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17.33.156) 조회 수 693 추천 수 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자 박경미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요한복음서 9:41)


201757

어린이/어버이주일

박경미 교수(이화여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 요한복음서 941-

 


이제 이틀만 지나면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이번 선거에는 역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불과 몇 달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뜨거웠던 촛불광장에서 박근혜는 내려오고 세월호는 끌어올리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었는데, 박근혜가 내려오자 기적같이 세월호가 올라왔습니다. 세상이치를 이해할 지적 능력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정서적 능력도 치명적으로 결여한 사람이 자신의 검찰조서를 검토하는 데 일곱 시간을 들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밤을 새워 토씨 하나까지 이 잡듯이 잡아내는 무서운 집중력과 독기가 느껴졌고, 그것이야말로 정치인 박근혜를 버텨온 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커다란 변화를 이루어냈지만, 실은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염원이 어느 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으로 실현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현실정치와 제도의 중심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한 사람을 뽑아놓고 그와 그의 집단에게 절대권력을 위임한 채 그들이 무슨 짓을 하건 두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스템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실질적 참여를 배제하는 시스템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대의 민주제에서 국민은 주권자이기는 하지만, 오로지 대표자나 통치자를 통해서만 주권자가 됩니다. 개별 민중의 삶이 전적으로 대의기구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국민주권은 공염불입니다. 헌법1조에서 말하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지만, 국민은 한없이 나약한 개인들로 흩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가 발달했다고 하지만, 책임은 갈수록 체제에 전가되고, 아무도 참여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대의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대개는 4년 내지 5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때뿐입니다. 그 외의 수많은 중차대한 문제들에서 시민들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멀쩡한 강을 망치느라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사드배치를 강행하고, 위험천만한 핵발전소 확대정책을 밀어부처도 대다수 국민은 자신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이 자신을 뽑아준 주권자의 뜻을 짓밟고 다수 국민의 이익에 반하여 중차대한 문제들을 제멋대로 결정하고 밀어부처도 다음 선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대의제 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는 대다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민주주의적 보완장치를 두고 있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가령 주요 현안들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에 대해 국민소환제를 실시하기도 합니다. 몇 해 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을 놓고 국민투표를 했던 것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 임기 횟수를 제한하고, 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된 대표들이 시민회의, 또는 시민합의회의에 참여하여 시민의 삶에 중차대한 문제를 놓고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토론하여 결정합니다. 덴마크나 스위스 같은 국가에서는 유전자조작식품 도입문제, 핵발전소 설립문제처럼 국민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성별, 직능, 연령별로 일정 수의 시민들을 추첨으로 선출해서 일정 기간 동안 그들이 공부하고 토론하여 결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 참여해서 자신의 삶과 직결된 문제를 놓고 공부하고 토론하여 결정하는 것입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누구나 동등한 정치적 영향력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들 배후에는 추첨제라는 낯설면서도 낯설지만은 않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본래 추첨제는 엘리트가 아니라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는 좋은 통로였고, 원래 민주주의는 추첨제와 가까웠습니다. 몽테스키외는 대의제는 엘리트의 지배로, 추첨제는 인민민주주의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추첨제는 민주주의 이념과 긴밀하게 연결될 뿐만 아니라,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들의 사회정치적 상황 속으로 전달되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가나안에 진입한 지파들이 땅을 분배할 때 제비뽑기를 했고, 처음 왕을 세울 때도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가롯 유다로 인해 궐석이 된 자리를 채울 때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유대전쟁 때 젤롯파는 예루살렘성전을 점령한 후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채무증서들을 불태우고, 대제사장만이 아니라 성전관료 전반을 평민 중에서 제비뽑기로 새로 뽑았습니다. 이것은 제비뽑기가 평등의 원칙과 직결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물질적인 이익이나 권력이 문제가 되었을 때, 제비뽑기가 하느님이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는 방식이고, 공평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의 신정정치의 이상이 결국은 민의 지배의 표현이듯이, 제비뽑기가 신적인 평등이 구현되는 방식이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신정정치의 이상은 평범하고 별로 잘날 것 없는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정치인 민주주의의 이상과 일맥상통합니다. 지난 몇 달 간 촛불은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인민주권이요, 성서가 줄기차게 붙잡고 있는 민의 지배의 이상입니다. 본래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적 존재가 되어, 권력이 그들에게 반응하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내장된 평등과 참여의 원리를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대의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추첨이라는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여 시민대표회의, 배심원제도 등을 상설하고, 정치에서 소외된 민중의 의사를 실질적으로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촛불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민중주권의 원리를 실천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한없이 공허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와 후손의 삶에 장기적이고 포괄적이며 심층적인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에 대해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를 실천하여 논의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핵발전 문제도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입니다. 이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과 생각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사회적 갈등은 빈번하게 약자들의 희생과 대규모 환경파괴가 결합된 형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대한 자연파괴와 민중의 자급적 삶에 대한 공격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주 강정마을과 4대강사업이 그랬고, 최근에도 사드배치로 인한 성주 사태가 그렇습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동남지역의 지진은 그 지역 350만이라는 인구와 세계 최고로 밀집한 핵발전소들을 생각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 파괴의 가장 일차적인 희생자는 언제나 맨 밑바닥에 있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민중의 삶과 그 토대인 자연생태계가 밑바닥에서부터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러한 전지구적 고통으로부터 돈을 벌고 있습니다. 거대기업들은 석유와 개스, 광물, 물고기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서 극지대의 바다를 온통 헤집어대고 있고, 그들에게 북극 빙하의 소멸은 되레 기쁜 소식입니다. 그들에게 지구의 죽음은 또 다른 투자기회일 뿐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강을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지금 보고 듣고 겪고 있습니다. 나오미 클라인은 기후변화 문제를 다룬 최근작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지금 우리의 경제시스템은 지구시스템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깜박거릴 때까지, 생명으로부터 마지막 한 줌의 이윤을 짜낼 때까지 저들은 죽음의 춤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최후의 포식자가 될 것이지만, 더 이상 잡아먹을 것이 없으면, 그들 역시 사라집니다. 자연과 인간의 생명이 신성한 차원, 금전가치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녔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명과 사회는 결국 집단자살로 갑니다. 그런 사회는 죽을 때까지 제 몸을 파먹는 괴물과 같습니다.

