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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현섭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마태복음서 16:21~23)


20177월 30일 주일예배

최현섭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이사장)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마태복음 16장 21~23

 

  


오늘 제목 심상치 않지요? 좀 세다 싶고 불안하기도 하지요? ‘사탄이라는 좀 음습하고 거북한 단어가 등장하고 그것과 사람을 연관시켜 놓았으니 걱정이 되지요?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대로 가야 하나 마나, 여러 번 망설였거든요.  

 

사탄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저는 30대 한창 나이에 이 질문과 씨름한 적이 있습니다. 참 별나지요? 그러다가 잘 못 파고들면 신앙 전체가 흔들릴 수 있겠다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어떤 회고록 하나가 저를 다시 이 질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어쭙잖은 깨달음을 내 놓는 것보다 해결되지 못한 질문을 그대로 나누어도 되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씀 증거가 아니라, 질문 나눔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질문 나눔! 괜찮겠지요? 괜찮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준비했으니, 운명이려니 하고 참으셔야 합니다. 저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만큼 좋은 수업은 없다는 교육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걸 한번 체험해보시라고 질문을 계속 내놓을 것입니다. 골치가 많이 아프시더라도, 좋은 거구나! 생각하며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준비 되셨지요?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혹 조비오 몬시뇰신부님, 아시나요?  5·18 당시 현장에서 응급 구호와 피해자 보호에 전심전력했던 분 말입니다. 지금은 소천하셨지만, 5.18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신부인 나조차도 손에 총이 있으면 쏘고 싶었다.”며 그때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떤 회고록에 그 신부님을 가면을 쓴 사탄이고, 성직자가 아니다.’라고 썼다는 보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19805, 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어떤 분이 말입니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조비오 신부가 사탄이라고? 사탄이 무엇인데? 그 보도를 보자마자 이런 질문과 함께, 해마다 5.18이 되면 생각나는 제 부끄러운 경험이 떠올라 뇌신경이 급박하게 움직였습니다.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80518일 이른 아침에 저는 서울대학교 병원 영안실에 있었습니다. 집안의 어른 한분이 창경원에 놀러오셨다가 그 전날 갑자기 명을 달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날 영안실 밖에서 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창경원 위쪽 길에서 아악!, 아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쳐다보니 군인들이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젊은이들은 군화 발에 밟히고 총 개머리판 방아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간호기숙사 앞마당에서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그렇게 발길질과 곤봉 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미쳤는가?” “사람 죽이겠네!” 라고 함께 있던 분들이 한마디씩 하면서 슬금슬금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도 두려움에 밀려 도망치듯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제가 맞이한 참으로 부끄러운 서울에서의 5.18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광주시민들은 그런 계엄군을 몸으로 막아섰고,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계엄군이 그런 시민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광주의 5.18이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공포나 분노를 느낄 틈이 없었다. 내 눈 앞에서 사람이 맞아 죽게 놓아 둘 수가 없었다.”라는 어느 광주시민의 술회는 지금도 가슴을 때립니다. ‘공포나 분노를 느낄 틈이 없었다. 내 눈 앞에서 사람이 맞아 죽게 놓아 둘 수가 없었다.’ 그 뜻을 온몸으로 느껴 알기에 저는 광주시민을 존경합니다. 그런 계엄군의 행태는 전국의 모든 대학교 앞에서 있었지만, 큰 충돌이나 사고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저는 광주 시민들의 의분과 용기와 참 슬픈 희생을 고귀하게 여깁니다. 민주화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랑하며 만끽하는 오늘의 세대가 두고두고 감사하고 대대손손 갚아가야 할 큰 빚이라 생각합니다. 민주화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랑한다면 말입니다.

