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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7.07.13 15:32

[2017.07.02] 손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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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구미정

“손의 회복”
 (마가복음 3:1~6)
 


                                                                                                                2017년 7월 2일 
                                                                                                         구미정 교수
                                                                                                    (숭실대 기독교 학과)                



[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마가복음 3장 1~6절

                                                                                        


 

종교개혁자 예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은 첫 구절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다시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확히 일주일 전에 그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성서의 표현으로 귀신 들린 사람이란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 생각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 생각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다 생각이 올바르고 깨끗하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기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지 500주년이라는데, 루터가 깨달은 진리도 바로 그것이지요.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교회라는 거대한 구조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해서, 아무리 경건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의 생각이 다 옳다거나 깨끗하거나 건전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루터는 내부 고발자였던 셈이지요. 남의 종교에 대해 왈가왈부 한 게 아니라, 자기가 몸담고 있는 종교의 치부를 드러냈습니다. 이 단순한 행위가 세계사의 흐름과 맞물려 거대한 역사사회 변동을 이뤄낸 게 이른바 서양의 종교개혁 아니겠습니까?

 

루터만 종교개혁자가 아닙니다. 루터 역시 자기 앞의 누군가를 모방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따져도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체코의 얀 후스 같은 이들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앞에, 그들보다 더 철저하고 강력하게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가복음이 증언하는 예수는 시종일관 종교개혁자이십니다. 마가 저자는 예수 사역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종교개혁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공생애 초기, 한 지역 회당에서 시작된 예수의 종교개혁의 칼날은 공생애 말기에 이르러 마침내 예루살렘 대성전을 향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무화과나무의 비유(11:12-14)는 바로 예루살렘 대성전을 향한 예수의 최후통첩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니까 잎이 무성한 것이 먹을 것도 많겠다 싶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정작 먹을 게 하나도 없더랍니다. 이 말씀, 당시에 부패할 대로 부패한 자기 종교를 향한 일침이었던 거지요.

 

예수는 유대교인이었던 만큼, 당시 정치권력과 야합한 유대교, 자본권력의 노예가 된 유대교를 갈아엎고 싶었습니다. 종교를 갈아엎는 일의 시작은 예배의 회복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사회가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의 생각을 바로 잡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이것도 엄연히 은 일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요리를 해서도 안 됩니다. 생계와 생존을 위한 일이 일절 금지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의미가 유대인들에게는 일상과 철저히 구별된다는 의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요리를 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그 전날 이틀 치 음식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실존의 구조 속에 있습니다. 또 배를 타고 멀리 나가 있어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뱃사람이나 주인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떠도느라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목동 역시 죄인으로 몰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 법은 이렇듯 직업 자체가 불안정하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정죄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안식일 법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처음부터 안식일 법에 정면도전을 하십니다. 마가의 증언에 따르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준 일로 쫓겨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사는 집에 피신했다가 공교롭게도 베드로의 장모의 병까지 고쳐주셨답니다. 아직 안식일이 끝나지 않은 해거름에 말입니다.

이건 대형사고입니다. 그것도 한 날 두 번이나 사고를 쳤습니다. 율법의 수호자요 유대사회의 정신적 지주를 자임하던 바리새인들의 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겠지요. 한 번만 더 걸려봐라, 그 때는 가만 두지 않겠다, 이를 갈며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  

오늘 본문은 그 맥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첫 문장을 예사로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한껏 긴장이 고조된 상황입니다. 이럴 때는 살짝 피해가는 게 지혜로운 처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사전에는 우회라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직진입니다. 그분은 법보다 사람이 먼저거든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시 들어간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납니다. 성경에서 이나 은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손의 권능을 기억하지 아니하며”(시편 78:42),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욥기 40:9) 같은 구절을 떠올리면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말은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능력이 없으니 마땅히 권세도 부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보니까 이 오그라들었다’(크세라이노)는 표현이 수동태(정확히는 현재완료 수동형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의 손은 무엇인가에 의해 오그라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무엇인가가 그의 손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랬답니까? 종교입니다! 마가 저자가 손 오그라든 사람 이야기를 둘러싸고 바리새인 이야기를 배치한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더러 왜 이 사람의 손이 오그라들었는지, 왜 그는 사회에서 무능한 사람,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분명히 보라고, 앞뒤로 단서들을 깔아놓았습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2:27)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히 그 뜻입니다. 그런데도 근본주의자, 교조주의자들은 종교를 앞세웁니다. 율법과 교리를 앞세워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이단으로 몰아갑니다. 예수의 거룩한 분노가 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4절을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이 침묵의 이유를 본문은 친절하게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서”(5)!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르디아는 히브리어 레브에서 왔는데, 단순히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당시 언어와 문화에서 마음은 생각의 자리입니다. 영어 성경이 마인드’(mind)라고 옮긴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단순히 무정하다, 냉정하다, 차갑다’, 그런 정서의 차원이라기보다는 마인드’(생각)가 절대 안 바뀌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머리가 돌처럼 굳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본문이 분명 손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는 이야기인데,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는 이야기가 끼어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치유 이야기와 논쟁 이야기를 콜라보레이션하는 데 천재입니다. 아마도 마가의 생각으로는, 치유와 논쟁이 별개가 아닌 모양입니다. 논쟁을 통해 생각이 바뀌는 것 자체가 치유를 가져온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이렇게 마가는 치유 이야기가 기적 이야기로 오해되는 걸 미연에 방지합니다.