 

돈에 중독된 어지러운 죽음의 춤은 실제 세계로부터,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는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현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기대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물질적 안락에 취해 과학적 사실에 눈을 감는 것입니다. 핵발전 문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6년도 더 지났습니다. 이제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쿠시마도, 체르노빌도 그 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원전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말만 믿고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며칠 지나면 다시 돌아올 줄 알고,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할머니들, 어린아이들은 기르던 고양이와 개를 두고 떠나는 것이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체르노빌에서는 사람이 떠난 후에 군인과 사냥꾼들이 마을로 와서 동물들을 총살했습니다. 굶주린 개와 고양이들은 사람 소리를 듣고 반가워 뛰어나왔다가 총에 맞았습니다.

 

방사능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과 흙과 꽃과 나무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익숙했던 색깔과 모양, 냄새가 나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십 킬로미터나 되는 오염된 땅에서 오염된 지층을 벗겨내고, 그 속에 사는 지렁이나 벌레의 유충들과 함께 특수 제작된 시멘트벙커에 담아 땅에 묻습니다. 흙을 흙에 묻습니다. 집과 자동차, 도로와 나무를 묻습니다. 이게 체르노빌에서 했던 일이고, 후쿠시마의 원자로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물을 붓지 않으면 폭발합니다. 후쿠시마는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요?

