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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에베소서 4:15)
 


                                                                                                                2017년 7월 9일 
                                                                                                        정경일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21세기의 이단 심문?

 

최근 일부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헌신해 온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를 거세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태의 발단은 한 보수교단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다면서 다른 교단 소속의 임보라 목사를 이단 혐의로 조사하겠다고 통보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고 있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여덟 개 보수교단이 이단 시비에 공조하면서 오히려 사태를 더 키우고 있습니다. 다원화 시대인 21세기에 이단이라는 전근대적 표현을 들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시계는 마녀사냥종교재판이 횡행하던 중세로 되돌아가고 있는 걸까요?

 

오늘날 이단이라는 말은 중세 때와 달리 사회적 위력을 잃었고, 심지어 시대의 이단아라는 표현에서처럼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불에 덴 듯 아픕니다. 그것은 이단 심문의 공포가 그리스도인들의 몸과 마음에 집단적 상흔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속에서 저질러 온 수많은 악행 중 하나는 교리의 차이를 이유로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폭력입니다. 일찍이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치열한 교리논쟁이 있었고, 313년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에는 일련의 종교회의를 통해 공식적 이단 정죄와 파문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교리 논쟁은 새로운 종교운동인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불필요한 분열과 증오와 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리 논쟁에서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결정 요소도 누가 신학적 설득력을 더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가 정치적 권력을 더 가졌는가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들은 결정에 깨끗이 승복하고 입장을 바꾸는 대신 입술을 깨물고 교회를 떠나거나 이를 갈며 복수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며 파문했습니다.

 

규모면에서 볼 때 교회 내 이단 정죄와 파문의 절정은 11세기에 있었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대분열입니다. 당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삼위(三位) 중 성령의 지위에 대해 이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그리스도중심주의로 방향을 정한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발한다는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아들로부터)” 입장을 취한 반면, 상대적으로 좀 더 신중심주의적 입장을 취하던 동방교회는 필리오케를 반대했습니다. 이 외에도 성찬에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해야 하느냐 누룩이 든 빵을 사용해야 하느냐, 로마 주교의 교황권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등의 의례와 제도 문제에서도 두 교회의 입장이 달랐습니다.

두 교회 사이의 종교적 이견이 정치적 갈등으로까지 격화되자,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는 훔베르트 추기경을 동방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해 합의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동방교회의 수장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훔베르트를 박대합니다. 그러자, 1054716, 훔베르트는 동방교회 성직자들이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모여 성찬식을 하고 있을 때 제단 위에 케룰라리우스를 이단으로 파문하는 문서를 올려놓고 떠납니다. 이에 격분한 케룰라리우스도 나흘 뒤 훔베르트를 이단으로 파문해버립니다. 두 종교 지도자가 주고받은 파문이 사실상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상호파문으로 굳어져 교회는 둘로 쪼개어집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서방교회의 십자군은 이슬람 지역이 아니라 동방교회 지역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무자비한 약탈행위를 저지릅니다. 이로써 교회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두 교회는 마치 두 종교처럼 갈라져 버렸습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상호파문을 취소하고 화해한 때는 최초의 파문으로부터 9백여 년이 지난 1965년이었습니다.

 

교회에 심겨진 분열의 씨앗은 증오로 싹트고 폭력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런 폭력은 사회적 불안과 위기감이 고조되던 중세 후기에 가장 극심했습니다. 권력자들은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을 공포로 억누르기 위해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그 희생양은 이단마법을 실천한다고 지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재판 혹은 이단 심문을 통해 수많은 이단 혐의자를 체포해 잔인하게 고문하고 불태워 죽였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의 부패를 비판한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 당했습니다. 한편,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도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같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위클리프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기 31년 전인 1384년에 죽었으니까요. 교회의 증오는 너무도 집요해서 그로부터 13년이 더 지난 1428년에 위클리프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화형 시켰습니다. 이처럼 중세교회는 살아있는 개혁자만이 아니라 죽은 개혁자까지도 이단으로 불태워 죽였던 것입니다.


또한 중세교회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마법 혐의를 씌워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희생자의 절대 다수는 마녀로 지목된 여성들이었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전통사회의 산파나 치유자처럼 가난한 여성들만이 아니라 부유한 과부들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부유한 여성들도 희생자가 된 까닭은 그들이 마녀로 정죄되어 처형당할 경우 그들의 재산은 모두 마녀재판관과 교회의 차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래드포드 류터는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삼백여 년 동안 마녀사냥으로 죽임당한 여성의 수는 100만에 가깝다고 추정합니다. 중세 후기의 마녀사냥은 교회의 이단 혐오와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혐오가 불과 기름처럼 만나 폭발한 종교학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도 이단 심문과 마녀사냥의 악행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마르틴 루터는 급진적 종교개혁자인 토마스 뮌처를 이단으로 처형했고 존 깔뱅도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한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종교재판에 관여했습니다. 그나마 칼뱅이 세르베투스에게 보인 자비는 화형 대신 참수형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종교재판의 피해자들이 종교재판의 가해자들이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마녀사냥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루터는 16세기 즈음에 휴머니즘의 영향으로 사라져가고 있던 마녀사냥이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교 내부의 분열이 격화되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17세기의 루터파 마녀 사냥꾼 카르프조프(B. Carpzov)는 자기가 화형에 처한 마녀의 수가 2만을 넘는다고 자랑했습니다. 17세기 말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미국에 이주한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마녀재판을 열어 많은 이들을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단 혐오와 여성 혐오는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종교적 폭력은 중세의 종식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단에 대한 공격은 근대 이후에는 이교(異敎) 혹은 타종교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다원화 시대인 현대에는 교회 안과 밖의 타자들, 소수자들에 대한 배제와 폭력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분열의 영은 한국교회에서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장로교만 예를 들면, 한국장로교총연합회공식 회원 교단만 21개이고, 장로교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군소 교단들이 200여 개에 이릅니다. 이런 분열의 풍토이니 교회 내에서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단 시비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분파에 대한 건강한 견제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작은 교리 차이를 크게 부풀려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늘도 현대판 이단사냥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다름틀림으로 간주합니다. 그 맞고 틀림의 기준은 진리입니다. 문제는 진리에 대한 견해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알려 주는 것은 한 몸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이름으로 서로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게 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진리에 대한 집착

