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게 하는 것
김문음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쭈뼛쭈뼛 찾아왔던 고2 반 친구들을 맞이하며, 내가 그리도 화사하게 웃더란다. 내가 계속 웃어대며 명랑 하이톤으로 수다를 떠는 바람에, 친구들이 당황스러웠더란다. 나야말로, 가엾은 내 아버지 좀 봐 달라 찾아갔을 때 그토록 냉담했던 이들이 꺼이꺼이 오열하는 사태가 당황스러웠다. 주여는 무슨. 혼자 임종을 봐야했던 황당함을 아시겠는가.
어머니 돌아가셨던 94년 늦가을, Q채널 창립 다큐멘터리 제작팀원과 작가동료들이 우르르 조문 왔을 때, 내가 사람들을 꽤나 웃겼단다. “나 깜짝 놀랐잖아. 언니가 소복 입고 채플린처럼 코미디를 하는데, 첨엔 이래도 되나 싶다가 나중엔 에라 모르겠다 웃어 젖혔지. 근데 왠지 짜릿하고, 속이 다 후련하더라.” 어머니 병 고친다고 중국을 헤매다 실패하고 돌아왔던 우리 삼남매의 기상천외 무용담이며 나의 연변 말씨 흉내에, 우리 쪽 조문객 테이블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응, 좋아 좋아, 울엄마 우는 거 싫어해.
그 몇 해 전 봄이었던가. 아무 곳에서 아무 맥락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난처했던 시기가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이라든지, 내 앞의 사람이 갑자기 재채기를 하는 따위의 ‘물리적 자극’에, 버튼이 잘못 눌려진 것처럼 눈에서 물이 쏟아지곤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난생 처음 상담치료-가족치료라는 것을 받고 있었다. 여성 상담가와 남성 신부님, 2인조가 진행을 하고, 폐쇄회로를 통해 또 전문가 ‘팀’이 지켜보며 협의를 하는, 꽤 잘 짜여진 15주 프로그램. 나는 온갖 관련 서적을 섭렵하며, 그 전문가들이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를 분석하고 있었다. 이봐요, 당신. 지금 날 이러이러하게 분석하고 있지? 그거 아니거든. 저기 폐쇄회로로 보고 있는 전문가 양반, ****라고 판단하고 계시지요? 틀렸거든요.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솟구치는지,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 주체성을 지켜야겠다는, 우리 가족의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기제가 본능적으로 작동했던 것 같다. 니들이 뭘 알아. 나를 우리를 어떻게 아는데. 낯선 이론을 익히며 투쟁하느라 그 건물 안에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 아름다운 여의사에게, 열 살 때의 자살 미수 사건을 조리 있게 설명하고 나서였다. 아 완벽. 난 솔직하기도 하지요. 넘어가려는데, 순하던 여인이 그날따라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잠깐만요, 그때를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기분이라니. 내가 잽싸게 말했다.
“뭐, 내가 자신에게 가혹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어떻게 견뎠나요”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데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전. 투명인간이 되었거든요!”
산뜻하게 답하고 있는 내 앞,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독하게 돌아섰던 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나 대신 울어주던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면서 뒤늦게, 신기하게도 맑은 눈물이 흐르곤 한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후 많은 국민들이 울었다. 나도 시도 때도 없이 따라 울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어느 조용한 시각에, 난 알겠다. 지금 이 시간, 세월호로 황당한 슬픔을 당한 이들 함께 활동해온 이들 또 어떤 이들 깊고 혼탁한 물살 아직도 건져지지 못한 이들 떠도는 그 숱한 사연들 틈새에, 제대로 울지조차 못하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새벽엔, 그 울지 못하는 울음들 때문에 내가 운다.
**김문음 자매님은 방송구성작가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좋은 다큐 기획이 좌절되면서 헤매고 있지만, 끊임없이 소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일면만 보여주셨지만 언젠가 곧 그 매력을 좀 더 드러내주시길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