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17.33.156) 조회 수 39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자 김경재

영과 진리 안에서:씨알의 꿈과 믿음, 그리고 함석헌

 (요한복음서 4:21~24)


20179월 17일 주일예배

김경재 목사

(한신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 요한복음서 4장 21~24-

 


 



제1: 함석헌의 생애


1. 종교개혁정신과 함석헌

한국 땅에서 개신교 역사의 첫 출발을 1884년 황해도 소래마을 초가집에서 선교사 지도 없이 조선인들이 첨 예배하던 해로 삼는데, 금년 2017년 기준으로 133년 전 일입니다. 한국 개신교 역사 133년 동안 개신교 기독교는 길지 않는 근현대 한국사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모두 안고 있는 종교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 133년 동안 훌륭한 인물이 많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신앙의 선구자로서, 특히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정신을 한국인으로서 또렷하게 살고 간 신앙인으로서 함석헌(1901-1989)이라는 인물을 조명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을 성찰하려고 합니다.

 

2. 가정환경

함석헌은 1901313, 평북 용천군의 황해바닷가 70호정도 조그마한 농어촌마을에서 한의업을 하는 아버지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함석헌은 고향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 스블론 납달리 이방의 갈릴리여”(4:15-16)라고 부르는 변두리 민초들의 마을이었다는 점입니다. 양반상놈의 반상 계급의식이 없고 소박한 서민들이 사는 마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훗날 함석헌으로 하여금 씨알이라 부르는 민을 역사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그루터기가 됩니다. 둘째 고향의 의미는, 청일전쟁와 러일전쟁의 싸움의 여진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이자, 동시에 외국의 문물이 쉽게 들어오는 해안마을이어서, 일찍이 기독교가 마을에 전래되어 신문화에 접촉할 수 있었고 민족의식이 일찍 자각되는 마을이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함석헌이 탄생한 마을에서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3. 청소년의 꿈

그 누구나 소년기와 청소년 시기의 교육은 그 사람의 인격형성과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함석헌은 마을에 있는 삼천재라 일컫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 한문글자 독법을 마치고, 덕일소학교와 양시공립보통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고, 당시 서울 경성의 관립 경기고등보통학교와 쌍벽을 이룬다는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에 1916년에 입학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5년제 중고등학교인데, 관립학교로서 경성에 있는 관립 경기고등보통학교와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는 당시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학교요, 졸업 후엔 경기의전에 무시험특례입학이 허락되는 학교요, 의사 아니면 관리로 채용되는 엘리트 학교였습니다. 당시 함석헌은 졸업 후 경성의전에 입학할 예정으로서 의사가 되려고 꿈꾸던 소년이었습니다.

 

4. 3.1만세 참여와 자퇴

그런데,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반 때, 19193월 대한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함석헌 나이 우리 나이로 19살 때입니다. 그의 회고담을 들으면, 어디에서 그런 용기와 열정이 났는지 자신도 놀랄 만큼, 온종일 평양 시가를 누비며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복사하여 동포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열심을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립만세운동의 여진이 좀 가라앉게 되자 임시 휴교하던 학교가 다시 개교를 하는데, 당시 일본인 교장선생이 독립만세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잘못했다는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는 자만 복교가 허락된다는 정책이 실행되어 대부분 조선인 학생들은 당국과 학교정책에 순응하고 복교했는데, 함석헌 학생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세운동이 옳다고 생각했고, 자발적으로 양심껏 했는데, 복교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잘못했다는 반성문을 쓰고 학교에로 다시 돌아갈 순 없었기에 그만 자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함석헌 일생의 갈림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이해타산을 저울질하여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 그의 올곧은 성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5. 민족학교 오산학교에서 참 스승을 만남