       

종교가 사람을 아프게 한다  

물론 이 논쟁에서 예수님이 이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겼다면 6(“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이 나올 리가 없지요. 예수님은 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고, 그 결과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의 사랑은 지지 않았습니다. 바보같이 무조건 직진인 그 사랑은 처음에는 촛불이다가 나중에는 들불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만 사회에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권세도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종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배와 일상을 구분하는 종교, 좀 유식한 표현으로 이원론적 신앙을 종용하는 종교적 가르침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치유는 이런 거짓 믿음을 청산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진리라고 설파한 무수한 법과 제도와 교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 일어나라는 말씀, 가운데로 나오라는 말씀, 결국은 너 자신이 중심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노예로 살지 말고 주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하여 만인제사장직입니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브로커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 본문이 단순히 손이 오그라든 장애인의 치유 기적이라면, 순서가 바뀌어야 맞습니다.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자마자 네 손을 내밀라, 그랬더니 손이 펴졌다’, 그러면 됩니다. 한데 순서가 그게 아닙니다. “네 손을 내밀라는 말씀은 5절에 가서야 나옵니다.

 

손이 능력과 권세를 상징한다면, ‘손을 내밀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능력 있게, 권세 있게 살아가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배와 일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사람, 일원적통전적 영성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옛날 종교개혁이 가져온 삶의 풍경 가운데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그 전까지는 사제만이 성직이라고 해서 믿음 좋은 청년들이 죄다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니 직업을 달리 생각합니다. 빵을 만들어 파는 일도 성직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을 바꿉니다. 루터 시대에 소명이라는 단어는 오직 교회와 관련된 일에만 사용되었는데, 루터는 이 단어를 모든 직업에, 모든 역할에 적용시켰습니다. 남편이 되는 것도, 아내가 되는 것도 소명입니다. 아버지가 되는 것도, 어머니가 되는 것도 소명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루터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글,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전 10:31)를 보편 진리로 확대시켰습니다. 종교개혁의 5대 강령 가운데 하나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강령인 솔리 데오 글로리라’(Soli Deo Gloria)가 바로 그 뜻입니다. 훗날 독일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그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소위 종교적인 곡이나 그렇지 않은 소위 세속적인 곡이나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JSB, SDG’라고 서명하곤 했습니다. 우리 눈에는 평범한 직업, 진부한 일상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특별한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세상에 보잘 것 없는 사람, 보잘 것 없는 장소란 없습니다.

 

나에게는 6일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심보선이라는 시인은 <필요한 것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더군요. “나에게는 6일이 필요하다/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나날이 필요하다/ 물론 너의 손이 필요하다/ 너의 손바닥은 신비의 작은 놀이터이니까/ 미래의 조각난 부분을 채워 넣을/ 머나먼 거리가 필요하다

 

시인은 안식일의 여가보다 나머지 엿새의 일상생활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개신교 영성의 핵심(‘Soli Deo Gloria’)이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안식일의 활동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지요. 아니 안식일에 하는 이른바 종교활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영적 교만이자 착각일 터입니다. 그보다는 안식일을 뺀 나머지 6일들이 중요합니다. 그 일상의 나날들을 무엇으로 채웠느냐가 중요합니다.

 

시인은 그 시간을 (시인의 표현을 빌면)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사랑으로 채우자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너의 손에게로 향하지요. 다친 너의 손, 추락하는 너의 손을 잡는 행위를 일컬어 사랑이라 말합니다. 다친 너의 손, 추락하는 너의 손을 붙잡는 한, 나도 함께 다칠 것이고 함께 추락할 테지만, 인간이 새로 태어날 길은 그런 사랑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잡음을 시인은 선행이 아닌 동행이라 부릅니다. “선행과 상관없는 동행”, 그런 것을 언제까지고 반복하고 싶은 욕구야말로 신비의 작은 놀이터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지요. 어린 시절 제 손은 봄이면 쑥을 뜯고 여름이면 아카시아 줄기로 동무의 머리를 파마해 주었습니다. 가을에는 감자를 캤고 겨울에는 고드름을 땄습니다. 메뚜기를 잡아서 강아지풀에 끼워 동무에게 구워주기도 했고, 동무와 함께 흙을 만지고, 물놀이를 하고, 실뜨기를 하고, 풀피리를 불었습니다. 어느 시인의 적절한 표현대로, 우주와 나 사이에 손이 있었습니다. 자연과 교감하고 온갖 놀이를 창조해내는 대단히 생산적인 활동이 모두 그 손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아름다운 손이었습니다.

 

그랬던 손으로 지금은 온종일 생명 없는 것들만 만지작거립니다. 어릴 적 내 손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물건들입니다. 컴퓨터, 핸드폰, 운전대, 리모컨, 도대체 이 손으로 얼마나 쓸 데 있는짓을 했을지 자괴스럽습니다. 이 손이 가장 즐거운 순간이란 더 이상 자연과 접촉하는 때가 아닙니다. 동무의 손을 잡고 함께 뛰어노는 때가 아닙니다. 오로지 돈을 만질 때만이, 그 돈으로 원하는 상품을 구입할 때만이 비로소 흡족하여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무지 교활한 손입니다.

 

문득 이런 시가 떠오르네요. “손은 두 사람을 묶을 수도 있지만, 서로를 밀어낼 수도 있다./ 손가락은 두 사람을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접으면 주먹으로 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색하게 두 손을 내린 채로 서서 서로를 붙잡지 못하고 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모두 손에 달려 있다.”(E. M. D. 수프라노비치, <손의 문제>)

 

그런가 하면 김영래 시인은 <가득한 손>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주 이따금 내 영혼의 왼손에 그의 손이 놓인다. 우리는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나 하나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이따금 우리 영혼의 왼손에는 그분의 손이 포개지니까요. 우리는 함께 걷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손길 닿는 모든 곳에,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이 전염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삶이 그런 신비의 놀이터가 된다면, 지상이 곧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이 매순간 천국의 축제이기를 간구합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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