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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7.04.04 16:08

[2017.04.02] 사랑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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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사랑과 믿음

(누가복음서 7:36~47, 8:43~48, 고린도전서 13:13)


201742일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

(새길교회 신학위원)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없애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였다. “더 많이 빚을 없애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판단이 옳다.” 그런 다음에, 그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 누가복음서 736~47-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는데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쳐주지 못하였다.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이 모두 부인하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누가복음서 843~48-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 고린도전서 1313-

 

저는 오늘 두 개의 이야기를 누가복음서에서 선택했습니다. 이야기하기의 방식은 예수가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만을 선택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두 개를 선택한 것은 간단한 비교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죄를 사하시거나 구원을 선포할 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드물게도 누가복음서 7장의 이야기에서는 사랑으로 구원받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7장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7장의 본문은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은 옥합을 들고 들어온 여인에 대한 얘기이고, 그 다음은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예수의 이 여인에 대한 대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밥상에 앉으셨는데, 이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집에 들어와 예수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등 뒤로 와,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요한복음서 123절에 마리아라고 하는 예수에게 충실한 여인이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발에 붇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고 했는데, 누가의 이야기에서는 먼저 눈물로 발을 적시고 그것을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춘 다음에, 향유를 발랐다고 했습니다. 정말 지극한 표현입니다. 예수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여자의 머리카락은 여성성을 말하며, 특히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귀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그리고 그가 흘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겨주었고, 여기에다가 그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며, 자신에 겸손이요, 예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이 여인과 예수 사이에 일어났는지 도저히 모릅니다. 모든 것을 생략하고 갑자기 등장한 이 여인은 곧바로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줄기의 이야기가 뻗어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와 바리새파 사람인 시몬과의 대화인데, 시몬이 혼자 중얼거리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저 여자는 죄인인데했습니다. 이러한 시몬의 의혹에 대해서 예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바리새파인인 시몬이 대답하기를,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말하였다. “당신 판단이 옳다.” 그런 다음, 예수가 그 여자에게로 몸을 돌리시고, 다시 시몬에게 이렇게 대화합니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을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이 여자와 바리새인 시몬의 행위를 여러 면에서 대조하면서 이 여자가 훨씬 더 값진 대접을 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시몬은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이고, 그래서 작은 사랑을 할 줄밖에 모르지만, 이 여인은 많은 사함을 받아서 큰 사랑을 할 줄 안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거니와,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랑에 의해서 확정된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랑이 더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곧 구원을 내포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두 번째 텍스트는 누가복음서 8장의 43절 이하의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출혈이 나은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을 때, 이 여인은 두려워 떨며, 예수께 엎드려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낫게 된 연유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예수의 대답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하고 말씀하시는 따뜻한 대답이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보면 구원이나 죄 사함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되어있는데, 바로 앞의 이야기에서는 드물게 구원은 사랑에 의해서 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향유를 바른 여인은 예수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린 사람이었고, 이제 모든 것을 잃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댄 혈루병 환자는 예수로부터 능력을 능동적으로 얻어간 사람입니다. 한쪽은 준 사람이고, 다른 쪽은 받은 사람,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탈취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사랑을 주었고, 탈취한 사람은 믿음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저는 오늘 사랑에 대해서 좀 중점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에게 믿음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 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구호가 개신교를 믿음의 종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올해가 개신교 종교개혁의 500주년이 됩니다. 1517년 루터의 비텐베르크 종교개혁 이후 딱 500주년이 되는 지금 오직 믿음으로만의 구호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원래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개신교 정통주의는, 사랑의 행동 없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정통교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조주의, 보수주의, 권위주의, 교권주의로 흘러갔습니다. 믿음으로만 이라고 하는 , sola 라는 말은 문제가 있지만, 사실, 믿음이란 것은 좋은 것입니다. 믿음은 변치 않음, 확고함, 흔들림 없음을 가리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믿음의 확고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믿음과 사랑 사이에도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변치 않는 확고함이기도 하니까요. 사랑과 믿음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석문의 전설이라고 하는 이야기인데,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촛불을 켜고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신랑이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서 문을 차고 달려 나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려서 찢겨 나가고 말았다. 밖에 나간 신랑은 신부가 음탕해서 예절을 읽고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줌을 누고는 그길로 집을 떠나버렸다. 다음날 신부 집 사람들이 신부 방문을 열면 그때마다 문을 여는 사람은 그만 질색하여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방은 문이 닫힌 채로 40여 년이 지났는데 옛날 신랑이 뜻밖에 딴 볼일이 있어서 그 집 옆을 지나가다가 문득 그 집에 들러서 방문을 열었더니 신부는 40여 년 전 그날 밤 그 모습으로 원삼 입고 족두리 쓴 채 앉아 있었고 문돌쩌귀에는 그때 자기의 찢겨진 옷자락 조각이 걸려 있어서 그날 밤의 성급했던 자기의 오해를 알게 되었다. 신랑은 측은한 마음,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신부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는 이야기.