평안도 정주 땅에 오산학교는 3.1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기독교 대표가 되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모든 사재를 부어 설립한 순 조선인의 사립학교였습니다. 첨부터 민족교육학교로서 인재양성에 큰 목적을 두었습니다. 남강 이승훈, 독립운동가 여준, 고당 조만식, 춘원 이광수, 그리고 다석 유영모 등 훌륭한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함석헌의 이종형제인 함석규 목사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 함석헌은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새로운 인생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의 생명 그 자체였으며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뜨거운 불가마였습니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2년 동안 다니면서 생각하는 인생의 길을 배웠고, 애국애족을 배웠고, 기독교신앙의 중요성에 대하여 한결 깊은 깨달음을 하게 되어 딴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지만, 나이는 요즘 대학 1-2학년 무렵 20-22살 무렵이었는데 그때 이미 일본어로 번역된 사상가들 톨스토이, 로망 롤라, 베르그송, 입센, 블레이크, 타고르, 괴테, 실러, 카알라일, 간디를 읽었다고 회상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특히 문명사가 H.G.월스의 세계문화사대계를 사서 읽고 세계문명과 역사의 의미에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요즘 한국 고등학교 2-3학년 시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은 대학입시준비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붓지만, 함석헌은 넓은 독서를 통해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 폐쇄적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선 세계국가주의에 대한 관심, 충분히 계몽된 과학정신의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 주체적인 기독교신앙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조숙한 청년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6. 일본유학과 무교회

오산학교에서 남강 선생과 다석 선생의 큰 영향을 받고 함석헌은 1923년 봄, 오산학교를 23살 늦깎이 학생으로 졸업하고, 1923-27년까지 일본에서 유학시절을 보냅니다. 가정형편이 일본유학을 할 만큼은 여유가 없었는데 모교 오산학교에서 장학금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유학시절 함석헌은 3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소위 관동대지진이라고 불리는 지진과 대화재사건으로 동경시의 2/3가 타버리는 생지옥을 겪으면서, 인간성의 밑바닥에 있는 동물적 야수성이 얼마나 무섭게 폭발하는지를 경험했고 일본정부당국이 이성을 잃은 군중들의 분노의 불길을 잡고 사회주의혁명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조선인이 불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탄다는 거짓루머를 퍼뜨려 5,000명 이상의 조선인을 마녀사냥하듯 닥치는 대로 죽이는 지옥경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본성과 국가주의가 지닌 마성적 성격을 그때 절감했던 것입니다. 둘째, 동경사범학교에 들어가서 역사와 윤리를 전공하는 교육과정 동안 자연히 당대를 풍미하는 여러 가지 세계 역사학계의 사관들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게 됩니다. 특히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극복하고 기독교신앙과 현대역사학을 융합한 사관을 갖추는 데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셋째, 장로교 전통에서 자라던 함석헌이 오산학교에서 유영모를 만남으로 생각하는 신앙인으로 변모해 갔지만, 결정적으로 우찌무라 간죠(내천감삼)의 성서연구회에 김교신 등 동지와 함께 참여함으로서 무교회 신앙에 들어가게 되었고 성서조선 동우회회원이 되었다는 사건입니다. 무교회주의란 우찌무라 간죠 선생과 그 제자들의 공식집회 명칭은 아니고, 기존교회들이 붙인 별칭인데, 무교회 정신은 마틴 루터의 십자가 대속신앙에 기초한 이신칭의신앙원리를 일본인의 기질 곧 철저성을 본질로 하는 무사도 정신에 접맥시켜, 일체의 종교형식주의와 성직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성서말씀에 깊이 파고들어 삶으로 신앙을 표출한다는 신앙주의입니다.

 

7. 오산학교 교사직과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강의

1928년 함석헌은 동경사법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하여 10년간 일생처음이요 마지막인 직업교사로서 일하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일은 식민지 치하에서 비전을 잃고 패배주의에 빠져드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정직하게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되,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김교신이 주간으로 일하는 성서조선회원들의 제2회 동계성서강습회(1933.12.30.-1934.1.5.)때 연3일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강연하고, 이 내용을 김교신의 강력한 권고로 성서조선잡지에 22회 연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강연과 원고가 기초가 되어 뒤에 단행본으로 1950년 서울에서 출판되고, 1964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책명이 바꾸어져서 지금도 한해에 만 여권이 판매되는 명저가 된 것입니다. 오산학교 역사교사 시절은 일본 식민지교육이 더욱 악랄해져서 한국어 사용을 금하게 되자 자진 교사직을 사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석헌은, 성서조선에 기고한 필화사건으로 일본당국의 요주의인물이 되어 옥중경험을 하게 됩니다.

