이름으로 합류시켰던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저는 이를 신석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변선환 삶의 열매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변선환의 신학은 특히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신학자들에게 신세를 진 결과였습니다. 그렇기에 한 신학자는 어느 신학자는 변선환을 가리켜 자기 것 없는 안테나 신학자라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변선환을 마음으로 느낀 가톨릭 신학자 심상태 신부는 달리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길이 너무 외로웠기에 동서양 이웃 신학자들의 생각을 빌어 자신의 말을 대신 한 것이라고 말이지요. 어느 경우가 되었든 변선환은 지극히 외로운 길을 갔습니다. 학창시절 도드라졌던 부흥사의 열정을 학문하는 데 쏟았고 교회를 향한 비판에 썼으며 제자들을 기르는 데 소진했습니다. 대학원생들 다수가 그의 지도하에 논문을 쓰고자 했기에 교수 한 사람이 여섯 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다는 내규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그의 배움을 얻은 제자들, 거지반 30명 이상이 신학박사 학위를 얻고 귀국한 것도 주변에서 찾을 수 없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외로웠습니다. 출교 이후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불러주는 교회도 없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홀로 책을 읽다가 고독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교회는 그를 내쳤으나 이웃종교인 원불교에서는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야말로 참 목사라 칭하며 추모의 시간을 가져 주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그의 제자들마저 외면했을 때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만이 유일하게 그의 죽음을 알아보고 고백했다지요. “저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입니다. 이웃종교인에게서 참된 목사로 인정받은 변선환, 그이야말로 복음을 증거했던 참된 신학자가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몇 년 앞둔 시점부터 변선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걱정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신학하는 이들의 영혼의 크기가 한없이 작아진 현실과 신학대학이 교단정치의 희생 양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동전양면처럼 상호 얽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변선환은 교단과의 싸움을 위해 키에르케고어가 말했듯 자신의 자화상을 순교자로 그렸습니다. 이 시대가 순교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교단과의 적당한 타협을 통해 출교만은 막자고 수차례 권유했었으나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감신 이사장은 그의 절친 중 한사람이었고 감리교단의 연회감독은 학창시절 그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던 변선환의 4년 후배였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타협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변선환은 스스로 죽고자 했습니다.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지금도 순교자를 시대가 요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고독을 두려워하기에 순교자를 꿈도 꾸지 못합니다. 별을 손에 넣을 수 없다하여 별보기 조차 거부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들로 변질된 탓입니다. 본래 하나님 나라가 체제 밖을 꿈꾸는 일이었거늘 모두가 체제 안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변선환의 외우(畏友)이자 초현실주의 신학자인 이신이 말했듯 상상력이 부패, 타락된 소치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변선환의 출교는 영혼의 크기가 한없이 작아진 이 시대의 목사, 신학생, 그리고 기독교인 모두에게 신학자란 무엇인지, 믿음을 지닌 사람의 선택이 어떠한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를 영혼이 궁핍했던 시대의 신학자라 부릅니다. 횔더린이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었고 하이데거가 궁핍한 시대의 철학자였다면 그는 신학영역에서 주저 없이 그렇게 불릴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과 연관시켜 종교해방신학자로서 변선환의 삶과 사상을 풀어내야 할 마지막 지면에 이르렀습니다. 아시듯 예수께서 알려준 기도문은 마태와 누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었습니다. 첫 번째 복음이라는 마가에는 없습니다. 그렇고 보면 주기도문은 의당 원천(Quelle)이라 불리는 예수의 어록 중심의 Q자료에서 비롯한 것이겠습니다. 이것 역시 바울의 첫 번째 서신들만큼이나 오래된 자료이기에 오히려 마가서보다도 이른 시기의 문서라라 할 것입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는 무수한 말을 쏟았으나 주기도문만큼 명확한 가르침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구하라하셨고 바울이 기도하라한 것은 실상 주기도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한 누구도 홀로 부자일 수 없고 누구도 홀로 슬퍼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누가 홀로 독점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는 예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고 예수가 하나님이란 교리가 생기기 전의 예수의 하나님 생각이 담겼습니다. 예수에게 하나님은 하늘 부모로서 근원적 존재입니다. 누가서의 족보이야기가 말하듯 조상의 끝은 하늘, 곧 하나님이란 것이지요. 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우리들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발 딛고 사는 현 세상 속에서 이룰 과제와 결코 무관치 않습니다. 하늘의 거룩함은 이 땅에서 이룰 과제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는 아니지만 둘도 아닌 탓에 이를 동양적으로 불이(不二)적 관계라 말해도 좋습니다. 이 땅에서 이뤄야 할 하늘의 거룩함, 그 실상은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 잘못을 인정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얻는 일입니다. 