 

인간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고,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만든 기계 역시 완전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완전하지 못한 기계를 움직이니 사고는 피할 수 없습니다. 사고의 위험이야 어디에든 있는 것이지만, 핵발전의 문제는 그 피해의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이라고 할 만큼 오랜 시간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늘 큰 사고가 날 때는 여러 가지가 겹쳐서 일어납니다. 후쿠시마 원전에 사용된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마크1’ 원자로는 회사의 전문가들이 모두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기종이었습니다. 수소폭발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설치된 원자로는 철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험하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후쿠시마 원전은 비상용 디젤발전기가 지하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해일이 밀려올 경우 가장 먼저 침수피해를 당하게 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허리케인이 많이 발생하는 미국을 기준으로 한 설계도를 일본에서 그대로 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쿄전력은 해발 35이던 발전소 터를 25나 깎아서 해발 10높이로 낮췄습니다. 냉각용 바닷물을 끌어쓰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2011310가 넘는 해일이 밀려들자, 비상용 디젤발전기는 모두 먹통이 됐습니다. 후쿠시마에 대규모 해일이 밀려올 수 있다는 경고는 많았습니다. 지진해일 연구가들은 진도 8 이상의 지진이 1000년 주기로 일어났음을 밝히고, 지금이 그 때이니 대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을 운영하던 도쿄전력도 큰 지진이 일어나면 10이상의 해일이 밀려올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고에 대비해 원전사업자와 정부가 보험을 들고 있었지만, 대규모 천재지변에 따른 사고는 정부가 배상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재지변에 따른 배상을 국가가 하도록 되어 있으니, 전력회사는 안전에 투자하기보다는 수익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또한 원전의 안전을 감시해야 할 원자력안전보안원은 원자력산업을 국책으로 추진해온 경제산업성 산하에 있고, 원자력안전보안원 간부는 경제산업성이나 전력회사와 잘 지내다 보면 나중에 전력회사의 임원이 될 수 있으니, 제대로 된 감시자 구실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30년 쓰도록 설계된 원전이 40년 넘게 가동되고, 지진·해일 대비가 소홀한 원전들이 계속 움직여온 데는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본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나라 핵발전소들은 일본보다 안전할까요? 우리나라가 운이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핵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 인류의 모든 기술은 분자단위의 변화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원자핵은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원자핵은 아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원자핵을 불안정하게 하거나 쪼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핵분열현상이 일어날 때 원자핵을 결합시켰던 힘이 엄청난 에너지로 방출되면서 동시에 방사능이라는 파괴적인 물질이 함께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다카기 진자부로에 의하면 지구별이 형성되는 아득하게 긴 시간 동안 핵분열 현상을 거의 다 일으켜서 방사능이 사라지고 안정적이 된 후에야 지구상에 생명체가 서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핵분열이라는 것은 그런 지구현상을 거꾸로 돌려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핵분열 현상은 모든 생명체의 안전을 위협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서식하고 있는 물질세계의 안전성이 원자핵의 안정성에 근거해 있고, 핵분열이란 바로 그 원자핵의 안정성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핵분열현상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계는 2차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이때 과학자들은 나치 독일이나 소련의 손에 핵무기가 먼저 들어가면 온세상이 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폭실험이 성공하고 곧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덕분에 전쟁이 일찍 끝났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당시 독일은 핵무기제조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은 미국이 핵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어도 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일본의 항복은 시간문제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1945년 말이면 일본은 항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선박의 10분의 9 정도가 침몰하거나 항해가 불가능했고, 공군력과 해군력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받았고, 공업은 파괴되었으며, 국민들의 식량공급량 또한 점점 줄어들어 일본의 붕괴는 확실했습니다. 군사적인 이유에서는 원폭투하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좀 더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당시 소련이 막판에 2차대전에 참전해서 더 많은 전리품을 할당받으려 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핵무기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이미 2억 달러나 썼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는 역사상 중대한 결정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내려집니다.