 

8. 해방정국에서 옥중경험과 사상적 전회

1940-1955년까지 약 15년 동안, 함석헌으로서는 또 한 번의 고난을 통한 사상적 탈바꿈을 하게 되는데, 1947년 부모님과 가족을 이북에 놔두고 남하를 결행하기 전까지, 해방정국에서 함석헌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과 공산당 정치권력에 의해 신의주 학생사건 주범으로 지목되어 소련군에 의해 투옥되었고, 오산학교 학생들의 반정부 유인물 사건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북조선 인민공화국 정치세력에 의해 보안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합니다. 냉전체제의 이념분쟁의 희생이 되어 고초를 겪게 되면서 그의 사상은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고난을 통하여 더욱 정화되고 승화되고 영글어져 가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6.25라는 동족상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함석헌의 종교 신앙은 더욱 깊어져갔고 높아져갔습니다. 1954새 시대의 하나님(1951), 흰손(1952), 대선언(1953)들을 발표하면서 함석헌은 무교회주의 신앙 울타리까지 넘어서면서, 기독교신앙을 기초로 삼지만 불경이나 노장사상까지를 섭렵하면서 독립된 사상가로서 우뚝 서게 됩니다.

 

9. 행동하는 양심과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저항적 프로테스탄트

1955년부터 1970년까지 15년 동안 한국사회는 자유당 말기의 부패정권과 박정의 일당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의해 한국민은 광야의 시험 3가지를 민족적 집단체로서 받던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펜과 검, 정신과 물질, 인간 양심과 힘의 숭배철학, 배고픈 언론자유와 배부른 영혼 없는 언론, 갈릴리의 복음과 궁중사제가 된 어용종교,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무렵 함석헌은 글자 그대로 한국광야의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이 무렵 함석헌은 매우 의미 깊은 논설문을 당시 『사상계를 통하여, 혹은 다른 잡지를 통하여 발표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나?(1956),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 5.16을 어떻게 볼가?(1961),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1963)였습니다.

 

10. 『씨알의 소리와 퀘이커 신앙에 뿌리 둔 비폭력 평화투쟁

1960년 이후, 함석헌에게는 신앙적으로 두 가지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회신부 떼이야를 샤르뎅의 우주적 그리스도 이해에 접하고, 또 다른 하나는 영국의 조지폭스에 의해서 시작된 개신교 신비적 소종파 운동단체 퀘이커신앙에 마음의 관심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미국 국무성과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미국과 영국을 방문하고 아놀드 토인비 등 저명인사와 만남을 갖습니다.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하고, 일본 동경에서 열린 선과 그리스도교와의 간담회에 참석합니다. 국내 정치상황은 호전되는 기색이 없이 삼선개헌을 강행하고, 모든 언론을 재갈 먹이고 모든 잡지를 통제하였습니다. 그러자, 1970년 함석헌은 70세 되던 해, 개인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나라의 참주인 씨알의 목소리를 대변하였습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의장 등을 맡고 민주화, 인권운동에 변함없이 정진했고, 수많은 투옥당한 학부모들의 목요기도회에 빠짐없이 꼭 참석하곤 했습니다. 특히 1976명동 3.1구국선언에 참여한 죄로 불구속 입건되어 1심 군법회의에서 징역8, 자격정지 8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자신의 작은 집 원효로에 있던 집을 남강문화재단에 기증하고, 당시 전제현 지금여기에 자리 잡은 오산학교 교장에게 자신이 죽은 뒤 시신을 학생들의 실험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19892488세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의인은 갔지만, 그의 사상과 얼은 살아남아 ()함석헌 기념사업회가 그 뜻을 선양하고 있으며, 한길사에서는 그의 전집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이상이 간략하게 말한 그의 일대기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그가 한국 기독교사에서 보기 드물게, 종교개혁정신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고 그렇게 살고 간 신앙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주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는 한국 개신교 역사 133년 기간중 가장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앙인이라고 볼 수 있는가?