 

석문의 전설은 한국의 민담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한국인이면서 크리스천이므로 두 이야기 즉 민담과 같은 오래된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고, 또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자라왔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어렸을 때의 우리에게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예수가 중심이 되고 예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힘이 있는 분으로 이야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담인 석문의 전설에는 그러한 존재는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행위만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시대의 문화적인 배경이 그 안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생각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성급한 남자의 잘못을 나무랐고, 어떤 학생은 이 여자가 이 남자를 정말 사랑해서 기다렸다고 보았고, 또 어떤 학생은 여자가 대단한 사람이며,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학생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이 여자를 좀 우둔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여자가 한을 가지면, 이렇게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한이 많으니 몸도 썩을 수도 없었다고 본 것이지요. 원한을 말합니다. 이 여자를 원한의 여자로 보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그냥 앉아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버선발이라도 뛰어나가서 신랑을 잡았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신랑이 뒷간에 갔다가 곧 돌아올 것이었다고 본다면, 버선발로 금방 뛰어나가서 붙잡거나 찾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한 시간 정도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면 나가서 찾아보아야 했을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토리는 그렇게 우리의 추리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추리하도록 허락해 줄 뿐, 자세하게 말해 주지는 않고, 축약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나는 이 석문의 전설을 다른 기회에 해설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신부는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이 신부는 억울하게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든 증거물들을 보호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방을 들어올 수 없게 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이 신부는 신랑으로부터 자기의 결백을 증명받기 위해 믿음의 행위를 한 것입니다. 작가 조지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한이 얼마나 집요하고 강인하기에 40년이 넘도록 신부는 죽어도 시신이 썩지 않고 한풀이 해명의 때를 기다렸다. 믿음이란 끈질김, 강인함, 흔들림 없고 변함없음을 가리키는데 이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의 역할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급했던 예전의 신랑은 비록 그가 40여 년 후 후회를 했어도, 바리새인 시몬보다도 못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한심하고 답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신랑의 모습에서 나의 지나온 모습을 많이 봅니다. 성급하게 판단했던 모든 것들이 기억납니다. 이런 모습은 바꿔야한다는 생각이 생깁니다. 우리가, 중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좋은 이야기를 읽던가,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그 판단을 하는 데에 중요한 도움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처럼 이야기가 우리를 바꾸어 줍니다.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A Story Changes Us." 이 대화는 제가 해적이라고 하는 어느 영웅담의 영화를 보는 중에 들은 대사입니다.

 

석문의 전설을 가지고 학생들과 이야기하다가 학생들 다수가 이 신부가 진정 사랑을 아는 사람이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측면을 내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신랑을 사랑했기 때문에 신랑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이 여자가 무서운 독심을 품고 원한을 품고 한이 풀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여기에 사랑이라는 요소가 있었다고 하는 새로운 해석을 학생들이 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 이야기는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한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이야기, 순애보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없다면, 그건 정말로 메마르고 팍팍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믿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 믿음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삶의 뼈대가 무너지고 마는 것인데, 그러나 그 믿음만 가지고는 우리의 삶이 완전해 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삶이 완전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믿음은 같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야기 중에는 반복이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 의식과 무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합니다. 콩쥐팥쥐 이야기나, 신데렐라 이야기나, 심청 이야기, 춘향 이야기 등등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춘향인줄 알았더니 향단이었더라는 정치권의 코멘트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말이지요.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성장했습니다. 이야기는 거친 바다 위를 항해하게 해 주는 배와 같은 기능을 우리 인류에게 해 주었다고 봅니다. 거친 바다는 그야말로 위험하지요. 우리 삶도 그러한 것입니다마는 태초의 인류를 가르치고 험난한 파도가 넘실되는 바다를 항해하는 인류의 운명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게 도와 준 것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성서의 이야기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반 이상이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이 크리스천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해 왔고, 성서의 이야기들은 크리스천들의 생각과 감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왜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왜 늘 듣는 이야기가 새롭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다양해서 그때마다 새로운 맛을 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간략하게 기록된 이야기는 다양하게 각색되고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인류의 귀한 유산 중 하나인 음악을 우리가 반복하여 듣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감동을 가지며 듣게 됩니다. 왜 같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새로운 감동을 가지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새롭게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이 인류에 계속해서 회자 되며, 그리고 새롭게 감동은 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그것은 그 이야기가 우리들의 새로운 상황 속에서 새롭게 들려지기 때문이고, 그 이야기가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이해와 통찰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서 7장의 죄를 진 여자의 이야기는 문학적으로도 인류의 어떤 이야기와도 비견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듣고 그때마다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야기에는 항상 난해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분명한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서 매우 조직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도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화자는 누가 복음서 기자입니다. 기자는 한 여인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들어와서 예수에게 와서 예수의 뒤에서 그의 발에 눈물을 흘리며 적시고 그의 머리로 발을 닦아주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에게는 이러한 장면이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진단은 간단합니다. 이 여자는 죄인이므로 예수에게 그 어떤 형태로든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여자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대략 추측하기로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여성이었을 겁니다. 당시의 시민이요, 사회적 지도자였던 시몬으로서는 자기가 마련한 식탁에, 이 하찮고 낮은 계급의 이 여인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이 여인의 행위를 모두 받아들이자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침묵하고 있던 예수가 입을 엽니다. 이제부터는 예수가 화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탕감해 주면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당연히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탕감해 준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난해한 문제입니다. 이야기는 이런 난감한 질문들을 던져놓습니다. 탕감을 많이 받은 사람이 감사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그러한 것을 숫자적으로나, 산수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따지지 않고, 이렇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47) 이 여인이 탕감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했기 죄를 탕감 받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제까지는 탕감 받은 양만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놓고,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사랑한 만큼 탕감 받고 구원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구원을 가져온다, 사랑이 전부이고 사랑이 으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이 여인이 자기 머리카락, 눈물로, 향유, 그리고 입술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믿음은 대략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랑은 좀처럼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수많은 사상가, 신학자들이 사랑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아직도 미정의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검토했고, 사랑을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로 구분해 보았고, 진정한 사랑은 대상의 좋은 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아직 확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적어도 이런 것이라고 바울 선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 중에서 눈에 띄는 것만 읽는 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기도.

주여, 저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시고, 우리 삶의 굽이굽이마다, 그리고 지나온 자취마다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사랑만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제 생명의 계절, 부활의 계절이 왔습니다. 저희들을 계속 이끌어주시고,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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