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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민영진 목사



사순절 명상-믿음을 버려야 할 때

(요한복음서 9:39~41)

2017326일 주일예배

민영진 목사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 요한복음 939~41-

 


 

사순절

교회력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금년 2017년에는 지난 31, 우리 주님의 광야 40일 금식을 회상하고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는 성회수요일부터 시작하여, 415일 토요일, 부활주일 직전까지 여섯 주간이 사순절 기간입니다. 326일인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네 곳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기상 16:1-13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왕이 다스리는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진입합니다. 왕의 노예였던 이들이었기에 왕 없는 나라를 세웁니다. 반왕정 이데올로기 때문에 열두 지파는 지파동맹 체제를 만들고 각 지파는 재판관[사사(士師)]이 다스립니다. 군대조직이 없고, 전쟁이 나면 지원병이 침략을 막고, 전쟁이 끝나면 지원병은 일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잦은 전쟁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지도자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을 통솔하여 방어전을 펼칠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삼상 8:1-5). 이 일로 마음이 상한 사무엘이 하나님께 여쭙습니다(삼상 8:6).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날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삼상 8:7)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양보하십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왕정제도의 폐단을 경고하며 마지못해 왕 세우기를 허락하면서도 백성이 한 번 더 고려할 것을 요청합니다(삼상 8:6-18). 그러나 백성은 왕 세우기를 줄곧 요구합니다(삼상 8:19-20).

 

사무엘이 왕으로 세울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사울이란 사람을 면접합니다(삼상 9). 사람이 겸손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지도자로 세웁니다(삼상 9:26-10:16). 비밀리에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그를 왕으로 임명합니다(삼상 9:27b-10:1). 곧이어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백성의 대표들 앞에서 절차를 밟아 공개적으로 사울을 왕 후보로 뽑습니다(삼상 10:17-24). 백성 일부가 사울의 왕위 즉위를 반대합니다. 사무엘이 서둘러 길갈에서 사울 왕 즉위식을 거행합니다(삼상 11:12-15). 그리고 사무엘은 정계와 종교계와 통치체제에서 은퇴합니다(삼상 12). 사울이 이스라엘 사방의 대적들을 평정합니다(삼상 14:47-15:9).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전쟁에서는 전리품의 노략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 법을 어깁니다. 전쟁하는 동안 사울은 적군의 완전진멸(完全殄滅)”이라고 하는 진멸법(殄滅法)(HEREM)을 위반합니다. 노획물(鹵獲物) 중에서 일부를 진멸하지 않고, “남겨서 가져옵니다”(삼상 15:7-9). 핑계는 제사에 바칠 제물로 양떼와 소떼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을 살려두었다고 합니다. 진멸법은 가나안 문화에 오랫동안 쌓여서 깊게 뿌리내린 폐단(弊端), 요즘 말로 적폐(積弊)”를 발본색원해야 하는 거룩한 전쟁이었는데, 사울의 이러한 행위는, 국익이나 제사(종교)에 득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노획물을 진멸하여 없애버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익을 취하거나, 국가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결과적으로는 없애야 할 적폐의 뿌리를 그대로 남기는 행위입니다. 그것도 군통수권을 가진 왕이 군대의 압력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이 직접 싸우는 야훼의 전쟁이 지닌 목적에 대한 배신입니다. 사울 왕이 군부 세력과 함께 진멸법을 제한적으로만 적용한 것은, 종교가 이유였고, 믿음이 핑계였습니다(삼상 15:10-21). 국익, 혹은 전통 제사종교를 위한 불법 자행이 허용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군의 압력으로 불법을 저지릅니다(삼상 15:21, 24). 변명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나무랍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사무엘과 사울의 인연은 이렇듯 각별한데, 사울이 더 이상 왕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 때문에 사무엘이 괴로워합니다. 자기가 임명하여 세운 왕을 자기 손으로 폐위시켜야 하는 사무엘의 왕에 대한 충정이 하나님에게 꾸중을 받습니다. “사울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내가 이미 그를 버렸는데, 너는 언제까지 사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냐?”(삼상 16:1a)

 