 

2: 한국의 종교개혁자로서 함석헌의 신앙관

 

11. 우상타파의 정신으로서 개신교의 근본원리

함석헌은 씨알, 바보새, 신천(信天) 등 세 가지 아호로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 됩니다. 설교자는 세 번째 신천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함석헌을 이해하려면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지극히 경배하려는 철저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을 소홀히 하면 그의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역사철학자, 언론인, 고전연구가, 시민운동가, 시인 등 다양한 면모를 가집니다만, 그의 모든 활동은 신앙인이란 데 있습니다. 신앙인 중에서도 그는, 정통적 기독교 울타리를 벗어난 신앙인으로서 역설적으로 철저한 기독교적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 공개방송의 자리에서 그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전통교회와 한국 개신교 신학계는 그를 이단자 혹은 비정통 신앙자 혹은 종교혼합자라고 말할지라도 내가 보기엔 진짜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 충만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정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폴 틸리히는 말하기를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유한한 것을 절대화시키려는 온갖 인간적 시도에 저항하여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려는 신앙의 열정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진정한 개신교도는 비진리와 불의에 저항하는 신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실재들, 예를 들면 성경 같은 종교경전, 정통신학 교학체계, 거룩한 성직질서, 예술적인 교회당 건물, 그리고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 민족, 국가 등등 그것을 절대화하면 우상숭배가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함석헌의 종교이해의 기본원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종교는 사람살림의 밑둥이요 끝이므로 이것이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긴한 문제이며... 역사에 무슨 변동이 있어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을 터이요, 도리어 역사적 변동의 원인이 종교에 있다는 신념입니다. 둘째, “종교는 변치 않으면서 또 변해야 하는 것, 늘 그대로 있으면서도 늘 새로워야 하는 것이기에, 종교의 운명은 찰나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종교란 절대와 상대의 관계문제이기 때문에 상대자 인간은 자기가 다루는 절대에 관계된 상대적 경험이나 진리를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려는 가장 우려되는 우상화의 유혹에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마침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고 종교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함석헌의 종교에 관한 설명 중 가장 아름다운 은유는 이렇습니다. “비유컨대 종교는 구슬이 아니고 씨다. 씨는 흙에 묻혀 새싹으로 나와서 자라서 열매 맺고 퍼져나가는 살아있는 거목 같은 것이다. 온갖 보화를 간직하는 보물창고 같은 것이 아니다.” 함석헌은 초기 개화기 때 한민족에게 전해져서 생명력을 가지고 신선한 생기를 불어넣던 기독교가 보수주의 근본주의 교리주의에 속박되고 그 역사적 한 줄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교파적 기독교를 절대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일본유학시절 큰 영향을 받았던 무교회주의 신앙마저도, 신앙 동지들이 무교회주의신앙을 절대 변함없는 것인 양 절대화할 때 그것마저 배신자라는 소릴 들으면서까지 박차고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를 예로 들면서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가 본래적인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신앙공동체에서 변질하여 물상화 된 종교단체로 변질한 증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교리를 완성하고 교리적 명분으로 진리를 독점했다고 착각한다. 둘째, 종교가 점점 제도화되고 교권주의가 발달하여 인격적 피돌기가 그친다. 셋째, 새로운 시대사조에 대하여 방어적이고 수세적이 되며 독단적 공격성을 나타낸다. 넷째, 종교의 구경적 목적을 피안적인 데 둔다. 타계적이거나 몰역사적 종교로 변질한다. 다섯째, 자체 안에 내분이 자주 일어나 분파작용이 심해진다.