 

종교는 진리 추구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덕목이며 의무입니다. 문제는 진리와 진리 주장을 혼동하고, 진리 주장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진리의 이름으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우선 진리진리 주장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무한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표현은 진리 주장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진리 주장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의 비유를 빌려 말하면 을 보는 대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여럿이듯 진리를 가리키는 진리 주장도 여럿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손가락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다른 손가락들은 모두 틀렸다며 손가락질하기 바쁩니다. 남의 진리 주장을 배워 자기의 진리 주장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보완하면 좋을 텐데, 남의 진리 주장을 공격하는데 몰두하느라 오히려 진리에서 눈을 돌려버립니다.

진리 주장의 진지함이 지나쳐 집착이 되어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 진리 주장에는 웃음과 기쁨이 없습니다. 늘 비장하고, 죽을 각오로 진리 주장을 펼칩니다. 더 심해지면 진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아니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순교자적 마음으로 사는 것은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진리를 위해 죽겠다는 사람들이 진리의 이름으로 남을 해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사는 아드소 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자신과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기보다 먼저, 때로는 자기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진리를 위해 죽겠다는 사람들이 혐오와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그 사실을 비통하게 상기하며 월리엄 수사는 계속 이야기합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진리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궁극적 진리라는, 모순처럼 들리는 역설. 그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한복음서 8:32b)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가 오히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족쇄처럼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성서를 문자주의적으로 읽고 적용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성서의 문자를 넘어

 

이번에 보수교단들이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조사에 나선 이유는 목사가 동성애를 지지하는 게 성경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즉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그들의 근거가 성서라는 사실입니다. 이번 이단 시비 사태를 촉발시킨 계기도 올해 말에 출간될 예정인 퀴어성서주석번역에 임보라 목사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서가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성서에는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으로 진술하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진술들은 고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기록된 것이므로 현대적 상황에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개별적 본문들은 성서의 전체적 정신에 비추어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성서는 상호모순적 진술들로 뒤엉킨 이상한 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교회는 성서의 문자를 맹신하여 동성애를 정죄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적 지향과 종교적 신앙을 화해시키지 못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렇다면 성서를 잣대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대신, 그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성서를 재해석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삶의 규범입니다. 하지만 성서를 중시하는 것이 도를 지나쳐 성서를 절대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것이기에 역사의 각 시기마다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성서를 읽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성경은 덮어놓고 읽을 글이 아니요 열어놓고 읽어야 할 글이다. ... 덮어 둘 것, 은밀하게 둘 것, 신비대로 둘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 그 밖의 것은 다 열어젖혀야 한다. 성경은 연구해야 하는 책이다. 연구하지 않고 믿으면 미신이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은 될 수 없고, 그 밖의 것은 다 연구해서 밝혀야 할 것이다.

 

성서는 덮어놓고 읽을 글이 아니라 열어놓고 읽어야 할 글이며 연구해야 하는 책이라는 통찰은 성서를 각 시대의 문화 속에서 재해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는 미신, 즉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우상은 무한한 하나님의 자리에 유한한 것을 대신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문자를 절대적 진리로 여기는 태도는 성서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우리는 그리스도인(Christians)”이지 성서인(Biblians)”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지 성서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를 가벼이 여겨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중요한 근거입니다. 하지만 성서에 근거한다는 것은 성서의 문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계명을 예수는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계명을 담고 있는 성서는 혐오의 책이 아니라 사랑의 책입니다.

 

모든 것에서 사랑을!”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진리와 진리 주장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가장 흔히 듣게 되는 비판이 상대주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에 대한 우려는 진지하게 경청해야 합니다. 상대주의는 그 어떠한 기준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으니 지적, 영적, 윤리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진리 주장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주장하는 방법과 목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가르쳐주는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의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규범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교회의 오래된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우선 앞의 두 구절이 뜻하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된 입장이어야 하지만 본질적이지 않은 것, 부차적인 것에서는 자유로운 해석과 적용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모든 것에서 사랑을!” 결국, 본질적인 것에서도 비본질적인 것에서도, 오늘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면에서”, 모든 것에서 사랑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단 시비를 목격하면서 우리가 깨어 알아차려야 할 것은 누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해 혐오 발언을 퍼붓고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자매형제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이단으로 몰리면서까지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까?

사랑으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단지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혐오의 종교에서 사랑은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신적 사랑을 지상에서 실천한 예수도 당대의 종교 권력자들로부터 신성 모독자, 즉 이단으로 몰려 죽임 당했습니다. 분열의 영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혐오와 폭력을 부추길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용기 있게 혐오 대신 사랑을 선택하고, 진리 앞에 겸손하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는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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