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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7.10.17 15:54

[2017.10.15] 감사, 나눔,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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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차옥숭



감사, 나눔,

(레위기 23:22, 신명기 16:11~12)

20171015

추수감사주일 예배

차옥숭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너희가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이지 말고, 또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아라. 그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 레위기 23:22 -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그 곳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잘 지키십시오.]

- 신명기 16:11~12 -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으며, 추수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가족과 일꾼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추수감사를 통해서 모두가 평등한 삶을 누리는 사회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농경이 중심이었던 고대 이스라엘의 월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추수는 1월 중순경부터 시작해서 8월 중순경까지 7개월 동안에 합니다. 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의 추수를 합니다. 유대인의 절기로 보면, 추수는 유월절 기간에 시작해서 초막절에 끝납니다. 첫 번째 추수는 1월 중순, 즉 유월절(과 무교절) 도중에 시작해서 칠칠절로 끝납니다. 유월절이 114일에 시작되고, 무교절은 15일에 시작되는데, 바로 이 날이 안식일입니다. 추수는 안식일 다음날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초실일은 이스라엘 월력으로 116일입니다. 이때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칠칠절 또는 맥추절입니다. 그리고 추수는 715일의 초막절로 일단 마칩니다. 그런데 남부지역에서는 장막절 무렵에 추수가 끝나지만, 북부지역에서는 남부지역보다 추수가 한 달 정도 늦어지기 때문에, 8월 중순경에 다섯 번째 추수가 끝납니다(보리, , 포도, 여름과실, 올리브 등). 유대인의 삼대절기로 일컬어지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은 모두 이 추수기간-이스라엘의 삼대절기는 종교적인 절기 이전에 실제적인 농사절기-에 들어 있습니다.

 

먼저 유월절에 대해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추수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시작됩니다. 우리는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는 절기를 묶어서 유월절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유월절은 114일이고,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동안이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입니다. 그리고 무교절 첫 날이 성일(안식일)이고, 그 다음날부터 추수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추수를 시작하는 초실일은 유월절 기간 도중인 116일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날을 특정한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단을 흔드는 날’, 또는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이라고 합니다.

 

다음 칠칠절에 대해 살펴보면, 이 절기는 유월절의 초실일로부터 칠 주간(7x7)이 지난 날이라고 해서 칠칠절이라고 부르며, 그때에 보리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422절에는 이 절기를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부릅니다. 보리의 첫 결실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실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해서 신약에서는 오순절’-여기서 은 우리가 보통 한 달을 셋으로 구분해서, 초순, 중순, 하순이라고 할 때의 으로, 10일 단위를 말함-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칠칠절은 초실절, 맥추절, 오순절로 불리며 칠일 동안 진행됩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715일에 시작해서 일주일 동안 진행됩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월력으로 7월이 정월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에 월력체계가 바뀜에 따라 7월이 1월이 되고, 1월이 칠월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절인 71일이 신년 축제일이었으며,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초막절은 가을추수 감사절에 해당합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던 것을 추억하면서 초막을 짓고, 거기에 거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러한 연유는 레위기 23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레 동안 너희는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의 본토 사람은, 누구나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너희의 자손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레위기 23:42~43)

 

당시 사람들은 추수할 때, 들판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거주하면서 추수를 했습니다. 초막은 추수용으로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 초막을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여기저기에 쳤던 장막과 동일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막절은 원래는 농사절기인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출애굽과 관련을 시키고, 추수를 하면서도 출애굽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의미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절기는 레위기에서는 초막 또는 장막을 짓고 광야생활을 기억한다는 의미가 강조되고, 출애굽기 23장에서는 곡식 저장-그래서 수장절이라고 함-이 강조됩니다. ‘또한 너희는 밭에서 애써 가꾼 것을 거두어들이는 한 해의 끝 무렵에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출애굽기 2316절 하반절)고 나옵니다. 따라서 이 초막절은 장막절, 수장절로 불립니다.