 

12. 환히 뚫려 비취는 이성적이고 인격적 종교

언젠가 함석헌은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지구에 큰 재난이 있어서 인류문명의 문헌자료가 다 망실된다고 하더라도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샘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대화 내용만 남는다면 기독교의 핵심본질은 건져진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답게 예배할 때가 오리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지니라”(4:20-24)는 말씀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번역된 원문은 엔 프뉴마 카이 알레데이아/ in Spiriit and Truth’입니다. 직역하면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이 한국 기독교는 무얼 하고 있나?라는 비판적 논설문을 1956사상계에 발표했을 때, 비판적 논지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해방된 지 10년이 지나고 동족상쟁 큰 비극을 치룬지 6년이 지났는데도, 한국 기독교가 하는 일이란 것을 가만히 보면 교권분열과 교파싸움에 여념이 없고, 크고 작은 교회당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민생을 도탄에서 건져내자는 숭고한 운동은 찾아보기 어렵고, 성신운동 한다는 부흥회가 극성을 부리면서 기독교가 기적, 방언, 신유, 축복성회 한다고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고혈압 앓는 환자처럼 되어서 교회들이 맑고 청신한 기풍이나 높은 윤리적 영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기독교가 말하는 참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인데, 이산이냐 저산이냐, 예루살렘이냐 로마 바티칸이냐 등 장소나 전통, 종파나 교파, 혈연과 지연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의 한계를 돌파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신충만 은혜받기 전에 인간은 인격적 존재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성적이어야 하고 철저히 윤리적 단계를 통과한 연후에 은총도 있고 기적도 있다고 함석헌은 강조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들려 망아상태의 무당굿판처럼 무당종교가 되고 만다는 충고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함석헌의 종교개혁자로서 면모는 타계주의적 기독교, 몰역사적 기독교, 반지성적 기독교, 현실도피적 기독교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도록 힘쓰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영원, 개인과 공동체, 이 세상과 저 세상, 물질과 정신, 자율과 타율, 그 양면적 분열이 극복되면서 거룩함과 자유로움과 평등함과 생명충만이 햇빛처럼 온누리에 가득 찬 생명현실을 말합니다. 함석헌은 교회가 가르쳐온 대속적 신앙마저도 철저하게 재검토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대속신앙, 파렴치한 대속신앙, 앉은뱅이 싸구려 기독자를 양산할 뿐이라고 봅니다. 대속이란 영어로 ‘atonement’인데 그 영어글자를 파자해서 보면 ‘at * one * ment’라는 것입니다. 혈육적 인간인 내가, 역사적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자기를 철저히 부정하여 일단 죽고 난 후, 그리스도인 예수생명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하는 새로운 존재에로의 재탄생 체험없는 대속신앙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이고 주체적 존재인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의 기독교신앙은 물론 윤리적 단계를 넘어선 영적 단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영적 단계란 철저히 인격적이고 이성적 단계를 거친 것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예수가 전한 복음과 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으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무한 사랑의 맘, 예수 인격, 그리고 각자 개인의 인격중심이 오직 사랑과 신뢰로서 하나가 되는 체험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 표현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 요한복음 표현으로 말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로 압축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체험하는 사람은 예수의 이웃사랑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될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될 것이고, 인생행로 중 문득 문득 그리스도의 동행하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3. 민중의 마음이 땅의 핵심, 땅에 임해야 하나님의 나라

주기도문의 핵심엔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입니다.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기도할 때 땅이란 밝고 다니는 흙 대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세계요, 세속적 세계요, 역사적 현실세계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너무 크게말하면 예수가 말하는 주기도문의 참뜻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 함석헌은 잘라 말합니다. “땅 중의 땅, 흙 중의 흙이란 고난 받고 서러움 받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초들, 서민들, 민중들, 씨알의 생명이요 그들의 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역사적 기독교는, 특히 개신교 역사는 그들을 외면했거나 기껏해야 시혜를 베풀어 불쌍히 여길 구호대상으로 생각했다고 질타했습니다. 역사현실 속에서 전쟁나면 맨 앞에서 총알받이 했고, 먹거리를 생산하고 온갖 궂은일을 맡아 사회공동체를 지탱해 나가는 바닥사람들을 권력자들과 기성종교들은 외면했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가 서민들의 삶의 고통을 외면한 체, ‘선교부흥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분하에 종교교세를 강화하고 교회당을 호화롭게 건축하는데 열을 올리는 것은 예수 복음과 아무 관련 없고 도리어 종교의 말기현상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에고치가 뽕잎은 잔뜩 먹고 고치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갈림길에는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영원히 누에고치 집에서 잠들어 번데기로 팔려나가든지,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계속 받아가면서 때가 되어 고치집을 뜷고 나비로 환골탈태하여 날아오르든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이 한국기독교의 종교개혁자요, 구약의 예언자 역할을 한 사람인 점은 그의 역사관과 고난이해, 그리고 종교의 역할 이해에서 드러납니다. 고난 뒤에 영원한 복락이 온다는 달콤한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통 혈육적인 짐승의 본성을 갈고닦아서 살과 같이 부드럽고 다른 생명의 아픔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삶과 역사 속에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당장은 고통이고 아프지만, 겪고나면 은혜요 영혼을 정화하고 영글게 합니다. 고난은 생명의 원리로서 고난을 통해 자유혼은 더 높이 더 자유롭게 오른다고 봅니다  

