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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7.06.22 19:25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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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현욱, 정영훈

[말씀증거 #1]

“기도”
 (출애굽기 3:1~5)
 
                                                                                                                                 2017년 6월 18일 
                                                                                                                         박현욱 형제
                                                                                                                      (평신도신학팀)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출애굽기 3장 1~5절

                                                                                        



평신도 신학팀에 대해 잠시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저희는 매달 세 번째 토요일에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팀원들이 제안한 주제에 관해 각자 글을 써서 발표합니다. 지난달의 주제가 ‘기도’였습니다. 자매, 형제님들과의 나눔을 바탕으로 정영훈 선생님과 제가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도저히 내 뜻대로 할 수 없기에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깊은 갈등에 빠지기도 하고,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극도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모멸감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외칩니다.
“오, 주여!”

절망 속에서는 기도하게 됩니다.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한숨 쉬며 기도합니다. 내 능력과 기대가 멈춘 곳에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자신의 절실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내뱉는 원초적인 언어입니다.


내 진실한 갈망을 언어로 표현하다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존재와 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독교의 전통은 대화기도의 상대방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타자적인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하고 거룩한 경험입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만나기도 합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가 겪는 놀라운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성경에 나타난 기도의 장면을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출애굽기 3장 말씀입니다. 유대인이지만 이집트 공주에게 입양된 모세는 왕자로서 특권을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열정과 독선에 사로잡혀 이집트인을 죽이고 맙니다. 그는 변방인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평범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던 어느 날 저 멀리 떨기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타지 않았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나무 앞에 다가 갑니다. 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에 그는 응답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 곳이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곳에서 그는 자신의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 지저분한 신을 신기에는 그 신성한 불길 앞이 너무 거룩했습니다. 신발을 벗으면서 모세가 보게 된 것은 신발에 뭍은 먼지들이었습니다. 신발을 벗으면서 모세는 자신의 연약함, 상처, 콤플렉스, 그림자, 트라우마를 직면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은 모세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세만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합니다. 천사들이 성전을 메우며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님!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


그 광경에 이사야는 말합니다.
“나는 망했다. 나는 죽게 되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하나님을 만나다니!”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나의 진실을 보게 됩니다. 자기애로 가득 차 있고, 에고로 팽창되어 있는 수치스럽고, 부정한 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죽게 되었다는 이사야의 고백에서 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떠올립니다. 참다운 나를 만나는 경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 순간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어둠을 직면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부끄러운 신발을 벗은 뒤로 유대민족을 해방시킨 새 시대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더러움을 시인하고 새 시대를 여는 선지자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부활의 기적은 마음을 찢는 자기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찢긴 가슴으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 위로 다시 끌어 올리십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싫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TV를 켜서 뉴스와 프리미어리그를 봅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며 지식에 몰두합니다. 스마트폰을 켜서 페이스북을 뒤적거립니다. 몰입할 여흥거리를 찾는 것이지요.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너무도 괴롭기에 벌이는 일입니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들어다 보는 기도에 머무를수록, 불안, 두려움, 수치심으로 떠다니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깊은 곳에서부터 아파하는 마음, 애도의 마음이 올라옵니다.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그 아픔에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듯이 우리의 십자가도 부활로 이어집니다. 아픔은 위로 받고, 상처는 치유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그 발에 신을 벗고,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순간 입을 가렸습니다. 그 순간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시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품속에 우리를 살리는 힘이 있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으며, 성숙하게 하는 자양분이 있습니다. 이 기도의 결실은 개인에 국한 되지 않습니다. 저는 최순실 정국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촛불을 든 시민들의 평화적인 염원에서 십자가의 상징을 읽어냅니다. 탄핵선고와 새로운 정부의 탄생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이 연상됩니다.

호렙산 떨기나무에 타올랐던 불빛이 새길교회에도 끊임없이 타오르기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기도는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한 경험으로 인도하는 용광로이기 때문입니다. 새길로고.jpg






[말씀증거 #2]

   “내가 모르던 기도”
 (데살로니가전서 5:17)
 
                                                                                                                  2017년 6월 18일 
                                                                                                                         정영훈 자매
                                                                                                                     (평신도신학팀)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장17절                                                                     

                           