 

 

다음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추수의 사회적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신명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민수기 28~29장에는 추수와 관련해서 이러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레위기에는 2322절에 나타납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다른 곳에서는 추수한 다음에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배려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는데 비해, 이 구절에서는 추수하는 도중에 그들을 어떻게 배려해야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삼대절기를 지내기 위해서 정해진 한 곳, 즉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 중앙성소사상은 신명기의 핵심적인 신학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삼대절기는 축제의 성격을 갖는데, 자기 가족뿐만 아니고, 일꾼들과 더불어, 또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도록 규정-1611절과 14-하고 있습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명기 16:11~12)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삼대절기는 수직적인 구조와 수평적인 구조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 수직적인 구조라고 한다면, 가족뿐만 아니라 종들과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수평적인 구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스라엘의 삼대절기입니다. 7개월 동안의 추수는 이러한 정신에 의해서 진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위의 가난한 이웃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주려고 했을까요? 신명기 14장에 의하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십일조를 드려야 했으며, 그것을 중앙 성소로 가져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해야 했습니다.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 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신명기 1426b-27).’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십일조를 드려야 했으며, 그 십일조는 주로 레위인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언급들이 있는데, 신명기에서는 매년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다른 제물과 구별됩니다. 신명기 126절에는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 예물이 따로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1217절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대체로 레위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주도록 되어 있는데, 신명기에서는 레위사람을 포함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되어 있으며, 3년 단위로 기간을 설정해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해에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세 번째 해에는 같은 성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십일조를 거두어서 그 성안의 레위인을 비롯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규정해 놓습니다.

 

3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28~29)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십일조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사회보장 제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희년제도나 안식년 제도만큼이나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을 예를 들면,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하게 유월절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유월절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거의 유일무이하게 요시야 시대에서 제대로 지켜졌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출애굽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요시야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히스기야 시대에서는 출애굽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혁을 일으켰고, 히스기야의 개혁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 그 사람들은 므낫세 시대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에서도 삼대절기를 제대로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맺어주는 표징이었고 고대 이스라엘에서 절기는 무엇보다 제의(祭儀)를 행하는 중요한 장이었습니다. 제의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형성하고 전승하는 중요한 기능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제의적 틀을 통해 을 누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레위기 23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절기마다 성회일에 반드시 쉴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절기들을 영원한 규례로 삼아서 대대로 전하고 지키도록 신신당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쉼을 영원한 규례로 정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의는 공동체적이기 때문에, 쉼 역시 개인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입니다. 그래서 제의는 온전한 사회적 쉼을 지향합니다. 먼저 레위기 23장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각 절기에 대한 구절들은 약간씩 변형되지만 대체로 이러한 형태를 보입니다. 본문은 절기들을 여호와의 절기”(<הוהי יוֹמ>)라고 칭합니다(2, 4, 37, 44). 그리고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הוהי או ת>)이고, 유월절도 여호와의 유월절(<הוהי ח>)입니다. 이것은 그 절기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되었고, 모든 절기들은 인간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때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절기는 야훼의 쉼에서 비롯합니다. 구약성서는 창조사역 과정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함으로써, 안식의 기원을 신에게 둡니다. 구약성서는 신의 안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וֹתּא>)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וֹתּא>)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ת>).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וֹתּא>)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ת>). (창세기 2:2~3)

 

이 구절은 안식일 제정이 아닌 신의 안식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은 일회적인 신의 안식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안식일 규정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וֹשׁ ת םוֹי־ת רוֹכ>)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의 안식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면서, 인간들의 안식을 위한 본()과 근거가 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고 다시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삶의 방식은 바로 이 구절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사역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 즉 하나님의 쉼을 본받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창조사역 과정에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הא־ל ה־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20:8~11)

 

