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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단으로써의 원죄

                                                                                                                                            

                                                                                강기대                          


근래에 다양한 성향의 기독교인들과 만나본 결과, 기독교 내에서 ‘원죄(原罪 - Original Sin)’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크게 두 가지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한 편에서는 어떻게든 ‘원죄’라는 개념을 기독교 체계에서 지켜내려고 하고, 다른 한 편에서 어떻게든 이 개념을 축소시키거나, 추방하려고 한다. 특히 새길 교회에서는 후자의 흐름이 조금씩 엿보이는데, 가령 원죄를 사하여 달라는 종류의 기도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의 교회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정당한가? 그것은 원죄를 이해하는 방식에 의하여 판가름 날 일이다. 이쪽에서 원죄의 개념을 최대한 배제하려 하는 이유는, 보통의 교회에서 원죄를 겁박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라고 하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해석되는 맥락과 관련이 있는데, 보통 ‘죄’는 어떤 종류의 잘못과 그에 따른 ‘처벌’의 혼합된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이때의 원죄는, 바로 ‘원(原)’자를 통해-영어로는 Original-, 우리로 하여금 언제든지 ‘처벌받아 마땅한 상태’를 상정하며,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공포를 함축한다. 그들은 원죄를 선포하면서, 동시에 불안과 공포를 선포하고, 이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한국 주류 기독교를 포함한, 다수의 저급한(?)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들이 주로 타겟으로 삼는 이들은 불행한 이들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실패가 원죄의 결과였음을 주지시킨다. 때때로 그들은 타락한 불교 승려들이 권력자들을 비호하는 바로 그 방식을 답습하기도 한다. “당신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을 투철하게 믿기 때문이지요.“ (땡중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성공한 것은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지요.“) 팽창주의 기독교에게는 최선의 전략임이 분명하다. 자기 팽창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단죄, 저주와 그 반대에 대한 보상. 당근과 채찍이라는 고전적인 경영전략과 그 구조상 완전히 동치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수 없이 많은 비판이 이루어져 왔고, 많은 이들이 ‘원죄’라는 이름의 공포를 핵심으로 상정하는 기독교에게 희망이 있느냐며, ‘원죄론‘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원죄’ 개념을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스피노자에게서, 니체에게서, 들뢰즈에게서, 혹은 프롬에게서 시도되었던 해석이다. 그들은 ‘죄’를 ‘처벌’ 혹은 ‘심판’의 짝패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죄의식과 마찬가지이고, 이 죄의식은 실제로 처벌을 가하는 자 없이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기에, 단죄하는 주체로서의 ‘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물론 죄는 ‘고통’의 원인이지만, 그것은 신의 처벌에 의한 고통이 아니라, 죄 지은 자 스스로의 구조, 존재 방식에 의한 고통이다. 그것은 일정 성분에 반응하는 유기체의 대응과도 유사하다. 우리는 상한 음식을 먹으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식중독에 걸린다. 죄는, 죄의식은 식중독과 같다. 그것은 누군가의 채찍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구조에 의하여 고통이 된다.


                                                        images3.jpg


 그렇다면, 우리의 어떤 구조가 보통의 ‘죄‘를 넘어서, ’원죄‘라 할 만한가? 성경이 말하는 원죄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존재 구조 그 근본에서부터 우리를 뒤흔드는가? 프롬은 그것을 무기력, 혹은 고독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보자. 신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음에, 둘은 서로 벌거벗음에도 아무런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에덴 동상 속에서 완전한 지복을 누리며, 잘 살다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원죄의 수렁에 빠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악과를 따먹기 전후의 달라진 행동이 원죄의 정체를 밝히는 시금석일 테다. 그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그들이 서로를 바라봄에 부끄러워하여, 서로의 성기를 가리는 행위였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이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 ’나와 너‘를 상정한 이후에야 발생하는 감정이다. 아담에게 있어 ’나의 뼈 중의 뼈‘였던 이브는 이제, ’너‘가 되어 떨어져 나간다. 너는 내 뼈가 아니라 ’너‘가 된다. 이제야 ’숨기는 행위‘가 성립한다. ’숨긴다’는 것은... 숨기는 자와 그 대립항을 성사시킬 때에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대립은, 이제야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갈라진 전후의 상황이, 부분적으로라도 드러난다. 그것은 분리요, 대립이고, 그에 따른 고독이며, 외로움이다. 이전까지 아담은 이브와 하나였고, 온 자연과 신과 하나였다. 그는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신과 일체감을 느끼며, 신의 모든 권능과 그 결과들에 대하여, 그 중에서도 자신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이브와 하나 됨을 느꼈다. 그러나 상황은 돌변했다. 이제는 이브마저 ‘남’이 되어버렸다. 1인칭의 시대는 저물고, 다채로운 언어들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어쩌면 뱀이 인간에게 ‘신과 같이 되리라’했던 것은 이것을 말했는지도 모른다. 다채로운 언어들! 말들! 말을, 말로 창조하기 시작한 인간!) 모든 것이 해체되고, 찢어지며, 무너진다.

