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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말씀증거 #1]



단테, 관조와 상상력의 날개로 구원에 이르다

 (마태복음 5:3)
 
                                                                                                                        2017년 8월 6일 
                                                                                                               문현미 자매
                                                                                                                       (새길너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





 

이번에 새길너머에서 장장 7번에 걸쳐 함께 읽은 신곡은 양도 방대하고, 내용도 중세 말기 이탈리아 피렌체라는 배경과 희랍 신화를 토대로 하고 있어서 소화가 쉽지 않았습니다. 신곡을 마쳤다는 기쁨이 더 클 정도로 모두들 고생이 많았지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깐, 신곡으로 말씀증거를 하라는 소리에 다시 지옥으로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잔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이왕 이렇게 된 바, 신곡의 나무 사이를 헤매느라 숲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을, 이참에 정리해 보자고 스스로를 달래가며... 지옥과 연옥을 지나왔으니, 이제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옥 같은 고통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저는 직업상 그런 표현을 쓰시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지난주에 만났던 25세의 여성은 중학교 1학년 이후로 10년간이 지옥 같았다고 표현하시더군요. 여러분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 있으셨나요? 신곡을 썼고 그 신곡에 등장하는 단테, 그의 삶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그의 생애야말로 지옥에 가까웠더군요.

    단테의 생애는 어린 시절부터 평탄치 않았습니다. 몰락한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나 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10대 후반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그는 집안의 가장이 됩니다. 10살 때 한눈에 반해 버린 베아트리체를 평생 짝사랑하고 신곡에도 등장시키는데, 이는 일찍 잃어버린 모성과 관련 있어 보입니다. 단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당시 풍습대로 집안끼리 정한 상대와 결혼을 하는데, 25세 때 베아트리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단테는 충격과 슬픔에서 그녀를 위해 쓴 시집을 냅니다. 부단한 공부와 훈련으로 30세에 정계에 입문하여 35세에는 피렌체 행정부의 최고 위원 중 1인으로 재직하는 명성을 얻는 가 했지만, 2년 뒤인 37세에 정치적 당파 싸움에서 권력을 빼앗기고 비리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아 망명생활을 시작합니다. 56세에 죽기까지 길지 않은 삶의 3분의 119년 동안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객지를 떠도는 신세로 살다가 라벤나에서 병으로 객사합니다. 그가 한 때 머물렀던 베로나에서는 저 사람 행색을 보니 정말로 지옥에 다녀온 모양이야라고 여자들이 수군거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하니, 그의 삶은 실로 힘들었던 듯합니다. 나중에 고향 피렌체와 라벤나 사이에 유골 쟁탈전이 일어나서 유골마저도 모처에 은닉되어 떠돌다가 사후 5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라벤나 작은 교회에 안치되어 긴 유랑을 끝냅니다. 이처럼 단테의 일생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죽음도 가련했습니다.

    신곡은 그의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나온 작품입니다. 그가 객지를 떠돌 때 구상되어 42세에 집필이 시작되고, 49세 때 지옥편이 발행되며, 죽기 2년 전 쯤에 천국편이 완성됩니다. 단테 평전을 쓴 RWB루이스가 신곡은 서사시로 표현된 단테의 자서전이라고 했듯이, 신곡은 지옥 같았던 삶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한 인간의 열망이 맺은 열매입니다. 새길너머에서 본 그 열매의 맛은 썼습니다. 하지만 말씀증거를 준비하면서 씹고 또 씹으니 다른 맛이 나더군요. 함께 그 맛을 조금 나누겠습니다.

 

그가 그린 지옥에서는 한숨소리, 괴로운 울음소리,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통곡이 가득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과 희망도 없이, 한탄하고 성 내며 괴로움에 찌든 영혼들이 자기 행위에 대한 벌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가 지옥의 고통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자신이 경험한 지옥 같은 고통을 오롯이 관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곡에서 단테는 상상력의 힘으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만들어 600명에 이르는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을 등장시킵니다. 피렌체 사회에서 자신이 겪은 배신과 억울함, 불행과 고통 속에서 단테는 두 명의 교황을 비롯한 자신의 적들을 지옥에 던지고,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은 림보에,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는 천국에 둡니다. 단죄하고 싶은 성직자나 정치인, 사기꾼 등, 선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벌주고, 정의를 구현합니다. 단테는 상상력의 힘으로 지옥을 만들어 부패와 악을 단죄한 것입니다. 칼이 아니라 상상력이 창조한 말로써 세상을 심판한 것이지요.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말과 생각은 미래를 만드는 힘을 지닙니다. 우리가 촛불 광장에서 외쳤던 구호가 현실을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테가 상상으로 창조한 지옥의 풍경을 보면서 저는 인과응보가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한 행동은 어떤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옥은 자기 행동의 대가를 받는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단테는 이런 지옥 벌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너무 고통스러워 실신하기도 합니다. 지옥에서 벌을 받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상상하고 관조하면서 단테의 분노는 점차 연민으로 변하는 듯합니다.