쉼의 명령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듯 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안식을 명령하지만, 그날은 인간의 안식일이 아니고 분명히 여호와의 안식일이며, 그렇기에 그날은 여호와의 안식을 기념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여호와의 안식을 기념함으로써 안식을 누립니다. 그럼으로써 여호와께서 안식하신 그 특정한 일곱째 날이 안식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약성서가 언급하는 모든 절기들은 안식일을 그 모델로 삼는 듯합니다. 안식일 이외의 다른 절기들 역시 제의적인 면에서는 안식일 패턴을 약간 변형시켜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안식일을 비롯한 쉼의 날, 즉 성회일에는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비롯한 절기들에 행하는 쉼의 제의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기 때문에, 인간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쉼의 삶을 본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절기를 제정하시고 제의를 통해 쉼을 재현하게 하신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쉬는 것입니다. 절기에서 제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지만, 오히려 쉼을 더 중시합니다. 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무엇보다 쉼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지니(<ת יי םוֹיּוּ ד םי ת>),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ת>). (34:21)

 

여기서 말하는 대로, 고대 이스라엘은 일곱째 날을 거룩한 안식일로 정하고 그 날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땅도 반드시 쉬게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어기는 자는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영원한 계약의 외적 표징이기 때문에,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즉 안식일이 없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관계가 끊긴 것입니다. 이것을 대대의 표징, 또는 대대로 영원한 언약이라고 함으로써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져야 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바벨론 유배 이후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고유성을 지키는 제도로서 한층 중요시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한 각종 규정들이 계속 생겨나, 해방과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감사드리는 날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옭죄기 시작했습니다.

 

탈무드는 안식일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신 귀중한 선물로 여겼습니다(Shab 10b).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온전히 쉬라는 것은 모든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이 원래 의도와는 달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하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얽어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유대교에서도 안식일 규정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안식일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사회적 차원의 쉼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온 이스라엘이 온전한 휴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사회적 쉼을 깨뜨리는 지극히 불순한 행동이며, 하나님께 대해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이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 안식일에 온전한 사회적 쉼을 누리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안식일에 불도 피우지 못하게 하고, 안식일에는 음식도 만들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음식을 전날 미리 준비해서 안식일에 먹어야 합니다. 만약 안식일에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면, 안식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이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한 날에 안식하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규정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안식일이 모두에게 안식을 주지만 특별히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유용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봅니다. 노예나 종들, 가축들에게도 고마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신의 안식이 인간의 안식을 촉발시킵니다. 인간들은 신의 안식을 기념함으로써 인간의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안식일을 비롯해서 여러 절기들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쉼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어떤 날이며, 그날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직접 실천하심으로써 본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그대로 따르도록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이외의 다른 절기들 역시 안식일을 기본 틀로 삼아, 온전한 쉼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안식일은 특별한 쉼의 날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날을 기다리며 준비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금식하거나 슬퍼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 먹고 마셔야 합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특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만나에 관한 이야기(출애굽기 16:23-30)를 보면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두 날 몫을 주는 것은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별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에 진정한 휴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안식일 규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편히 쉬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쉬는 것은 사람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한편 쉼의 의미는 사람이 자기 노력에 의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는 피조물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세이자,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성서와 함께 편집부, 어서 가거라, 425)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 즉 온전한 사회적 쉼을 현실적으로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절기 제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명령에 따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절기들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절기에 행하는 제의를 통해 온전한 사회적 쉼을 실현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쉼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농경문화 생활을 했던 한국민족도 추수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하는 제의를 지냈습니다. 오래된 문헌으로 3세기경 진()나라의 사가 진수(陳壽)가 펴낸 위지 동이전에 보면 부여, 고구려, , 진한 등에서 행해지던 제례 풍습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여에서는 은력(殷曆) 정월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이름을 영고라 하고, 고구려는 시월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하고, 예에서 시월절에 천신에게 제사를 무천이라 하고, 진한에서는 오월 파종과 시월 추수가 끝나면 천신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한국인들의 제의의 목적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해방된 삶을 창조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창조는 신과 인격적 교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인격적 교제로서의 제의 양식은 음주가무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에도 어촌마을의 풍어제와 농촌마을에서 행해지는 동제나 마을 굿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추수가 끝나면 제의를 통해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참여자 모두가 흥겨운 춤판을 벌립니다. 그곳에서 그동안 노동의 중압감에서 오는 사회적 응어리, 생리적심리적 응어리 등이 발산되고 흥겨운 놀이 속에서 복을 빌어 주고 아픔을 나누며, 같이 울고 웃는 공동체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은 한울이라고 했습니다. 천지의 젖인 밥은 나누는 것이고 함께 먹는 것이고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월선생은 만사지 식일완(萬事知 食一碗), 즉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밥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함께 협동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벌레··공기·바람··서리·천둥·햇빛과 볍씨와 사람의 정신 및 육체적인 모든 일이 다 같이 협동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쌀이요 밥입니다. 그러므로 밥은 육체의 밥이요, 물질의 밥이며, 동시에 정신의 밥이요, 영의 밥입니다. 그래서 밥을 우리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밥은 공동체적으로 생산하고 수렴해서 나누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밥은 밥상에서 나누어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밥상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밥이란 본래 공동체적으로 함께 놀고 다시금 공동체적으로 밥을 만듭니다. 밥이란 생산 활동과 또한 그 결과를 수렴하는 활동 전체에서 거대한 힘의 원천이 됩니다. 자기가 일해서 얻은 것을 남에게 흔쾌히 내어주는 것, 내어주기 위해서 피땀 흘려서 일을 하는 것, 근원적인 의미에서 서로 나누기 위해서 일하고 또 일해서 나누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입니다.