 

사탄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하는 질문은 그때 생겼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군부세력의 탐욕 때문이라고 해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군대 귀신이 계엄군들에 침투해서 생긴 일일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째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잔혹한 일을 그냥 두실까? 하나님께서는 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해보라고 허락하여, 온갖 고난을 겪게 한 것일까? 등 신앙 자체를 흔들만한 생각과 질문으로 번져갔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그만 접었습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제가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궁금해질 때도 있답니다. 제가 겁이 좀 많은 편이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5.18은 사탄의 작용 때문일까요, 사람의 그 무엇인가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이 대답은 잠시 미루어 두고, 조비오 신부님은 사탄일까요, 아닐까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누가 누군가를 사탄이라 규정하면, 그가 사탄이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요? 누가 저보고 참 잘 생겼다고 해서 잘 생긴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준과 근거도 있어야 하지만, 혹 비아냥거림이나 비난인지도 살펴봐야지 않겠습니까? 사탄이 누구입니까? 거짓과 탐욕, 이간질과 적대, 폭력과 살육의 주도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사탄은 물러가라!’고 외쳐야 할 대상이고, 심지어 죽여 없애도 되는 존재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제 마음대로 규정해서도 안 되고, 발가락이 닮았다는 식의 교묘한 이유로 덧씌워서도 안 되잖겠습니까? 백을 흑으로 바꾸는 악의적 조작은 더욱 금물일 것입니다. 기준과 근거가 분명하지 않으면, 천사가 사탄이 될 수 있고, 엉뚱하고 억울한 정죄를 양산하는 또 다른 죄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따져보지도 않고 무작정 함께 돌팔매질을 하면, 덩달아 죄악을 범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조비오 신부님의 사탄 규정도 이 차원에서 바라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대로 규정과 악의적 덧씌우기, 엉뚱하고 억울한 정죄, 그리고 덩달아 죄악 범하기는,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빨갱이, 종북 좌파, 공산주의자 덧씌우기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단어들은 죽여 없애라, 척살하라는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 사탄보다 더 적대적이고 더 무자비하게 취급되는 대상입니다. 지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계엄령을 선포하여 12만 종북세력 척살하라는 발언, 너무나 쉽게 나왔지 않습니까? 물론 박수와 환호도 작지 않았다고 하잖습니까? 12만이라는 계산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 참 끔찍하지 않습니까?

    어두웠던 시절의 내란음도 사건, 간첩단 사건, 유서대필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대통령 탄핵과 선거 그리고 인사 청문회에서 쏟아진 막말과 근거 없는 폭로, 악마의 편집, 치졸한 치고 빠지기 등도 비슷할 것입니다. ‘기준과 근거는 내팽개치고, 오로지 누구 편이냐 하는 잣대만 들이대며, 옳고 그름을 따지면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는 모습도 똑같지 않습니까? 학식이 많고 종교적 지위가 높은 분들은 한술 더 뜨고 말입니다. 뒷골목 패거리나 싸이코패스 정도는 돼야 출세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가 아닙니까? 미래 세대가 배우고 따라야 할 모델로 착각할까 걱정이 태산 같고, 제발 격 좀 높이자고 호소하고 싶은 맘 간절하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한번 외쳐보겠습니다. 제발 격 좀 높이고 살자! 함께 해보시겠습니까? 제발 격 좀 높이고 살자! 속이 좀 시원해지시나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포함하여, 5.18은 사탄의 작용 때문일까요, 사람의 그 무엇 때문일까요? 그 대답을 성경 말씀에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성경말씀에서 사탄은 아주 위협적인 존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8절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닌다고 쓰여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4절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홀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13절에서 15절에는, 사탄이 빛의 천사나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사탄은 자신의 지배력을 높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씀 아닙니까? 귀에 솔깃한 말, 기준과 근거도 없는 규정, 조작된 덧씌우기, 심지어 천사나 의인으로 위장하는 것이 사탄의 속성이고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탄, 참 대단히 집요하고 두려운 존재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사탄을 제어하고 물리칠 방도도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들을 다 믿지 말라(1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마태 26:11), 굳건한 믿음으로 사탄에 대적하라(벧전 5:9), 하나님의 갑옷을 입으라(6: 13), 등이 그 예입니다. 사탄의 집요한 유혹과 교묘한 위장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굳건한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비록 지위가 높고 의인처럼 보이더라도, 엉터리 규정으로 홀리고, 악의적 덧씌우기나 교묘한 위장으로 삼키려 하는지, 따지고 또 따져야 한다는 말씀이잖습니까

