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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성수, 정공자, 김희국



[말씀증거 #1]

 


고통 중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 곁에서

(마가복음서 16:6~7)




2017416

세월호 참사3주기·부활절 기억과 동행 예배

김성수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원)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 마가복음서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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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그리고 부활주일

 

이번 해 부활주일은 공교롭게도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3년 전, 세월호 참사 사건이 터지고 나서 맞이했던 부활주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섣불리 예수의 부활을 말할 수 없었고, 어쩌면 그 상황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3년 전, 그 날의 우리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이 땅에 살아남은 우리는 아파하는 이들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며, 함께 깊은 애도를 이어 나가는 것이 부활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믿고 고백해왔다. 그 날 이후, 그 이전과는 다른 부활 신앙을 살아내려던 우리들의 몸부림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치열했던 3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은 물러났고, 세월호는 인양되어 상처투성이인 병든 몸을 내보이며 우리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와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미수습자들은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토록 외쳤던 진상규명은 아직도 요원하다. 그래서 그 시간은 누군가 그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고통 가운데 견디고 견뎌야만 했던 유가족의 일상을 표현했듯, 시간의 배신이다. 참으로 기뻐 마땅해야 할 부활주일에, 아직도 부활을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이유이다.


삼킬 수 없는 고통

 

시간이 지나도, 세월히 흘러도, 삼킬 수 없는 고통이 있다. 하물며, 그 고통 중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있다.

 

지난 326일 주일 저녁, 나는 안산 분향소에서 예배를 마친 후에, 창현 어머니와 시찬 어머니와 함께 더 진득하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과 여러 기도회와 간담회, 그리고 청운동 피켓팅을 함께 하면서 조금은 더 친숙하게 느껴졌던 창현이의 이야기와 함께, 무엇보다도 그날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듣지 못했던 시찬 어머니를 통해 딸 같았던 아들, 시찬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별히 언제나, 어디서나 말을 아껴 오셨던 시찬 어머니로부터 그간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도 목포신항에 거치된 배를 바라보며 고통을 겪고 있는 미수습자 가족인 다윤이네 가정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 함께 같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서로 가정 간에 교류도 많았던 탓에, 지금도 여전히 딸을 기다리는 다윤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찬 어머니의 심정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찬이는 사건이 터진 20여일 후인 5월 초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지만, 시찬 어머니는 시찬이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다윤이네를 위해 다시 팽목항으로 내려 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해 11, 미수습자 가족이 구조를 하다가 더 이상 목숨을 잃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고, 울먹이며 수습 종료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신 후, 겨울이 다 되어서야 다시 안산으로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인양이 되었다는 소식으로, 이제서야 비로소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그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여전히 말이 되지 못한, 그래서 삼킬 수 없었던 고통은, 무엇보다도 고통 중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내뱉을 수 없는 고통

 

다시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내뱉을 수 없는 고통이 있다. 하물며, 그 고통 중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또 있다.


고통의 크고 작음을 말한다는 것만큼 말도 되지 않고 어리석은 것도 없다지만, 한편 지난한 세월 동안 비록 거칠게 거리에서 싸우면서일지라도,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세월호 유가족 엄마, 아빠에 비해 여전히 고통을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지도 못하는 이들이 바로 희생자의 자매형제들이다. 이들은 아직도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생존자와 희생자의 자매형제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서 몇몇 대목을 나누고 싶다.


상주가 뭔지도 모른 채 형 상주를 했어요중에서 세월호 희생자 정휘범 학생의 동생 정수범 친구는 이렇게 고백한다:


엄마아빠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진도로 가고, 저는 혼자 남았어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촌 형 집에서 조카들을 돌보면서 며칠 지냈어요. 그리곤 420일이 되기 전에 제가 진도로 내려갔어요. 저도 알아야 되니까요. 부모님들의 모습이 너무 처참했어요. 정말 힘들어 보였어요. 그때 당시는 엄청 혼란스러웠잖아요. 그걸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저는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다음 날에 안산으로 올라왔어요. (중략)

 

아빠가 상주는 저보고 하라고 하셨어요. 중학교 2학년 나이에. 상상도 못했고, 그냥 마음이 무거웠어요. 형이 마지막 가는 자리에 제가 책임자로 있다는 게 마음이 아프면서도 책임감이 생겼어요. 어떻게 해야 될 지, 그때 무슨 심정이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만 기억나요. (중략)

 