 

농사는 고대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추수는 그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추수는 자신들에게도 중요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추수할 때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면서 추수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7개월 동안의 추수 기간에 들어있는 삼대절기를 통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했으며, 어느 사회에나 있게 마련인,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십일조라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함으로써, 모든 인간들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신명기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추수의 근본적인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기쁨을 나누고 쉼을 누리는 사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이것이 바로 추수를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이 이루려고 했던 사회, 출애굽 이후의 사회였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가을입니다.

익어가는 모든 것들은 비워내며 겸손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된 감사와 나눔과 쉼의 의미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새길로고.JPG


원문:  20171015_말씀증거_차옥숭(원본)감사나눔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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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 2017 [2017.11.5] 신·인(神·人)장벽, 생·사(生·死)장벽 허물기: 복음의 진수 file 2017.11.10 한완상
1034 2017 [2017.10.29]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 file 2017.11.08 길희성
1033 2017 [2017.10.22]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 책임적 실존, 세계 개방성, 그리고 종교 해방에 이르기까지 file 2017.10.25 이정배
» 2017 [2017.10.15] 감사, 나눔, 쉼 file 2017.10.17 차옥숭
1031 2017 [2017.10.08] 받침대를 흔드는 위험한(?) 개혁: 한국 여성 종교개혁자들 file 2017.10.12 최만자
1030 2017 [2017.10.01] 서남동, 당신의 뒷모습만 봅니다 file 2017.10.10 권진관
1029 2017 [2017.09.24] 안병무와 21세기 file 2017.09.28 김진호
1028 2017 [2017.09.17] 영과 진리 안에서: 씨알의 꿈과 믿음, 그리고 함석헌 file 2017.09.19 김경재
1027 2017 [2017.09.10]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file 2017.09.13 최성무
1026 2017 [2017.09.03] 꿈과 짐: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주체적 신앙과 예언자적 역사의식 file 2017.09.06 양현혜
1025 2017 [2017.08.27]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따라 file 2017.08.30 정경일
1024 2017 [2017.08.06] 단테의 '신곡' 여행 file 2017.08.10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1023 2017 [2017.07.30]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file 2017.08.02 최현섭
1022 2017 [2017.07.16] 내 안의 선악과(善惡果) file 2017.07.18 김용덕
1021 2017 [2017.07.09]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file 2017.07.13 정경일
1020 2017 [2017.07.02] 손의 회복 file 2017.07.13 구미정
1019 2017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file 2017.06.22 박현욱, 정영훈
1018 2017 [2017.06.04] '포도나무 비유'에 담긴 뜻은 file 2017.06.08 장회익
1017 2017 [2017.05.14] 꽃 핀 쪽으로 file 2017.05.17 정경일
1016 2017 [2017.05.07]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file 2017.05.12 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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