은퇴한 사무엘에게 마지막 임무가 남습니다. “너는 어서 뿔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길을 떠나,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거라. 내가 이미 그의 아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한 명 골라 놓았다... 너는 내가 거기에서 일러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 (삼상 16:1b, 3b). “뿔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관용구입니다. 다른 왕을 옹립할 준비를 갖추어 가지고를 뜻합니다. 왕 후보는 복수(複數)의 사람을 상상할 뿐, 아직 지명된 구체적 한 인물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일곱 명, 혹은 여덟 명, 혹은 열 한 명을 면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윗이라는 이새의 막내아들이 바로 후임 왕으로 선정된 인물임을 압니다.

 

마치 사무엘은 오늘날 차기 대통령을 선거로 뽑아야 하지만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지 모르는 우리 국민을 대표한 것과 같습니다. 왕 후보에 오른 이새의 아들 숫자가 7에서 11명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구약의 기록은 지금 네 개 정당과 무소속과 그 밖의 제3지대에서 나올 수십 명의 자천 타천 후보군들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의 시대는 끝나고, 다윗의 시대가 열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사순절 기간에 왕권이 바뀌는 이 본문을 읽습니까? 교회는, 기독교라는 한 종교는, 그리고 우리 국민은, 집권자는, 입법부는, 사법부는, 행정부는, 군부는, 제각기 각자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쌓인 적폐를 청산하고 참회하고 자숙하고 자정해야 한다는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시편 23:1-6

오늘의 시편 본문은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는 시편 23편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삶의 여러 국면, 여러 환경에서 애송할 수 있습니다. 금식(禁食), 고행(苦行), 참회, 자선, 묵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이 사순절 기간에, 특히 단순히 개인적인 참회에서 머물지 않고,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를 포함한 국가적 국제적 참회로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이 사순절 기간에, 인간이 하나님의 극진한 손님이 되어 대접받는 이 시편을 다시 읽습니다. 더욱이 이미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울의 뒤를 이어 새로 왕이 된 바로 그 다윗의 이름으로 된 이 시를 읽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우리나라의 국정을 40년 전부터 어지럽혀 왔던, 한 때 목사로까지 알려졌던 최 모씨의 묘비에는 바로 오늘 우리가 읽는 시편 성서일과 231-3절이 새겨져 있습니다(개역한글판). 어디 그 뿐인 줄 아세요? 대통령까지 탄핵을 당하는 일에 연루된 강남구 논현동의 모 성형외과 주인도 교인인 것 같습니다. 그의 병원 출입문 오른 쪽 벽에도 시편 231-6절이 영어 NIV 번역으로 적혀 있는 것이 TV 뉴스 화면에 나온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3절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은유로 고백하는 시인의 독백입니다. 피조물을 보살피시고, 아쉬움이 없도록 넉넉히 공급하시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4-6절은 하나님을 향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2인칭 단수로 언급이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시인에게 베푸신 보호와 인도를 고백합니다. 시인을 괴롭히던 원수들 보라는 듯이 시인을 당신의 식탁에 극진한 손님으로 초청해주시는 감격을 고백합니다. 거절할 수 없이 마구 추격하여 이 시의 화자(話者)를 공격하듯 덮쳐오는 하나님의 선하심(TOV)”인자하심(HESED)”, 시인은 지금 복에 겹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 는 지금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라고 다짐하고 고백합니다. 자숙과 참회와 자정으로 우리가 받는 보상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여기 처럼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탄핵 정국을 지나면서 입장을 달리하는 우리 국민들은 지금 많이 지쳐 있습니다. 이제 새 대통령 선거를 앞 둔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시편 23편의 시인이 누리는 정서적 안정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작년 10월 말 이후 지난 310일까지 우리국민은 시편 시인이 말한 것처럼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지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1-4절의 목자와 양 은유가 5절에서는 왕과 그의 식탁에 초대받은 귀한 손님(VIP) 은유로 바뀌고 있습니다. 서로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장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 국민이 금년 봄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다 중국과 일본이 부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 받는 귀한 손님으로서, 하나님께 환대받는 이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극진한 손님으로 초대받아 술잔이 넘치도록 대접을 받는 이런 이미지의 배경은 궁중에서 베풀어지는 왕의 만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극진한 손님으로 맞아주신다는 히브리어의 숙어적 표현입니다. 영어번역들 중에서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신다는 이 말을 “You welcome me as an honored guest”라고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TEV).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가는 우리 국민이 이러한 환대를 받는 날이 속히 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손님이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때 우리 국민이 큰 위로를 받게 될 것이고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게 될 겁니다.