이 일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 사안과도 깊이 연루되었지요. 그래서 경제적인 것은 종교적이며 물질적인 것이 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 경제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거룩함의 실상이 헛된 염불되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남미 해방신학이 물질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민중 신학이 빵의 문제로 고통 하는 민중의 우선성을 말한 것도 그리고 변선환이 민중성과 종교성의 하나 됨을 강조한 것도 모두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일입니다. 신학자 이신 역시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다시 신되는 것을 성육신의 본질이라 여겼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주기도문 속의 이런 가르침이 변선환의 신()중심적 종교해방신학에서 구체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중심적이었기에 그의 신학은 다원적일 수 있었고 종교해방적이었기에 현실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변선환에게 신, 곧 하늘은 모두를 품으며 모두를 거룩케 하는 근원적 일자(一者)입니다. 땅의 사람들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얻는 방식으로 이 땅이 거룩해질 때 비로소 거룩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홀로 거룩하고 홀로 완전해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땅과 하늘, 신과 인간이 함께 거룩해 지기를 바라는 ‘Pro me’적 존재라 하겠습니다. 이 경우 ‘me’는 개인이 이 아니라 인류 혹은 땅 전체가 되겠지요. 그래서 신학자 이반 일리치는 기독교의 골자인 성육신의 신비는 오로지 현장(現場)에서만 재현되는 것이라고말했습니다. 초월을 초월한 것이 성육의 본뜻이기에 성육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이 땅의 종교라 본 것입니다.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역시 결국 땅을 위한 땅을 사랑하는 신학일 뿐입니다.

 

금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변선환의 제자 된 저희는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하는 가정아래 살아생전 기독교에 대한 그분의 염려와 우환을 기억하기에 1년의 세월을 투자하여 소위 종교개혁 500以後신학: 루터 밖에서 루터 찾기를 펴냈습니다. 루터에게로의 회귀가 아니라 루터 밖에서 새로운 루터를 찾을 목적에서였지요. 처음의 루터가 역사적인 비텐베르크의 루터라면 나중 루터는 이 시대를 개혁할 우리들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제자들을 노 터치하라 선언한 변선환, 기독교의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홀로 순교자의 길을 갔던 변선환,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하여 사후 20여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88일을 전후하여 용인 묘소를 찾았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더웠고 어느 날은 폭우를 만나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저와 제 제자들 또 그들 학생들을 이곳으로 데려 오기도 했었지요. 묘소에 누워계신 선생님까지 4대에 걸친 학문의 인연들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여하튼 20여 년간 묘소를 참배했던 그 힘으로 우리는 600페이지 되는 책을 함께 만들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종교개혁은 아시아에서 나와야 한다는 변선환의 사자후(獅子吼)를 기억한 탓입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웨슬리의 감리교단은 그를 버렸으나 이런 변선환을 종교개혁자로 중히 여겨 이 시공간을 허락해준 새길교회는 로마 백부장처럼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 주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새길교회가 두 번째 종교개혁의 출발지가 되었다고 믿습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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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2017 [2017.10.01] 서남동, 당신의 뒷모습만 봅니다 file 2017.10.10 권진관
1029 2017 [2017.09.24] 안병무와 21세기 file 2017.09.28 김진호
1028 2017 [2017.09.17] 영과 진리 안에서: 씨알의 꿈과 믿음, 그리고 함석헌 file 2017.09.19 김경재
1027 2017 [2017.09.10]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file 2017.09.13 최성무
1026 2017 [2017.09.03] 꿈과 짐: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주체적 신앙과 예언자적 역사의식 file 2017.09.06 양현혜
1025 2017 [2017.08.27]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따라 file 2017.08.30 정경일
1024 2017 [2017.08.06] 단테의 '신곡' 여행 file 2017.08.10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1023 2017 [2017.07.30]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file 2017.08.02 최현섭
1022 2017 [2017.07.16] 내 안의 선악과(善惡果) file 2017.07.18 김용덕
1021 2017 [2017.07.09]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file 2017.07.13 정경일
1020 2017 [2017.07.02] 손의 회복 file 2017.07.13 구미정
1019 2017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file 2017.06.22 박현욱, 정영훈
1018 2017 [2017.06.04] '포도나무 비유'에 담긴 뜻은 file 2017.06.08 장회익
1017 2017 [2017.05.14] 꽃 핀 쪽으로 file 2017.05.17 정경일
1016 2017 [2017.05.07]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file 2017.05.12 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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