 

여기에서 혹 사탄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에 대한 어떤 답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사탄이 제아무리 집요하고 위협적이라도,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면, 결국 사람의 문제라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5.18 계엄군과 광주 시민의 의분과 저항 그리고 그 답답하고 화나게 하는 수많은 추악한 현상들도 모두 사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끊임없이 따지고 되묻지도 않거나 강고하게 맞서 대응하지 않으면, 그런 일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냉철하게 분별하고 강고하게 대응을 해야 사탄을 물리칠 수 있다? 그럴 듯 해보이나요?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하라는 믿음과는 배치되는데 어쩌지요? 이러다가 혹 하나님께서 자신보다도 자기를 더 잘 아는 것 같다며, 개인교습을 해 달라 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되긴 합니다.

 

그런 걱정을 안고 다른 질문으로 옮겨가겠습니다. 사람의 냉철한 분별력과 강고한 대응력은 만병통치약일까요? 혹 거기에도 유의하고 지켜야 할 어떤 원칙과 조건은 없을까요? 골치가 자꾸 아파지지요? 제 교육지론 체험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저는 이에 대한 대답의 단서를 조금 전 문현석 형제께서 읽은 성서 본문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볼까요?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이 말씀 잘 아시지요? 여러 번 들으셔서 내용과 의미는 뜨르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에서 크게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반드시 준거 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극질책을 받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고난과 부활은 피할 수 없는 예수님의 숙명이라는 게 아닙니까? 베드로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고 항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십자가 고난과 부활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십자가 고난과 부활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새출발이고 희망의 원천이어야 한다는 궁극적인 뜻은 짐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과 궁극적인 뜻을 준거 틀로 삼지 않는 생각과 행동은 어느덧 사탄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푯대도 없고 원칙도 애매하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꼴이고, 가짜 천사들의 유혹과 위장에 쉽게 넘어갈 것이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 각자의 생각과 행동도 냉철한 분별과 강고한 대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해서 하늘의 열쇠를 맡기겠다는 극찬과 극축복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금방 그 그리스도의 숙명을 반대해서 사탄이라는 극질책과 극저주를 받았지 않습니까?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극과 극으로 갈리게 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행동도 따지고 되물어서 분별하여야 하고 강고하게 제어해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 가운데 사탄성이 파고들었는지를 냉철하게 분별하고 강고하게 제어해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생각과 신앙만 옳다는 착각과 오류에 빠져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잘 해보자는 의견도 적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의인인 양 큰소리치는 바리새파, 교묘한 덧씌우기와 악의적 조작까지 서슴지 않는 악랄한 사탄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깨우침일 것입니다. 그것은 특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혹 이 말씀에 아멘!’ 하고 싶으신 분 계신가요?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분별의 영의 도움으로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곧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한걸음만 더 나가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준거 틀로 삼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까지도 냉철하게 분별하며 강고하게 대응하면 만사형통 신앙일까요? 그렇게 해서 저 건너의 사탄과 내 안의 사탄을 물리치면,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자동적으로 임하게 될까요?

     혹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 읽어보셨나요? 14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에서, 그는 세상의 폭력과 악은 인류의 역사를 거치면서 계속 줄어왔다는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분석에 대한 이견이 있겠지만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우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천사성이 또 다른 내면의 악마적 본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 모든 생명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다함께 번영케 하려는 천사성이, 공격성, 우세경쟁, 이데올로기 폭력과 같은 악마성을 제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역사의 순간순간에 나타난 수많은 외부의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역사적 힘이라고 하는 그 외부 요인 가운데 이성의 에스컬레이터 장치리바이아던(Liviathan)’이라는 두 가지가 제 맘에 와 닿았습니다.