에베소서 5:8-14

오늘의 사도서신 에베소서 58-14절을 봅니다. 사도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둠의 사람들이었으나 이제는 주님에게 속하였으니 빛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빛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빛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온갖 선한 열매와 의로운 결실과 참된 수확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바로 빛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어둠은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사도서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바로 11-13절입니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暴露)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暴露)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5:8-13)

 

빛의 사람들이 해야 할 기능 중에 하나가 어둠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몰래 저지른 일”, “어둠속에서 몰래 자행된 부끄러운 일들폭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같은 문맥 안에서 빛의 사람들어둠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폭로하라고 두 번씩이나 거듭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년 10월 이후 지난 5개월 동안 광장에서 타오른 촛불에서 이 빛의 작용을, 작은 촛불 빛이 지닌 가공할 폭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빛이 있어서 지난 10월 이후 지금까지도 어두운 곳을 거점으로 1,476일 동안 자행되었던 부끄러운 일들이 계속 폭로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구중궁궐 속 같은 은밀한 곳에서 저질러진 불법이 달을 거듭하면서 이처럼 줄곧 폭로된 적은 일찍이 우리 역사에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폭로는 더 이어질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 21-12절에는 불법/무법의 메커니즘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무법이나 불법이 힘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 힘의 활동이 신비에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 힘을 휘두르는 불법자도 신비에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불법자/무법자가 쫓겨나기 전까지는 그 불법자/무법자와 관련된 불법과 무법이 세상에 폭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법의 하수인들이 직무정지를 당하거나 구속되거나 하여 그들의 행동이 제한을 받게 될 때 비로소 불법의 비밀이 줄줄이 엮인 타래가 풀리듯 그렇게 폭로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로에는 빛의 사람들이 한 몫 크게 합니다. 무법/불법이 폭로된 후에는 무법자/불법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구경할 수 있도록 진열장(陳列欌)에 진열(陳列)것이라고 합니다. TV나 휴대폰 화면에, 모니터에, 버젓이 공개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76년 미국 영화 All the President’s Men(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몇 개월 동안 줄곧 이런 현상에 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진열장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녀가신 파루시아”(재림)의 흔적도 함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요한복음서 9:1-41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요한복음서 9장 전체 1-41절입니다. 에베소서 5장과 이어지는 공통의 주제는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9:5). 이것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의 시력을 회복시켜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맹인이 속해 있던 종교는, 이 맹인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의 죄든 자신의 죄든, 죄 때문에 맹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침 예수께서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사건이 발생한 것이 노동을 금지하는 유대교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의 치료 행위가 노동으로 판정되고 예수는 안식일에 병을 고쳤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죄인으로 판정됩니다. 눈이 밝아진 전 맹인은 자기를 고쳐준 이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속한 종교는 줄기차게 치료 과정을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히 신문하고, 부모에게 까지 확인하고 또 본인에게도 재차 확인합니다(9:23).

 