 

결국 인간이 문제입니다. 당시 핵무기제조를 계획 실행하고 원폭투하를 결정했던 사람들에게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에게 세계는 국가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은 그 국가의 일부분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기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 있는 구체적인 인간을 생각했다면 당연히 떠올랐을 복잡한 질문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방사성 물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또 그런 물질이 환경에 들어왔을 때 구체적인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 당연히 했어야 했던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고, 그들은 서둘러 핵무기개발을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정치 지도자들이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머리로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행동했습니다. 살아 있는 사물을 기계로 대할 때에는 안다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삶이 자기들 손아귀 안에 있고, 삶을 잘 알고 예견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주제넘게 오만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왜소했습니다. 국가라는 경계 앞에서 상상력과 도덕과 양심이 멈춰버리는 왜소한 인간들이 전지구적인 가공할 위력을 가진 핵에 대해 결정권을 가졌던 것입니다. 왜소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조그만 머리통 속에서 상상하고 예측하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절대시했을 때 어떤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후쿠시마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반복해서 배우는 것도 실은 인간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핵발전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사람들은 모든 가능한 위험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한다고 했지만, 도무지 그들은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동안의 수많은 핵발전소사고들이 말해줍니다. 결국 인간의 도덕적, 과학적 인식이라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런 불완전한 지식에 근거해서 오만하고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그 결과는 파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대중적 감각이 존재하느냐 여부가 실은 그 사회의 문화적, 도덕적 수준을 나타냅니다. 이런 지적 능력은 실은 인간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인간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데 근거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괴물이 됩니다. 인간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면서 인간은 삶 속에서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겠습니까. 자신이 안다는 데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데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인간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잘 행동하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원자력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과학자들은 방사능의 위험성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방사성 폐기물 문제를 언젠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낙관주의, 과학의 진보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들은 방사능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핵무기를 만들고, 핵발전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방사성 폐기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방사성 폐기물은 영원히 남는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과학자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확실해 보이는 지식이 완전한 지식이라고 착각했거나, 아니면 과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해서 방사능으로 인한 폐해를 곧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학의 진보를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일단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행동은 합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고, 사실은 종교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쁜 종교입니다. 이런 과학적 낙관주의는 현대의 미신입니다.

 

보다 많은 정보나 더 나은 이론을 축적한다 해도, 보다 정확한 예측가능성에 도달하고, 엄청난 주의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인간이 과학과 산업 활동에 핵을 이용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방사능과 방사능 폐기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핵발전이야말로 과학의 발전에 대한 막연한 믿음, 언젠가 슈퍼맨 같은 과학적 천재가 나타나서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한 미신적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알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적, 집단적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이야말로 현대문명의 밑바닥에 있는 오만이며, 기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죄입니다. 이것은 과학과 지식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행동할 때 무엇이 우리 행동의 기준과 목적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술가 웬델 베리는 이럴 때 인간 행동의 기준은 기술적 능력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의 성격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추상적인 수치나 진보의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들의 공동체, 인간이 서식하고 있는 세계에 관심을 두는 지식과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핵무기제조계획에 뛰어들었던 과학자들은 사실 애국자들이었습니다. 핵무기계획을 입안한 지도자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조종사들도 일말의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국이란 무엇입니까? 미헬스라는 독일의 작가는 조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국이란 우리가 아이였을 때 저물녘까지 실컷 놀았던 들판이고, 알전구 밑에서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의 따뜻함이고, 소금이나 설탕이나 과자를 파는, 마을에 있던 작은 상점의 진열대를 가리킨다. 열매가 익기를 기다리던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정원에, 바로 그곳에 조국이 있다. 집에서 보이는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 죽 이어진 산비탈의 계단논, 반딧불이가 반짝이던 실개천, 떼 지어 날아다니던 고추잠자리, 멀리서 허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버스, 고갯길을 오르던 추억, 구슬픈 자장가, 축제 때 춤과 음악을 들으며 뛰던 가슴...그것이 조국이다. 인간에게 조국이란 국가가 아니라, 유년시절 우연히 겪었던 한때의 그리운 기억, 희망에 넘쳐 미래를 그렸던 시절의 추억을 가리킨다.”(자급을 다시 생각한다117-8)