저는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월적 인격신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는 초월적 인격신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예수를 알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혼란이 없었기에, 저는 꾸준히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닌 지 7년 만에 세례도 받았고, 세례를 받을 때 드리는 신앙고백에도, 제 이성을 교회 문 밖에 두고 들어오는 일 없이, 제 마음 그대로를 정직하게 담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말이 예수를 알고 믿고 따르는데 오로지 합리적 이성의 힘만이 작용한다는 뜻이 아님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어쨌든 고백하건대 저는 우리 교회의 신앙 선배님들 덕에 자유롭고 행복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인격신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갖지 않았기에 제게 기도는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향해 무엇을 ‘빌라’는 말인가?
내밀한 내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그것은 말로 쓰는 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교회의 요청을 들을 때면 그들의 치료와 위로를 위해 기도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사실 내 마음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냉정하고 강퍅한 내 마음을 연민과 동정, 연대감 같은 부드러운 것으로 바꾸었으니까요. 무엇을 이루게 해달라거나 무엇을 얻게 해달라고는 거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도는 제게는 무척 곤란한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제 처지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려울 때는 몇 번 그렇게 기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종의 비명이었겠지요. 어쨌든 저에게 기도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기도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마음을 정돈하여 기도를 할 때면 그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이름이지만 사실은 나로부터 온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도 시간의 대부분을,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이름을 덮어쓴 내 것인지를 분별해내는 데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기도를 모릅니다.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기도를 합니다. 이는 어머니의 기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지만, 법문을 열심히 공부하거나 절에서 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그저 불교를 좋아한다.’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히 어머니가 오랫동안 새벽에 기도를 다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매일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가족들 중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어머니가 너희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것은 겸손이거나 경건의 마음일 수도 있지만, 사실 당신 자신도 대놓고 말할 만한 대단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이거나 대단한, 꼭 달성해야할 목표를 절실하게 요청했다기보다는 ‘건강하게 해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하는, 모든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마음에 갖고 있는 소박한 바람을 속으로 가만히 빌고 오는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어느 대학에 붙게 해달라거나 무슨 병이 낫게 해달라거나 어디 회사에 취직하게 해달라는 구체적이거나 간절한 소원들이 살면서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정도를 요청하기엔 ‘왠지 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엔 예전에 장독대에 깨끗한 물을 떠놓고 비손하던 그런 식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절이 어머니의 장독대였던 셈이지요. 그렇게 단순하고 싱거운 말을 하기위해 매일 새벽에 절을 찾았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효율적’인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기도라기보다는 그냥 마음이었지, 뭐’ 하는 간단한 말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냥 마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뜻이 조금씩 달리 생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할 때의 그 마음을 연상했습니다. 순수하게 정성을 모으는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을 ‘한다.’는 의식 없이 그저 조용히 손을 모으고 몸을 숙이는 시간, 간절하지 않아서 어쩌면 더 간절했을지 모르는 단순한 소망을 반복하는 시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 그 시간이 어머니에게는 세미한 음성을 듣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확장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기복적인 기도로 시작되었으나 언제부터인가는 그것을 넘어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람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제가 ‘자식들 공부 다 끝났는데?’ 하면서 장난스럽게 놀리니까 어머니는 순간 ‘아, 그러네?’ 하는 표정으로 잠시 멈칫하다가 ‘손주가 있잖아’ 하시더군요. 장담하건대, ‘손주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소망은 상관없는 기도였다는 것이지요.
커다란 소원도 없이 그저 드리는 기도, 단순하고 싱거운 기도가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이 어머니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있거나 혹은 어머니로부터 무엇인가를 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의 기도도 비슷합니다. 가만히 손을 모으고 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분별의 시간이 되풀이 됩니다. 분별이 끝나고 나면, 물론 자주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거기, 내 안에, 내가 아닌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굳이 말로 한다면 나의 확장이면서 나의 축소이기도 하겠지요. 어쨌든 내 안에 내가 아닌 어떤 것을 느끼게 되는 그 시간이 평화롭고 기쁩니다. 제게 기도는 그 시간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나로 돌아가지만 동시에 나를 넘어섭니다. 가장 나다운 것이면서 내가 없어지고, 나를 넘는 시간이지요. 제게 기도는 그 시간을 구하는 일입니다. 


오늘 봉독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하는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은 그동안 말씀증거 시간에 여러 번 되풀이하여 나눈 말씀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에 담긴 깊은 뜻을 새롭게 새기기도 하지만, 이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상상하고는 합니다. 이들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신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을 생각하며, 이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곳에는 구체적인 소망이 있고, 이루게 해주시는 분을 전제하고 드리는 간절한 요청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물론 분별되지 않은 자신의 소망도 들어있습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고, 아니,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상상합니다. 기도 속에 들어있는, 제가 경험한, 자기가 아닌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도처럼 무력하고 무용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당장의 밥 한 그릇도 약 한 봉지도 연필 한 자루도 되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제가 홀로 고통 받고 있다고 느낀 그 순간에도 저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커다란 은혜였습니다. 저도 모르던 어머니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위해 이 시간에도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은 곧 이 기도 속에 계시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그 가운데, 평화와 기쁨 그 가운데. 그 곳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과연 어디 계시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없는 가운데 있으신 하나님,
지금 이 시간 당신을 만나고 당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고요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 속에 계십니다.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은 그 속에 계셨습니다. 당신은 기도이십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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