     연옥은 사람들이 죄를 보상하는 행위로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곳으로 그렸습니다. 연옥에는 지옥과 달리 희망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힘들어 보입니다. 단테가 그린 연옥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정화하는 곳입니다. 연옥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죄를 씻고자 노력합니다. 지옥, 연옥, 천국 편마다 마지막 절에 별들이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연옥편에서는 나는 다시금 살아나서 별들에게라도 솟아 올라갈 만큼 순수해졌다고 나옵니다. 이처럼 연옥을 통과한 단테는 순수해집니다. 지옥과 연옥에서 각각 벌을 받고 죄를 씻는 사람들을 상상하고 관조하고 연민하면서 그는 분노와 미움과 원한의 마음을 비우고, 외로움과 불안을 넘어서 천국으로 상승할 만큼 가벼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에 오른 단테는 관조하고 비워서 가난해진 마음으로 오로지 빛이신 하나님을 관상합니다. 단테의 의지와 열망은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그분의 사랑에 일치가 됩니다. 자기로부터 초월하여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단테는 인생의 덧없음을 관조하고 초월하여 천국에 이른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법을 추구하고 격언에 충실하며, 성직에 연연하고, 더러는 폭력이나 궤변으로 다스리려 한다. 더러는 도둑질을 생각하고 나라 일을 걱정하고 육체적 쾌락에 빠져들고, 또 더러는 피로에 지치는가 하면 편안함에 몸을 내맡긴다. 나는 이런 모든 헛된 것들에서 벗어나 베아트리체와 함께 하늘에서 이렇게 황송한 대접을 받고 있다.”

     단테가 그린 천국에는 빛과 노래와 춤과 환희가 가득합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죄를 씻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사랑인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해나가고자 하며, 세상과 지옥과 연옥의 영혼을 위해 사랑을 쏟게 됩니다.

    이처럼 신곡은 단테가 자신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이를 관조하고 상상력으로 승화해 나간 과정을 보여줍니다. “끝없이 비통한 세상에서, 내가 올랐던 산 위에서, 그리고 빛에서 빛으로 오르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라고 말하는 단테의 경지를 보며 경외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고통 속으로 하강해서 고통을 관조하고 인간의 한계를 느껴 본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가벼워져 초탈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상담실에서 만나는 분들은 고통 속에 있습니다만, 저는 그분들에게서 단테를 봅니다. 지옥 같은 고통과, 연옥 같은 정죄의 마음을 관통하면서 순수해져 운명을 용서하고 죄의 기억을 잊으며, 신의 사랑을 점점 이해하는 과정에서 초인이 되어 가는 여러 단테들 말입니다.

     우리도 단테처럼 고통을 관조하면서 자기 보존의 두려움과 그것이 일으키는 갈망을 초월하여 온 우주를 돌보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관상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투명한 그분의 빛으로 나아가 그 사랑이 우리를 움직이는 천국의 삶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천국 편을 읽으면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토마스 머튼의 말을 전하면서 말씀 증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본체까지 공유하는 진리의 가장 깊은 지점이 있다. 우리 존재 중심에는 죄와 환영이 닿지 않는 무의 지점, 순수한 진리의 지점,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지점, 혹은 섬광이 있다. 그곳은 천국의 보이지 않는 빛으로 반짝이는 순수한 다이아몬드 같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삶의 모든 어두움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태양의 표면과 그 화염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빛의 점들을 보게 될 것이다...... 천국의 문은 어디에나 있다.”새길로고.jpg




[말씀증거 #2]



단테가 꿈꾼 세상

 (시편 34:15~16)
 
                                                                                                                      2017년 8월 6일 
                                                                                                             노선희 자매
                                                                                                                       (새길너머)                




[님의 눈은 의로운 사람을 살피시며, 주님의 귀는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다. 주님의 얼굴은 악한 일을 하는 자를 노려보시며, 그들에 대한 기억을 이 땅에서 지워 버리신다.]