 

조국이란 결국 우리 속에 있는 어린 시절이고, 내 안에 있는 어린 아이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린 시절의 강물과 논밭, 계곡물과 반딧불이, 마을의 상점과 친구와 가족을 다 빼앗긴 채 그런 것 말고 또 무슨 조국이 있기라도 한 양 들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어린 시절을, 조국을 빼앗아간 무리들은 끊임없이 숫자를 들이대며 우리를 더 깊은 낭떠러지로 밀어뜨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브랜드지만, 제게 조국은 어린 시절입니다. 핵발전은 우리에게서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빼앗아갈 것입니다. ‘지역과 공동체에 뿌리를 둔 과학이란 바꿔 말하면 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작고 겸손한 과학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는 앞 못 보는 소경을 고쳐줍니다. 그리고 당신을 죄인이라고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9:41)고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것”, 즉 인간의 알지 못함은 죄가 아닙니다.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고, 거기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 실은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주장하고 거기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었다가 고침받은 사람이 그랬듯이, 자신의 구체적이고 진실한 경험을 끝까지 지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삶을 통해 서로에게 전달되는 올바름에 대한 감각’, 그것을 끝까지 신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 보지 못하면서, 사실은 보이는 것만 볼 뿐이면서 본다고 주장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오만이고, 죄입니다. 삶과 세계에 대한 겸허하고 정직한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는 지식, 알 수 없는 깊이와 모르는 차원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지식은 어리석고 파괴적입니다. 체르노빌, 스리마일, 그리고 후쿠시마는 우리에게 그 점을 뼈아프게 알려줍니다새길로고.jpg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1024 2017 [2017.08.06] 단테의 '신곡' 여행 file 2017.08.10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1023 2017 [2017.07.30]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file 2017.08.02 최현섭
1022 2017 [2017.07.16] 내 안의 선악과(善惡果) file 2017.07.18 김용덕
1021 2017 [2017.07.09]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file 2017.07.13 정경일
1020 2017 [2017.07.02] 손의 회복 file 2017.07.13 구미정
1019 2017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file 2017.06.22 박현욱, 정영훈
1018 2017 [2017.06.04] '포도나무 비유'에 담긴 뜻은 file 2017.06.08 장회익
1017 2017 [2017.05.14] 꽃 핀 쪽으로 file 2017.05.17 정경일
» 2017 [2017.05.07]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file 2017.05.12 박경미
1015 2017 [2017.04.23] 하나님의 능력, 우리의 능력 file 2017.04.26 윤여성
1014 2017 [2017.04.16] 부활하신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 file 2017.04.21 김성수, 정공자, 김희국
1013 2017 [2017.04.02] 사랑과 믿음 file 2017.04.04 권진관
1012 2017 [2017.03.26] 사순절 명상-믿음을 버려야 할 때 file 2017.03.31 민영진 목사
1011 2017 [2017.03.19]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file 2017.03.24 정경일
1010 2017 [2017.03.12] 여혐과 민주주의는 같이 갈 수 없다 file 2017.03.22 이숙진
1009 2017 [2017.03.05] 새길교회 창립 30주년 기념주일 말씀증거 file 2017.03.10 최순님, 장숙경
1008 2017 [2017.02.26] 3·1 운동과 기독교 file 2017.02.28 이만열 교수
1007 2017 [2017.02.19] 정의와 평화의 입맞춤: 희년 평화의 오늘의 의미(분배정의, 환대, 긍휼) file 2017.02.23 최만자
1006 2017 [2017.02.12] 이름 불러주기의 힘: 예수 이름의 힘 file 2017.02.17 한완상
1005 2017 [2017.02.05] 사랑은 율법의 완성 file 2017.02.09 추응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