    삼팔선과 휴전선을 새 시대 새 아기를 낳기 위해 산통을 겪는 여인의 자궁에 비유한 함석헌은 오늘 남북한의 이 자살경련적 미친 행동 속에서 교회가 산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전 지구촌의 씨알들은 아직도 절반은 잠들고 있거나 절반은 고난 속에 있지만, 씨알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 지구촌의 씨알들이 깨어 일어나, 인류가 한 몸 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날, 온갖 피부색 인종 문화의 특색을 넘어서서, 국가주의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져버리는 날,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자유 평등 정의 생명 평화가 지구촌 전체에 실현되는 그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기성종교들이 과거 영광의 단꿈에서 깨어나서 진실로 영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날이 오면, 그 날이 훨씬 더 빨리 올 것을 믿고 기도하고 행동하는 개혁자였습니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에 보내신 하나님의 예언자요 교회개혁자입니다. 함석헌이라는 인물을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새길로고.jpg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1035 2017 [2017.11.5] 신·인(神·人)장벽, 생·사(生·死)장벽 허물기: 복음의 진수 file 2017.11.10 한완상
1034 2017 [2017.10.29]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 file 2017.11.08 길희성
1033 2017 [2017.10.22]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 책임적 실존, 세계 개방성, 그리고 종교 해방에 이르기까지 file 2017.10.25 이정배
1032 2017 [2017.10.15] 감사, 나눔, 쉼 file 2017.10.17 차옥숭
1031 2017 [2017.10.08] 받침대를 흔드는 위험한(?) 개혁: 한국 여성 종교개혁자들 file 2017.10.12 최만자
1030 2017 [2017.10.01] 서남동, 당신의 뒷모습만 봅니다 file 2017.10.10 권진관
1029 2017 [2017.09.24] 안병무와 21세기 file 2017.09.28 김진호
» 2017 [2017.09.17] 영과 진리 안에서: 씨알의 꿈과 믿음, 그리고 함석헌 file 2017.09.19 김경재
1027 2017 [2017.09.10]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file 2017.09.13 최성무
1026 2017 [2017.09.03] 꿈과 짐: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주체적 신앙과 예언자적 역사의식 file 2017.09.06 양현혜
1025 2017 [2017.08.27]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따라 file 2017.08.30 정경일
1024 2017 [2017.08.06] 단테의 '신곡' 여행 file 2017.08.10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1023 2017 [2017.07.30]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file 2017.08.02 최현섭
1022 2017 [2017.07.16] 내 안의 선악과(善惡果) file 2017.07.18 김용덕
1021 2017 [2017.07.09]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file 2017.07.13 정경일
1020 2017 [2017.07.02] 손의 회복 file 2017.07.13 구미정
1019 2017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file 2017.06.22 박현욱, 정영훈
1018 2017 [2017.06.04] '포도나무 비유'에 담긴 뜻은 file 2017.06.08 장회익
1017 2017 [2017.05.14] 꽃 핀 쪽으로 file 2017.05.17 정경일
1016 2017 [2017.05.07]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file 2017.05.12 박경미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