                                                                                                    - 시편 34장 15~16절





지난겨울 새길너머에서 부산으로 워크숍을 갔었습니다. 그 때 샛길과 옛길이라는 새로운 모임을 해보자는 발상이 나왔습니다. 샛길은 가끔 일상을 벗어나 샛길로 빠지는 여행 모임이고, 옛길은 혼자서는 읽기 어려운 고전을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샛길은 아직 첫 발을 떼지 않았습니다. 옛길은 단테의 <신곡>을 읽는 것으로 그 힘찬 서막을 올렸습니다. 새길너머는 문을 활짝 열고 독서와 나눔, 그리고 여행을 함께 할 동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달 둘째 주일 오후, 5층 목회자실에서 정기 모임이 있습니다.


주문했던 두툼한 책이 도착한 날, 혼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할 <신곡>, 함께 하는 벗들이 있어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초상화로만 보아왔던 단호한 메부리코의 남자 단테는 어떤 글을 쓸까, 예술의 도시 피렌체, 중세의 끝자락인 1300, 벡키오 다리를 건너 두오모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곤 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단테의 첫사랑이자 영원한 구원자인 베아트리체는 어떤 여인일까, 상상해 보며 책장을 열었습니다.

     첫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 , 거칠고 사납던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야망을 성취하고 승승장구 하던 인생의 절정에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쳐 피렌체로부터 추방되고 유랑자의 신세로 남은 생을 살아야 했던 단테의 처지가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는지 확 다가왔습니다. 제가 만났던 거칠고 사납던 숲도 떠올랐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에서부터 시작하는 단테의 시 앞에서 저는 쉽게 무장해제 되었고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승길과도 같은 숲을 겨우 빠져나와 산기슭을 오르던 단테 앞에 날렵하고 민첩한 표범과 허기진 사자, 굶주린 늑대가 나타나 길을 막습니다. 이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납니다. 1300년의 시간을 달려 나타난 형상 앞에서 단테가 애원합니다. “당신은 귀신이요, 사람이요? 누구든 간에 날 좀 살려 주시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구원해 지옥과 연옥을 두루 보여주겠다고, 그리고 천국에 이르러서는 베아트리체에게 인도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해서 베르길리우스와 동행하는 단테의 여행, 단테와 떠나는 <신곡>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계곡 속 지옥을 지나고, 산 위의 연옥을 거쳐, 하늘에 있는 천국까지 이르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첫 여행지 지옥은 영원한 고통의 세계였습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 지어다지옥문 위에 쓰여 있는 문구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끝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죄인들이 도착해 죄를 고백하면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가 죄과에 따라, 갈 지역을 배정합니다. 죄가 무거울수록 더 깊은 권역에서 더 참혹한 벌을 받습니다. 코나 귀나 팔이 잘린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거나 끊어진 자신의 머리채를 초롱인양 들고 있는 영혼들이 보입니다. 이들은 생전에 정치가였습니다, 펄펄 끓는 역청 속에서 기어 나오려고 애쓰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직권을 남용해 사적 이익을 취한 탐관오리들입니다, 엎치락뒤치락 하며 아귀다툼 하듯이 싸우고 있는 영혼들, 이들은 평화를 위해 부름 받았으나 불화와 전쟁을 일삼았던 교황과 추기경들입니다, 피가 끓고 있는 강물에 눈썹까지 잠긴 이들은 폭군들입니다. 비처럼 떨어지는 불덩이를 맞아 털이 빠지고 그을림으로 알아 볼 수 없는 이들, 이들은 피렌체의 저명인사들입니다. 무거운 죄를 지어 큰 벌을 받고 있는 영혼들은 모두 지도자급 엘리트들입니다. 지성의 힘이 사악한 권력과 만났을 때 지옥 같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 여행지 연옥은 속죄와 정죄, 즉 죄 씻음의 세계였습니다. 죄를 깨달은 영혼들이 천국행의 희망을 가지고 지은 죄를 씻고 있습니다. 평생 인색했던 교황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이고 걸어가며 속죄합니다. 자신의 업적에 오만했던 귀족은 잔등에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으로 속죄합니다. 질투의 죄를 지은 영혼은 철사로 꿰멘 두 눈이 너무 아파 연신 눈물을 흘리며 산을 오릅니다. 연옥에서 씻을 수 있는 또 다른 죄는 분노, 태만, 탐욕, 애욕의 죄입니다.

     마지막 여행지 천국은 인간 지성의 척도를 벗어난 영원한 빛의 세계였습니다. 천국의 지복자들은 직관으로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시켰기 때문입니다. 단테도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이것으로 지옥에서 3, 연옥에서 3, 천국에서 보낸 하루의 여행은 마무리 됩니다.