화장할 때는 엄마가 쓰러지셨어요. 뜨거운 데를 니가 왜 들어가냐고 하시면서. 근데 제가 정말 마음이 아팠던 게, 엄마는 힘들어하는 걸 밖으로 표현을 하셨는데, 아빠는 약간 저랑 같은 스타일이어서 겉으로 내색을 못하는 거예요. 엄마는 사람들이 다 챙겨주는데, 아빠도 힘드신데 잘 안 챙겨주니까, 아빠한테 저는 그게 제일 미안한 거예요. 살면서 아빠가 우는 걸 못 봤어요. , 한번 있었다, 교실에서. 발인할 때, 단원고 교실에 가서 형 자리에 딱 앉았을 때, 아빠가 오열하셨어요. 그게 너무 안쓰러워 보였어요. 실감이 도무지 안 났어요.” (p.43~44)


또 같은 책의아픔은 있지만 보듬어 주고중에서 세월호 희생자 이지민 학생의 동생 이정민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아빠가 그렇게 열심히 싸우고 다니실 때, 도와드리고 싶은데 도와드리지 못해서 미안하고 너무 슬펐던 것 같아요.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우리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사건 나고서 팽목항에 있는 엄마를 처음 봤을 때, 보자마자 엄마가 힘들다는 걸 느꼈어요. 얼굴도 새까맣게 탔는데, 표정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쭉 힘드실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동생이지만, 자식과 형제는 좀 다른 의미니까. 제가 감히 알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으니까. (중략)

 

그런데도 가끔은 약간 서운할 때도 있었어요. 뭔가 중요한 저만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려고 하면, 엄마가 신경을 안 쓰는, 그런 느낌이 들 때요. 엄마가 다같이 힘든데 넌 너 혼자만 생각하느냐, 지금 그럴 시기냐,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엄마도 많이 힘드셔서 그러는 거 아는데, 그게 정말 너무 상처가 된 것 같아요.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괜히, 알았어, 신경쓰지 마, 하고 문 닫고 들어가고, 짜증내고, 툴툴 거리고.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이걸 말해야 했다가도, 엄마아빠가 너무 힘드니까, 내가 이걸 뭐하러 얘기하지, 그러곤 속에 묻어두기도 하고.” (p.94)


마지막으로그렇게 안 살기로 다짐했어요중에서 세월호 희생자 박성호 학생의 누나 박예나 씨는 이렇게 전한다:

 

다른 어른들이 아직도 저희한테 얘기하세요. 너네가 힘들어하면 안 된다. 진짜 그 말은 좀 그만 듣고 싶거든요. 우리도 감정이 없는 로봇이 아니잖아요. 동생 장례 치를 때도 동생 시신 상태가 어땠냐고, 저한테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어요. 엄마한텐 차마 못 물어보겠으니까. 부모님 쉬시게 이제 너희가 좀 해라, 그런 걸 너무 많이 겪으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리 상태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말을 안 하니까 모르는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저희들의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p.219)


이렇게 생존학생, 또 희생자의 자매형제들의 이야기에는 이 사회의 통념이 만들어낸 아픈 흔적과 상처들이 여전하다. 누군가는 어른들의 보호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헤아릴 기회를 갖지 못했고, 누군가는 이제 너희가 잘해야 한다는 당부와 재촉 탓에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고, 자신의 상처를 돌볼 여력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엄마와 아빠가 힘겨워 할까봐 눈물을 머금고 삼키며 울지도 못했던 자매형제들, 따가운 시선으로 언제나 자신을 숨겨야만 했던 자매형제들, 어른이 되기 싫어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자매형제들.


이렇게 여전히 말이 되지 못한, 그래서 내뱉을 수 없었던 고통은, 무엇보다도 고통 중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던 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예수님은 어디에?

 

부활하신 후,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고 증언하는 모습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다. 416일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는 오늘, 무엇보다도 이 부활주일에,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 창현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문의 일부를 나누며 글을 마친다.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을 때 망연자실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사무소에도, 침몰 지점이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 주시던 따뜻함 속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길로고.jpg






[말씀증거 #2]

 


단원고 2학년 예술가들, 박예슬과 빈하용



2017416

세월호 참사3주기·부활절 기억과 동행 예배

정공자 자매(화가) 

 


2014412, 토요일이었던 그날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5일후 삼우제를 지내면서 친척들과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세월호 참사 소식을 접했다. 그 시각 뉴스가 전하기를 "전원구조"라고 했기에,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우리 가족의 슬픔이 너무나 깊었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들려오는 소식들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로 이어졌다

 