     ‘이성의 에스컬레이터 장치란 인간의 이성을 더 강화하고 활성화시키는 외부 장치를 가리킵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생각과 문제 해결을 혼자 하게 놓아두면, 악마성에 홀릴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것을 막으려면 각자의 생각과 주장을 비평의 광장에 내 놓고, 다 함께 더 객관적이고 더 올바른 이성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공동토론과 집단탐구 장치를 통해서 창출된 공감성 높은 집단 지성과 연대적 결행이 내 안의 악마성과 저 밖의 세력화된 악마성을 물리쳐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강화하고 활성화시키는 학문 탐구와 교육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장치라고 보았습니다.

     한편 리바이아던은 국가라는 거인을 가리킵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국가의 발달은 인간의 악마성인 공격의 유혹과 복수의 충동을 억제시켜 폭력과 악폐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정의롭고 엄격한 공권력과 사법제도가 발달할수록 더 부유하고, 더 건강하며, 더 교양 있고, 더 평화롭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무능한 정부, 불법과 부패로 황폐해진 국가는 상대적으로 불신이 팽배하고 폭력과 무질서가 극심하다고 진단하였습니다.

 

스티븐 핑커의 주장,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천사성의 승리는 사탄과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다 싶지 않나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성의 에스컬레이터 장치를 비롯한 역사적 힘을 어떻게 키우고 강하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더 빨리 더 확고하게 이루어질 수 있겠다 싶지 않나요?  이렇게 이리 따지고 저리 되물어 살펴보았지만, 사탄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여전히 안개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특히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이분법으로 갈라놓고 몰아붙이는 신학과 신앙에 걸려 판단을 주저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강조하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불경스러운 인본주의라고 공격을 하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가지만은 분명해보입니다. 냉철한 분별과 공감성 높은 집단 지성이 뒷받침 되어야 하겠지만, 천사성의 연대적 민감성강화가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작동하는 사람의 천사성을 직감하고 그때마다 격려하고 손을 맞자고 키워가는 연대적 결행이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역사 발전의 동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하면, "공포나 분노를 느낄 틈이 없었다. 내 눈 앞에서 사람이 맞아 죽게 놓아 둘 수가 없었다."는 광주시민의 그 천사성을 직감하고 함께 격려하며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의 막바지 무렵,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 다시금 손길을 뻗는다면, 모든 적대를 끝내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호소하였다 하지 않습니까? 천사성의 연대적 민감성을 유효적절하게 이끌어내어 노예해방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계 유명한 신학자 위트니스 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잘 음미해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직접 처리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사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깨뜨릴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도 사탄도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

감이 오시나요? 한 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직접 처리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사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깨뜨릴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도 사탄도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저희는 왜 사람들이 그토록 악랄하며 세상의 악이 사라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땅에 사랑이 넘치고 정의와 평화가 강같이 흐르게 할 수 있을까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게 하시고, 따지고 또 따지며 쌓아가는 신앙적 무장과 집단 지성 그리고 연대적 결행을 통해, 이 땅에 하늘나라가 단 한걸음이라도 빨리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지난 주는 우리 사랑하는 최규삼 형제의 일주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형제의 우리 공동체 사랑과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열망과 헌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못다 한 숫한 과제들을 우리가 이어받아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열을 더 강고하게 하여 주소서. 그래서 그가 비록 내 눈에 안보여도 허전하지 않게 해주시고, 눈물이 나도 참으며 함께 만날 날을 소망하게 해주소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과 과제를 주시고, 소망을 잃지 않게 해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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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2017 [2017.05.14] 꽃 핀 쪽으로 file 2017.05.17 정경일
1016 2017 [2017.05.07]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file 2017.05.12 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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