 

<신곡> 여행을 시작하면서 단테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지옥과 연옥과 천국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죄지은 자가 가는 지옥, 뉘우친 자가 가는 연옥, 선한 삶을 산 자가 가는 천국, 그 너머의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신곡> 여행을 마쳤을 때, 사랑과 정의에 목말랐던 단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옥, 연옥, 천국은 단테가 꿈 꾼 세상,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만나는 영혼 하나하나에게 그 자리에 오게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유 없이 벌이나 축복을 받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정의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천국뿐만 아니라 지옥과 연옥 모두 정의가 살아있는 공간입니다. 지옥과 연옥에서는 죄 값이 제대로 치러지고 있으니까요. 현실에서는 죄지은 자 따로, 고통 받는 자 따로 입니다. 부패한 권력 집단의 횡포로 고통 받는 이들은 사회의 약자들입니다. 탐욕스런 종교 지도자의 기만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갈급한 영혼들입니다. 그래서 현실이 더 지옥스럽습니다. 단테가 꿈 꾼 세상에는 억울한 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는 많은 이들이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워합니다. 현실이 혼란하고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인간의 썩어빠진 본성 때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단테는 현실의 고통은 나쁜 통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정의로운 통치를 얼마나 갈구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테의 꿈은 그의 억울한 처지와 고통스러운 삶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고통은 정적들의 기만과 배신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국과 고향, 가족과 친구, 부와 명예를 모두 잃고 난 후에도, 그가 잃지 않은 단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시를 붓으로 삼아 거대한 세밀화를 그렸습니다. 계곡과 산과 하늘에서, 온 우주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의 그림이 완성 되었습니다.

    단테가 붙인 <신곡>의 원제목은 commedia, 즉 희극입니다. 지옥과 연옥이 너무 처참하고 끔찍하니 비극이면 비극이지 왜 희극일까요? 하지만 <신곡>은 비극이 될 수 없습니다. <신곡>은 단테가 꿈꾸었던 세상의 이야기, 하나님의 정의가 통치하는 세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새길로고.jpg




[말씀증거 #3]



<신곡>, 희망을 말하다

 (요한복음 1:8~9)

                                                                                                        2017년 8월 6일 
                                                                                                박흥식 형제
                                                                                                             (새길너머)               