 

 

이런 의미에서, 프롬은 ‘원죄’란 다름이 아니라 인간종이 경험한 ‘분리’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동물들이면서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타자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타자로 인식할 수 있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데, 바로 이 때문에 인간들은 본능적인 이타심은 물론이거니와 자기애에 대한 본능까지 잃어버렸다고 본다. 이 쯤 되면 정말이지, 원죄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만 하다. 학살과 자살의 원인이 이곳에서 모이는 게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원죄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죄사함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 가지 방법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기 전의 상황, 즉 무자각 상태의 일체감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의 내용을 들어 말하자면,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불의 검을 든 천사(케루빔)’가 지키고 있어서, 돌아가려는 인간을 내려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이는 어떤 상태에 해당하는가? 이러한 현상을 예화(例話, exemplify)하는 데 필요한 품이 별로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당장에 TV를 틀어 보더라도, 여기저기에서 난립하는 극우주의의 폭력, ‘국가’라고 하는 전체와 일체화됨으로써 원시의 일체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관찰하는 것은 애석하게도 매우 쉬운 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케루빔의 불타는 검은 이러한 시도가 결코 원죄에 대한, 외로움과 무력감에 대한 완전한 해결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니, 보통의 칼도 아닌 ‘불타는 검’이라는 묘사로 보았을 때, ‘해결 될 수 없음‘이 아니라 ’문제를 악화시킴‘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다른 방식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선포한 것, 붓다가, 공자가 제시한 바로 그 방식이다. 인간은 동물적 합일, 무자각적 상태로의 회기를 이룩할 수 없다.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분리를 자각했기 때문, 즉, 케루빔이 우리의 퇴로를 가로막고 있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분리의 경험을 안겨준 이 ‘자각’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그것을 해체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예수는 ‘사랑’을 말했고 붓다는 ‘자비’를 말했으며 공자는 ‘인’을 말했다. 예수가 모든 인간에게 성령을 내렸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신과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역사적인 사실(상식적인,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사실)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것이 우리의 앞길을 비추고 있는 희망이다‘라고 생각해도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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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야기 끝에,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 ‘원죄’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류 기독교, 세속화된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다르다!“ 원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아이의 복수극 따위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신은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죄’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의사가 청진기를 떼며, ‘선생은 영 좋지 않은 곳을 다치셨습니다’하는 것과 비슷한, 즉 ‘진단’으로 여겨져야지, 법적인 ‘선고’로 여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외롭다는, 분리되어 있다는, 무력하다는 진단이며, 이 진단은 ‘사랑’이라는 처방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 강기대 형제님은 청년부 소속으로. 대학에 입학했을때 아버지께서 두가지만 하지말라 하셨답니다, 데모하지말고, 철학하지 마라. 졸업을 목전에 두고 돌이켜생각하니,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고 하네요. 스물여섯 철학도라고 자신을 지칭한 열정 귀요미 청년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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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사랑 2015.07.10 17:55
    기대 형제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홈피의 기술적인 문제로 일단 글부터 올립니다. 사진은 추후에...ㅠ

    교회 팽창(성장)주의 기조를 이루는 공포 마케팅에 속고 속이는 작금의 우리들의 현실. '원죄'를 처벌의 방식이 아닌 죄 지은 자 스스로의 구조, 존재 방식에 의한 고통으로 보는 부분과 아담 이브의 '분리'에서 '합일'로 가려는 그 몸부림을 사랑으로 규정함에 적극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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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철 2015.07.10 22:42
    스물 여섯의 청년이 이 정도의 깊은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랍니다. 해맑게 웃던 모습과 사뭇 다른 진지함에 두번 놀랍니다.
    좋은 글 읽어서 주말이 즐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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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훈 2015.07.16 16:17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력하고 외롭고 분리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원죄네요.
    이 구조적 병에 유일한 처방은 '사랑'이구요.
    생각하게 만드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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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종희 2015.07.18 20:24
    모두가 죄인이면, 아무도 죄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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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2015.07.20 20:34
    분리로 진단하고 사랑으로 처방하셨네요. 우리는 그 처방을 믿고 치료에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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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사랑 2015.07.21 12:43
    형제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우리 새길이 나아가야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준거 같네요.

    작금의 우리 사회, 브레이크 없이 분리로만 치닫는 이 불신의 사회에 '함께함'과 '공동체'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합일'을 위한 '사랑'이라는 처방의 씨앗을 우리 사회 곳곳에 작지만 묵묵히 뿌리는 그런 역할을 하는것이 새길교회와 새길인의 몫인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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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국 2015.09.30 11:4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인 원죄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가 되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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