사실 그 때의 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 생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 우울증을 겪기도 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나 슬픔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더해진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내 마음을 더더욱 약하게 만드는 일이었기에, 일부러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광화문 광장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때도 나는 그쪽으로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늘 뭔가 빚진 것 같은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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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서촌에 있는 한 갤러리에서 단원고 학생 희생자 중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박예슬 양과 빈하용 군의 그림을 모아 전시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렇게 진행된 전시장 소식을 뉴스와 SNS 를 통해 계속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후에도 마음이 무거워 차마 갤러리로 향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겨우 용기를 내어 박예슬 학생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갤러리에 가게 되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갤러리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서부터 가득 메워진 관람자들의 안타까운 메시지들과 예슬이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 오면서,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져 계단을 오르기가 힘겨웠다. 하지만 갤러리의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웠던 마음에 보상이나 해주는 듯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너무나 예쁜 아이의 목소리와 밝은 모습, 그리고 바로 상품으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는 세련된 구두 스케치와 귀여운 그림들이 가득했다. 실제로 디자인된 그림 그대로 만들어진 의상과 구두들도 눈에 들어왔다. 뛰어난 감각은 물론이고 맑은 생기가 넘쳐나는 느낌을 받아 무거웠던 마음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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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는 서촌에 갈 때마다 참새 방앗간 들르듯 그냥 갤러리에 들러 사람들이 놓고 간 다양한 메시지와 꽃들, 과자나 케잌 같은 먹거리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갤러리 관계자들과 함께 다음 전시인 빈하용의 일러스트 전시회를 기획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전시 준비를 위해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갤러리 벽에 색을 칠하고 작품 스티커를 붙이고 액자를 만들고 그림을 거는 일을 했고, 순번을 정해 매일매일 전시장을 지키는 일도 함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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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함께 만들어 간 하용이의 전시는 그림작업을 하는 내게 좀 남다른 영감으로 다가왔다. 희생자나 학생 작품이라는 선입견을 떠나 하용이의 상상력은 감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재능이 보였기 때문이다. 주로 혼자 집에서 그림 그리는 걸 즐겼다는 하용이는 동물도감을 찾아 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집중력이 좋아 공부도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는 어머님의 말씀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반복되는 선의 느낌이나 탁월한 색상 등에서 뛰어난 감각이 느껴졌다. 게다가 노트나 가정통신문 등 손에 잡히는 종이에 거침없이 그려낸 그의 상상력과 표현 능력은 기성화가들이 보더라도 부러움을 살만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그의 재능에 질투심까지 느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봉사라는 일이 늘 그렇듯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결국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처럼 유가족들을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치유되는 나의 상처들, 또 새롭게 보여지는 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014년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시간들이 그러한 경험들로 채워져갔다.

 

내 아버지는 생전에 병으로 앓고 계셨음에도 마지막 가시는 길은 병원에서 보내길 원치 않으셨기에 늘 앉아 계시던 집 거실에 누워, 늘 즐겨 들으시던 음악을 들으며,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년 온갖 꽃이 만발하는 이 계절이 오히려 슬프게만 느껴진다하물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이들의 죽음을 맞아야 했던 세월호 유가족과 아홉 분 미수습자 가족들의 참담한 마음... 나는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새길로고.jpg






[말씀증거 #3]

 


오직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2017416

세월호 참사3주기·부활절 기억과 동행 예배

김희국 형제(관세사) 

 

3년 전, 416일 오전 850,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의 병풍도 인근을 지나가던 세월호가 갑자기 우회전하면서 표류하다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불과 30분 만에 40도 가량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1030분에 세월호는 완전히 뒤집히면서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기울어지기 시작한지 불과 101분 만이다. 승선인원 476명 중 안타깝게도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3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홉 명은 아직 미수습 상태다.

 