[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

                                                                                                  - 요한복음 1장 8~9절




<신곡>에서 지옥은 희망을 버리고 들어서는 곳입니다. 지옥문의 문, gate에 부정관사 a가 붙어있습니다. 지옥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하는 자리가 곧 지옥문이라는 뜻입니다. 연옥은 별이 보이는 곳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이성 때문이 아니라 반성 때문일 것입니다. 죽기 전에라도 뉘우치면 우리는 연옥에서 벌을 받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별 자체입니다. 인간의 이성적 진리와 신의 계시적 진리가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지옥과 연옥은 인간의 이성을 상징하는 베르길리우스가, 천국은 신의 계시를 상징하는 베아트리체가 안내합니다. 사적인 인물인 베아트리체에게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이 있습니다. <신곡>에 지옥문과 연옥문은 따로 있습니다만 천국문은 없습니다.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천국문이었던 것이지요. 절망하는 자리가 지옥문인 것처럼, 나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내 곁의 사람이 나에게 천국문이라는 뜻 아닐까요? 천국이 음악적이라고 합니다만 중요한 감각은 시각입니다. 천국은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빛을 감당할 수 없어 단테는 시력을 잃기도 합니다. 천국에서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시력을 잃었다가 다시 찾기를 반복하면서 시력이 강해집니다. 하느님을 보려면, 하느님의 빛을 감당하려면 먼저 눈이 깊어져야 합니다. 보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나중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題辭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안다.’라는 문장으로 삼았습니다. 보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알게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을 예술, 곧 아름다움의 추구라고 한다면 그건 보게 하는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신곡> 덕분에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테가 왜 <신곡>의 제목을 comedy라고 했는지가 계속 궁금했습니다. <신곡>은 영어로 <The divine comedy>입니다. comedy 앞에 divine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은 보카치오였습니다. 단테가 붙인 애초의 제목은 영어로 <The comedy of Dante Alighieri>입니다. 저는 <신곡>을 헬라스의 신화 전통와 히브리의 성서전통이 만나, 서양고전의 한복판에 우뚝 솟은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신곡>이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왜 단테는 자신의 작품을 단순히 comedy라고 했을까요? 결말이 행복하니까, 라티움어가 아니라 속어, 곧 토스카나 방언으로 썼으니까 등의 설명이 가능하지만 제멋대로 덧붙여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비극론은 있어도 희극론은 없습니다. 희극에 대해서도 말할 것처럼 해놓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학>에서 비극의 정의는 한마디로 고귀한 사람들을 고상한 문체로 다룬 것입니다. 희극의 정의는 비극이 아닌 것으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저속한 문체로 다룬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사실 그가 희극론도 썼을 가능성은 꽤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그 가능성을 소설로 만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론, 희극론 두 권으로 되어 있고, 호르헤 수사가 희극론에 독약을 묻혀 그것을 읽은 수사들을 죽게 만들고 결국은 책과 함께 자신도 불에 타버리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호르헤 수사에게는 웃음이 악마였습니다. 왜 그렇게 웃음이 두려웠을까요?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저속함이 중세 수도원의 경건함에 치명적이었던 걸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극은 울음이 수단이고 카타르시스, 淨火가 목적이었습니다. 아마도 호르헤 수사가 불태운 희극론에는 희극은 웃음이 수단이고 elpis, 希望이 목적이다.’라고 쓰여 있을 것 같습니다. 호르헤 수사가 <시학> 두 번째 권을 불태운 것은 저속함 때문도 웃음 때문도 아니고 오히려 희망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기독교인들은 4가지 방식으로 죄를 짓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생각, 둘째는 말, 셋째는 행동, 넷째는 태만입니다. 사실은 네 번째도 행동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죄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죄의식 속에서 욕망을 억누르며 수행을 하는 수사에게 구원의 희망은 저속한 웃음을 통해 쉽게 얻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희극론이 금서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고대 아테나이의 시민들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을 보며, 함께 울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공동체의식을 키웠을 겁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뤼시스트라테>를 볼 때는 어떠했을까요? 이 희극의 내용은 아테나이 여성들이 파르테논신전에 모여 잠자리 파업을 결의하고 농성을 벌이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아테나이가 툭하면 스파르테와 전쟁을 벌이니까 전쟁을 멈출 때까지 남성들이랑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 선언문의 표현수위는 지금도 청소년관람불가입니다. 저속하고 웃깁니다. 이 희극을 보면서 아테나이 여성들이 우리들은 남성들과 하나다.’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맨날 쌈박질이나 하고 우리 여성들은 시민으로 끼워주지도 않는 찌질한 것들.’이라고 욕하지 않았을까요? 갈등만 생기고 공동체의식은 더 약해졌을 겁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양성평등이라는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수사에게 웃음은 중세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파괴와 전복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comedy를 금서로 다룬 <장미의 이름>의 시간적 배경은 1327년입니다. 단테는 <신곡>을 더 이전인 1300년 부활절을 배경으로 1307년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단테가 자신의 저승여행의 제목을 comedy라고 한 것은 엄청난 도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신곡>을 지옥의 끔찍함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책이 아니라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테가 comedy라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300년이면 여전히 중세의 가을이고, <신곡>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갇혀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단테가 <신곡> 속에서 사건이나 등장인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옥편의 참상 속에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전직 교황 니콜라우스3세를 지옥의 불구멍 속에 거꾸로 처박아놓았습니다. 현직 교황, 다음 교황까지 차례로 그 위에 처박히는 것으로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단테가 루터보다 200년도 더 전에 <신곡>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형수와 시동생 사이인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는 애욕의 죄를 저질렀지만 단테는 그들을 사실상 가장 약한 지옥에 보내놓고 안타까워합니다. 동성애자들도 자연의 섭리를 거슬렀으니 지옥에 보냈지만 하필이면 훌륭한 사람들만 배치해 놓고 연민을 보냅니다. 트라야누스는 타자의 기도 덕분에 죽을 희망조차 없는 지옥에서 빠져나와 천국에 갑니다. 레피우스는 그리스도 이전 1200년 무렵의 이교도입니다만 믿음, 소망, 사랑을 미리 알았다고 천국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도 숨통을 터주는 예외가 있습니다.

     <천국의 세 번째 하늘인 금성천에 쿠니차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금성은 헬라스어로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입니다. 제우스만큼은 아니어도 사랑을 많이 나눈 여신입니다. 쿠니차도 사랑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네 명의 남편과 두 명의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천국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쿠니차가 천국에 있는 것은 끝없이 기도하고 끝없이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100곡으로 된 <신곡>의 정중앙인 연옥편 16, 17, 18곡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사랑을 자세히 설명하고 여러 곳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원죄에서 구원했습니다. 니체는 우리를 죄의식에서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니체처럼 죄는 그대로 놓아두고 죄의식만 구원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는 단테가 그리스도와 니체 사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테는 우리를 죄에서도 죄의식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단테는 르네상스의 문도 열어젖힌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 단테를 따라 저승여행을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의식하면서 살되, 죄의식 속에서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삶이 함께 울면서 비극을 나누되,

함께 웃으면서 갈등을 피하지 않으면서 희망을 꿈꾸는 희극이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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