맹인이었던 이 젊은이는 자기 종교가 자기를 고쳐준 그 사람을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드디어 그 청년은 유대교 율법 중 안식일 노동금지법을 어긴 것으로 인민재판을 받아, 유대교 회당 곧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납니다. 맹인 된 것을 죄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종교,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젊은이가 시력을 회복했으면 그 공동체가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안식일 노동 금지법을 어겼다고, 고쳐준 이와 고침 받은 이를 한꺼번에 유죄판결을 내린 종교, 그 종교를, 그 믿음을, 이 젊은이는 버립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미 5장에서, 베데스다 못가의 중풍병자가 평생 믿어 온 믿음을 떠나 비로소 병도 완치되고 새로운 도를 따른다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5:1-16). 불구의 몸이 삼십여 년을 넘게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서 기다립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으면 제일 먼저 뛰어서 들어가는 병자는 무슨 병이라도 낫는다고 해서 그 수많은 병자들 틈에서. 앞 못 보는 이들과 걷지 못하는 이들과 중풍으로 누워 있는 이들이 병 나을 기회를 기다리지만 물이 움직일 때마다 오직 한 사람,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그 한 사람만이 병을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5:4). 이게 얼마나 잔인한 처사입니까! 차라리 순서대로 번호표를 주어서, 가끔 한 사람씩만 치유를 받게 한다는 것도 못할 짓인데.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이”(5:3) 무슨 수로 제일 먼저 그 못에 뛰어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왜 믿음을 경쟁시킵니까?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은 오히려 매번 겪는 좌절 때문에 심리적으로 병을 더 키우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예수라는 분이 그 현장에 나타나십니다. 38년이나 병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에게 접근하십니다. 그를 지긋이 내려다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병자가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거기에 누워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십니다. ‘낫고 싶으냐(5:6). “낫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십니다. 아마 그 병자 보기에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을 것 같습니다. 글쎄, 낫자고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는 그 병자에게 낫고 싶으냐고 묻다니요! 그런데 낫고 싶은지묻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그 병자에 어떤 깨우침이 일어납니다. 이 중풍병자 노인은 그렇게 죽치고 누워있다가는 절대로 자기 병이 낫지 못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이 이미 낫기를 오래 전에 포기하고, 그렇다고 달리 어찌 할 방도가 따로 없어서, 그냥 막연히 베데스다 못 가에 이렇게 누워 있었던 자신을 비로소 발견합니다. 중풍에 걸린 그 몸을 가지고는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뛰어들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면서도 그 자리에 오랜 세월 누워있었던 자신이 사실 병 낫기를 이미 포기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여길 떠나세요!”(5:8). 이곳을 떠나라고.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가라는 우리 주님의 말을 정말로 병이 낫고 싶으면 여길 떠나라는 말로 들었던 그 중풍병자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그 낯선 청년, 조금은 무례한 그 젊은이가 사라져 간 쪽을 바라보다가, 어느 누구의 부축도 없이, 그는 벌써 멀쩡하게 일어서 있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워 있던 그 자리를 거두어 둘둘 말아 들고 걷기까지 합니다!

 

! 내가 일어서다니, 아니 내가 이렇게 걸을 수 있다니! 이젠 사람 구실, 하나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리를 걷어가지고 그곳을 막 뜨려고 하는데, 그때까지 불구인 자기를 외면하던 그 종교가, 그가 앓는 병을 죄인이 받는 형벌이라고 심판하던 그 종교가, 그가 안식일(安息日)에 자리를 거두었다고, 그 자리를 둘둘 말아서 옮기기까지 하였다고, 노동을 금지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자기에게 추궁을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이제 그 종교가 무섭지 않습니다. 병자들을 기만하는 타락한 그 종교가 이젠 무섭지 않습니다.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 나 이제 이 베데스다 못 가를 떠난다. 나를 정죄하고 억압하는 이 종교를 오늘 날짜로 나는 버린다. 누군지도 모를,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청년을 찾아 이제 나는 여기를 떠난다.” 오랫동안 한 종교에 걸었던 믿음을 버립니다. 얼마 뒤에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성전으로 온 그 노인을 만나십니다. 그 노인은 자기를 낫게 해 준 이가 예수라고, 유대교 사람들에게 말합니다(5:15).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광신도 집단이 느는 것보다는 덜 절망적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이들은 교회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영접해 주시는 예수, 우리 주님을 거기에서 만날 수도 있겠기에, 저는 교회를 떠나는 이들을 기꺼이 전송하고, 그들과의 재회를 주선합니다. 여러분의 교회도 출발이, 그 시작이 그러했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창립기념주일에 뵈었을 때 저는 기독교가 그 기원을 배신하면 안 되듯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교회의 기원을 배신하지 말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린 바가 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 이들, 성전에서 축출당한 이들이 여러분의 교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수를 만나는 감격을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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