운항해서는 안 되는 불법증축을 한 위험한 배를 운항하였고, 화물을 많이 싣기 위해서 배의 균형을 유지하는 평형수를 덜어 내었고, 선장과 선원들이 도주하면서 승객들에게는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라는 방송을 집요하게 10여 차례나 되풀이하여 승객들의 탈출기회를 막았다. 골든타임을 허비한 구조대의 늑장 출동과 해경의 소극적인 대응, 무엇보다 절체절명의 생명 구조시간에 일사불란하게 구조지휘를 해야 했을 대통령과 관련 공직자의 직무유기, 그야말로 총체적인 부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있어서는 안 되는 참사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이러한 부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지켜졌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모두 구조가 되거나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국민이 이게 나라냐?”고 물으며 억장이 무너질 때 진실을 밝히고 유가족을 위로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권은 오히려 유가족들을 생떼를 쓰는 몹쓸 사람들로 비난하며 모욕하고 국민을 이간질하였고, 진실규명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극우수구세력들을 부추겨 폭식투쟁을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패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십자가를 메고 걸으며, 안산분향소에서 광화문광장에서 국회의사당에서 청운동에서 동거차도에서 풍찬노숙하며 진실을 밝히기를 호소하는 유가족들의 피맺힌 절규에도 불구하고 파렴치한 정권은 온갖 핑계를 대며 언론과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거짓을 퍼뜨리고 끈질기게 방해공작을 했다.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던 무능한 정권은 거짓 공작에는 무척이나 유능했고 몸서리치도록 잔인하기까지 했다. 어렵사리 시작된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도 조사권과 기소권도 없는 상태에서 예산마저도 배정되지 않아 급기야는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3년이 된 오늘까지도 우리는 세월호가 왜 침몰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수많은 어린 학생과 승객들을 왜 구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암흑의 시기를 지나며 자책도 하고 깊은 좌절도 경험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을 딛고 일어섰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스스로 인명구조에 나서고 구명조끼를 서로 나눠주며 격려했던 아이들이 있었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학생들을 구한 선생님들이 있었다. 1,100일에 가까운 긴 시간동안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꿋꿋이 진실을 밝히는 일에 앞장서온 유가족들이 있었다. 또한 유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각자의 삶터에서 거리에서 기꺼이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이웃들이 있었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더불어 사는 안전한 사회로 가야 한다고 믿고 행동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난겨울 온 나라의 광장에서 거리에서 지극히 숭고하고 평화로운 촛불시민혁명이 불붙었고, 급기야 촛불의 파도가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청와대와 권력 핵심부의 가짜와 껍데기들을 모조리 쓸어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공교롭게도 불의한 권력이 촛불에 의해 구속이 되는 날 세월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참혹했다. 바닥을 드러내고 옆으로 드러누운 세월호는 마치 만신창이가 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크고 작은 수많은 구멍이 뚫렸고 사고 원인을 밝힐 앵커와 스태빌라이저도 사라지고 선미의 램프도 절단되었다. 그 외 수많은 증거들이 인양과정에서 치워지거나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의 선체 훼손을 막고 미수습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가족 품에 돌아오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세월호를 비롯하여 고통과 아픔의 현장인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주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THAAD를 반대하는 성주주민, 고리 영월 등 핵발전소, 날마다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산업현장, 비정규직 노동자, 절망에 빠진 헬조선의 청년들,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빈곤노인 그리고 남북분단의 현장인 휴전선 등 아픔이 켜켜이 쌓인 곳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세월호를 외면한 채 그 아픔을 치유하지 않는 한 그 외의 어느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사실 이 아픔 모두가 세월호다. 현재 겪고 있는 세월호의 비극은 앞으로 있을 더 큰 재난을 예고하는 징후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다.

 

아모스 선지자는 오직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의를 시냇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항상 흐르게 하라고 말한다. 그 어떤 권력도 불의를 참지 않고 행동하겠다는 시민들을 결코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함께 연대하고 참여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있는 한 진실은 침몰하지 않고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다. 캄캄한 물속에 잠겨있던 세월호가 밝은 세상으로 나왔듯이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세월호 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모든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과 심판이 이루어질 때 참사 이전과는 다른 사회가 시작될 것이다. 오직 정의가 강물처럼 시냇물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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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본다. 이 고장난 나라를 안전한 나라로,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나라,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나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시민의 나라로 만들어 나갈 때 3년 전 416, 못다 핀 푸른 꿈을 안고 하늘나라의 별이 된 안산 단원고 2학년 어린 학생들이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우리들에게 찾아 올 것이다.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희망을 열어 나가자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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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2017 [2017.02.19] 정의와 평화의 입맞춤: 희년 평화의 오늘의 의미(분배정의, 환대, 긍휼) file 2017.02.23 최만자
1006 2017 [2017.02.12] 이름 불러주기의 힘: 예수 이름의 힘 file 2017.02.17 한완상
1005 2017 [2017.02.05] 사랑은 율법의 완성 file 2017.02.09 추응식
1004 2017 [2017.01.26] 하나님의 날카로운 평화 file 2017.02.02 변상욱
1003 2017 [2017.01.19] 바울을 움직인 핵심원리 file 2017.01.25 김응교
1002 2017 [2017.01.15] 모래와 소금 file 2017.01.25 정경일
1001 2017 [2017.01.08] 연대: 예수 이름으로 file 2017.01.12 안인숙
1000 2017 [2017.01.01] 정의의 하느님 file 2017.01.06 길희성
999 2016 [2016.12.25] 나의 크리스마스 file 2016.12.29 김두현, 김옥순
998 2016 [2016.12.18] 되어주는 이웃 그리고... file 2016.12.23 최현섭
997 2016 [2016.12.04] 다시, 길을 떠나며 file 2016.12.09 정경일
996 2016 [2016.11.13] 구원이야기의 평신도 신학성 file 2016.11.17 평신도 신학팀
995 2016 [2016.10.30] 샬롬으로 만물을 새롭게 file 2016.11.11 한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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